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형통케 하시길 기원합니다.

 

 

 

[열왕기하 18장 1-7절 상반절]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은 복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 가정, 친척, 이웃들까지도 복을 주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을 뿐만 아니라 요셉을 위하여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처럼 말입니다(창39:5).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형통의 복을 주심에 있어서 결코 유혹과 환난과 고통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형통의 복이란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형통의 복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형통의 복이란 고통과 고난이 없는 성공이 아닌가 생각함.  그리고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성공이란 물질의 풍부함을 얘기하는 것 같음.  교회적 으로 얘기하다면 교인 수가 많은 것이 성공한 교회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많고 풍부한 것이 성공이라고 주로 생각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성경 히브리어 원어로 “형통”이란 “찰레아흐”로서 ‘번성하다’, ‘풍성하다’, ‘성공적이다’란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성공’이란 무조건 번성하고 성공하는 것만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창세기 39장 2, 3, 2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이란 번성함과 성공함에는 고난과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이란 왠지 고통과 고난이 없는 번성과 성공이라기 보다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이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가 하면 우리가 고통과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인자를 더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곧,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바로 형통의 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의 근원이 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 바로 형통의 복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18장 7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하시매 저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더라  …”(And the LORD was with him; he was successful in whatever he undertook.).  성경은 히스기야 왕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는 어떻게 형통의 복을 누릴 수 있었는지 오늘 본문 열왕기사 18장 1-7절 상반절 말씀 중심으로 그의 형통의 비결 한 가지를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아 순종하길 원합니다.  그 한 가지 형통의 비결이란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것입니다.  3절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He did what was right in the eyes of the LORD, just as his father David had done.).  유다 왕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가(1절) 나이 25세에 왕이 되어 유다를 29년간 치리 하면서(2절)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습니다(3절).  다시 말하면,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로 행하였습니다.  과연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행한 옳바른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3가지로 우리는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행한 정직한(옳바른) 일은 여러 산당과 우상들을 제하여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18장 4절을 보십시오: “여러 산당을 제하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이라 일컬었더라”.  히스기야 왕의 아버지인 아하스 왕은 20살 때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16년을 치리하였지만 그는 그의 조상 다윗과 같이 아니하였고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였습니다(16:2).  오히려 아하스 왕은 이스라엘 열왕들의 길로 행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습니다(3-4절).  그는 심지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어(10절) 우리야로 하여금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들게 하였습니다(11절).  그리고 아하스 왕은 그 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렸습니다(12절).  이렇게 아버지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치 아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아들인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되 그의 아버지가 만들어 놓은 우상 숭배 제단 등을 다 제하여 버렸습니다.  그리고 히스기야 왕은 그의 열조 왕들이 다윗과 같이 아니하고 오히려 북쪽 여로보함처럼 우상들과 산당들을 만들고 숭배하는 죄에서 돌이키고자 그 모든 우상들과 산당들을 다 제하여 버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레위인들에게 자신을 성결케 하게 하였고(대하29:5a) 또한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게 하였습니다(5b-9절).  그리고 히스기야는 그의 부친 아하스 왕이 성전 문들을 봉쇄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한 것(28:24)을 다시금 하나님의 전 문들을 열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게 했습니다(29:3).  이 얼마나 놀라운 종교개혁입니까? 

 

