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신앙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누가복음 7장 9절).

 

 

            저와 여러분의 믿음은 진짜입니까 아니면 가짜입니까?  우리의 믿음은 순수한 믿음입니까 아니면 섞인 믿음입니까?  과연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퇴보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누가복음 7장 9절을 보면 예수님을 놀라게 한 “어떤 백부장”(2절)을 우리는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으로 인하여 놀라신 이유는 바로 그의 믿음(9절) 때문이었습니다.  어떠한 믿음을 그 백부장이 가지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 그를 놀랍게 여기시사 따르는 무리들에게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고 말씀하셨을까요?  한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신앙은 주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7장 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for this reason I did not even consider myself worthy to come to You, but just say the word, and my servant will be healed).  왠지 요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은 주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 같아 보이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요즘 우리들의 믿음은 주님의 말씀 더하기(plus) 알파인 증거(evidence)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여기서 “증거”란 우리 육의 눈으로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우리의 섞인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 더하기 표적 또은 이적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믿음으로 병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음으로 기도하기보다 말씀 더하기 치유의 징후(sign)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말씀만 하셔도 자기 종(하인)이 나을 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마8:8).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7절)는 말씀만을 믿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입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 주님 감사합니다.  저희 집에 오셔서 제 종의 몸에 안수 기도를 해주시면 저는 제 종이 나을 줄 믿습니다”라고 반응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 로마 백부장은 그리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지를 말씀으로만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8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눅7:8).  이렇게 말한 그 백부장의 믿음은 “예수님이 명령하신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성취된다고 믿는 큰 믿음”입니다(박윤선).  과연 저와 여러분은 이 백부장처럼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이 있습니까?

 

            저는 이 백부장의 주님의 말씀만을 믿는 믿음을 생각할 때 제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제임스야, 너는 주님께서 너에게 주신 두 개의 약속의 말씀인 요한복음 6장 1-15절과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만 믿고서 죽을 때까지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느냐?’, ‘제임스야, 너는 오병이어의 약속의 말씀만을 믿으면서 특별한 어떠한 증거가 너의 육의 눈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그리고 신실하게 끝까지 나눌 것이냐?’, ‘제임스야, 너는 주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인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란 약속의 말씀만을 붙잡고 눈에 보이는 교회의 성장 같은 것이 없을지라도 믿음으로 주님의 몸된 승리장로교회에 죽도록 충성하겠느냐?’.  이러한 질문들을 제 자신에게 던졌을 때에 저의 간절한 바램은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이 두 약속의 말씀만을 믿음으로 붙잡고 그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믿음 더해 주시길 기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평생에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그 말씀에 견고히 서서 그 말씀을 믿는 믿음대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나타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신앙은 겸손한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7장 6절 하반절과 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 (for I am not worthy for You to come under my roof; for this reason I did not even consider myself worthy to come to You).  예수님께 “말씀만” 하시길 구했던 그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오심을 자기는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백부장은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실 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예수님께 말하였습니다.  즉, 그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임을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6절 하반절).  그래서 그는 주님께 직접 나아가서 자기의 병든 종을(2절) 구해 주시길 청하지(3절) 못한 것입니다.  즉, 그 백부장은 자기 자신을 주님께 나아가기에 합당치 않은 사람으로 여겼던 것입니다(7절 상반절).  어떻게 주님의 말씀만을 믿는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믿음을 가진 자가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가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이요 또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기에 합당치 못한 사람으로 여겼는지 놀랍지 않습니까? 

 

