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람의 노래(3):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십시다!

 

 

 

[민수기 24장 1-9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하여 나아갈 때 그들의 광야 생활 중 행군 순서와 정착시 장막 배치 순서를 보면 흥미롭습니다(인터넷).  그들이 광야에서 행군할 때에는 크게 4대로 나뉘어 행군했습니다: (1) 즉 맨앞에는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앞서고, 그 뒤로 제 1대로서 유다의 진 기에 속한 지파들인 잇사갈과 스불론 지파들이 행군했습니다.  (2) 그 다음에는 게르손과 므라리 자손들이 성막의 기구를 메고 뒤따랐으며, 그 뒤에는 제 2대로서 르우벤의 진기에 속한 지파들인 시므온과 갓 지파들이 행군했습니다.  (3) 그 다음에는 고핫 자손이 성소의 기구들을 매고 뒤따랐으며, 제 3대로서는 에브라임의 진 기에 속한 지파들인 므나셋와 베냐민 지파들이 행군했습니다.  (4) 끝으로 제 4대로서 단 진기에 속한 지파들인 아셀과 납달리 지파들이 행군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군할 때에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맨 앞에서 행군했고 성막 기구 및 성물을 멘 레위 지파 자손들이 이스라엘 지파 사이 사이에 끼어서 행군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항상 하나님 중심, 성막 중심의 생활을 하게 하여 경건한 삶과 하나님 신앙을 유지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을 향해 행군하다가 부득불 광야에서 야영할 때에 그들의 장막 배치를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그들은 성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각각 세 지파씩 진을 쳤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지시하신 것으로 성막을 중심으로 12지파가 동서남북으로 진을 치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모든 지파들이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할 것을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번에 묵상한 발람의 첫번째 노래(민23:7-10)가 바로 모압 평지에 성막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방향으로 각각 세 지파씩 진을 치고 있었던 당시에(22:1) 모압 왕 발락이 발람을 데리고 바알의 산당에 올라 거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진 끝까지 보되(22:41) 그들의 사분의 일만(10절)만 보고 이스라엘을 축복한 노래입니다.  그리고 발람의 두번째 노래(23:18-24)는 모압 왕 발락이 발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달리 보게 하고자 발람을 데리고 소빔 들로 인도하여 비스가 꼭대기에 이르러서(14절)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보게 하지 않고 이스라엘 진의 한 쪽 끝만 보게(13절)하였을 때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한 노래입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24장 1-9절을 보면 발람의 두 번째 축복 노래 후 모압 왕 발락은 발람을 다른 곳으로 인도하되(23:27)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인(인터넷) 브올산 꼭대기로 인도하여(28절)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케 하려는 장면이 나옵니다(27절).  그러나 발람은 첫 번째와 두 번째 노래에서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24:1) “사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여(1-2절) 다시금 오늘 세 번째 노래에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합니다(10절).  흥미로운 점은 오늘 본문 1절에서 발람이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아니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음.  이 말씀이 우리에게 다시금 상기시켜 주는 것은 발람은 참된 선지지가 아니라 거짓 선지자, 즉 점술가이다 라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보기엔 발람이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은 내가 그대로 하지 않을 수 없다”(23:26, 참고: 22:38, 23:3, 12)라는 식으로 말할 때 그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므로 참된 선지자 같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렇게 오늘 본문 민수기 24장 1절에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듯이 발람은 사술을 쓰는 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압 왕 발락의 요청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 싶었지만 그 때 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신23:5).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발람을 듣기를 원치 아니한고로 그가 오히려 너희(이스라엘)에게 축복”케 하셨던 것입니다(수24:10).  이것을 볼 때 거짓 선지자요 점술가인 발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어서 이스라엘을 두 번이나 축복한 것이 아니라 그는 모압 왕 발락이 주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벧후2:15)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께서 그러한 점술가조차도 다스리시고 사용하시사 그의 입에 말씀을 주어(23:16) 이스라엘을 축복케하신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발람의 세 번째 노래는 “하나님이 신이 그 위에 임하”였다(24:2)고 성겨은 말씀하고 있는데 그 뜻은 성령 하나님께서 발람을 지배하시고 사로잡으시사 그로 하여금 또 다시 이렇게 세 번째 이스라엘을 축복케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 민수기 24장 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  곧, 발람은 자기의 소욕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성령님에게 사로잡혀 말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이 발람의 세 번째 축복의 노래를 우리가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음.  오늘 본문 민수기 24장 5절을 보십시오: “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How beautiful are your tents, O Jacob, your dwelling places, O Israel!).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라!”는 제목 아래 이 발람의 세 번째 노래인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3 가지로 묵상하면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행복함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24장 6-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 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 가에 있으리로다”.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산 꼭대기에서(23:28) 그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고(24:2) 발람은 성령님에게 사로잡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면서(5절) 그는 이스라엘의 행복함을 노래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행복함을 노래하되 발람은 이스라엘이 강 가의 동산 같고 하나님 께서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 가의 백향목 같도다”라고 노래하였습니다(6절).  흥미롭지 않습니까?  