여러분, 종교개혁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까?  얼마 전에도 어느 형제하고 대화하면서 그 형제는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우리는 다시 기본(basic)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 형제의 말에 동의하면서 ‘맞습니다.  우리는 다시 foundation(기초)로 돌아가야 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까?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렇게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기본이 안되있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까?  여기서 제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이 안되어 있다고 말한 것은 특히 우리들이 기독교인의 기본진리를 모르고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얼마전(2011. 7. 28)에 소천하신 성공회 신부이자 세계적인 복음주의 운동의 거장이였던 고 죤 스토트 목사님은 그의 책 “기독교의 기본진리” (Basic Christianity)에서 한 4가지 주제를 심도있게 나누고 있는데 그 4가지란 이렇습니다: (1)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리스도 자신의 주장, 그리스도의 인격, 그리스도의 부활)  (2) 인간의 상태 (죄의 실상과 성격, 죄의 결과)  (3) 그리스도가 하신 일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스도의 구원)  (4) 인간이 해야할 일 (비용 계산, 결정, 그리스도인의 삶).  한 마디로, 존 스토트 목사님이 말하고 있는 기독교의 기본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기본이 안되어 있다는 말은 우리가 기독교의 기본 진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그 복음의 능력을 부인하면서 그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 그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혀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죄악된 것들을 다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  마치 히스기야가 자기 아버지 아하스 왕이 만들어 놓았던 산당들과 우상들을 제하여 버린 것처럼 우리는 우리 집 안과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우상들과 죄악된 것들을 모두 다 제하여 버리고 또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히스기야 왕은 유대인들에게서 제일 위대했던 지도자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까지 부서트려 버렸던 것처럼 우리는 아무리 유명한 성경 인물이던 교회 역사에 목사님들이던 그들이 만든 “놋뱀”과 같은 것들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상화할 경우 단연코 우리는 그것도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르게 행하는 것이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형통의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행한 정직한(옳바른) 일은 하나님을 의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18장 5절을 보십시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하나님께서 그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는 히스기야를 통하여 유다에 종교개혁을 일으키셨을 때 히스기야 왕이 의지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자기 아버지 아하스 왕은 산당와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고 하나님의 성전 문들을 봉쇄하여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였던 그런 아버지인데 어떻게 히스기야 왕이 종교개혁을 행하면서 자기 아버지 아하스 왕을 의지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다시 말하면, 여러분 생각엔 히스기야 왕이 아버지 아하스왕의 도움과 지지가 없이 유다의 종교개혁을 계속해서 감행했다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엔 오히려 아버지인 아하스 왕은 아들 히스기야가 자기가 만들었는 산당과 우상들을 훼파하는 것을 보던지 듣던지 했을 때 심히 분노하고 그러지 않았을까 측측하게 됩니다.  그러와 와중에서도 히스기아가 꾸준히 종교개혁을 감행했다는 것은 그는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우리는 말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제가 어제 새벽기도회 때에 잠깐 나눴지만 믿지않는 불신자 가정에서 태어나 예수님을 믿고 신앙생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한 권사님에게 대해서 나눴습니다.  유권사님이란 분이신데 제가 선교지 가기 전이나 후에 한국에 들러서 한 세 번정도 그 권사님 집에 찾아가서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양하고 했던 권사님이십니다.  마지막으로 작년에 몽골 다녀와서 찾아갔을 때는 그 권사님은 의식도 없고 방안에 계서서 얼굴을 뵙지 못하고 그분의 남편되시는 장로님과 맏아드님과 만나 대화를 나눴었습니다.  그 권사님 부부에게 제일 힘든 것은 그 권사님의 믿지 않는 형제, 친척들이 조롱(?)하는 것이였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왜 이런 질병과 고통을 당신에게 주셨는가?’입니다.  이 말을 그 장로님에게 듣고 그 권사님이 왜 좀 더 오래 살아서 형제들과 친척 식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길 그리 간절히 원하셨던지를 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권사님이 어제 새벽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권사님의 형제들과 친척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이미 들으셨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께서 그 권사님의 기도를 들으시사 그녀의 형제들과 온 친척 식구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영접케 하실 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의 가정에서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계신다면 예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비록 신앙생활함에 있어서 제일 가까운 가정 식구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으므로 많이 힘들고 외롭고 어려울지라도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여러분의 온 가족, 친지 식구들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자녀 대대 후손이 하나님께 놀라운 복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여러분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할 때 신실하신 언약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온 식구들과 자녀 대대 후손들이 하나님께 형통의 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소망을 가지시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믿음 생활을 감당하실 때에 비록 여러분이 외롭고 힘들어도 오직 주님 만을 바라보시면서 그 주님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18장 5절을 보면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유다의 그 많은 왕들 중에 히스기야처럼 하나님을 의지하였던 왕들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에 있어서 어떠한 왕들은 처음엔 하나님을 잘 믿고 의지하다가도 나중에 가서는 하나님을 떠나 배도하여 하나님께 범죄하였는데 히스기야 왕은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였다는 것입니다.  