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해도 되는 것입니까?

 

 

[고린도전서 6장 1-11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분쟁이 전혀 발생하지 말고 소송 문제도 전혀 없으면 그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겠지만 아무리 우리가 의롭게 살려해도 사회 생활을 하다보면 자의든 타의든 송사 문제는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듯 합니다.  주로 우리는 그 때에 이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까지 가야만 하는가 하면서 항상 포기하고 손해를 봐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1997년 2월 24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기독벌률센타가 개최한 제1회 ‘화해와 성결을 위한 법률 세미나”에서 “크리스천의 법정 송사에 대한 성경적 이해”란 제목아래 세미나를 인도하신 목사님이자 변호사인 주명수란 분의 글을 보닌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물어 보아야 할 질문들” 13가지가 있어 여러분과 몇 가지 나누고자 합니다(인터넷):

 

  1. 첫째로, 이 소송을 하는데 있어서 나의 어떤 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 (고전 10:31)
  2. 둘째로, 만약 내가 앞으로 6개월만 살 수 있다면, 나는 이 소송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할 것인가? (시 90:12)
  3. 셋째로, 이 소송을 하려고 하는 나의 진실한 동기는 무엇인가, 보복은 아닌가? (고전 13, 마5:38-48)
  4. 넷째로, 내가 하는 소송이 다른 신자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가, 내가하는 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신자들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없이 말할 수 있는가? (롬 14:13, 딤전 4:12)
  5. 다섯째로, 내가 하는 소송이 불신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가, 내가 하는 소송 으로 인해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는가? (고전 6:1-8, 10:32-33)
  6. 여섯째로, 내가 하는 소송이 상대방 앞에서나, 상대방의 변호사 앞에서나 나의 변호사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가? (롬 15:1-3)
  7. 일곱째로, 나는 이 소송을 하고 있는 중에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가?
  8. 여덟째로, 나는 이 소송을 이기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가?
  9. 아홉째로, 내가 하는 소송이 무죄한 제3자에게 해를 주는 결과가 되지는 않는가? (막 9:42)
  10. 열번째로, 나는 이 소송을 하는 중에도 나의 가족과 가사와 나 자신에 대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
  11. 열한번째로, 다른 해결책은 적절했는가?  (k1) 용서는 적절했나?  (k2) 화해와 타협은 적절했는가?  (k3) 상대방을 만나 그의 의견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k4) 화해를 도와줄 변호사나 다른 중재를 찾아본 적이 있는가?
  12. 열두번째로, 나의 권리들을 주장하기 위해 열성을 내는 만큼 화해나 용서를 하기 위해서 열성을 낸 적이 있는가? (마 6:12-15)
  13. 열세번째로, 나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에 따라 판결된 결과에 대해 깨끗하게 승복할 것인가?’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 1-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내려 가면서 교회 안에서 형제들끼리 세상 법정에 소송(고소)(lawsuit)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음.  과연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끼리 세상 법정에 서로 소송을 해도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소송해도 되는 것입니까?”란 제목 아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교훈을 겸손히 받기를 원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나 지금 21세기 교회 안에서 형제가 또 다른 형제로 더불어 소송하되 이 세상 법정인 불신자들 앞에서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 1절과 6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가 다른이로 더불어 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여러분은 2011년 들어서서 이민 교회 안에서 지금 법정 소송건이 몇개나 되시는 줄 알고 계십니까?  인터넷판 신문인 Sunday Journal, 2011년 3월 6일 날짜 것을 보닌까 그 때 LA 법정에 교회분규나 목회자들 대상으로 진행되고 있는 소송건수가 약 40개에 이르렀다고 합니다(인터넷).  그 기사를 좀 더 자세히 읽어보면 이 40여개나 이르는 법정 소송건 내용은 각양 각색이며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 한 예로 최근 물의를 일으켰던 LA에 있는 한 서너개 대형교회 분규에서 보듯이 LA 한인 교회들의 재정 비리와 관련된 문제들은 날이 갈수록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결국 교회 안에 재정 비리와 관련된 문제들은 세상 법정 소송까지 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재정 비리 문제 외에도 지금 LA 이민 교회 안에서 심각한 양상을 띠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목회자나 장로들의 섹스 스캔들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유부녀 여성 성도들과 눈이 많이 (성 관계를 맺은 후) 그 여성도들은 자기들의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사를 읽을 때 저는 고린도 교회나 지금 21세기 이민 교회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고린도 교회안에 일어난 심각한 문제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가 고린도전서 1장부터 5장까지 묵상해 오면서 고린도 교회의 심각한 문제들을 딱 두 단어로 요약한다면 그 것은 바로 “분쟁”과 “음행”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에 들어와서 우리가 접하는 고린도 교회의 세 번째 심각한 문제는 바로 이 세상 법정에 형제들끼리 “소송”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심각한 문제들은 지금 21세기 이민 교회에서 우리가 보고 듣는 문제들임 오죽 했으면 LA 지역 법원에 있는 판사 한 명이 ‘왜 유독 한국 사람들만 교회 안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법원으로 들고 오냐’며 역정을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소송에 들어가면 사실 확인 작업을 하는 데만 최소한 2만불 이상 소요된다.  성도들이 바친 귀한 헌금을 왜 그런데 쓰냐’(인터넷).

