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을 보여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6-16절]

 

 

한 2 주전 화요일 저희 교회에 소속되 있는 PCA 서남노회 정기 모임이 있어 참석했었습니다.  노회를 참석하면 참석할 수록 제가 경험하는 것은 노회 목사님들이 제가 “김창세 목사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저하고 대화할 때 김창세 목사님의 아들인 줄 몰랐다고 하면서 그 분들이 제 아버님 목사님을 존경한다고 말씀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제 입장에서 이러한 말들을 듣게 되면 한 면으로는 아버님이 노회에서 많은 분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아들로서 기쁘고 감사하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저에게 참 부담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부담이 되는 이유는 제가 노회에서 제 아버님처럼 본을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그래도 우리 승리장로교회 원로 목사님의 본을 보고 성장한 여러분들에게 후임자 목사로서 본을 보여야 하는 부담감도 있는데 이제는 노회에서도 이러한 부담감을 더 갖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부담감은 좋은 부담감이요 귀한 부담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이나 후손들 또한 여러분들을 좋아하고 따르는 주위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감이 가지고 있을 때 어떻게 행동을 하십니까?  “거인들의 발자국”이란 책을 쓴 한홍 목사님은 “본을 보이는 삶”에 대해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으로 더 많이 가르친다”(인터넷).  결국 우리가 우리 자녀들이나 후손들, 주위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는 삶을 산다는 것은 입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저와 여러분의 삶의 앞 모습 보다 뒷 모습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발자국 또는 발자취(footprint)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저와 여러분이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 또는 주위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서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 주위 사람들이 그 발자취를 바라보고 좇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6-16절의 첫절인 6절과 마지막 절인 16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을 위하여 자기나 아볼로가 본을 보였으니(6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I urge you to imitate me)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본을 보여야 합니다”란 제목 아래 과연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어떠한 본을 보였는지 한 두 가지로 묵상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적용하여 순종하므로 우리도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여러분, 저를 본받는 자가 되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게 하려 함이라”.  지금 바울은 당파를 지어서 자신이나 아볼로를 자랑하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저와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압니다’(3:7). 우리는 그저 여러분들을 섬기는 주님의 사역자들입니다(5절).  저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6절).  여러분들을 자라게 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십니다(6-7절).  우리는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10절) 하나님의 집인(9절) 여러분을 세우는데 조심하였습니다(10절).  … 그러므로 여러분은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들이요 또한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맡은 주님의 청지기들로 여겨야 합니다’(4:1).  이런 식으로 말하면서 바울은 자기나 아볼로가 그리스도의 일꾼과 청지기로서 서로 협력하여(3:5-9) 겸손히 주님께 충성된(4:2) 본을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6절).  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기록한 말씀 밖에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자기나 아볼로의 본을 통하여 배워서 교만한 마음을 먹어 서로 대적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6절).  다시 말하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구약 성경 말씀을 어기고 교만한 마음으로 자기나 아볼로 등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자랑하면서 교회 안에서 당파를 지어 분쟁하는 것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의 범위 안에서 자기나 아볼로나, 교회 지도자들을 존경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교회 지도자를 존경함에 있어서 교인들이 너무나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않으십니까?  가끔 인터넷 기독 뉴스에서 교회들의 분쟁 소식들을 접하게 될 때 어떤 기사들을 보면 교회당 앞에서 담임 목사님을 반대하는 파 교인들이 시위를 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볼 때도 있습니다.  그 사진들을 보면 담임 목사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담임 목사님으로 하여금 교회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시위를 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담임 목사님을 추종하는 사람들) 마치 경호원처럼 담임 목사님을 둘러싸서 자기 목사님으로 하여금 교회 당에 무사히 들어가게 하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에 어떻게 이정도로 교회가 분쟁하고 있는지 참 세상에서 시위하는 것과 별 다를바 없지 않나 생각될 때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제가 보기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도가 지나치게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담임 목사님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도가 지나치게 언행을 일삼는 것 같고 또한 담임 목사님을 추종하는 사람들도 도가 지나치게 행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다들 도가 지나치게 행동을 할까 생각해 볼 때 그 원인은 다들 성경의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범위를 벗어나서 자기 마음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지금 분쟁하고 있는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몸된 교회의 하나됨을 깨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러한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계속해서 써내려가면서 오늘 본문에 와서는 그들에게 자기나 자기의 동역자들을 향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존경심이 도가 지나친 것을 꾸짓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나 교회 지도자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좇는 것이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서 지나치게 교회 지도자들을 자랑하되 교회 안에 분쟁을 가지고 올 정도 그리하였기에 바울은 그들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왜 말씀의 범위를 벗어날 정도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교회 지도자들을 자랑하였을까요?  