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목적

 

 

“그러나 저희가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열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역대하 12장 8절).

 

 

            ‘영혼의 청교도 의사’(a Puritan doctor of soul)인 Thomas Case 목사님이 쓴 “Suffer”(고난)이란 책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서 고통의 상황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는 21가지 교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21가지 교훈들을 읽으면서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 매를 맞으면서도 왜 매를 맞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 참 두려운 일이다.  그런데 더 두려운 것은 하나님께 매를 맞고 난 후에도 하나님의 가르침(교훈)을 배우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두려운 생각이 든 이유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면서도 우리의 범한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을 때가 많이 있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아 고통을 당하는 상황에서 왜 이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이 우리에게 임했는지 의아해 하곤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당면한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인하여 불평하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의 주권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의 목적이 있을텐데 우리를 그 목적을 깨닫지 못할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방황하기도 하곤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일까요?  혹시 우리의 범죄 때문에 고통을 주시는 것은 아닐까요?  만일 우리의 죄 때문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리고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힘입어 그 고통에서 건짐을 받았다면 저와 여러분이 그 고통을 통하여 배워야 할 하나님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역대하 12장 8절의 문맥을 보면 유다 왕 르호보암과 이스라엘은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큰 고통이란 바로 멸망의 위기였습니다(12절).  그 큰 고통이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려 애굽 왕 시삭의 손에 붙힌바 된 것입니다(5절).  왜 르호보암과 이스라엘이 멸망의 위기를 맞이했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기 때문입니다(5절).  다시 말하면, 르호보암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기 때문에(1절) 그들은 하나님께 버린바 된 것입니다(5절).  그러면 왜 르호보암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것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유다 “나라가 견고하고 세력이 강하”여 졌기 때문입니다(1절).  다시 말하면, 르호보암과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버려 하나님께 범죄한 원인은(2절)은 바로 교만이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노하시사(12절) 애굽 왕 시삭을 일으켜 예루살렘을 치게 하신 것입니다(2-4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또 다른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두려운 생각이란 바로 “익숙함”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치 르호보암과 유다 나라가 견고함과 강한 세력에 익숙해져가므로 결국에 가서는 교만하여 하나님의 율법을 버렸던 것처럼 제 자신과 저의 가정 및 섬기는 영의 가정 교회가 평안함이나 풍족함이나 견고함이 익숙해져 갈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의 씨앗이 우리 마음에 뿌려쳐 쓴 뿌리가 보이지 않는 마음에 깊이 자라나 있고, 심지어 교만의 나무가 자라나 열매를 맺어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의도적으로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분명히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교만함과 그 교만함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 범죄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실텐데 ….  이러다가 하나님께서 징계의 막대기를 드셔서 저와 저의 가정과 제가 섬기는 승리공동체를 치시면 어찌하나 하는 염려가 됩니다.  만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치시면 우리가 고통중에 거하게 될 텐데, 그 고통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우리가 이렇게 평안함과 풍부함과 견고함에 익숙해져 있는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르호보암와 유다 예루살렘에 모인 유다 방백들이(5절) 스스로 겸비한 것처럼(6절) 우리도 스스로 겸비해야 합니다.  우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6절) 스스로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특히 가정과 교회의 지도자인 우리 남편들(아버지들)과 목회자들이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여 우리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린 범죄를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시는 목적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의 매를 드셔서 교만하고 불순종하며 범죄하는 우리들을 치시는 목적은 바로 우리가 의로우신 하나님께 범한 죄를 깨닫고 그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여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르호보암이 스스로 겸비하고 유다에 선한 일도 있으므로 노를 돌이키사 유다 나라를 다 멸하지 아니하셨습니다(12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겸비한 르호보암과 유다 나라에 모든 진노를 다 쏟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다 멸하지 않으셨습니다(7절).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대강 구원하”셨습니다(7절).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유다 나라를 완전히(totally) 멸망시키시지도 않으시고 그렇다고 완전히(completely) 구원해 주시지도 않으시고 ….  왜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셨을까요?  우리의 기대는 완전한 구원인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우리의 고통에서 완전히 건져주시지 않으시는 것일까요?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과 더불어 더 좋아하는 세상(혹은 우상)을 섬기는 것이 어떻게 다른지(difference) 교훈을 가르쳐 주시길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역대하 12장 8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러나 저희가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열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겸비하는 르호보암와 유다 방백들을 보시고 그들을 다 멸하지 아니하시고 대강 구원하신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애굽 왕 시삭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열국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그 차이를 알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저와 여러분은 깨닫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고통 중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재물과 성공과 이 세상의 우상들을 섬기는 것의 차이를 깨닫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의 영혼에 진정한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에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병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평안함과 풍족함과 견고함과 강한 세력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해 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을 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너무나 세상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 우리는 의로우신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는 “세상”이란 막대기를 우리를 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겸비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아직도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목이 곧은 백성처럼 우리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회개하기보다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세상을 섬기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과연 우리에겐 소망이 있는 것입니까? 

 

 

 

육신의 가정과 영의 가정인 교회 안에 범죄 행위를 보면서 두려운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