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적 아버지

(A Spiritual Father)

 

 

[고린도전서 4장 14-21절 ]

 

 

여러분은 국민학교 때 부터 학교 다니시면서 기억에 나는 선생님 또는 스승님이 있으십니까?  있으시면 혹시 그 엣 스승님을 생각할 때 기억나는 것은 무엇입니까?  혹시 여러분은 그 스승님의 삶의 가르침이 생각나십니까? 또는 혹시 여러분은 그 스승님께 받은 책망이 생각나십니까?  선생님의 사랑과 격려를 통해 자신 안에 잠재된 가능성을 모든 발현해낼 수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모아 낸 책인 “내안의 빛나는 1%를 믿어준 사람”이란 책을 보면 자신을 믿어준 선생님, 자신에게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보인 선생님, 칭찬을 많이 해준 선생님,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선생님, 열정적으로 지도해 주신 선생님 등으로 우리가 존경하는 교사상이 각자의 경험을 통해 제시되어 있습니다.  한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개인에게 있어서 격려와 관심,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스승님의 격려와 관심, 믿음을 받고 자라나셨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제 생각엔 스승님은 부모님 보다 더 나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너희를 낳은 아버지이다’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므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였기에(3:5) 바울은 그들에게 있어서 복음으로 낳은 영적 아버지이다라는 말입니다(4:15).  여러분, 아버지하고 스승하고 같습니까?  바울 당시 스승은 주로 노예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노예 스승은 주인 집의 어린 아이에게 기본적인 훈련(basic training)과 도덕적인 교육(moral upbringing)을 가르칠 의무가 있었다고 합니다(MacArthur).  그러나 아버지는 스승과 달리 노예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창조하시는데 쓰임받는 도구로서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자식을 사랑함에 있어서 스승의 사랑과 비교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의 복음으로 그들을 낳았기에 자기가 그들의 영적 아버지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영적 아버지”라는 제목 아래 과연 영적 아버지는 누구인지 한 두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영적 아버지는 사랑하는 영적 자녀들을 책망(admonish)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I do not write these things to shame you, but to admonish you as my beloved children).  여러분, 부모가 자녀를 권한다고 할 때 ‘권하다’란 무슨 말입니까?  네이버 사전을 보닌까 “권하다”란 말은 “어떤 일을 하도록 부추기다”라고 적혀 있습니다(인터넷).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권하다’라는 원어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좀 다릅니다.  그 헬라어 단어는 “noutheteō”인데 그 문자적 의미는 경고와 책망의 목적을 가지고 (상대방의) 마음에 넣다(to put in mind)입니다.  이것은 상대방이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잘못된 점을 고쳐서 바르게 하는 것을 의도하고 있습니다(MacArthur).  한 마디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인 아버지로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변화할 것은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 경고를 무시하고 변화하지 않으면 심판(벌)을 초래할 것이다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MacArthur). 

 

            여러분은 여러분의 스승이 이렇게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한 것처럼 여러분에게 권하신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무엇인가를 잘못하고 있을 때 여러분의 스승이 여러분을 경고하고 책망한 적이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버지가 여러분을 책망하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책벌이 있을 것이다라고 경고하신적이 있습니까?  개인적으로 저는 제 자녀들에게는 책망하고 책벌을 경고한 후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징계를 한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우리 교회 자녀들에게는 그렇게 한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전에 전도사로 봉사할 때 제가 어염풋이 기억나는 것은 교회 한 유년주일 학교 어린아이의 어머님이 저에게 와서 자기 아이가 잘 못하면 때려주세요 라는 식으로 말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저희 교회 자녀들에게 매를 들지 못햇습니다.  그런데 딱 한번 제가 중등부 학생들을 몽뎅이로 징계한 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 때 두 학생은 여자래서 제가 징계하지 못하고 나머지 대 여섯 명 남자 아이들은 엎드려 뻐쳐 해서 엉덩이의 몽뎅이로 한대씩인가 때렸습니다.  그 학생들이 지금 약 서른 살이 되서 결혼하여 자녀들도 낳은 사람도 있습니다.  기록한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서 도가 지나치게 각각 지도자를 존경하되 당파를 지어서 자랑하므로 교회 안에 분쟁을 가지고 왔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영적 아버지로서 그들을 사랑하기에 마치 어린 자녀들에게 경고하고 책망하듯 권하였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마치 어린 자녀들을 대하듯이 한 이유는 그들이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처럼 육신에 속하여 있었기 때문입니다(3:1).  그러한 영적 어린 아이들인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영적 아버지로써 그들의 교만한 마음 속에서(4:6) “왕 노릇” 하면서(8절) 영적 지도자들을 차별화 한 것(7절)을 사랑하므로 이렇게 편지를 통하여 그들을 경고하고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경고하고 책망하되 바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고 편지를 쓴다고 오늘 본문 14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자녀 양육에 대해서 귀한 교훈을 받습니다.  영적 자녀들이던 육신의 자녀들이던 제가 아버지로서 그들이 잘못하고 있을 때 그들을 경고하고 책망함에 있어서 그들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 아버지로서 그의 영적 자녀들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권하면서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기보다 바울이 그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길 원했습니다.

