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귀지 마십시오.

 

 

[고린도전서 5장 9-13절]

 

 

여러분, 속담에 “친구 따라 강남간다”는 말 다 알고 계시죠?  여기서 “강남”이란 한국에 강남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의 양자강 이남인 강남을 말한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중국 양자강 이남은 농업이 매우 발달한 곳이며 자원이 풍부하여 고대시대부터 문명이 발달했기에 중국 강남을 기회와 풍요의 땅으로 불리웠다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풍요의 땅이라도 타국 생활이라 어려움도 많았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혼자 가는 것이 쉽지 않기에 그곳에 친구가 간다고 하니 친구를 잃기 싫어 따라 간다고 하는 모습에 비유해 주변 사람을 따라 하거나,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을 일컬어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말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 의미는 좀 부정적인 것으로서 친구따라 가느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장적 따라 나서는 줏대 없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믿을만한 친구는 어디든지 따라 나설 수 있는 우정을 말하기도 합니다(인터넷).  과연 여러분에게는 어디든지 여러분이 따라 나설 수 있을 정도로 믿을만한 친구가 있으십니까?  영어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Two is company, three is a crowd” (둘이면 친구지만 셋이면 갈라진다).  그 의미는 두 명은 잘 지내지만 세 명은 의견이 맞지 않아 둘이면 친구지만 셋이면 난장판이란 뜻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이 두 속담들을 생각할 때 저는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어떠한 만남을 가져야 하는가를 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제 개인적 생각은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좋은 만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좋은 만남이란 주님 안에서 서로 믿을 수있고 또한 서로 잘 지내며 더 나아가서 서로를 사랑하며 위로하는 가운데 서로에게 영적으로 유익을 주는 만남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좋지 않은 만남은 서로 의견도 안맞아 다투고 싸우며, 서로 신뢰하지도 않으며 더 나아가서 서로에게 영적으로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나쁜 영향을 끼치는 만남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리 교회 안에서의 만남이 서로의 신앙 생활에 플러스가 되는게 아니라 오히려 마이너스가 될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지난 3주 동안 고린도전서 5장 1-8절 중심으로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고 있는 고린도교회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만일 그러한 일이 우리 교회 안에 일어날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훈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서 성도들 가운데서 불신자들도 범하지 않는 근친상간이란 음행의 죄를 범하면서도 회개치 않고 있는 성도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죄를 묵인하고 그들을 용인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다가는 그 죄악이 온 교회에 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선 우리 가운데 있는 적은 누룩을 제거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지난 주일 묵상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볼 때 먼저 우리는 그 부도덕한 죄를 범하고 이는 형제를  영적으로 바로 판단해서 적절한 조치를 내려야 합니다.  그 적절한 조치란 우리가 그 음행의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고 있는 그 형제와 영적 교제를 끊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그 큰 범죄자를 용납하면서 잘한 듯이 자랑하였습니다(6절).  그래서 바울은 6절에서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라고 그들에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상상이 되십니까?  예를 들어 우리 교회 안에서 음행의 죄를 범하면서도 회개치 않고 있는 형제가 있는데 그 형제를 우리가 용납하고 있는 것을 자랑한다고 하면 여러분은 우리 교회를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근친상간의 큰 음행의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를 용인하고 용납까지 하면서 자랑하였을까 생각해 볼 때 저는 그 원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 말은 그들은 음행의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를 용인하고 용납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착각을 할 때가 종종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우리 가운데 죄를 습관적으로 계속 범하고 있는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하는 것이다 라고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 잠언 10장 12절에서도 “…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라고 써 있고 또한 잠언 17장 9절에서도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라고 써 있지 않습니까?  그러다 보니 참으로 심각한 문제는 죄를 범하고 있는 그 형제가 자기의 죄를 하나님께 자복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느9:2).  결국, 우리는 그 형제를 사랑한답시고 그 형제의 허물을 덮어 주었지만 도리어 우리는 그 형제로 하여금 죄를 자복하지도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게 한 것 밖에 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 9절과 1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또한 저와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음: ‘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9절), ‘이제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만일 어떤 형제라 일컫는 자가 음행하거나 탐람하거나 우상 숭배를 하거나 후욕하거나 술 취하거나 토색하거든 사귀지도 말고 그런 자와는 함께 먹지도 말라 함이라’(11절)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성경은 우리에게 ‘음행하는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귀지 말라’는 헬라어 원어의 문자적 의미는 ‘섞이지 말라’(to mix up with)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의 이 단어의 의미는 좀 더 강한 것입니다.  즉, ‘친밀하게, 가깝게 어울리지 말라’(to keep intimate, close company with)는 뜻입니다”(MacArthur).  여러분은 이 사도 바울의 말이 어떻게 들리십니까?  좀 너무 심한 처사라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제가 고등학교 때인가 믿지 않는 친한 친구들하고 어울려 다닐 때 어느 어른 목사님의 설교를 들은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그 때 그 목사님은 자기가 목사가 되고 나서부터는 믿지 않는 친구들하고 더 이상 어울리지 않고, 만나지도 않는다고 설교를 하셨음.  그 설교를 듣고 저는 좀 고민해 빠졌습니다 – ‘하나님께서는 내가 믿는 않는 친구들하고 어울리지 말고 관계를 끊기를 원하시는 것인가?’.  저는 그 때 그 설교를 듣고나서 속으로 좀 거부반응이 일어났었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이런 생각들이 들었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나보러 내 친한 친구들하고 우정을 끊으라는 말인가?’, 등등.   