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

 

 

[고린도전서 5장 1-8절]

 

 

지난 주 한 인터넷 뉴스를 통하여 애플의 창업자인 고 스티브 잡스가 생전 암 수술을 거부했던 것은 후회했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인터넷).  우리가 이미 들어 알고 있었듯이 그 사람이 앓았던 암은 췌장암 중에서도 희귀 종얀인 신경내분비종양(neuroendoctrien tumor)이란 것으로 췌장에 생기는 암 가운데 발생할 비율이 1%도 안되는 암이였다고 합니다.  아마 그가 수술을 거부했던 이유는 대체 치료를 원했고 그 대체 치료는 아마도 식이요법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심령론자를 찾아가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자연주의적인 방식을 찾으려 했기에 수술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워낙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기에 스티브 잡스가 죽고나서는 한동안 그 사람이 걸렸다는 췌장암에 대해서도 뉴스 미디아는 관심을 보여 다루었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저도 요즘 “당신의 건강 가이드 헬스 조선”이란 웹싸이트에 가끔 들어가서 건강에 관한 흥미로운 기사가 있으면 열어서 읽어 보곤 합니다.  그 외에 다른 뉴스나 웹싸이트에서 건강에 관련된 흥미로운 기사가 있으면 읽어보곤 하는데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암 발생 과정”에 관하여 읽게 되었습니다(인터넷).  그 글을 읽어 보닌까 우리가 먼저 암을 이해하려면 정상 세포가 어떻게 암이 되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인체는 많은 종류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적으로 세포는 자라고, 분열하여 인체의 건강과 적절한 기능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소요에 따라 더 많은 세포를 생산한다. 그런데, 어느 때는 이 과정이 정도를 벗어나서, 새로운 세포가 필요하지 않은데도 세포가 분열을 계속한다. 이 남아도는 대량의 세포가 덩어리 혹은 종양을 형성하는 것이다. 종양은 양성일 수도 있고 악성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양성 종양은 암이 아닙니다.  그리고 양성 종양은 생명에 위협이 되는 경우가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악성 종양입니다.  그 이유는  악성 종양은 바로 암이기 때문입니다: “악성 종양내의 세포는 비정상적이며 통제나 질서 없이 분열한다.  이와 같은 암 세포는 주변의 조직을 침범하고 파괴한다.  암세포는 또 악성 종양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혈액이나 림프계통(감염이나 기타 질병과 싸우는 백혈구를 생산, 저장, 운반하는 조직과 기관)속으로 들어간다.  이 전이라고 불리는 과정이 암이 원래의 (일차적) 종양으로부터 확산되어 인체의 다른 부위에 새로운 (이차적) 종양을 형성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암이 전이가 되지 않았다면 그 암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암이 전이가 되었을 때입니다.  특히 암이 여기 저기 퍼졌을 때 참 우리 생명의 치명적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온 몸에 퍼지는 암 세포처럼 비슷한 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고린도 전서 5장 6절 하반절에서 8절까지 말하고 있는 “누룩”(leaven)입니다.  6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온 덩어리에 퍼지는 적은 누룩”이란 제목아래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누룩이란 무엇인가?’ 입니다.

