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박국의 노래: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하박국 3장 2절 ]

 

 

여러분, “부흥”이란 무엇입니까?  저희 교회가 7월 1일이면 교회 설립 32주년을 맞이하여 6월 29일(금)과 30일(토)일 송상현 목사님을 강사로 모시고 말씀 집회를 갖습니다.  주로 많은 교회에서 “부흥회” 또는 “부흥집회”라고 부르는데 저희 교회에서는 “말씀 집회”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요즘 교회가 원하고 또한 교회에서 말하고, 기도하고, 외치는 “부흥”이 잘못된 의미가 부여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잘못된 의미란 바로 “부흥”하면 우리는 교회가 크게 성장하여 교회당도 크게 짓고, 성도 수가 늘어나고 헌금이 많이 걷히는 교회를 부흥된 교회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왠지 요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부흥에 대한 인식은 “성장 제일주의”, “성과주의”, “경제 제일주의”와 연관되 있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세상 논리에 현혹되어 세속화된 교회의 모습입니다(인터넷).  그래서 저는 저희 교회 집회를 “부흥회” 또는 “부흥집회”라 부르지 않고 “말씀 집회”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참된 부흥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정 원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참된 회개를 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회개(repentance)가 없는 부흥(revival)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2절을 보면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3장 1절에서는 “시기오놋에 맞춘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마지막 절인 19절 하반절에 가서는 “이 노래는 영장을 위하여 내 수금에 맞춘 것이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1절에서는 “기도”라고 그러고 19절에서는 “노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입니까 아니면 노래입니까?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은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시기오놋”이란 말은 또 무슨 뜻입니까?  먼저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시기오놋”이란 단어는 무슨 뜻입니까?  이 단어는 성경에서 두 번 밖에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박국 3장 1절과 시편 7편의 머릿말에 나와있습니다.  그 의미는 분명하지 않지만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여기서는 단순히 곡조의 이름으로서 열광적인 성격을 뛴 종류인 듯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그리고 John MacArthur 목사님에 의하면 이 단어는 음악-예배식에 의미가 있으며 하박국 3장은 노래고 불려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it has a musical-liturgical significance, and that this chapter was sung)( MacArthur).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선지자 하박국의 기도란 그의 열정적인 노래로 표현된 기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하박국의 노래” 가사 내용 중 2절 말씀 중심으로 하박국 선지자가 노래로 하나님께 간구한 기도 제목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아 우리 또한 “부흥”이란 노래를 우리의 기도로 삼아 하나님께 열정적으로 찬양을 올려드리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2절 상반절을 다시 보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여기서 하박국 선지자가 들은 주님께 대한 소문은 무엇입니까?  그 소문이 무엇이었길래 하박국 선지자는 듣고 놀랐습니까?  그 소문은 바로 하나님께서 유다(1:5-11)와 바벨론(2:2-20)을 심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사람들을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간악”하고 “패역”하며 “컵탈과 강포”를 행하고 있었고 유다 가운데 “변론과 분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1:3).  다시 말하면, 유다 백성들이 행악과 불의를 행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어느 정도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악을 행하고 있었는가 하면 하박국 1장 4절 하반절을 보면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공의가 굽게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다는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4절 상반절).  이 유다 백성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아닙니까?  모든 악행과 불의를 행하되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박국 시대의 유다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율법(계명)을 지키려는 열심히 식어지지 않았습니까?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활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회에서 공의를 행하지 않고 오히려 불의를 행하므로 공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이바지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박국 시대 때 악인들이 의인들을 에워쌌듯이 지금 이 시대 이 사회에서도 믿음으로 사는 의인들보다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1장 5절에서 유다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찌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찌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행하실 그 한 일, 유다 백성들이 놀라고 또 놀랄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납고 성급한 백성 곧 땅의 넓은 곳으로 다니며 자기의 소유 아닌 거할 곳들을 점령하는 “갈대아 사람”들(6절) 또는 바벨론 사람들을 일으켜(6절) 유다 백성들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심판의 말씀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죄악을 경계(12절)하는 차원에서의 징벌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거룩하시어 이스라엘보다 더 악한 자들인 바벨론 사람들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아주 멸망하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습니다(12절).  오히려 그는 만세 전부터 계신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영원까지 돌아보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박윤선).  그러므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가 주님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란 이유는 하나님께서 장차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사람들을 통하여 징벌하실 것이기에 놀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전에서 경험하는 경외감, 또는 하나님과 그분이 신비로운 방식에 대한 경배와 찬양을 표현”한 것입니다(로이드 존스).  