생각해 볼 때 좀 더 구체적인 원인은 바로 교만함 속에서 바울이나 그의 동역자들을 차별화 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7절에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란 말은 “누가 너를 남보다 우수하다고 차별하더냐”란 뜻입니다(박윤선).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나 자기의 동역자들이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동일하게 주님의 사랑으로 대했는데 ‘왜 너희들은 우리를 차별화하여 어느 누구는 아볼로보다 나 바울을 자랑하고 또 어느 누구는 나보다 아볼로를 자랑하면서 교회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고 있느냐’고 면책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나 아볼로는 주님의 사역자들로서 그들을 섬기라고 주님께서 그들에게 준바 된 자들로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일꾼들이요 주님의 청지기들로 받아들여었야 했는데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를 그렇게 겸손히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이나 아볼로를 부르사 도구로 사용하시는 주님을 자랑하기보다 쓰임 받았던 바울이나 아볼로를 교회가 분쟁할 정도로 자랑하였던 것입니다.  그러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오늘 본문 8절에서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도다”(you have already become rich, you have become kings without us)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미 배부르며 부요하여 스스로 교만해 져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 자기나 자기의 동역자들을 자랑하되 교회의 분쟁까지 일으킬 정도로 그리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의 교만함을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주 주중에 축구를 하러 갔다가 그 축구 모임을 책임 맡은 나이 드신 미국 분이 off-side(오프사이드)라는 규칙를 오늘 적용하겠다고 해서 그리 알고 시합을 헸습니다.  그런데 시합을 하는 도중에 언쟁이 얼마나 많았는지 축구의 흐름이 계속 끊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축구 도중 네 사람 정도가 너무나 화가 나서 그냥 축구 경기장에서 걸어 나와 경기장을 떠난 사람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왜 이렇게 축구 시합이 이지경까지 됐는가 생각해 볼 때 그 오프사이드라는 규칙에 대한 사람들의 견해 차이가 너무나 달라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공격에서 골 넣은 사람은 오프사이드가 아니라고 말하고 수비하는 팀에서는 오프사이드라고 말하니 어떻게 언쟁이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저는 교회 안에 언쟁이나 분쟁의 원인도 이러한 면이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즉,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견해 차이가 많으면 많을 수록 언쟁과 분쟁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더 큰 원인은 이러한 견해 차이보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무시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에서 벗어난 말과 행동을 할 때 교회 안에는 언쟁과 다툼과 심지어 분쟁이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에서 벗어난 말과 행동이 더 익숙합니다.  마치 동네 축구 할 때 오프사이트 없이 축구하면 그래도 언쟁이 들하고 축구 시합의 흐름이 더 원만히듯이 성숙하지 못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뒷전으로 제쳐두고 그냥 우리 마음대로 또한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는게 오히려 더 익숙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교만해서 그런 것임.  우리가 교만하면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의 범위에서 벗어난 말과 행동을 우리 마음대로 하게 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가정이나 교회 안에서 언쟁과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밖에 넘어가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서 말과 행동 하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 안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왠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 안에 있다고 하면 꼭 감옥에 갇혀서 자유하지 못한 사람 같이 생각할 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 안에 있다면 우리야 말로 참된 자유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으면서 그 하나님의 말씀에 지배를 받고 우리의 전인격이 그 말씀에 다스림을 받을 때에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의 하나됨을 잘 지켜 나아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교만해져서 영적 우월감을 가지고 사람들을 차별화하여 어느 누구보다 어느 누구를 자랑하면서 교회에 분쟁을 가지고 오는 죄를 범해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바울과 아볼로처럼 서로 협력하여 주님의 사역을 충성되게 감당하므로 말미암아 교회의 통일성을 신실하게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교회의 하나됨의 빛을 환하게 비쳐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가정에 있던 직장에 있던 교회에 있던 어디를 가던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안에 거하면서 그 말씀에 지배를 받아 겸손히 그 말씀을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의 참된 본을 모든 이들에게 보여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천해 졌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에서 벗어나 교만한 마음을 먹고(6절) 바울이나 그의 동역자들을 차별화하여 도가 지나치게 자기가 존경하는 지도자를 자랑하므로 결국 교회 안에 분쟁을 일으키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달리 바울은 자기와 자기의 동역자들과 함께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련하고 약하며 비천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강한체 하였으며 또한 존귀함을 받았지만(10절) 바울은 자기와 자기의 동역자들은 정반대로 미련하고 약하며 비천하였던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왕노릇” 한 반면에(8절) 바울은 자기와 자기의 동역자들은 고난 당하는 노예나 죄수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비난 받는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9절).  