지금 발람은 브올산 꼭대기에서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되 ‘강 가의 동산 같고 물 가의 백향목들 같다’고 노래한 것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광야에 강 가가 있고 물 가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성령님에게 사로잡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고 있었던 발람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는 광야의 강 가와 물 가를 보면서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이 발람의 노래 부분을 생각할 때 복음성가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란 노래가 생각났습니다: (1절)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 동산되리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히라, (2절) 사막에 숲이 우거 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되리라  독사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쳐도 물지 않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사막이 꽃동산이 되고 낙원이 될 수 있습니까?  바로 사막에서 물을 내시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이사야 48장 2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막으로 통과하게 하시던 때에 그들로 목마르지 않게 하시되 그들을 위하여 바위에서 물이 흘러나게 하시며 바위를 쪼개사 물로 솟아나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 사로잡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였던 발람은 이스라엘을 강 가의 동산과 물 가의 백향목들 같다고 비유하는 것은 “강 가”나 “물 가”나 다 물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 당시 근동 지방에는 물이 귀하기 때문에 발람은 물을 행복과 관련시켰던 것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발람은 사막에서도 바위를 쪼깨사 물을 솟아나게 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보고 이들이야 말로 참 행복한 자들이다 라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이스라엘 백성이 참 행복자들입니까?  신명기 33장 29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참 행복자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얻은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심에 있어서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영광의 칼이 되셔서 모든 대적들을 물리치시사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 주셨을 뿐만 아니라 반석에서도 샘물이 나게 하시사 그들로 하여금 마시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묵상할 때 반석이 되시는 예수님이 생각났음.  고린도전서 10장 4절을 보면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 반석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 로마 군병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을 때 피와 물이 나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요19:34).  그러므로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믿는 자는 예수님의 보배로운 피로 다 씻음을 받고 죄사함을 받고 그의 부활하심을 믿는 자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기에(롬4:25)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를 가리켜 행복자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 6-8절을 보십시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이 바로 행복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마치 광야에서 물이 솟는 것처럼 그리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는 것처럼(사35:6)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믿는 주님의 광야 교회(행7:38)로 하여금 생수의 강이 흘러나게 하셨습니다(요7:38).  곧,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한 광야 교회 모든 성도들인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혈로 모든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받는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보시기에 참 행복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자들의 모임인 교회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장막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해야 함.  우리는 교회의 행복함을 노래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흥왕함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24장 7절 하반절부터9절상반절을 보십시오: “…  그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의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꿇어 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  광야가 내려다 보이는 브올산 꼭대기에서(23:28) 그 낯을 광야로 향하여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고(24:2) 발람은 성령님에게 사로잡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면서(5절) 그는 이스라엘의 흥왕함(flourish)를 노래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발람은 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축복하사 그들로 하여금 번창케 하시고 그들의 세력을 왕성케 하신 것을 보고 노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 7절 하반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의 나라가 흥왕하리로다”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발람이 그 당시 강한 나라였던 아각의 나라보다 이스라엘 나라가 더 강하고 위대해 질 것은 노래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을 뿐만 아니라(8절) 그들과 함께 하시사 그들의 적국과 싸워 승리케 하시므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을 강국으로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발람은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면서 이스라엘을 가리켜 “들소”, “수사자”, 또는 “암사자”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 모든 동물들이 힘을 상징합니다(박윤선).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미약한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힘있는 강한 나라로 세움을 받은 것입니까?  그 이유는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을 강하게 하시고 높이시사 열국으로 하여금 그들을 두렵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열방 중에 두려운 존재로 만드셨는가 하면 나중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성인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기 전에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냈을 때 여리고 성 안에 살고 있었던 라합이란 여인이 그 두 정탐꾼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 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  상천 하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그 모든 놀라운 일들을 듣고 라합과 여리고 성 사람들은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을 정도로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사 그들을 힘있게 하시고 강한 나라로 높이셨기 때문입니다.

