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5-9절]

 

 

여러분들은 요즘 교회 성장(Church Growth)을 어떻게 보십니까?  여러분들은 지금 한국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바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얼마전 미주 뉴스엔조이란 웹싸이트에 들어가 보닌까 “공적 영성 파괴하는 7가지 요소’란 제목 아래 뉴브런스윅신학원의 이학준 교수(신학 및 윤리)란 분이 쓴 글이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인터넷).  오늘 날 많은 교회들이 다양한 시도를 통해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에 대처하고자 노력하는데 그 노력들 중에 구도자 예배, 열린 예배들을 중심한 문화 사역이 가장 대표적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전통적인 예배당의 모습을 대중에게 친근한 현대식으로 개량하고, 엄숙하고 경건한 찬양대보다 현대식 악기로 무장한 찬양단이 활기차고 경쾌한 복음송을 앞세워 예배를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첨단 정보통신 장치와 기법들을 도입하여 현대적 문화 코드에 익숙한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 예배를 재구성하거나, 또 교회 본당 주변에 선교관과 교육관뿐 아니라 사회복지관이나 도서관과 서점이나 카페 등을 건축하여 이웃에 친근한 교회로 자리매김하고자 합니다.  이런 시도들이 교회로 하여금 오늘의 변화하는 문화를 이해하고 이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면에서 한국 개신교의 적합성 위기의 해결에 일정 부분 설득력을 갖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방법이 얼마나 한국 교회의 정체성 위기, 즉 신앙의 본질 회복에 도움을 줄지는 의문입니다.  사실 이 모델은 이미 윌로우크릭교회의 자체 보고서인 <Reveal>에서 거론되고 있는 바와 같이 개교회의 유지나 성장에는 일시적 도움을 줄지는 모르나 성도들의 영성의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에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이 밝혀 졌습니다.  그래서 이학준 교수의 주장은 “구도자 중심의 예배를 추구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의 경우, 초점이 대부분 '어떻게 하면 교회에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을 것이냐'에 있지, 성도 개인으로 하여금 참된 하나님나라의 제자도의 삶을 살게하는 데 목적을 두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칫 잘못하면, 구도자 중심의 예배가 프로그램들이 교회를 찾아오는 개인들의 욕구와 흥미와 관심을 충족시켜주는 데 끌려가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제안은 “지금 한국 개신교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구도자 예배와 같은 기술적 대응이 아니라, 복음의 근본 가치에 바탕을 둔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학준 교수님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교수님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 사람들이 원하는 교회 성장이란 “어떻게 하면 교회에 더 많은 사람들을 모을 것이냐”에 있는 반면에 하나님께서 원하신는 교회 성장이란  결코 그러한 증가하는 숫자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 성장이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합심하여 기도하는 가운데(행1:14) 성령충만함을 받아(행1:8; 2:4; 4:31) 담대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므로(4:31)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들을 더하시는 것(2:47)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더함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받고 주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므로(마28:19-29)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활을 할 때 그러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교회(공동체)가 참된 교회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왠지 요즘 말하는 교회 성장이란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우리 사람들이 일으키는 교회 성장이란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3장 6절과 7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동일한 하나님의 말씀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다름 아닌 “…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습니다(6절),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입니다(7절)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입니다”란 제목아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떻게 자라나게 하시는지 보고 배우므로 우리 승리장로교회에도 적용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교회를 자라나게 하심에 있어서 주님의 사역자들을 사용하십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3장 5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육신에 속한 성도들, 즉 너무 신앙이 유치하여 불신자의 정도 에 가까운 자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데(3절) “어떤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고 있는 것(4절; 1:12)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오늘 본문 5절에서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지금 바울은 자기 자신이나 아볼로는 “아무 것도 아니”다(7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지금 바울은 자기나 아볼로는 주님의 사역자들로서 “각기 사명을 주신대로”(“주신 대로”란 말의 뜻)(박윤선) 하나님이 쓰시는 도구일 뿐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하나님께서 쓰시는 도구일 뿐입니다.  도구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는 하나님의 일군들이 부족합니다.  마태복음 9장 37-38절을 보십시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은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군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군이 적습니다.  적을 뿐만 아니라 특히 사명에 이끌림을 받는 일군들이 부족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중심된 일군들이 부족합니다.  또한 지금은 꿈(비전)을 꾸는 일군들이 부족합니다.  더 나아가서 킹덤 일군들(kingdom workers)이 부족한 시대를 우리는 맞이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세우시는 승리교회는 일군을 세우는 것이 비전입니다.  일군을 세우되 그리스도 중심된 꿈을 가진 일군들을 세워서 이 세상에 파송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나게 하시되 주님의 도구인 사역자들을 일으켜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사역자들인 바울과 아볼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를 자라나게 하셨습니까?  바로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아볼로를 통하여 고린도 교회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하셨습니다(5절).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회를 자라나게 하시되 바울로 하여금  심게 하셨고 아볼로로 하여금 물을 주게 하셨습니다(6절).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믿게 하였고(행18:1-11), 아볼로는 그 믿는 자들을 성경으로 가르쳐 주므로(18:24-19:1)(박윤선)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회를 자라나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는 바울처럼 복음의 씨앗을 부지런히 뿌려 심는 자들도 있어야 할뿐만 아니라 또한 복음의 씨앗이 심겨져 예수님을 믿기 시작한 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케 하는 양육자들도 필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복음 전파자들과 말씀 양육자들이 하나(one)가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3장 8절을 보십시오: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  무슨 말입니까?  복음 전파자들이나 말씀 양육자들 모두 다 주님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좀 더 나아가서 모든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각자 맡은 사명을 완수함에 있어서 서로 다투지 말고 협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듯이 한국 교회 안에는 다툼과 분쟁이 많습니다.  또한 선교지에서 한국 선교사님들끼리도 협력 선교를 잘 같이 못하고 있기에 선교지에서도 다툼과 분쟁이 많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챙피하고 부끄러운 일입니까?  특히 사역자들과 선교사님들끼리 서로 다투고 분쟁할 때 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고 복음 전파를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딱 하나 꼬집어서 말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제 생각엔 문제의 핵심은 “교만”이라 생각합니다.  결코 교만한 자들은 함께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교만한 자들과 함께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시기와 다툼과 분쟁만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해 합니다.  우리가 서로 협력하여 주님의 일을 하고자 할 때 우리는 겸손히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3장 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와 아불로를 가리켜 “하나님의 동역자들”(God’s fellow workers)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바울과 아불로는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동역자들이란 말입니다(박윤선).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동역자들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협력하여 주님의 일을 합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6절).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일을 협력하여 하되 다른 누구에게가 아닌 주님으로 부터 자기의 일하는 데로 자기의 상을 받을 줄 바라보며 일을 하였습니다(8절).  이렇게 상 주심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충성합니다(4:2).  그리고 그들은 책임을 감당함에 있어서 모세처럼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합니다(히11:25).  또한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이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깁니다(26절).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주님의 사역자들은 “상주심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26절).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십니다.  자라나게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동역자들, 주님의 사역자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우시고 자라나게 하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책임은 우리 모두가 주님의 사역자들로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협력하여 복음 전파와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충실하되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영혼들을 섬겨야 함.  그리고 우리는 주님께 상주심을 바라보면서 충실히 섬겨야 합니다.   바라기는 주님 앞에서 저와 여러분들이 설 때에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주님께 받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오직 주님께서 성장케 하시는 승리장로교회,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