“누룩”이란 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발효소로서(출12:15, 19; 13:7) 소제물(레2:11)에나 유월절(출12장)에는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인터넷).  예를 들어 유대인의 큰 명절 중 하나인 유월절에는 누룩이 있는 빵을 칠일 동안 먹을 수 없었으며(출12:15) 누룩을 집안에 보관할 수도 없었고(출12:19) 또한 이스라엘 나라에 전 지역에도 존재할 수가 없었습니다(출13:7; 신16:4)(Ryken).  한 마디로, 유월절에는 누룩은 철저하게 제거되었을 뿐만 아니라(레 23:6)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명절을 지키기 위해 집안에서 누룩이 있는 빵가루도 철저히 제거해야 했습니다(신 16:4) (인터넷).  왜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에 누룩을 철저하게 제거했습니까?  그 이유는 “누룩을 제거하는 일은 부정을 제거하고 악을 말살하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인터넷).  여기서 우리고 좀 구분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누룩”이란 성경에서 상징적으로 사용되었을 때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1) 긍정적인 면으로 사용된 좋은 예는 마태복음 13장 33절에서 예수님께서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해서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누룩이 퍼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의미는 누룩이 가루 속에서 부풀려 퍼지듯이 천국도 하나님의 복음의 전파와 더불어 확장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누룩”하면 성경에는 오히려 부정적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 좋은 예는 바로 마태복음 16장 6절로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오직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룩”이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악한 교훈과 위선을 말씀하신 것으로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그 악한 교훈과 위선을 주의하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 6절 하반절에서 8절까지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적은 누룩”(a little leaven), “묵은 누룩”(old leaven),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the leaven of malice and wickedness)이란 말을 하고 있는데 여기서 “누룩”이란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부정적인 의미는 바로 “부도덕(immorality)”입니다.  그리고 그 부도덕이란 고린도전서 5장을 볼 때 바로 “음행”(1, 9, 10, 11절), 탐하는 것(covetousness)이나 토색하는 것(예를 들어 사기를 쳐서 남의 것을 빼앗는 것)(swindlers), 우상 숭배하는 것(idolatry)을 말합니다(10절).  특히 오늘 본문 1절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음행(immorality)이란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자기 아버지의 아내인 새어머니(계모)(stepmother)와 함께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구약 성경에 비춰볼 때 “근친상간의” 죄로서 새어머니(계모)와 성관계를 맺는 것은 마치 자기 친 어머님랑 맺는 것과 같음 범주의 죄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근친상간은 구약 성경 뿐만 아니라 바울 당시 로마 법에서도 엄격하게 금지되 있었습니다(MacArthur).  놀라운 사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이웃인 불신자들도 범하지 않고 있었던 이러한 근친상간의 죄를 그들이 범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런 성도들을 고린도 교회가 용인하고 있었다(tolerate)는 사실입니다.  성도가 근친상간을 하는 것도 심각한 죄이지만 더 심각한 죄는 그러한 근친상간의 죄를 범하고 있는 성도들을 고린도 교회가 용인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근친상간을 하는 죄보다 더 심각한 죄입니까?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6절 하반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근친상간의 죄가 비록 처음에는 “적은 누룩”처럼 보일 수있을지라도 온 교회에 퍼져서 다른 성도들도 동일한 죄를 범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참으로 그 죄를 고린도 교회가 용인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죄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생각엔 지금 21세기 교회 안에 적은 누룩과 같은 부도덕함이 마치 암 세포처럼 교회 전체(기독교)에 퍼치고 있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비록 지금 보기엔 그 누룩이 적어보이지만 지금 현재 빠른 속도로 교회 안에 퍼져서 마치 암덩어리처럼 교회에 치명적인 것은 무엇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하십니까?  