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열왕기하 10장 30-31절).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4:16)는 사실은 조금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시99:9)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범함에 있어서도 점점 더 담대해 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닌까 죄를 범해도 우리가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신다고 확고히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또 다신 우리를 동일한 죄를 또 범하고 또 범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입니까?  우리는 용서의 하나님, 용납의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진노하시며 징계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나 익숙하지 않습니다.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균형 잃은 “신론’(the doctrine of God)이요 균형 잃은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열왕기하 10장 30-31절을 보면 예후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 아합을 섬기던 군대장관이었던 예후란 인물을 택하셔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되(9:6)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아합의 집을 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7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는 엘리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다 이루시고자(10:10) 예후를 들어 일으켜 “내 마음에 있는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셨습니다(30절).  그러므로 예후는 음행과 술수가 많은 아합의 부인인 왕후 이세벨로 인하여 평안이 없는 가운데서(22절) 아합와 이세발의 아들인 이스라엘 왕 요람을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토지에서 만나”(21절) 그를 죽이고(24절)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대로(25절) 요람의 “시체를 취하여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 던지”게 하였습니다(25절) [참고: 나봇은 아합 왕의 신뢰할만한 이웃이었지만 그의 포도원을 원했던 아합의 고민을 해결해 주고자 왕후 이세벨이 계략을 세워 나봇과 그의 아들들을 다 죽였음(왕상21장)].  아합이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가 어젯날에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셨고 나봇의 토지에서 나봇에게 갚으시리라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6절).  하나님께서는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시고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아합 왕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왕상21:19).  이 예언의 말씀대로 아합의 부인 왕후 이세벨은 내시들이 창에서 내려 던지매 그녀의 피가 담과 말에게 뛰었을 뿐만 아니라(왕하9:33) 그녀의 시신은 남은게 그녀의 두골과 발과 손바닥 외에는 찾지 못했습니다(35절).  그 이유는 엘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고기를 먹”었기 때문입니다(36절).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입니까?  하나님의 진노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후는 아합의 아들 칠십 인 왕자들까지도 다 죽입니다(10장).  그는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르엘 방백들인 장로들과 아합의 칩신 인 왕자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어(10:1) 그들로 하여금 아합의 칩신 인 왕자들은 몰수히 죽여 그들의 머리들을 광주리에 담아 자기에게 보내게 만들었습니다(7절).  예후는 아합의 집에 속한 이스르엘에 남아 있는 자들을 다 죽이고 또 “그 존귀한 자와 가까운 친구와 제사장들을 죽이되 저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습니다(11절).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한 것입니다(10절).  더 나아가서 아합은 바알을 위하는 대화를 열어(19절) 온 이스라엘에 있는 바알을 섬기는 모든 선지자들과 모든 섬기는 자들과 모든 제사장들을(19절) 다 모아 다 죽입니다(25절).  그리고 아합은 바알의 당에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바알의 목상을 헐며 바알의 당을 훼파하여 변소를 만들었습니다(26-27절).  이 예후에 대하여 저는 한 세 가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예후는 하나님 마음에 있는 대로 정직한 일을 다 잘 행하였습니다.

 

            열왕기하 10장 3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예후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보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되 잘 행하여 내 마음에 있는대로 아합 집에 다 행하였은즉 네 자손이 이스라엘 왕위를 이어 사대를 지나리라 하시니라”.  예후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what is right in God’s eyes)을 행하였습니다.  행하되 아합은 다(all) 행하였고 또한 잘(well) 행하였습니다.  여기서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 즉 하나님의 마음에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아합의 집을 치는 것이였습니다(9:7).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아합의 집을 치는 것이 여러분이 생각하기엔 옳은 일입니까?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잔인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합의 집을 이렇게 치셨을까 의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진노하시사 진멸하시는 장면들을 자주 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에게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삼상15:3)는 말씀을 들수가 있습니다.  우리 생각엔 어떻게 젖먹는 아이와 동물들까지 죽이는가 하나님의 뜻에 이해가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마음이 사랑의 마음일 뿐만 아니라 거룩한 마음임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일(옳은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바른 질문(옳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가를 먼저 질문해야지 우리는 그 보다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이 되고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 우리가 기대하는 효과적인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우리는 다 잘 행해야 합니다.

