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쓰시는 드라마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하만을 다니 왕의 노가 그치니라”  (에스더 7장 10절).

 

 

            한국 드라마의 대표적인 작가는 김수현 작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녀가 쓴 드라마들 중 시청률이 높앞던 작품 중에는 “사랑과 진실”(1984), “목욕탕집 남자들”(1995), “완전한 사랑”(2003)이 있습니다(인터넷).  그녀의 드라마가 인기가 있는 이유 중 하나는 톡톡 튀는 대사와 화려한 말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언어의 연금술사”로 부른다고 합니다.  그와 더불어 개성있는 또렷한 인물들이 드라마 전반을 이끌어 가는 것을 볼 때에 그녀의 드라마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런데 왠지 하나님께서 쓰신 성경의 드라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쓰신 드라마들은 그리 큰 인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오늘 새벽기도회 때 에스더 4장에서 7장까지 성도님들하고 읽은 후 에스더서를 하나님께서 쓰신 드라마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 후 이렇게 저는 다시금 에스더 7장 10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께서 쓰신 에스더 드라마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특히 저는 “나무”의 관점에서 다시금 이 드라마를 부분적으로나마 묵상하려고 합니다.

 

            “나무” 하면 우리는 먼저 에스더 2장 21-23절을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나무에 달려 죽은 사람들이 에스더서에 처음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 죽은 사람들은 바로 “문 지킨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라는 사람들로서 그들은 바사 왕 아하수에로를 모살하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21절).  그런데 그 계획을 에스더의 사촌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고했고 왕후 에스더는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고하였습니다(22절).  그 결과 빅단과 데레스는 나무에 달렸고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되었습니다(23절).  이렇게 하나님의 드라마 2장이 끝을 맺었는데 흥미로운 것은 드라마 3장을 시작하면서 아하수에로 왕이 하만이란 사람의 지위를 “높이 올려” 모든 함께 있는 대신 위에 둔 것입니다(1절).  이 사실이 흥미로운 이유는 2장을 끝내면서 하나님께서는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던 빅단과 데레스의 계획을 모르드개로 하여금 왕후 에스더를 통하여 왕에게 알게 하셨는데 3장을 시작하면서는 모르드개의 공로를 치하하는 이야기를 쓰시기 보다 오히려 모르드개와 더 나아가서 그의 민족인 유대 사람들을 도륙하고 진멸하려고 한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아하수에로 왕이 “높이 올려” 모든 함께 있는 대신 위에 두었다는 사실을 쓰셨기 때문입니다(1절).  아니 어떻게 하나님께서 드라마를 쓰시면서 3장에 와서 모르드개의 지위를 높이 올리지 않으시고 그의 원수 하만의 지위를 높이 올리시는지 좀 이해가 안되는 드라마의 흐름입니다(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지위를 8장2절에 가서 높이시기 시작하시면서 9장 3-4절에 와서는 모르드개로 하여금 왕궁에서 존귀케 하시사 그로 하여금 점점 창대케 하여 그의 명성이 각 도에 퍼지게 하셨음).  결국 높이 올림을 받은 하만은 자기에게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는 모르드개로 인하여 심히 노하여(3:2, 5)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경하다 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였습니다(6절).  이 일로 인하여 4장에 와서 모르드개와 각 도에 있는 유다인들이 크게 애통하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재를 무릅쓰고 대성 통곡하였습니다(1, 3절).  그 사실을 알고 왕후 에스더가 “무론 남녀하고 (왕에게) 부름을 받지 아니하고 안뜰에 들어가서 왕에게 나아가면 오직 죽이는 법”(11절)을 알고도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한 것입니다(16절).  사촌과 유대 민족의 큰 위기 가운데 하나님의 드라마의 주인공 에스더의 그 유명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대사가 등장한 것입니다.  이렇게 4장이 끝을 맺으면서 5장에 들어서서 왕후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장면 가운데 2절에 가서 보면 “왕후 에스더가 뜰에 선 것을 본즉 심히 사랑스러우므로”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흥미로운 대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왜 그 순간에 그 대사가 적혀 있는 것일까요?  왜 아하수에로 왕은 30일 동안이나 얼굴을 보지 않았던 왕후 에스더가 규례를 어기고 왕궁 안 뜰에 서 있는 모습을 보고 심히 사랑스러웠을까요?  우연일까요?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에스더와 모르드개 및 유다 민족들의 간구를 들으시사 죽으면 죽으리라 하고 자기 민족의 생명을 구하고자 규례를 어기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간 에스더로 하여금 형통케 하시고자 왕으로 하여금 그녀를 보고 심히 사랑스럽게 보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생명을 걸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사랑스러운 것입니다.  