혹시 고린도 교회처럼 ‘음행하는 것’, ‘탐하는 것이나 토색하는 것’ 또는 우상 숭배하는 것은 아닌지요?  지난 주 한 기독교 인터넷 싸이트에 들어가 보닌까 “장로 줄게 500만 원 다오?”라는 제목 아래 글이 있어 좀 읽어 보았습니다.  그 내용은 그 제목 그대로 어느 집사님이 서울에서 고향 교회로 옮기게 되었는데 그 교회 장로님 한 분이 그 집사님에게 장로 투표까지 거쳐서 뽑혔으니 교회에 500만원 헌금하라는 내용의 글입니다.  그 때 그 집사님은 그 장로님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 좀 해 보세요.  장로 시켜 놓고 돈 내라니요.  이거 장로하고 돈하고 맞바꾸자는 거 아닙니까.  전 더 이상 그런 짓 안하기로 했습니다”(인터넷).  저는 이러한 글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 교회 안에 침투한 인본주의 사상과 물질만능주의 사상이 참 심각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사상들이 마치 적은 누룩처럼 처음에는 조금씩 조금씩 교회 안에 침투했다가 지금은 마치 암 덩어리처럼 교회의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죄악된 현실이 기정의 사실(a fixed fact)로 우리 교회 안에서 받아 들여지고 있다는 것임.  다들 그렇게 하닌까, 모든 교회가 이젠 그렇게 하닌까 라는 식으로 교회의 흐름과 패턴이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범위)을 벗어나 죄악된 교회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성된 그러한 죄악된 교회 문화를 물리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 2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꾸짓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무슨 말입니까?  지금 바울은 적은 누룩과 같이 부도덕한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회개하기를 거부하고 있는 음행하는 지체들을 왜 징계하지 않느냐고 남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면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징계는 무엇입니까?  바로 출교(excommunicate)입니다(MacArthur).   저희 교회가 소속되 있는 P.C.A. 장로교단 헌법 27장 “권징조례”를 보면 “권징은 교인들을 교육하고 지도하며 교회의 순수성과 안녕을 촉진하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주신 권위를 행사하는 것이다”(27-1).  그리고 27장 3조를 보면 이렇게 적혀 있음: “권징의 실시는 매우 중요하며 필요하다. 올바른 권징 실시는: (1) 하나님의 영광과, (2) 하나님의 교회의 순결성 유지와, (3) 불순종하는 죄인들을 보호하며 회개시킨다.  권징은 경건을 위한 것이다(딤전 4:7); 따라서 권징은 성경의 [권위 하에] 자기 반성을 요구한다.  재판 사건에 관련된 권징의 목적은 범죄를 책망하며, 추문을 제거하며, 그리스도의 영예를 변호하며, 교회의 순결성과 건덕을 증진하며, 범과자들의 영적 유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한 교회의 책벌들이 있습니까?  헌법 30장 1조를 보면 “교회의 치리회가 부과할 수 있는 책벌은 견책, 수찬 정지, 출교, 정직, 면직이 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견책이나 유기 정직의 책벌은 유죄 판결을 받은 후 회개하여 치리회를 만족시키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나타낸 자에게 시행된다.  그와 같은 책벌로 재판을 종결한다”(교단헌법).  그러나 “무기 정직이나 출교의 책벌은 유죄 판결을 받고도 뉘우치지 않는 자에게 시행된다”고 적혀 있습니다.  즉, 출교란 교회의 권징에 있어서 최고의 책벌입니다.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회개의 징조가 보이지 않는 즉,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있는 세례 교인에게 행해지는 최고의 책벌이 바로 출교입니다.  왜 그렇게 까지 책벌을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 6절 하반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적은 누룩”과 같은 죄가 온 교회에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의 순결성을 위해서 교회는 출교란 책벌을 내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 적은 누룩과 같은 부도덕함(음행)이 온 덩어리인 고린도 교회 안에 퍼지는 것을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막지 못했을까?’ 입니다.