그 때 이런 저런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특히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면서 설교 제목 그대로 “사귀지 마십시오’, ‘가까이 어울리지 마십시오’라고 계속 설교한다면 여러분은 혹시 목사님께서 나보러 불신자 친구들하고 더 이상 사귀지 말고 관게를 끊으라고 말씀하시는가 보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리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좀 분명하게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사귀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그 대상은 불신자들이 아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 10절을 보십시오: “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여기서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 …”은 예수님을 믿는 신자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바울은 교회 밖에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불신자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요점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불신자들 중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도무지 사귀지 말고 그들과 아예 관계를 다 끊고 지냈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에서 살아 갈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들하고 영적 교제는 할 수가 없음.  그러나 사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일하고 있는 직장, 회사 모든 사람들이 다 그리스도인들은 아니잖습니까?  우리는 그들과 사회생활을 함께하면서 오히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데 만일 그들과 사귀지 말라고 성경에서 바울이 그랬다고 잘못 해석해서 살아가면서 오늘 본문 10절 하반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면 우리는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오늘 본문 12절과 13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교회 밖에 외인들, 즉 불신자들은 하나님께서 판단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교회 밖에 불신자들은 우리의 전도 대상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사귀지 말라’는 말을 교회 밖에 불신자들에게 잘 못 적용해서 그들과 모든 관계를 끊어서는 아니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말하고 있는 요점은 우리가 교회 밖에 불신자들을 판단하고 그들과의 교제를 신자로서 끊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음행이나 탐심과 토색이나 우상 숭배의 죄, 후역하거나 술취하는 죄를(11절) 회개치 않고 지속적으로 범하고 있으므로 온 교회에 그 죄의 악한 영향을 끼치는 형제나 자매들을 판단하고(12절) 그들과 교제를 끊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13절 말씀에 비춰서 다시 말한다면,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교회 밖에 외인들(불신자들)과 관계를 끊으라는 말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지금 지속적으로 음행이나 탐심과 토색이나 등등 지속적으로 죄를 범하되 회개치 아니하고 오히려 온 교회에 죄악된 영향을 끼치는 교인들과 사귀지 말고 관계를 끊되 그러한 “악한 사람”을 아예 교회에서 내어 좇으라(13절)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볼 때 요즘 교회 안에 오늘 본문 11절에 말씀하고 있는 ‘음행하는 자들’, ‘탐심하는 자들’, ‘우상 숭배하는 자들’, ‘후욕하는 자들’, ‘술취하는 자들’, 그리고 ‘토색하는 자들’이 어느 정도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심하는 자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후욕하는 자들은 어떻습니까?  입으로 다른 교인들이나 심지어 세상에서 불신자들에게까지도 욕설하는 교인들을 여러분들은 보십니까?  여러분은 술취하는 교인들, 그리고 토색하는 교인들도 보십니까? 교회 안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사기를 치는 교인들도 보십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죄를 범하는 교인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지금 하나님과 교회 지체들에게 죄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지속적으로 동일한 죄를 계속 범하므로 온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악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을 볼 때에 참 심각하게 여기시지 않으십니까?  만일 우리 교회 안에서 계속하여 심각한 죄를 범하고 있는 교인으로 인하여 다른 교인들에게 죄악된 영향을 끼치고 있을 때 당회가 그 교인을 불러다가 면책하고 권면해도 듣지 아니하고 온 교회로 하여금 알게 하여 면책하고 권면해도 듣지 아니할 때 그 사람은 모든 영적 교제를 참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와 주일 성경공부 및 모든 행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해야할 뿐만 아니라 특히 그러한 사람을 교회 지도자로 세워서는 더욱더 아니될 것입니다(MacArthur).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그러한 자를 교회 지도자로 세웠을 때 온 교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칠지 상상이 되십니까?  오늘 본문 11절을 보면 바울은 아예 그러한 자들과 음식도 함께 먹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교회 안에서 지속적으로 심각한 죄를 범하되 온 교회에 나쁜 영향을 까치고 있으면서도 죄를 회개치 아니하는 그러한 자들과 영적 교제 뿐만 아니라 식탁 교제까지도 끊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후서 3장 14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우리가 그러한 지체들과 영적 교제와 식탁 교제까지 끊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그러한 형제들을 부끄럽게 해야 합니까?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바로 그로 하여금 고립된 상태(isolation)에서라도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케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치 아니하고 마음을 강퍅하게하여 계속해서 죄를 습관적으로 범하되 온 교회에 악한 영향을 끼치고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오늘 본문 13절 하반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듯이 우리는 “이 악한 사람은 너희(우리) 중에서 내어 좇”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교회의 순결성을 계속해서 지켜 나아가데 저와 여러분이 되야 합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미국 초대 대통령인 George Washington은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쁜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게 낫다'(It is better to be alone than in bad company)(인터넷).  왠지 이 말이 저는 요즘 교회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용이 되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즉, 교회 안에서 나쁜 사람과 어울리는 것보다 그저 조용히 혼자 신앙생활하는게 낫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요즘 교회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특히 이숍 우화의 말처럼 ‘친구를 보면 그를 알 수 있다’(You are known by the company you keep)라는 말처럼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그 교회를 알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음행이나 탐심이나 술취하거나 사기치거나 등등 한다면 어느 누가 그러한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 교회에 나오려고 하겠습니까.  아니 두 세 사람만 모였다 하면 기도하는게 아니라 의견 충돌 속에서 다투고 싸우는 교회라면 누가 그렇게 시끄러운 교회에 나아가고 싶겠습니까?  참으로 심각한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세상 사람들도 비웃는 이러한 죄들을 범하고 있는 교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에 아무 덕이 되지 못하고 또한 서로 지체들에게 영적 유익을 끼치기 보다 나쁜 영향을 끼치는 교인들이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합니까?  오늘 성경은 그러한 자들과 사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렵니까?  바라기는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예수님과 친밀하게 사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의 순결성과 교회의 순결성을 힘써 지켜 나아가길 기원합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승리교회가 되길 기원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