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기도할 때”

 

 

[마태복음 6장 5-8절]

 

 

여러분 생각엔 미국인들이 어떤 일로 유혹을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2013년 새해 첫 바나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이 제일 많이 받는 유혹은 “근심과 걱정”(60%) 및 “할일을 뒤로 미루기”(60%)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 뒤를 이어서 받는 유혹은 “과식 하기”(55%), “미디어에 너무 많이 시간빼기기”(44%), 그리고 “게으름과 일 회피”(41%) 등등으로 조사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 개신교인들이 제일 많이 받는 유혹은 “과식 하기”(66%)로 나타났으면 그 다음이 “근심 걱정”(58%)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유혹들을 미국인들은 어떻게 피하는가 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는데 유혹을 피하는 방법으로는 ‘딱히 별로 없다’(59%)라는 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인들의 가장 많은 답은 ‘하나님께 기도하기’(18%)였다고 합니다(신문).  이 설문조사 결과를 생각해 볼 때 왠지 우리는 유혹을 유혹으로 여기지 않고 있지는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개신교 교인들이 유혹을 피하기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리 힘쓰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계십니까?  2013년 새해를 맞이하여 예수님을 따라 살고자 하는 우리 모든 승리장로교회 식구들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기에 힘을 쓰길 원합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우리 모두가 예수님께서 감람산에서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yet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마26:39, 42; 눅22:42)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때에 우리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길 기도하는 습관을 가질 수 있길 원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옵소서’(Not my will, but Your will be done)라고 기도하는 습관을 들이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므로 오직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5-8절 보면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오늘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아 실천하여 주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5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러분, 외식하는 자와 같이 기도하는 것은 어떻게 기도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to be seen by men)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외식하는 자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렇게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까?  저는 그 대답을 마태복음 6장 2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외식하는 자가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to be honored by men)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외식하는 자들에 대햐여 예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5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여러분, 외식하는 자들이 이미 받은 상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저 그들이 사람들에게 보인바 된 것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결코 하나님은 그들에게 상을 주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MacArthur).

 

여러분, “외식하는 자”란 원어 헬라어의 의미를 보면 ‘가식적으로 행동하는 자’(pretender)란 말입니다(Swanson).  예를 들어 외식하는 자는 거룩하지도 않으면서 거룩한 척, 경건하지도 않으면서 경건한척하는 사람입니다.  신앙이 좋지도 않은데 좋은 척, 성경도 많이 모르면서 많이 아는척, 기도도 많이 하지 않으면서 많이 하는 척 등등, 외식하는 자는 영화배우처럼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의 모습을 연극합니다.  한마디로, 외식하는 자는 척척 박사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종교적 예식은 척척 잘하면서 마음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또한 이웃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 8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즉,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외식하는 사람들은 입술로는 하나님께 기도도 무척이나 잘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마음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 앞에서는 의롭게 보이지만 실제로 삶 속에서 행동은 기도한 내용대로 살려고 노력하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기도에 대하여 잠언 기자는 잠언 28장 9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

 

