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노래: 뒤로 물러가지 아니한 활을 노래하라!

 

 

[사무엘하 1장 17-27절]

 

 

여러분, 혹시 작년에 나온 한국 영화 “최종병기 활”이란 영화를 아십니까?  작년 2011년 8월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인데 이 영화에서 보면 활이 주요 무기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영화의 주인공 “남이”란 사람은 조선 최고의 신궁으로 나옵니다.  그는 역적의 자손으로서 유일한 피붙이인 누이 자인의 행복만을 바라며 살아가는데 그 누이의 혼인날, 가장 행복한 그 순간에 청나라 정예부대(니루)의 습격으로 그녀와 신랑이 포로로 잡혀가고 맙니다.  그 때 영화 주인공 남이는 아버지가 남겨준 활에 의지해 귀신과도 같은 활솜씨로 청나라 정예부대를 하나 둘씩 처치합니다.  그는 가장 소중한 자기 누이를 지키기 위하여 사상 최대 활을 전쟁을 합니다(인터넷).  그리고 결국에는 주인공은 청나라 정예부대의 두목인 쥬신타라는 인물을 죽이고 그로 부터 자기의 가장 소중한 누나를 지킵니다.  이 영화은 그래도 해피 엔딩(happy ending)으로 끝납니다.

 

제가 이렇게 “활”에 대한 영화를 잠깐 서론 부분에서 언급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 사무엘하 1장 17-27절에 “활 노래”(the lament of the bow)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명령하여 그것을 유다 족속에게 가르치라 하였으니 곧 활 노래라 야살의 책에 기록되었으되”.  흥미롭지 않습니까?  왜 노래 이름은 “활 노래”라고 정했는지 좀 의하하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활 노래는 다윗이 지은 노래로서 기쁜 노래가 아니라 “슬픈 노래”(lament)입니다(17절).  왜 슬픈 노래인가 하면 그 이유는 다윗의 제일 친한 친구 요나단과 그의 아버지인 베냐민 지파 사울 왕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여 현대 말로 하자면 “조가”를 지어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게 한 것입니다(17-18절).  그런데 이 조가의 제목이 바로 “활 노래”인 것입니다(18절).  왜 하필이면 조가의 제목이 “활 노래”일까요?  22절을 보십시오: “죽은 자의 피에서, 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다윗은 “요나단의 활이 뒤로 물러가지 아니하였”다고 노래를 지어 부르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곧, 요나단의 활이 원수의 피나 기름을 흘리고야 말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요나단는 전쟁을 할 때마다 반드시 승리를 거두었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저는 오늘이 말씀 중심으로 “다윗의 노래: 뒤로 물러가지 아니한 활을 노래하라!”는 제목 아래 과연 우리가 어떻게 요나단처럼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을지 한 두 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승리교회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아 순종하길 원함.

 

첫째로, 우리가 요나단처럼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용사”가 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노래를 보면 “용사”(mighty)라는 단어가 다섯 번이나 나옴(19, 21, 22, 25, 27절).  즉, 다윗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사울과 요나단을 가리켜 “용사”라고 오늘 본문에서 다섯 번이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오늘 본문 23절 하반절에서 사울과 요나단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 두 용사들은 전쟁에 능하고 또 용감하였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여기서 전쟁에 능하였다는 말을 생각할 때 그 의미 중에 하나는 사울과 요나단은 자기들의 무기를 잘 사용할 수 있었다는 뜻도 내포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울 왕은 전쟁에서 칼을 무기로 잘사용한 것 같고 요나단은 활을 무기로 잘 사용한 것 같습니다(22절).  “활”하면 다윗에게는 좀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전에 요나단의 아버지인 사울 왕에게서 도망다닐 때에 한번은 요나단이 다윗을 피신하는데 도와줄 때 그가 자기의 활을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삼상20:35-42).  그 이야기, 기억나시죠?  다윗이 에살 바위 곁에 숨어 있었을 때(19절) 요나단이 작은 아이를 데리고 다윗과 정하한 시간에 들로 나가서(35절) 아이에게 자기의 쏘는 살을 찾으라고 말한 후 아이가 달려갈 떄 요나단이 화살을 그의 위로 자니치게 쏘았습니다(36절).  그리곤 아이가 요나단의 쏜 살 있는 곳에 이를 즈음에 요나단이 아이 뒤에서  “살이 네 앞편에 있지 아니하냐”(37절), “지체 말고 빨리 달음질하라”(38절)고 외쳤습니다.  그가 그리 외친 이유는 다윗에게 “네 길을 가라”(22절)고 알려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결국 다윗은 요나단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그 아이가 병기를 가지고 성으로 갔을 때 일어나 땅에 엎드려 요나단에게 세번 절한 후에 피차 입맞추고 같이 울되 다윗이 더욱 심하게 울은 후(41절) 일어나 떠났습니다(42절).  이렇게 다윗은 요나단의 “활”하면 이 일이 생각났을 텐데 ….  그리고 사무엘상 18장 4절을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므로(1절)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요나단은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다윗은 요나단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 활의 노래를 애가로 지어 불렀을 때 분명히 요나단의 활에 대한 이러한 귀한 추억들로 인하여 요나단의 사랑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이렇게 요나단은 자기가 애중지중 아끼는 활을 다윗에게 줄 정도로 다윗을 사랑하였는데 다윗의 입장에서 요나단의 활을 생각할 때 요나단은 활을 무기로 매우 잘 사용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짐작해 볼 수 있는가 하면 역대상 8장 40절을 보면 우리는 좀 알 수가 있습니다:  “울람의 아들은 다 큰 용사요 활을 잘 쏘는 자라 아들과 손자가 많아 모두 일백 오십인이었더라 베냐민의 자손들은 이러하였더라”.  “울람의 아들”들은 베냐민 자손들입니다.  그리고 베냐민 자손들은 “다 큰 용사요 활을 잘 쏘는 자”들이다 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베냐민 지파에 속한 사람이 바로 사울 왕과 요나단입니다.  그리고 요나단 또한 큰 용사요 활을 잘 쏘는 자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활로 이스라엘의 원수들과 싸워 그들의 피를 꼭 흘리고야 말았던 것임(삼하1:22).  그는 전쟁을 할 때마다 승리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영적 전쟁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싸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모두는 십자가의 군병들이 되어 용감하고 담대하게 전쟁에 임해야 합니다.  우리 다 함께 찬송가 390장 “십자가 군병들아”를 하나님께 찬양 드리십시다: (1)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기 들고 앞서 나가 굳세게 싸워라/ 주께서 승전하고 영광을 얻도록/  그 군대 거느리사 늘 영광 주시네, (2)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그 나팔 소리 듣고 곧 나가 싸워라/ 수없는 원수 앞에 주 따라 갈찌니/  주 예수 힘을 주사 강하게 하시네, (3)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네 힘이 부족하니 주 권능 믿어라/ 복음의 갑주 입고 늘 기도하면서/  너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라, (4)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  이 날에 접전하고 곧 개가 부르리/  승전한 군사들은 영생을 얻으며/  영광의 주와 함께 왕노릇 하리라.”

