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능함은 기회입니다.

 

 

 

프랑스의 영웅 나폴레옹은 ‘내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단어는 없다’라고 말했지만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내 삶에 불가능이란 것은 수 없이 많다.’ 그 이유는 인생을 살아가면 갈수록 제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없는데 점점 더 많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 자신만 보아도 저의 나쁜 습관도 잘 고쳐지지 않고, 제가 생각하는 데로 저는 행동도 하지 않을 때가 수 없이 많고, 왜 제 마음은 그리 제 맘대로 변하지 않는지 모두 다 제 능력 밖에 일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뿐이겠습니까? 이 세상 살아가면서 우리 마음대로 안되는 게 얼마나 수 없이 많습니까? 우리 사람들이 못하고 못 고치고 못 이겨 나아가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러한 현실을 보고 직시하게 될 때 참 낙심이 되기도 합니다. 실망도 되며 심지어 어쩔 때는 절망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불가능한 일을 접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언젠가 성경 민수기를 읽다가 민수기 13-14장을 주목하여 읽게 되었습니다. 그 두 장을 보면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12명의 족장들 중 두 사람인 갈렙과 여호수아는 믿음으로 보고하였지만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은 불신의 보고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이 10명은 가나안 땅의 거민들은 강하고 심히 클 뿐 아니라 장대한 자들로서 그들이 올라가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치지 못하리라고 악평을 하였습니다. 그들과 비교해 볼 때 10명의 정탐꾼들은 스스로 보기에 메뚜기 같다고 생각했습니다(13:28-33). 그러므로 그 악평을 들은 이스라엘 온 회중은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곡하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14:1-2). 그러한 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서로 말했습니다(4절). 이 소리를 다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 백성이 어느 때까지 나를 멸시 하겠느냐 내가 그들 중에 모든 이적을 행한 것도 생각하지 아니하고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11절).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어느 때까지 나를 믿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고 있지 않나 자문해 보았습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범죄요 불신은 결국 하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결코 가볍게 여겨야 할 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찬송가 39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를 즐겨 부릅니다. 특히 후렴 가사를 좋아합니다: “믿음이 이기네 믿음이 이기네 주 예수를 믿음이 온 세상 이기네.” 이 찬송을 좋아하는 이유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과연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믿음이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합니다(롬4:18). “믿음이란 ‘믿다, 신뢰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써 그 대상이 분명히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약에 나타난 믿음의 세 가지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은혜를 깨닫고 완전히 인정하는 것, 자신을 포기하고 주님과 교제하는 것, 전적인 의존을 말하는 것이요, 구원의 하나님인 주님께 대하여 의심이나 변함없이 신뢰하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우리가 만들어 내는 감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말씀을 계시하신 것에 대한 우리의 전적인 응답인 것입니다. 믿음이란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합니다. 성경은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히11:1). 증거는 '확신'을 말합니다.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내적인 확신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행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믿는 것이 내적인 확신입니다. 그러나 이 확신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 의지로 "믿습니다! 믿습니다!" 하면서 억지로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할 수 없는 것을 하게 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나님을 믿음으로 해낸 사람들입니다. "사람으로는 아니 되나 하나님으로서는 모든 것을 다 하실 수 있다"고 확신하면서 일한 사람들이 우리 믿음의 선조들입니다(막10:27). 믿음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요 축복"입니다. 이 믿음은 역사를 새롭게 창조하고, 불가능을 가능의 길로 열어 놓습니다(인터넷).

 

성경 로마서 4장 9-17절을 읽다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아브라함의 믿음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하나님을 믿음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 아브라함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께서 명하신대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받치고자 단에 자식을 묶어 놓고 칼로 내리치려고 하면서 까지도 하나님께서는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리실 줄을 믿었습니다(창22:10; 히11:17, 19).

 

(2) 아브라함의 믿음은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하나님을 믿음이었습니다.

 

로마서 4장 17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도록 아들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 즉 그의 후손이 하늘의 별들과 해변의 모래 같이 많게 하시겠다는 말씀을 믿었습니다(창15:5; 히11:12).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저는 그의 믿음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과연 아브라함이 접한 바랄 수 없는 상황, 즉 아무 소망이 없는 상황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 로마서 4장 1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 즉, 아브라함이 접한 바랄 수 없었던 상황, 소망이 없었던 상황은 자기나 자기 부인인 사라나 의학적으로 전혀 아기를 낳을 수 없는 “죽은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불가능한 상황, 인간적으로는 아기를 낳을 수 있다는 소망이 끊긴 상황에서 아브라함이 주님 안에서 소망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이란 로마서 4장 18절(인용: 창15:5)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아브라함은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자기나 아내 사라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인 그의 자손이 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번성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믿었습니다. 이러한 바랄 수 없는, 참으로 불가능하게 보이는 상황에서도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하여 지지 아니하고 오히려 더욱더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19-20절). 로마서 4장 19-20절을 보십시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보통 우리는 상황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믿음이 약하여져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의심하면서 마음이 더욱더 흔들릴 텐데 아브라함은 바랄 수 없는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히려 믿음이 더욱더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충분히 설득 당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4장 21절을 보십시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 하였으니” (being fully persuaded that God had power to do what he had promised). 여기서 ‘확신 하였으니”라는 말씀을 “확신케 되었으니”란 말씀입니다(박윤선). 즉,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또한 그 약속의 말씀을 견고히 믿도록 충분히 설득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히려 믿음이 더욱더 견고해 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견고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 간주되었습니다(22절).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가 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23절)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입니다(24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들인(24절) 바울 시대 로마 성도들뿐만 아니라 오늘 이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도 성경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던 믿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무엇을 믿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죽음에서 부활하심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대상은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십자가에 내어 줌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25절). 한 마디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칭의의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무덤에서 3일 만에 부활하심을 믿으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과연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자 죽음에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이미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부활의 소망과 영원한 기업인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게 하시고 계십니다. 바라기는 이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으므로 우리의 소망이 더욱 커지길 바랍니다(찬송가539장 3절). 그리고 바라던 천국 올라가 하나님 전에 뵈올 때 구주의 의를 힘입어 어엿이 주님 앞에 설 수 있길 기원합니다(4절).

 

 

 

 

오직 믿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