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53장3절).

 

 

            우리가 찬송가 102장(“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을 하나님께 찬양드리면서 우리는 주 예수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세상 행복과 부귀와 영화보다 주 예수님이 제일 귀하다는 고백의 찬양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멸시합니다.  멸시하되 그들은 자기들의 얼굴을 가리우고 예수님을 보지도 않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크리스천들도 예수님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고 있는 것입니까?  한 두 가지 이유를 오늘 본문 이사야53장3절에서 찾아 봅니다.

 

            첫째로, 우리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는 이유는 간고를 겪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는 근심된 일과 곤고한 일이 많습니다.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이 세상에서 슬픈 일들을 많이 보고 듣고 또한 실재로 겪습니다.  참으로 눈물을 많이 흘릴 수 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삶을 이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아닌 기쁨을 원합니다.  눈물과 아픔이 아닌 행복과 웃음을 원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기쁨과 행복을 얻고자 노력합니다.  그것들이 우리의 인생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헹복한 삶, 행복한 가정, 행복한 공동체를 꿈꾸면서 달려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기쁨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귀히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쁨을 원한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혜자 솔로몬은 우리에게 슬픔이 웃음보다 낮다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전7:3).  어떻게 슬픔이 웃음보다 낮습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간고(슬픔)를 많이 겪으셨다(acquainted with grief)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53:3).  즉, 예수님의 비애의 사람(a man of sorrows)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슬픔을 싦어하고 기쁨을 좋아하는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아니 기쁨을 좋아하기에 슬픔을 많이 겪으신 예수님을 싫어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얼굴을 예수님에게로부터 돌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을 귀히 여긴다는 것은 간고(슬픔)을 귀히 여겨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슬픔을 귀히 여긴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슬픔이 많은 우리를 체휼하시는 것처럼(박윤선) 우리도 슬픔이 많은 형제, 자매들을 체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는 자들로 함께 울수 있어야 합니다(롬12:15).  이것이 바로 슬픔을 많이 겪으신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이 바로 비애의 사람이신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삶입니다. 

 

            둘째로, 우리도 예수님을 귀히 여기지 않는 이유는 질고에 익숙해 지고 싶지 않아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모든 면으로 발달되어서 참 편안함을 추구하는 세상입니다.  그 한 예로 과학의 발달을 통하여 우리의 삶은 매우 편안해 졌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는 조금이라도 불편한 점들이 있으면 너무 쉽게 불평하며 짜증을 내면서 원망까지 합니다.  우리는 결코 고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평안한 길과 고난의 길 이 두 갈램길에 서 있으면 우리는 거의 평안한 길을 선택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평안함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안락함이 익숙해져 있기에 고난의 길보다 평안한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의 길이 아닌 평안한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질고를 아시는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러한 삶은 예수님을 싫어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53장3절을 보면 예수님을 “질고를 아는 자”(familiar with suffering)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고난에 익숙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고난 주간에 저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질고를 아시는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할 때 저는 고난에 너무나 익숙하지 않은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새삼스러운 발견은 절대 아닙니다.  너무나 안락함에 익숙해져 있는 제 자신을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과는 거리가 먼 신앙생활을 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는데(히5:8-9) 저는 고난을 받는 것을 기피하므로 말미암아 순종보다 불순종함을 배우고 있음을 직시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온전치 못한 제 자신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은 질고를 아시는 예수님처럼 고난에 익숙해야 합니다.  참된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알고(빌1:29)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으로 순종함을 배웁니다.  이것이 바로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삶입니다.

 

 

 

예수님을 귀히 여기는 삶을 살기를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