그 결과 아하수에로 왕은 왕후 에스더에게 그녀의 소원과 요구를 묻되 나라의 절반이라도 그녀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3, 6, 7:2).  그 때 에스더는 왕에게 자기가 왕을 위하여 베풀고자 하는 두 번의 잔치에 하만과 함께 오시길 구했습니다(5:4, 8).  그 두 잔치를 베풀고 참석하는 과정 속에서 하만은 “오십 규빗이나 높은 나무를 세우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서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기를 구하려고 합니다(14절).  이렇게 하나님의 드라마 5장이 마치는데 흥미로운 점은 6장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밤에 왕이 잠이 오지 아니하므로 명하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혔다고 쓰신 것입니다(1절).  아니 왜 6장에 와서 입니까?  2장에서 왕의 모살 계획을 모르드개가 왕후 에스더를 통해서 아하수에로 왕에게 고했고 그 결과 왕을 모살하려던 두 사람은 나무에 달려 죽고 그 일을 왕의 앞에서 궁중 일기게 기록되었는데(21-23절) 왜 3장에서 왕이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게 하지 않고 6장에 와서야 그렇게 한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서 드라마를 이렇게 쓰신 것일까요?  그리고 왜 아하수에로 왕은 6장에 와서 많고 많은 밤들 중에 왜 “이 밤애” 잠이 오지 않을 것일까요?  그리고 잠이 오지 않는데 뭐하러 역대 일기를 가져다가 자기 앞에서 읽히게 한 것일까요?  이 모든 일들은 우연이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이 모든 것들을 다 절대 우연이 아닙니다.  작가이신 하나님께서 에스더서 드라마를 그리 쓰시고 전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특히 2장 마지막 부분에서 두 사람들이 달린 나무, 그리고 5장 마지막 부분에 와서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려고 세운 높은 나무, 그리고 7장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높임을 받아(3:1) “자기의 부성한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방백이나 신복들보다 높인 것을 다”(5:11) 자랑했던 교만하고 잔인한 하만이 모르드개를 달고자 한 나무에 달리는 이야기는 참으로 하나님의 멋진 작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드라마를 “나무”의 관점에서 묵상하면서 나무에 대한 하나님의 최고의 드라마 작품이 생각났습니다.  그 작품은 바로 저주의 나무(신21:23)에 높이 달리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그리고 마치 아하수에로 왕을 모살하려다가 나무에 달린 두 사람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양쪽에 십자가에 달린 두 강도들도 생각났습니다.  또한 “하만”과 같은 교만한 죄인이 저를 위하여 아무 죄도 없으신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죽임을 당하신 사실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저주의 나무에 달려 죽으신 것일까 생각할 때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를 왕궁 안 뜰에 선 것을 보았을 때 심히 사랑스러웠다는 말씀(에5:2)이 생각났습니다.  주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이 심히 사랑스러우셔서 저주의 나무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했을 때 마치 하만이 나무에 달려 죽었을 때 아하수에로 왕의 노가 그쳤던 것처럼(7:10) 하나님의 진노가 그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진노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다 쏟아부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와 이 사랑을 생각할 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할 때 이런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에 하나님이 쓰시는 드라마 ...  나 같은 죄인을 심히 사랑하셔서 주인공으로 삼으신 사랑의 하나님, 나를 낮추시기도 하시며 또한 높이시기도 하시는 지혜로우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드라마를 부족하나마 적어 내려가고 싶다.”  제 인생에 오늘날까지 쓰신 하나님의 드라마를 적어 내려가려고 합니다.  한국에서의 12년 삶, 미국에 이민 와서 청소년기의 방황의 삶, 대학의 삶 속에서의 하나님의 부르심과 주님의 종으로서의 준비하는 삶, 그리고 결혼을 통하여 맛본 하나님의 선하심과 결혼 삶 속에서 주영이의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굉장하고 놀라운 사랑, 그리고 목회자의 길 가운데 받아 누린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의 삶을 적어 내려가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제 인생의 쓰신 하나님의 드라마를 부분적으로마 엿보면서 앞으로 하나님께서 쓰실 드라마를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려고 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고 싶습니다!

 

 

인생의 역전 드라마 쓰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