 

사도 바울 당시 로마 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분쟁들을 중재인(arbitration)을 둬서 자기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도록 허락했다고 합니다(Hodge).  그래서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분쟁들을 은밀히(privately) 해결하던지 아니면 회당 법정 안에서(in a synagogue court) 해결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문제들을 이교도 법정(pagan court)에 가지고 가는 것을 거부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문제들을 이교도 법정에 가지고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경적 원리들로 그의 백성들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MacArthur).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경적인 원리들로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소송)를 하고 있었습니다(1절).  그래서 바울은 충격과 비통함 속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How can it be?) ‘너희들은 어떻게 서로 송사할 엄두까지 냈느냐?(How dare you sue each other?)라고 오늘 본문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염려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세상 법정에서 불공평한 공판을 받을까봐서가 아닙니다.  바울의 염려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교회의 권위와 능력을 별로 존중히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었습니다(MacArthur).  여러분은 이 바울의 염려가 이젠 기정사실화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려분 생각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권위와 능력을 별로 존중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권위와 능력을 존중하고 있다면 어떻게 교회의 분쟁을 세상 법정에 가지고 가서 서로 소송을 걸며 싸우고 있습니까?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나 지금 21세기 교회 안에서 형제가 또 다른 형제로 더불어 이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 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형제들 간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교회 밖인 세상 법정에 소송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줄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5절).  그러면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음: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고린도교회 성도들 중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3:18) 지금 바울은 그들에게도 “너희 가운데 ….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라고 편지로나마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편지 내용을 읽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반응은 어떠했겠습니까?  우리는 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좀 많이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교회 문제는 둘째치고 가정에서 부부 관계만 봐도 우리는 부부의 문제를 주님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예수님을 믿는 부부들이 심지어 세상 법정까지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정 문제나 교회 문제나 우리 가운데 지혜 있는 자가 하나도 없어서 세상 법정에 불신자요 불의한 재판장과 변호사들과 배심원들에게 다 맡기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지금 그정도 우리 가운데 지혜 있는 자가 하나도 없는 것입니까?  여러분, 누가 지혜 있는 자입니까?  지혜있는 자는 바로 성도가 세상을 판단하며 천사까지도 판단 할 것을 아는 자입니다(2-3절).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미련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미련하게도 자기들의 문제를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4절)인 불신자들에게 판단해 주길 부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을” 하였던 것입니다(5절).

 