            이렇게 이 백부장처럼 큰 믿음의 소유자는 지극히 겸손한 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떻게 주님의 말씀만을 믿는 큰 믿음의 소유자가 교만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왠지 요즘은 큰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처럼 보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그리 교만하고 거만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상석에 앉고 교회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을 스스로 합당한 자로 여길 수 있습니까?  진정 우리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이 스스로 합당하며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겸손하신 예수님의 섬김을 말하면서 예수님처럼 겸손히 섬기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처럼 섬기기 보다 섬김을 받는 것을 더 좋아한 나머지 이젠 몸에 베어 익숙해져 있는 것입니까?  찬송가 347장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어느 누가 괴로운 일을 많이 접하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는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편안한 일을 접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겸손히 섬기는 척하면서 교만한 마음으로 섬김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말씀의 힘으로 우리는 더욱더 겸손해 져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스스로 합당치 않는 자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자로 합당케 여기셨다는 그 사실에 그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욱더 겸손히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신앙은 이웃을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7장 2절과 5절을 보십시오: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예수님께 “말씀만” 하시길 구하며 자기 자신을 예수님께 나아가기에 합당치 않은 자로 여겼던 그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하는 자였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첫째로 그는 병든 자기 종을 사랑하였습니다(2절).  그래서 저자 누가는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라고 말하였습니다(2절).  그 당시 로마 백부장이였던 사람이 자기 밑에 백명이 로마 군인들만 있었을 뿐 아니라 여러 종들이 있었을 터인데 그 종들 중 한명이 병들었다 하여(왠지 그 병든 종이 유대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듬) 그 백부장은 그리 신경을 써서 그 병든 종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었을 터인데 그는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자기 종을 구해 주시길 청하였습니다(3절).  이 얼마나 한 영혼을 사랑하는 귀한 사랑입니까?  역시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겸손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그 로마 백부장의 눈은 높은 곳에 있지 아니하고 낮은 곳, 즉 병든 자기의 종에게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낮은데로 임하시는 겸손한 주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 백부장은 더 나아가서 유대 민족을 사랑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5절).  그래서 그는 그 유대 민족을 위하여 회당을 지어 주기까지 했습니다(5절).  그래서 어쩌면 그 유대인 장로들이 스스로 자원하여 그 백부장을 돕고자 예수님께 나아가 그 백부장이 사랑하는 병든 종을 구해 주시길 간청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MacArthur).  흥미로운 점은 그 장로들이 예수님께 나아가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간청하면서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He is worthy for You to grant this to him)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백부장 스스로 예수님께 나아가기를 합당한 자로 여기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신 예수님께 나아간 그 유대인의 장로들의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그 백부장의 간청을 들어주시사 그의 병든 종을 구해주시는 것이 그들이 보기에 그 백부장에게는 합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유대인의 장로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그 로마 백부장은 간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합당하게 여겼던 것입니다.  왜 그 유대인의 장로들은 그리 여겼을까요?  그들이 그 로마 백부장의 사랑을 받으면서 그를 존경해서 그랬지 않았을까요?  아니 로마에 지배를 받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 로마 백부장이 자기의 종(특히 유대인이었을 경우에)을 사랑하는 모습과 유대 민족을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을 때 그 유대인의 장로들이 그 사랑을 느끼면서 그 백부장을 합당한 자로 여기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지요?  특히 그렇게 겸손한 인품을 지니고 있는 그 로마 백부장의 겸손히 자기 종을 사랑하며 섬기는 모습을 볼 때 어느 누가 존경하며 예수님의 사랑의 기도 응답을 받는 합당한 자로 여기지 않겠습니까? 

 

            지금 우리의 믿음은 입술로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만 행함과 진실함이 결핍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요일3:18).  주님의 말씀만을 믿는 신앙이 아니기에 겸손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하기에 우리는 이웃을 겸손히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귀하에 여기시는 한 소자를 귀히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타민족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타 민족을 사랑하며 선교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선교 대상자들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겸손하고 따뜻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결핍된 이웃 사랑, 진리가 타협된 이웃 사랑은 아무리 뜨거울 지라도 무의미 할 수 밖에 없는데 우리는 지금 그러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웃 사랑은 너무나 거만하지 않나 염려됩니다.  우리 한국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러 처음에 들어 오셨던 여러 외국 선교사님들은 자기들의 생명보다 우리 한국인들의 영혼을 더 귀히 여기므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하셨는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주님 사랑과 영혼 사랑이 결핍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어제 월요일 하나님께서 이 미국 땅에 제1 위대한 각성(1st Great Awakening)을 일으키셨을 때 사용하신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목사님의 책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에드워즈 목사님은 책을 읽고 있는 저에게 ‘예수님을 아는 것’(Knowing Christ)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계속해서 강조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빌립보서 3장 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신앙인이라면 과연 나는(우리는)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어제 저녁에 누가복음 7장을 읽기 시작하다가 9절에 제 시선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묵상하다가 든 생각은 ‘이 로마 백부장의 믿음이 어떠한 믿음이였길래 예수님께서 놀라셨을까?’, ‘과연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신앙은 무엇인가?’라는 것이였습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나도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생각 가운데 누가복음 7장 2-10절 말씀을 묵상하고 전파한 후 다시 이렇게 묵상하면서 적어 내려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놀라게 하는 신앙, 주님의 말씀만을 믿는 신앙, 겸손한 신앙,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신앙, 이러한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므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놀라케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믿음 적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