 

            잠언 27장 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Better is open rebuke than hidden love).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이 잘못하고 있을 때 여러분의 영적 아버지가 면책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면 그 잘못하고 있는 것을 덮어주면서 ‘괜찮다’고 말하는 친구의 사랑이 좋습니까?  지혜자 솔로몬 왕은 잠언 27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통책은 충성에서 말미암은 것이나 원수의 자주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Wounds from a friend can be trusted, but an enemy multiplies kisses).  주님 안에서 진정한 친구라면 우리가 잘못을 행하고 있을 때 책선해 주는 친구입니다.  그러나 거짓된 친구는 아부나 하면서 우리를 친철히 대해주는 친구입니다.  진정한 친구도 이렇다면 우리의 아버지는 우리를 사랑하므로 우리가 죄를 짖고 있을 때 책망하는 것이 마땅한 것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영적 아버지에게 책망을 받을 때 하나님의 그 깊은 사랑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둘째로, 영적 아버지는 사랑하는 영적 자녀들에게 본을 보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Therefore I exhort you, be imitators of me.).  우리는 이미 고린도전서 4장 6-16절 중심으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두 가지 면으로 본을 보였다는 사실을 묵상했었습니다.  그 두가지 본이란 바울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았다는 것(말씀의 범위에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6절)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천해 졌다는 것입니다(10절).  이러한 바울의 본을 제일 가까이서 잘 본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 바로 그의 영적인 아들 디모데일 것임.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바울은 그의 신실한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어떻게 본을 보였는지를 우리가 좀 엿 볼 수가 있습니다: “이를 인하여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니 저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은 16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 권면을 한 후 17절에 와서 그들로 하여금 자기를 본받게 하기 위하여 자기가 사랑하는 신실한 영적 아들인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낸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디모데를 고린도 교회에 보내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바울의 삶을 다시금 상기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참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바울의 삶은 그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일치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의 행위와 교훈이 서로 일치하여 일체하였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7절 하반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상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참된 모범이 아닙니까?  교회 성도들 앞에서만 가르치는 것과 행사가 일체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 아들 앞에서도 언행 일치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 참된 본이 되는 삶이 아닙니까?  저는 지난 주 수요일 새벽기도회 때 설교를 하면서 제 자신의 죄를 솔직히 고백하였습니다.  그 죄란 제가 가르치는 것과 제 행동이 불일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저는 심지어 설교하면서 까지도 내주 하시는 성령님께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 양심을 찌르사 저의 죄를 들춰내시고 계심을 경험합니다.  그리할 때 저는 ‘나는 지금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못살아가고 있는데 …”라는 생각 속에서 양심이 가책을 느낍니다.  그리고 육신의 가족 식구들과 영의 가족 식구들이 승리장로교회 여러분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듭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본을 보이는 삶이 아닙니다(16절).  이것은 위선적인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영적 아버지로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16절)고 권면하면서 자기 자신이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과 달리 고린도 교회 안에 스스로 교만한 자들이 있었습니다(18절).  다시 말하면, 바울은 영적 아버지로서 가르치는 것과 행사가 일치되는(17절) 겸손히(10절)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었던(6절) 반면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스스로 교만하여(18절) 말만하고(19절) 행함이 없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바울이 디모데는 자기들에게 보내면서도 바울 자신은 자기들에게 오지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면서 교만히 말하고 다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바울이 그들에게 와서 자기들의 말과 행동의 불일치하는 삶을 정면으로 부딪치지(confront) 않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MacArthur).  그러나 바울은 주님께서 뜻하시면(“허락하시면”) 그들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talking)과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power)을 알아보길 원했습니다(19절).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For the kingdom of God is not a matter of talk but of power).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하면 저 천국을 생각하면서 어떠한 장소 개념으로 생각할 때가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영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His rule)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17장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말이요 또한 하나님의 나라에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에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in the Holy Spirit)이 있다고 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다(고전4:20)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교만한 가운데서 말만해서는 아니되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의로운 삶(바른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온전한 평강과 희락(기쁨)을 누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의로운 삶을 살기보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음란한 삶으로 돌아가 죄악된 삶을 살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기보다 교회가 분쟁 속에서 평강을 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죄악된 삶 속에서 어떻게 희락(기쁨)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Grace Community Church의 John MacArthur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국어로 제가 번역해 보았음: ‘바른 삶의 결과를 내지 못하는 믿음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함을 지지하기 위해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은 아무 능력이 없습니다.  한 사람의 진정한 영적 성품은 그의 말들의 인상적임(혹은 장엄함)으로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의 능력으로 결정 짓는 것입니다 [“Faith that does not result in right living may have many words to support it, but it will have no power. A person’s true spiritual character is not determined by the impressiveness of his words but by the power of his life”( MacArthur)].  여러분은 MacArthur 목사님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능력은 무엇입니까?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는 삶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이끌림을 받는 삶이 아닙니까?  그저 입술로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까?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영적 아버지인 사도 바울은 그의 영적 자녀들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2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또한 저와 여러분들에게 선택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선택이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나 우리들이나 영적 아버지인 사도 바울의 책망을 듣고 우리가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아가는 죄악된 삶을 회개하던지 아니면 계속해서 마음을 강퍅하게 하고 스스로 교만히 말하고 행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매”를 맞던지 둘 중에 하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라기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가 겸손히 회개하고 돌이켜 본을 보이는 삶을 살되 하나님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 삶을 살아가므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목격할 수 있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영적 아버지로 세움 받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