실패는 기회입니다.

 

 

 

언젠가 새벽기도회 때에 찬송가 395장인 “너 시험을 당해”를 하나님께 찬양드렸습니다: (1절)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후렴)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를 빌라 주님 네 편에 서서 항상 도우시리.” 제가 이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린 이유는 저는 신앙생활은 분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분투에는 “우리 구주의 힘과 그의 위로”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원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드렸습니다. 언젠가 아버님이 자신이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배우신 교훈 “돈과 여자와 명예” 이 세 가지 유혹을 경계해야 할 것을 저에게 말씀해 주신 기억이 납니다. 또 기억나는 것은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란 유혹입니다. 사단은 이러한 유혹들로 우리를 넘어뜨리고자 수시로 공격해 오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그 유혹들에 넘어가 범죄하고 쓰러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또한 듣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이 영적 전쟁에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싸워 승리하고 싶은데 왜 자꾸만 사단의 유혹에 빠져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이렇게 자꾸만 실패하고 있는 것일까요?

 

성경 마태복음 26장을 보면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31절)고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주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절). 왜 베드로는 이렇게 결심했을까요? 그 이유는 한 마디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기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마16:23). 목자 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죽으시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22절). 다시 말하면, 베드로는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믿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길 원했습니다. 그 결과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했습니다. 그는 실패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고 말씀하셨는데(26:31) 베드로는 그 말씀의 성취를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베드로는 그 말씀의 성취를 거부한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왠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이끌림을 받기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 의지에 이끌림을 받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또 다른 원인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처럼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41절). 그는 예수님께서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셔서(38절)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고 계셨을 때(39절) 오히려 졸고 있었습니다(40, 43절).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던 베드로가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께서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38절)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졸고 있을 수 있었을까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예수님과 함께 깨어 기도해야 할 수 수제자 베드로가 어떻게 깨어 기도하지 않고 졸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였기 때문입니다(41절). 결국 베드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므로(41절) 예수님을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되(70절) 맹세까지 하며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72절) 저주까지 하며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74절). 그렇게 세 번 예수님을 부인한 후 닭이 곧 울었을 때(74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인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했습니다(75절). 이렇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 그는 나중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보고 다시금 자기의 옛 본업이 어부로 돌아가는 것을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에서 봅니다. 아니,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람을 낚는 어부의 삶을 살아야 하지 않았나요? 어떻게 베드로는 다시 고기를 잡은 어부로 돌아간 것입니까?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나서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이었나요? 실패하고 또 실패한 베드로, 예수님께서는 그를 어떻게 하셨습니까?

 

언젠가 어느 목사님을 통해 성경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후 말씀 중심으로 예수님께서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즉 실패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세 번 하신 후 그에게 전 보다(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더 큰 사명[“내 양을 치라”(16절), “내 양을 먹이라”(17절)]을 주셨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에게 더 큰 사명을 주신 것입니까?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실패(범죄)한 베드로, 그러나 통곡하면서 진정으로 회개한 베드로에게 죄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신 후(21:15ff) 더 큰 사명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오순절 날 이제 더 이상 졸지 않고 모든 약 120문도와 합심하여 기도를 함께 하였던(행1:15) 베드로에게도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시사(2:1-4) 더 이상 베드로로 하여금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게 하시고 오히려 마태복음 26장에서 그가 고백한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33절)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절)라는 결심을 성취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와 사랑입니까? 이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였던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물이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벧전4:7),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5:8-9).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새벽기도회 때 하나님께서 들춰내시고 회개케 하신 죄를 성도님들과 나누면서 말씀 전파를 마친 후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부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죄인, 하나님의 뜻보다 내 뜻이 이루어지길 원하는 교만한 자,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새벽기도회 때 졸면서 기도하는 목사, 아무 자격이 없고 실패하고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를 범하는 제가 무엇이 관대 주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큰 사명을 주시는 것인지 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생각할 때 마음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은혜로 제가 오늘까지 왔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 만나는 그 날까지 살아가길 기도하였고 지금도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시116:2),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