 

            둘째로, 예후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있었습니다.

 

            열왕기하 10장 16절을 보십시오: “가로되 나와 함께 가서 여호와를 위한 나의 열심을 보라 하고 이에 자기 병거에 태우고”.  예후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zeal for the Lord)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후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 마음에 있는 대로 옳은 일(바른 일)을 다 잘 행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인 아합의 집을 치되(9:7) 아합에게 속한 자들은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죽였습니다(10:11).  참 잔인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예후는 아합의 집을 쳐서 진멸시켰습니다.  이 예후의 열심을 생각할 때 저는 바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기 전에 사울이였을 때 “열심으로는(as for zeal) 교회를 핍박”한 것이 기억이 납니다(빌3:6).  물론 사울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목적을 가지고 열심으로 행한 것은 아닙니다.  사울이 교회를 핍박한 것은 자기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한 목적인 하나님을 사랑한답시고 그렇게 한 것이지 그는 결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행한 것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예후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열심을 가지고 다 잘 행하였습니다.  마치 비느하스가 하나님의 질투하심 또는 하나님의 열심[“my zeal” (민25:11)]으로 손에 창을 들고 시므리와 고스비의 배를 꿰뜷어서 죽인 것처럼(민25:7-15) 예후는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아합의 집을 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후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진노를 아합의 집에 쏟아내시는데 도구로 쓰임받은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경계(조심)합니다.  혹여나 열심을 내는 사람들이 사단의 유혹을 받아 시험에 들까봐도 염려합니다.  그 이유는 그 열심이 처음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르다가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함과 욕심이 들어 자기가 보기에 옳바르다라고 생각하는 일에 열심을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인줄 확신하고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참 위험합니다.  오히려 열심은 부족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른 일을 행하는 사람이 자기가 보기에 옳바른 일을 열심을 내어 행하는 사람보다 더 낮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제일 좋은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른 목적을 가지고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사람이 되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른 일을 하나님의 열심을 가지고 행하는 우리가 되야 합니다. 

 

            셋째로, 그러나 예후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습니다.

 

            열왕기하 1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예후가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며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예후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른 일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행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전심으로(with all his heart)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는 여로보암이 이스라엘로 범하게 한 “그 죄”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31절).  여기서 “그 죄”란 “곧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를 가리킵니다(29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을 가지고 다 잘 행했던 예후, 한가지 오점은 금송아지를 섬기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이스라엘 중에서 바알을 멸하였던 그가(28절)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는 멸하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한 마디로, 예후는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좇이 않았습니다.  저는 이 예후의 오점을 묵상할 때 하나님을 온전한 마음으로 좇은 갈렙이 생각났습니다(민14:24; 수14:8, 9, 14).  그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도 온전한 마음에서 모세에게 성실한 대로 보고 했었을 뿐만 아니라(수14:7) 그는 평생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습니다(he followed the Lord God of Israel fully)(14절).  우리도 주님을 온전히 좇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른 목적을 가지고 열심을 다하여 잘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온전하지 않으면 결국 우리는 예후처럼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곧, 우리의 마음이 온전하지 못하면 우리는 두 주인인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는 죄를 하나님 앞에서 범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시119:34, 69).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도를 행하여 모든 우상을 다 제하여야 합니다(대하17:6).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의 명령을 지켜 전심으로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왕상14:8).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해야 합니다(시119:2, 10, 145).  우리는 전심으로 주님 앞에서 행해야 합니다(왕하20:3; 사38:3).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후를 세워 아합의 집을 치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를 범하는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 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옳바른 일(정직한 일)을 다 잘 행해야 합니다.  다 잘 행하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으로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펼쳐 가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아기 주영(뜻: “주님의 영광”)이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경험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