       

그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바로 교만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 2절을 보십시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지금 바울은 음행하는 자들을 출교시키지 않고 용인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졌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바울의 관점에서 볼 때 고린 도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교만함이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의 기준을 못보게 하였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진리의 기준에 벗어나 범죄하고 있는 음행하는 형제들을 용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MacArthur).  그리고 바울이 볼 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 음행하는 형제들의 죄를 애통하며(lament) 몹시 슬퍼하고(grieve)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애통하지도 않고 있었습니다(did not mourn)(2절).  그 정도로 그들은 마음이 강팍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오늘 본문 2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177장 “성령이여 강림하사”라는 찬송 가사 1절과 후렴이 생각납니다.  동일한 문구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서”.  혹시 지금 우리가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해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해야 할 필요성을 느껴야 하는 것은 아닌지요?  혹시 지금 우리 기독교인들은 교회 안에 있는 “적은 누룩”과 같은 음행이나 탐하는 것이나 토색하는 것 또한 우상 숭배하는 것 같은 죄악들이 온 교회에 퍼지는 것을 보면서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그저 용인(묵인)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왠지 우리는 우리의 죄가 적은 누룩처럼 작게 보일 때는 방관하다가 그 작은 누룩과 같은 죄가 점점 퍼져서 우리 자신이나 가정이나 교회에 암덩어리처럼 치명적이 될 때에서야 애통하며 몹시 슬퍼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때서야 우리는 하나님께 울부짖으면서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윗이 쓴 시편 51편 말씀이 생각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인 후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그의 죄를 책망 하셨을 때 죄를 자복하고 회개를 하는 그의 모습을 엿 보면서 특히 시편 51편17절 말씀이 오늘 본문을 묵상하면서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이와 같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멸시치 아니하실터 우리는 지금 적은 누룩이 교회 안에 암덩어리처럼 많이 퍼져있는 죄악들을 직시하면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Grace Community 교회를 섬기고 계신 John MacArthur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Whenever sin is not repented of and cleansed, it increases and spreads its infection”(MacArthur) (죄가 회개되지 않고 씻겨지지 않을 때마다 그 죄는 증가하며 또한 그 죄의 전염병은 더 널리 퍼집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 공감되는 말이 아닌지요? 마치 우리 안에 암 세포를 제거하지 않고 그 암 세포로 하여금 모든 영양을 섭취하게 내어 버려둘 때 그 암 세포는 점점 더 커셔서 온 몸에 퍼지게 되는 것처럼 지금 우리 안에 암 세포와 같은 죄, 우리가 회개하지 않을 때마다 더욱더 우리는 그 동일한 죄를 범함에 있어서 그 숫자가 증가하며 결국에는 그 죄로 인하여 감염되어 우리 주위에 있는 지체들에게도 전염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지금 우리가 이러한 현실을 보고 있으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마지막 셋째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 교회는 이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부도덕한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를 판단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 3절을 보십시오: “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 바울은 비록 몸으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지는 못하지만 영으로 함께 있어서 마치 고린도 교회에 있는 것 같이 부도덕한 죄를 범하고 있는 그 형제들을 이미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바울과 함께 그들이 범하고 있는 부도덕한 죄를 심각히 여겨 적절한 조치를 내리되 징계의 필요성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MacArthur).  21세기에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의 부름에 겸손히 응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교회 안에 부도덕한 죄를 범하는 지체들을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판단하여 적절한 조치를 내려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그 지체들의 부도덕한 죄가 온 교회에 퍼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겸손히 통한히 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 2절을 보십시오: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우리는 교회 안에 침투한 적은 누룩과 같은 죄들이 온 교회에 퍼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그냥 멍하니 보고만 있으면 아니됨.  아니 어느 누가 자기 가정에 적은 누룩과 같은 부도덕함을 보면서 그냥 멍하니 가만히 있습니까?  우리는 겸손히 애통하며 슬퍼해야 합니다.  겸손히 애통하고 슬퍼하되 우리는 그 부도덕한 죄로 인하여서도 애통하며 슬퍼해야 하지만 또한 우리는 그 죄가 온 교회에 퍼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애통하며 슬퍼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가 아무 적절한 행동을 취하고 있지 않는 우리 자신(교회)을 보면서도 우리는 통탄하고 슬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을 역활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이 세상에서 더럽히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상하고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교만함 가운데서(2절) 자기 자신을 자랑해서는 아니됩니다(6절).

 

셋째로, 우리는 우리 가운데 회개하지 않는 부도덕한 죄를 범하는 형제와 영적 교제를 끊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7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2절 하반절에서 “이 일(즉, 근친상간이라는 음행을 행하는 자)을 행하는 자를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않고 있는 것을 꾸짖으면서 4-5절에 가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자기의 영과 함께 모여서 주 예수의 능력으로 부도덕한 죄를 범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형제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회개하지 않는 형제들을 교회에서 출교 시키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과 더 이상 영적 교제를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는 적은 누룩이 온 교회에 퍼지는 것을 막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순결성(purity)을 지키기 위해서 부도덕한 죄를 범하면서도 회개치 아니하는 적은 누룩과 같은 형제들을 교회에서 출교시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이 바울의 권면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받고 순종해야 할 이유는 그들은 이미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희생하시므로 누룩 없는 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7절).  그 말은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바울이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나 저와 여러분들은 더 이상 죄의 지배(권)(the dominion of sin)과 심판의 처벌(the penalty of judgment) 아래 있지만 완전히 분리되었다는 말입니다(MacArthur).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건짐을 받아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면서 광야에서 자꾸만 애굽을 그리워하고 돌아가길 원했듯이 이미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구원의 은총을 받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과거에 죄의 지배 아래 살아던 옛 죄악된 습관으로 돌아가 죄와 분리된 삶을 살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철저히 깨끗하게 제거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물론 부도덕한 죄를 범하고 있는 개인 개인들에게 적용될 수도 있겠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그들을 용인하고 있었던 나머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묵은 누룩”과 같은 부도적한 죄를 범하면서도 회개치 아니하는 그 형제들을 교회 안에서 철저히 제거하여 더 이상 그들과 영적 교제를 나누지 말라는 말입니다.