그 하나님의 신비로운 방식은 하박국 2장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유대 민족을 징벌하신 후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바벨론을 심판하시는 것이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마음이 교만하며(2:3, 4) 자기 영혼에게 죄를 범하되(10절) 술취한 것 같(5, 15절) 행동을 제재할줄 모르고 영토 확장에 대한 야심으로 침략주의에 광분하여(박윤선)(5절) 여러 나라들을 노략하며 사람들의 피를 흘리며 강포를 행한(8절) 바벨론 나라를 심판하신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경외심 속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노래고 간구한 것입니다.  여기서 “주의 일”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구원하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 주님의 일을 이 수년내에 부흥케 하여 주시길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노래로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와 하나님께 감사로 찬양과 경배를 드립니까?  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고자 행하신 그 분이 신비로운 방식 때문이 아닙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사 영원히 멸망당할 수 밖에 없는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까?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생각할 때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을 향하여 경외심을 가지지 않고 하나님의 존전에 함부러 나아와 교만한 마음으로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하박국 선지지가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 찬양으로 간구하되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3:2)라고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는 구원과 안락함을 구하지도 않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살려 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으며, 갈대아 사람들과 전쟁하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고난받지 않게 해 달라거나 예루살렘이 약탈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또는 성전이 철저히 파괴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있어야 하며 당해도 마땅한 일들이라는 사실을 그가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획을 바꾸시기를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선지자의 단 한 가지 관심은 하나님의 일하심과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와 온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일이 바르게 행해지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습니다: ‘나와 나의 민족이 어떤 고난을 받든지 주님의 일이 부흥되고 순결하게 행해진다면, 나는 그 고난에 대해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의 단 한 가지 청원은 하나님께서 주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로이드 존스).  하박국 선지지가 그리도 원했던 “부흥”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벌인 바벨론의 침략으로 오는 모든 고난과 고통 속에서 모든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까?  히브리어로 “부흥”은 “보전하다” 또는 “살아 있게 하다”라는 의미가 있지만 이러한 의미 외에도 “깨끗하게 하다, 교정하다, 모든 악을 제거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로이드 존스).  하나님께서는 범죄하고 회개치 아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벨론 사람들을 일으켜 징벌하시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모든 악을 제거하며, 그들을 깨끗케 하시사 하나님의 순결한 백성으로 삼으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이 소문을 들은 하박국 선지자는 놀라움(경외심) 속에서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라고 하나님께 노래로 간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박국 선지자는 오늘 본문 하박국 3장 2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하나님께 노래로 간구하였습니다: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한 죄대로 하나님께서 징벌하신다면 다 멸망 당할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범죄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진노를 다 쏟아 부으시면 바벨론의 침략으로 인하여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도 다 전멸당할 수 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겸손히 간구하기를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한 것입니다.  이 간구의 뜻은 “죄대로 갚으면 유대 민족이 멸망받고 남을 것이 없을 것이나, 그 민족을 징벌하는 중에라도 불쌍히 여겨 다시 구원하여 달라는 것이다”(박윤선).  이 기도는 시편 85편2절 말씀처럼 “주의 모든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고 저희 모든 죄를 덮”어 주시길 간구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기도는 시편85편3절 말씀처럼 “주의 모든 분노를 거두시며 주의 진노를 돌이”켜 달라는 요청인 것입니다.  그는 지금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한 것임: “진노를 긍휼로 누그러뜨리소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본성에 따라 행하고, 진노 가운데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기만을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로이드 존스).  우리 교회도 이렇게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흥”이란 복음성가를 부를 때에 그 찬양 가사가 마음에 다가올 때가 종종 있습니다.  특히 “이땅의 황무함을 보소서/  하늘의 하나님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라고 노래를 부를 때 저는 교회의 황무함을 보면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찾는 마음으로 찬양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 우리 교회의 죄악을 용서해 주시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이제 우리 모두가 하나 되어 이 교회의 무너진 기초를 다시 쌓는데 헌신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곤 합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 교회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이 교회에  흐를 것이며 성령님의 바람이 이제 불어올 것임.  주님의 영광 가득한 새날을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일을 수년 내에 부흥케 하시길 기원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