그리고 오늘 본문 11-13절을 보면 바울은 자기나 동역자들이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 전파를 위하여 수고하며(12절)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11절), 비방을 당하며(13절) 심지어 매맞기까지 하면서(11절) 핍박을 당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12절).  한 마디로, 오늘 본문 13절 하반절을 보면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 같이 되었”던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낮고 비천한 자리까지 내려가서 사람들에게 천대와 멸시를 받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참고 인내하면서 자기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오히려 축복하였습니다(12절).  왜 그리했습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연고” 때문입니다(10절).  즉, 바울과 아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은 그리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조적인 삶입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배부르며 부요하며 왕노릇 하고 있는데(8절)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정반대로 노예처럼 세상에서 참으로 비천하게 살고 있으니 이 얼마나 대조적인 삶입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스스로 교만해져서(18절)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를 벗어나 사람들을 차별화하므로(7절) 서로 대적하고 있는(6절) 반면에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겸손히 순종하되 서로 협력하면서 그들에게 맡겨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하는 일과 성도들을 양육하는 일을 부지런히 그리고 조심히 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왜 자기와 동역자들이 이렇게 본을 보이고 있는지를 편지를 통하여 알려주는 그 목적을 오늘 본문 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여러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기와 자기의 동역자들이 어떠한 본을 보였는지 알려주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 목적이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14절).  다시 말하면, 바울은 사랑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기와 자기의 동역자들의 본을 보고 자신들이 범하고 있는 죄를 회개한 후 자기와 자기의 동역자들의 본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그들이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품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이 서로 대적하기보다 서로 협력하여 자기와 아볼로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힘쓰길 원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기와 동역자들처럼 그리스도를 위하여 미련하고 약하며 비천하게 되길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자기와 자기의 동역자들을 빼고 왕노릇 하기보다 자기들과 함께 영광스러운 저 천국에 들어가 영원히 함께 왕노릇하길 원했기 때문입니다(8절).  이러한 바울의 원함은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함에 있어서 스승으로서 사랑하였다기보다 오히려 아비로서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낳았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의 영적 아버지로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자기의 영적 자녀들로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영적 아비의 심정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바울과 같은 여러분의 영적 아버지로부터 이러한 편지나 이 메일을 받았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그 편지나 이 메일을 통해서 여러분이 사랑하는 영적 아버지가 참 귀한 본을 여러분에게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 오히려 여러분은 그의 대조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한 편지나 이 메일을 받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그 편지나 이 메일을 통해서 영적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므로 감동을 받아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여 영적 아버지를 본 받는자가 되고자 힘쓰시겠습니까?  본받고자 힘쓰데 여러분은 여러분의 영적 아버지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천해진 것처럼 여러분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비천해 지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좀 더 주리고 목마르며 좀 더 고생하며 좀 더 어려움과 역경을 겪으며 좀 더 예수님을 위하여 핍박까지 받으시겠습니까?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6절에서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Therefore I urge  you to imitate me.)고 말하였는데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보면 그는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Be imitators of me, just as I also am of Christ)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도 바울이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나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 또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본을 보이는 아름다운 발자취를 남길 수 있길 기원합니다.

 

 

신앙의 본을 보여주시는 분들을 나의 삶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