 

마지막 둘째로, 우리가 요나단처럼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선 우리는 함께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장 23절을 보십시오: “사울과 요나단이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 그들은 독수리보다 빠르고 사자보다 강하였도다”.  오늘 본문을 다시 보면 다윗은 이 활의 노래를 부르면서 사울과 요나단을 가리켜 “용사”라고 다섯 번 칭하였는데 그 다섯 번 중 네 번은 “두 용사”라고 칭하였습니다.  그 말은 그 두 부자가 함께 전쟁에서 용맹습럽게 싸웠다는 말임.  용맹스럽게 싸우되 특히 그들은 생명을 걸고 전쟁에 임하였습니다.  19절과 2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네 영광이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오호라 두 용사가 엎드러졌도다  …  오호라 두 용사가 전쟁 중에 엎드러졌도다 요나단이 네 산 위에서 죽임을 당하였도다”.  비록 사울 왕과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길보아 산에서 죽임을 당하였지만 그 두 용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생명을 걸고 블레셋 사람들과 싸웠습니다.  이렇게 사울과 요나단은 함께 생명을 걸고 싸웠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죽을 때에도 함께 죽었습니다(23절).  그 모습을 보고 다윗은 애가를 지어 노래하기를 “사울과 요나단은 생전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자이러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떠나지 아니하였도다”(23절상)라고 하였음.  두 용사들이 전쟁 중에서 함께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25절).

 

            여러분, 주님의 교회는 승리의 교회요 또한 동시에 전투적인 교회임.  지금 교회는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을 하되 지금 교회는 사단과 그의 적그리스도와 인간을 우상화한 그의 우상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미 묵상한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계15:2-4)에서 배운 것처럼 끝까지 모든 핍박과 환난을 견뎌낸 최후의 승리자들만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모세의 노래,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처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짐바 될찌라도 느부갓네살 왕이 만든 금신상에 절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해서는 아니됨.  우리는 생명을 내놓을 지언정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믿음과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마치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함께 생명을 걸고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주님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우리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행20:24).  찬송가 400장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란 찬양 1절과 후렴이 생각납니다: (1절) “주의 진리 위해 십자가 군기 하늘 높이 쳐들고 주의 군사되어 용맹스럽게 찬송하며 나가세”  (후렴) “나가세 나가세 주 예수 만을 위하여  목숨까지도 바치고 싸움터로 나가세”.  이 시간 다 함께 찬송가 400장 하나님께 찬양 드리겠습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활 노래는 “최종 병기 활”이란 영화처럼 해피 엔딩이 아닙니다.  오히려 다윗의 활 노래는 슬픈 엔딩으로 끝남.  다윗의 친구인 요나단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 사실을 알고 다윗은 오늘 본문 26절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다윗은 심히 애통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심히 아름다운 친구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는 사랑하는 요나단의 여인의 사랑보다 승한 그 친구의 사랑함으로 인하여 슬퍼하여 애통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 또한 사랑하는 배우자가 가족 식구들이나 친구들이 죽으므로 그들의 죽음으로 인하여 심히 애통할 것입니다.  특히 요나단의 물러가지 아니한 활처럼 영적 전쟁에서 피 흘려 싸우다가 우리는 승리의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잊지 마십시다.  우리를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여주신 우리의 참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을 기억하십시다.  우리의 모든 죄를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음에서 부활히사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여주신 그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잊지 마십시다.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사망과 사단을 승리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우리 또한 최후 승리를 얻는 그 날까지 주님의 십자가 사랑하며 빛난 면류관 받기까지 험한 십자가 붙드십시다(찬송가 135장 후렴).  승리!

 

 

 

최후의 승리를 얻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길 간절히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