            스테판 씨맨즈란 목사님은 그의 책 "마음의 상처를 십자가로 가져가라"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죄책은 우리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말하거나 행한 어떤 것에 의해 유발되기는 하지만 우리 존재에 관한 것이다. ...  수치심의 핵심에는 자기 노출로 인해 느끼는 예민한 느낌이 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제일 먼저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아닙니까?  그들은 에덴동산 살면서 선악과를 따먹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기 전까지는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완벽한 신뢰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수치심을 전혀 느끼지 않았었음.  그러나 하나님 처럼 되기를 구하며(창3:5)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 행위의 첫 번째 결과로 찾아온 것이 수치심이였다 -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3:7) (씨맨즈).   아담과 하와는 자기 노출로 인해 수치심을 느끼기 된 것이다.  이 수치심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주저함으로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찾으시는데로 숨어버렸음.  왜 그랬습니까?  그들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던 것입니다(창3:10).  이렇게 수치심은 주저함을 낳고 주저함은 급기야 숨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상대방으로부터 숨어버렸고, 심지어는 자신으로부터도 숨어버렸습니다(씨맨즈).  그리고 나서 자신을 계속 숨기기 위해서 남을 비난하는데 몰두했습니다: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13).  자기 자신을 숨기기 위해, 다시 말하면 자기 노출을 두려워 하여 남을 비난하며 원망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렇게 자기 존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수치심은 참 위험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수치심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뿐만 아니라 삐뜰어진 자아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끼게 하며 또한 자신감을 잃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수치심은 모든 중독성 행동을 부추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존 브랜드쇼).  씨맨즈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고통스러운 자기 노출을 견뎌내기가 너무나 벅차기 때문에 위로와 인정을 받기 위해 마약, 일, 음식, 섹스, 기타 자신의 창조한 무감각의 세계로 뺘져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수치심을 극복하기 위해선 "십자가의 수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은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히12:2).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는 그들의 관점에서는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 예수님께서는 벌거벗기신 채 십자가에 매달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수치의 나무를 바라볼 떄에 우리의 모든 가식의 옷이 벗겨질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두려워하고 꺼리겼던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인정하게 되며 또한 우리의 그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사 사랑해주시며 우리의 존재를 존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관점이 생기므로 말미암아 자기 노출을 더 이상 꺼리끼며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벌것벗은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전에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을 우리는 자랑하게 될 것임.  마치 사도 바울이 자기의 연약함과 미련함 등을 자랑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수치의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예수님을 바라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 가운데서 온전케 되는 것을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형제가 또 다른 형제에게 소송하는 것을 보면서 수치심을 가지고 수치의 나무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서나 지금 21세기 교회 안에서 형제가 또 다른 형제로 더불어 이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영적으로 패배한 것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 7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피차 송사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기독 신자가 기독 신자를 걸어서 불신 세상 법정에 소송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  그러므로 기독 신자로서는, 그 형제(같은 신자)에게서 어떤 손해를 당할 우려가 있을 때에 불신 세상 법정에 가서 소송함보다 그저 손해를 당하고 마는 것이 좋다”(박윤선).  물론 박윤선 박사님은 신자가 부득히 하여 불신자를 걸어 송사하게 되는 것까지 정죄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본능은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임.  어느 누가 손해 보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저희 집 와 보신 분들은 이미 보셔서 아시겠지만 저희 집 갑판(deck)이 무너져서 지금 사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집을 지으신 사람이 와서 보고 나서 10년 보증(warranty)이 있는데도 고쳐주실 생각도 않하시고 전화도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다고 교회 집사님의 제안을 받고 집 보험회사에 cover이 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보험이 cover이 안된다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그 집을 지은 사람을 세상 법정에 고소를 해야 하는 것인가 말아야 하는 것인가 솔직히 고민했었습니다.  고민할 때 이런 저런 생각들이 들었지만 한 가지 든 생각은 룻기 4장 말씀이었습니다.  우리가 좀 손해보면 되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럴 때 동시에 든 생각은 ‘아니 10년 보증이 되있고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잘못했으닌가 당연히 그 사람들이 그 갑판을 고쳐주는 것이 그들의 책임인데… 우리의 right도 있고 .. 등등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사람 보기에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손해를 돌이켜 우리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룻기 4장에 나옵니다.  보아스란 사람이 성읍 장로 십인을 청한 후(2절) 자기보다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친족(3:12)에게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의 죽은 남편인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사서 그의 기업을 무르라고 하닌까(4:3-4) 그 기업 무를자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 후(4절) 보아스가 그러면 그 밭을 나오미에게서 사는 날에 곧 과부 이방 여인인 나오미의 며느리 룻과 결혼하여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해야 한다고 말하닌까(5절) 그 기업 무를 자가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6절).  그리고 그는 자기의 기업 무를 권리를 보아스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래서 보아스가 대신 기업을 물러서 나오미에게서 엘리멜렉의 소유를 다 사고 룻을 자기 아내로 취하였습니다(9-10절).  그 결과 보아스는 룻과 결혼해서 다윗 왕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음(17절).  그래서 보아스와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마1:5).  사람들 보기에 손해 보는 장사라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서 실제로 경제적으로는 돈을 좀 잃을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이 범사에 잘 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좀 손해를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 7절 하반절에서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물질을 좀 잃어도 신앙을 잃어버리는 행동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돈 몇푼 때문에 우리의 양심을 팔아서 불의를 행하고 남을 속이는 죄를 범해서는 아니됩니다(8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6장 9-10절을 보십시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성경은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음란한(간음하는) 자나 우상 숭배자나 탐색하고 토색하는 자나 술취하는 자나 다 하나님의 나라(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의를 행하고 남을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아니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1절에서 분명히 우리에게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 성도들은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 공로와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우리의 모든 죄악은 다 씻음을 받아 성별되었고 또한 하나님꼐 의롭다 칭함을 받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다 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 답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변화된 자들로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참 신자 답게, 참 그리스도인 답에 살아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요즘 새벽기도회 때 읽으면서 바울은 그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 모습을 보면 유대인들은 바울을 고소하면서도 그가 죄인임을 입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대 총독(들)도 바울이 아무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볼 때 저는 예수님이 생각났음.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인데 유대인들과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십자가에 못박고자 하였습니다.  심지어 빌라도도 예수님이 아무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수치의 나무인 십자가에 벌것벗으신 체로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그리하셨습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들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의롭게 하시사 새 사람으로 변화시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변화된  새 사람들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교회가 세상 법정에 고소를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는 죄를 부끄럽게 여기고 수치의 나무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와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 변화된 새 사람들로서 새 삶을 살도록 힘을 쓰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이미 영적으로 패하고 있는 분쟁과 소송에 휘말린 교회를 승리케 하실 주님을 바라보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