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일꾼들
[고린도전서 4장 1-5절]
찬송가 350장 “나의 죄를 정케하사”의 가사 1절과 후렴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1절) “나의 죄를 정케 하사 주의 일꾼 삼으신 구세주의 넓은 사랑 항상 찬송합니다 (후렴) 나를 일꾼 삼으신 주 크신 능력 주시어 언제든지 주 뜻대로 사용하여 줍소서”. 이 찬송의 배경으로 나와 있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사랑하는 동역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첫 번째로 보낸 편지인 디모데전서 1장 12절입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인 자기를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겨 주셔서 주님의 일군으로 사용해 주심에 감사의 고백을 영적 아들인 디모데에게 한 것입니다. 저는 이 사도 바울의 감사의 고백이 저의 고백이 또한 여러분의 고백이 되길 기원합니다. 신앙생활 하면 할 수록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은혜, 그 구원의 은총과 나 같은 죄인을 일꾼으로 삼아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감사, 감사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 크신 능력 주시어 언제든지 주님 뜻대로 사용해 주세요’라고 찬양하며 기도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특히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기나 또는 그의 동역 사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들로 마땅히 여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절).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란 제목 아래 그리스도의 일꾼들에 대해 한 세 가지를 생각해 보면서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의 일꾼들로 세움을 받아 하나님께 칭찬 받는 축복이 있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란 누구인가?” 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의 정체) (Their identity).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찌어다”(Let a man regard us in this manner, as servants of Christ and stewards of the mysteries of God). 사도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자기나 아볼로는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servants)입니다 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즉, 바울은 자기나 아볼로를 자랑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7절), ‘우리는 그저 주님의 사역자들입니다’ 또는 ‘주님의 섬기는 자들입니다’(5절)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또 다시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절에 와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여러분들은 마땅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겨야 합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어 성경으로 보면 3장 5절에서 사용된 ‘사역자들’란 단어나 오늘 본문 4장 1절에서 사용된 “일군들’이나 동일하게 “servants” 즉 ‘섬기는 자들’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원어 헬라어를 보면 두 단어는 동일한 단어가 아니라 다른 단어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사용된 단어는 “diakonoi”으로서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deacon”, 즉 “집사”란 말이 그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섬기는 사람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4장 1절에서 쓰인 헬라어 단어는 그것이 아니라 “huperetes”라는 단어로서 문자적 의미는 배 밑에서 ‘노 젓는 사람’(under rowers)을 뜻합니다. John MacArthur 목사님에 의하면 그 당시 배 밑에서 노 젓는 노예들은 제일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요 또한 제일 경멸을 받는 사람들이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MacArthur).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단어가 나중에 와서는 모든 권위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입니다(MacArthur). 결국 바울은 자기나 아볼로나 베드로를 자랑하는 육신에 속한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자기나 자기의 동역자들은 그리스도의 “하인” (또는 “하급 노예”)(박윤선)로서 주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주님의 노예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주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주님의 노예입니다. 그것도 하급 노예입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에게 이러한 노예 의식이 있습니까? 만일 바울처럼 우리가 이러한 노예 의식이 있다면 주님의 명령에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언젠가 제가 설교하면서 우리에게는 “노예 근성”이 필요하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왠지 우리는 노예 근성이나 노예 의식보다 ‘주인 근성’과 ‘주인 의식’이 더 많지 않나 생각됨.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섬김을 받고 있는지를 보면 알수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섬김의 의식이 필요함.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겸손한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장 3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은 흥하셔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합니다’(He must increase, but I must decrease)라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일꾼들의 마음이요 자세입니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일군들이 맡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비밀”이다 라고 바울은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요 마땅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들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로 여겨야 합니다’라고 바울은 그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1절).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나 자기의 동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이요 또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청지기들(stewards)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청지기들”이란 무슨 말입니까? 그 문자적 의미는 집 메니저(house manager)(MacArthur)로서 바울은 지금 자기나 자기의 동역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일꾼들로서 하나님의 집에서 하나님의 비밀을 전파하는 자들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전에 감추었던 것이 이제는 계시된 것”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합니다(박윤선). 결국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와 자기의 동역자들은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집(3:9)인 그들에게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일꾼들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승리교회 여러분, 여러분은 저나 다른 목사님들을 마땅히 그리스도의 일꾼들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들로 여겨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마땅히 저나 다른 목사님들을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의 집인 여러분들에게 전파하는 그리스도의 일군들로 여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을 자랑해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입니다(그리스도의 일꾼들의 필요한 것) (Their requirement).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2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Now it is required that those who have been given a trust must prove faithful).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와 자기 동역자들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이요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맡은 자들로 마땅이 여겨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2절에 와서는 자기와 자기 동역자들과 같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충성”(faithfulness)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맡은 자들”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청지기들(stewards)입니다. 