여러분, 우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사람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교회당이나 큰 모임에서 기도해서는 아니됩니다.  결코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기도를 들으시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기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든 외식을 버리고 하나님께 진실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참고: 고전14:15).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계명을 듣고 순종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6장 18절에서 말하고 있는 “성령 안에서 기도”입니다.  곧,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기도, 이러한 기도를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6절을 보십시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여러분, 이 예수님의 말씀을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는 말씀을 믿으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믿음 장인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 중(Hall of Faith)에 모세를 좋아합니다.  히브리서 11장 24-26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여러분, 믿음으로 모세는 거절하였고, 믿음으로 모세는 고난 받았고, 믿음으로 모세는 수모를 받았습니다.  왜 모세는 그리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모세는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는 이 세상에서 애굽 왕 바로나 바로의 공주나 등등 사람들에게 받는 상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본향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받을 상을 바라보았기에 그는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했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을 받았으며 또한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모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합니까?  우리는 이러한 모세의 믿음이 너무 부족하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에게 상 받기보다 사람들에게 상 받기를 바라보고 (기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지금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 신앙생활하고 있기 보다 보이는 사람들 앞에서 교회생활 하는데 분주히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가 바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5-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기도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외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외식하는 자와 같이 기도하지 말고(5절)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은밀한 중에 보시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공적 기도(public prayer)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 공적 기도를 함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기도하는 외식하는 자 같이 기도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고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자 입술로는 기도를 잘 하는데 마음으로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지 않는 그러한 위선적인 기도를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공적 기도(public prayer)를 하기 위해선 개인의(은밀한) 기도(private prayer)가 있어야 합니다(Wiersbe).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은밀히 드리는 개인의 기도 습관이 없이 그저 공적 기도하는 습관만을 가지고 있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참 위험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기도 습관은 더욱더 우리는 위선적인 사람들로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데 입술로는 너무나 하나님과 가까이 신앙생활하는 척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기도할 때에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보이는 사람들에게 기도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3 가지 입니다.  그 3가지는 바로 조용한 시간(Quiet time)에 조용한 장소(Quiet place)로 가서 조용한 마음(Quiet heart)으로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습관을 드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7절을 보십시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여러분, 여러분은 방언 기도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언젠가 후배를 만나 대화를 하는데 자기가 교회에서 기도회를 같는데 옆에 있는 사람이 기도를 하면서 무슨 방언처럼 기도하길래 자세히 들어보았더니 욕을 하고 있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방언에 대해서 생각할 때 고린도전서 14장 19절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알아 듣지도 못할 방언으로 일만 마디 하는 것보다 낫다는 이 말씀에 저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28절에 가서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33절).

 

            여러분, 오늘 본문 마태복음 6장 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기도할 때 그 당시 이방인들처럼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기도할 때 이미 한 말을 자꾸 되풀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당시 이방인들은 의미도 없는 말을 반복해서 자기들의 신에게 기도할 때에 중언부언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한 이유는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면 자기들의 신이 그 기도를 들어줄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열왕기상 18장 29절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 성경구절을 보면 갈멜 산에서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때 바알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신이 바알에게 기도하는데 시간이 정오가 지나도록 응답이 없으닌까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미친 듯이 그리 긴 시간 동안 떠드는게 기도입니까?  성경 전도서 5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 앞에서 마땅이 말을 적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함부러 입을 열어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마땅히 말을 적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알고 계십니다(마6:8).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한국 기독교 역사에 훌륭한 목사님들 중 한 분인 손양원 목사님, 여러분들도 그 이름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1948년 10월 여수 순천 사건이 터졌을 때 6학년과 2학년인 두 아들이 좌익 학생들에 의해 총살되었지만 그들을 죽인 범인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 전도사로 키워낸 그의 일대기를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제목으로 책이 나왔고 또한 1966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손양원 목사님이 두 아들의 장례식에서 드려진 10가지 감사기도가 있어여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인터넷):

 

(1)    나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2)    3남 3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두 아들, 장자와 차자를 바치게 된 나의 축복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3)    허다한 많은 성도들 중에 어찌 이런 보배를 주께서 하필 내게 주셨으니, 그 점 또한 주께 감사합니다.

(4)    한 아들의 순교도 귀하다 하거늘 하물며 두 아들의 순교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5)    예수 믿다가 누워 죽는 것도 큰 복이라 하거늘, 하물며 전도하다 총살 순교 당함이리요, 하나님 감사합니다.

(6)    미국 유학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 갔으니 감사합니다.

(7)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8)    내 두 아들 순교로 말미암아 무수한 천국의 아들들이 생길 것이 믿어지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9)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여덟 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감사합니다.

(10)나에게 분수에 넘치는 과분한 큰 복을 내려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