 

            복음성가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이 생각납니다: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우리 주 하나님/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우리 주 하나님/ 깃발을 높이 들고 흔들며 왕께 찬양해/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우리 주 하나님/ 위대하고 강하신 주님 우리 주 하나님.”  위대하고 강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함께 하실 때에 사람들 보기에 미약한 교회라 할찌라도 흥황케 하시고 강하게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깃발을 높이 들고 흔들며 왕중의 왕이신 주님께 찬양케 하실 줄 믿습니다.  아무리 골리앗과 같은 대적이라 할찌라도 우리는 다윗처럼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17:47)는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전진해 나아갈 때 위대하고 강하신 우리 주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로 하여금 승리케 하실 줄 믿습니다.  진정한 약속의 땅인 천국에 들어갈 그 때까지 위대하고 강하신 주 하나님께서 우리 광야 교회와 함께 하시사 우리를 흥왕케 하시되 우리를 번창케 하시며 또한 강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승리의 면류관을 받는 그 날까지 우리는 교회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하되 교회의 흥왕함 또한 노래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이스라엘의 아름다운 장막을 노래한다는 것은 이스라엘의 축복함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24장 9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로서(민22:12) 그들을 축복하는 자들은 복을 받을 것이고, 그들을 저주하는 자들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모압 왕 발락이 점술가인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케 하여(23:7) 그들을 쳐서 이기어 그 땅에서 몰아내려고 했지만(6절) 하나님께서는 그 저주하는 것을 변하여 복되게 하셨던 것입니다(8절).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신23:5).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신23:5).  그 이유는 하나님은 진실하셔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아가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창세기 12장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의 후손을 번창케 하시사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고 그의 이름을 창대케 하셨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사 그를 축복하는 자에게 복을 내려시고 그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진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진실하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시되 그의 후손을 통하여 진정한 복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대신하셔 저주를 받게 하시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시고 부활케 하시사 우리에게 모든 신령한 축복들을 주셨습니다(엡1:3).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게 하시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또한 발람처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 사로잡혀 우리 교회의 축복함을 노래해야 합니다.  이 시간 다 일어나셔서 찬송가 28장을 하나님께 찬양 드리십시다:  (1절)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길 없도다/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그사랑을 항상 찬송 합니다, (2절) 주의 크신 도움받아 이때까지 왔으니/ 이와 같이 천국에도 이르기를 바라네/ 하나님의 품을 떠나 죄에 빠진 우리를/ 예수 구원하시려고 보혈흘려 주셨네, (3절) 주의 귀한 은혜받고 일생 빚진 자되네/ 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행복함과 흥황함과 축복함을 믿음으로 바라보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