특히 히스기야 왕은 유다 나라의 위기에 빠졌을 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열왕기하 18장 17절에서 19장 34절을 보면 앗수르 왕이 대군을 거느리고 유다를 치려고 왔을 때 히스기야에게 “너의 의뢰하는 이 의뢰가 무엇이냐”(18:19)고 했을 때 히스기야 왕은 자기 자신만 하나님을 의뢰한 것이 아니라 그는 온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의뢰하라고 말하였습니다(30절).  그러므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했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서(19:1, 14)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15절).  그의 기도 내용 중에 이러한 간구가 있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우리를 그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는 홀로 하나님이신줄 알리이다 하니라”(19절).  하나님께서는 이 히스기야 왕의 기도를 들으시사 결국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서 건져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자를 보내서 앗수르 진에서 군사 십 팔만 오천을 다 쳐서 송장이 되게 만드셨고 앗수르 왕 산헤립도 니느웨로 돌아가서 결국에는 죽임을 당합니다(35-37절).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켜 줍니까?  항상 그리고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신다 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르게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자들을 형통케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찬송가 342장 “어려운 일 당할 때” 1절 가사와 후렴이 생각납니다: (1절)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의 적으나 의지하는 내주를 더욱 의지합니다”, (후렴) “세월 지나갈 수록 의지할 것 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만을 의지하십시다.  세월 지나갈 수록 우리 예수님 만을 의지하십시다.  특히 우리 인생의 여정에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더욱더 주님을 의지하십시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더욱더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가 우리 자신을 정결케 하고 우리 가정을 정결케 하며 우리 교회를 정결케 해 나아가십시다.   우리 안과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죄악된 것들을 제하여 버리십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행하는 저와 여러분을 형통케 해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 보시기에 행한 정직한(옳바른) 일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18장 6절을 보십시오: “곧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여러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오늘 성경은 유다의 여러 왕들 중에 하나님을 의지함에 있어서 전후무후했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을 계명을 지켰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과연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저는 이것을 생각할 때 두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것을 바로 “신실”과 “순종”이란 단어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은 그는 하나님을 꼭 붙잡았다, 하나님께 달라붙어 있었다(cling) 또는 매우 가까 이 있었다(keep close)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매우 가까이 하되 신실하게 그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레위인들을 정결케 하며, 하나님의 성전을 정결케 하였던 것임.   그 목적은 유다를 향하신 하나님의 맹령한 노를 그들에게서 떠나게 할 마음이 그에게 있었기에(대하 29:11) 히스기야 왕은 부패한 종교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마음이 되야 합니다.  하나님께 착 달라 붙어서 하나님을 매우 가까이 하는 성도들이 되어 우리는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우리에게서 떠나게 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히스기야 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른 일을 행하여 교회의 순결을 위하여 정결케 하는 회개함이 우리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히스기야 왕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저는 “순종”이란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매우 가까이하여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는데 힘썼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삶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께 간구할 뿐만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여 지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정결케 하는 개혁을 계속해서 진행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유다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을 온전히 따라야 합니다.  우리의 온맘과 정성을 다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해야 합니다.  마치 갈렙이 하나님을 온전히 순종하며(민32:122, 신1:36)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것처럼(민14:24; 수14:14) 우리도 하나님을 온전히 좇아야 하며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삶이요 하나님 보시에 바르게 행하는 삶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을 하나님께서 분명히 형통케 하십니다.  이러한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독생자 예수님이야 말로 온전히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가까이 계셨던 분이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죄를 다 제하여 버리시기 위해서 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모든 죄에서 구속하시고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꼐서는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령을 복을 이미 받았습니다(엡1:3).  이렇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 형통을 받아 누리기 위해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히스기야 왕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로 행해야 합니다.  새해 2012년을 맞이하여 우리는 우리 가운데 있는 모든 우상들과 죄악들을 제하여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형통케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형통케 하시길 기원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