 

            넷째로, 우리는 순전함과 진실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 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사건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최대의 명절인 유월절을 지킴에 있어서 유월절 전 날에 모든 유대인 어머니는 집안을 샅샅히 청소하되 특히 부엌은 구석구석까지 청소하면서 혹 누룩이 들어 있는 음식이 남아 있는 일이 없도록 깨끗히 청소한다고 합니다.  그 때에 유대 어린이들은 촛불을 켜 들고 다니며 침대 밑이나 옷장 뒤 등을 살핀다고 합니다.  혹시라도 누룩이 든 음식물 찌꺼기가 있으면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누룩을 제거하는 이유는 부정을 제거하고 악을 말살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인터넷).  이렇게 유대인들이 유월절 명절을 지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오늘 본문 8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유월절 명절을 지킴에 있어서 왜 묵은 누룩이던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으로 명절을 지키지 말자고 권면하고 있는지 좀 이해가 됩니다.  오히려 바울은 우리가 유월절 명절을 지킴에 있어서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적은 누룩과 같은 죄악을 조금도 섞지 않은 순수함과 하나님의 뜻의 진상에 부합하는 도덕 생활로 유월절 명절을 지키자는 말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정결한 마음과 순결한 신앙 생활로 유월절 명절을 지키자는 권면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은 정결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인 저와 여러분들의 삶은 순결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순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가 더럽혀지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과 같은 죄악들이 지금 온 교회에 퍼지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는 교회의 순수성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암”하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저는 “암”하면 저의 넷째 삼촌인 고 김창혁 목사님이 대장암으로 고생하고 계실 때 사서 읽은 “희대의 소망”이란 책이 생각납니다.  그 책의 저자인 영동세브란스 병원 외과 의사 이희대 교수는 대장암 2기를 판장받은 후 수술치료를 받았지만 간과 뼈로 전이되어 4기 상태로 10번의 재발 고비를 넘기는 등 힘든 투병과정을 통하여 몸소 체험한  결과를 중심으로 실제적이면서도 영적인 암투병 극복방법을 그 책에서 나누고 있는데 참 도전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책을 보면 1장은 “나는 살 수 있다”부터 마지막 장인 “암은 차라리 축복이다”까지 각 장마다 암으로 인한 공포와 절망 때문에 죽음으로 더 가까이 가는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러한 처지에서도 “암(재발)을 예방하는 여덞 가지 방법’, ‘통증을 이기는 세 가지 소망의 법칙” 등을 나누면서 암과 싸워 이길 수 있는 열쇠를 제공합니다(인터넷).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의학적인 관점에서 암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더 알게 되면서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영적인 관점으로 암을 어떻게 바라보고 극복해 나아가야 하는지 그 마음가짐과 자세 등에 대해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저는 이번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러한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마치 우리 몸 안에 존재하고 있는 암 세포가 온 몸에 퍼지듯이 지금 우리 교회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악들이 온 교회에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   혹시 지금 우리는 교회 안에 퍼지고 있는 그 죄악들이 아직은 우리 생각엔 교회에 치명적이다 여겨지지 않기에 아무 적절한 행동을 취하지 않고 그냥 그 죄악들을 용인(묵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만일 지금 우리 교회 안에 암 세포가 온 몸에 퍼지듯이 죄악들이 퍼지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는 그 죄를 범하는 형제, 자매들을 용인하고 있다면 오늘 이 시간 우리는 유월절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기념하는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애통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삶 속에 모든 악독한 적은 누룩들을 다 제거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순결성을 지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