주님께서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일을 맡아 수종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과연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어떻게 교회를 섬기길 원하고 계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길 원하고 계십니다(1절). 그리고 주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충성을 요구하고 계십니다(2절). 달리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충성된 자로 발견되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서 바울은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구할 것”이란 말은 “간절히 요구되는 것”이란 뜻입니다(박윤선). 즉, 바울은 자기나 자기의 동역자들이 그리스도의 일꾼들로서 간절히 요구되는 것은 바로 “충성”이다 라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충성”(faithfulness or trustworthy)이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충성이란 일꾼이 그 주인에게서 일을 맡은 대로(그 지시한 대로) 어김 없이 (certainly) 그리고 지속적으로(consistently) 순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주님께서 명하시고 맡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어김없이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저는 목사인 제 자신에게 적용해 보았을 때 저는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오병이어의 약속의 말씀(요6:1-15)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다가 언젠가 새벽기도회 때 주신 깨달음인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지런지 묵상하여 떡을 떼어 주님께서 나눠 주셨듯이 저도 말씀 묵상을 나눠야 겠다는 것입니다. 나누되 주님 오시는 그날 까지 또는 제가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까지 일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해야 겠다는 결심입니다. 시편 101편 6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눈이 이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거하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수종하리로다”. 하나님의 눈은 이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하시고 그 충성된 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수종하게 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수종할 수 있는 충성된 저와 여러분이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승리교회 여러분,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서 주님이 저와 여러분에게 간절히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충성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5-46절을 보십시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뇨 주인이 올 때에 그 종의 이렇게 하는 것을 보면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재확인 받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음. 그것은 저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참된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때에 따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먹이는 말씀 사역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므로 말미암아 주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길 원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일꾼들은 어떠한 평가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가?” 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꾼들의 평가) (Their evaluation).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4장 3-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 사도 바울은 지금 자기를 자랑하는 자들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분명히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다른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것이 자기에게는 매우 작은 일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는 칭찬이던 비판이던 사람들에게 판단 받는 것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사도 바울을 자랑하던 사람들은 바울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바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아 그 분은 참 신실하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핍박 가운데서도 담대히 그리고 신실하게 선포하시는 주님의 종이야’. 이러한 칭찬을 받으면 바울은 충분히 기뻐하고 좋아할 수 있을텐데도 불구하고 그는 사람들의 칭찬이던 비판이던 그들의 판단을 매우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 심지어 바울은 자기도 자기 자신을 판단치 아니한다고 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3절).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를 향한 다른 사람들의 판단도 믿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unreliable) 자기 자신의 판단도 믿을 수 없기에 자기도 자기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 4절에 와서는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My conscience is clear, but that does not make me innocent)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자기의 삶을 뒤돌아볼 때 심각한 죄를 알지 못하기에 자기 자신을 자책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알고 있었음. 그것은 바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자책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기로 하여금 아무 죄 없는 결백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 이렇게 바울은 자기가 자기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나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을 매우 작은 일로 여긴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그에게 제일 중요한 판단은 바로 주님의 판단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 4절 하반절에서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It is the Lord who judges me)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바울이 다른 사람들이나 자기 자신의 판단보다 주님의 판단을 중요시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오늘 본문 5절에서 찾아 볼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이 사람들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오직 하나님 만이 우리 사람들의 마음의 뜻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씀 아닙니까? 비록 우리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할 때 그들의 행동을 보고 판단을 하지만 우리 중심을 보시고 계신 하나님만이 우리가 그렇게 행동하는 마음의 동기를 알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승리교회 여러분, 우리는 사람들의 평가나 우리 자신의 평가보다 하나님의 평가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들로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함에 있어서 어떠한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판에 우왕좌왕해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재림하시는 주님의 평가를 제일 중요시 여기고 주님께 칭찬 받기 위하여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맡기신 사명을 신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 그리스도의 일꾼들이요 주님의 청지기들로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여 주님을 만날 때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1)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주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