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 목회자들은 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   …  사단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다윗을 격동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니라” (사무엘하 24장 1절, 역대상 21장 1절).

 

 

            우리 교회 목회자들을 향한 사단의 유혹 중 하나는 바로 교인 숫자를 계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교인 숫자를 계수하게 하되 그 숫자를 크게 보이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헛된 자부심과 교만함을 극대화 시키고 있습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사단은 우리의 욕심을 자극하여 더욱더 교인 숫자를 늘리기에만 집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세상적인 이런 저런 방법들을 총동원하여 교회 세력을 키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교회가 회사같다는 말도 우리는 듣고 있습니다.  결과만을 중요하시는 교회 사역, 이제는 방법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지 아니한지 우리들은 그리 고민을 많이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이 성경적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방법이 우리가 원하는 교인 숫자 증가라는 결과를 가지고 올 수 있는지 아닌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죽 했으면 교회 담임 목사님이 부목사님들에게 담당하고 있는 교구나 부서에 교인 숫자 증가를 요구하고 있겠습니까.  결국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교인 숫자의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이제는 설교하면서도 교인 숫자를 부풀려 은근히 자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시는 것입니까(행2:47) 아니면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양 도둑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지금 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사무엘하 24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감동”(incited)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고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지만 역대상 21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니라 사단이 일어나 다윗을 “격동”(incited)하여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다윗을 격동케 하여 이스라엘을 계수하게 하는 것을 막지 않으시고 그대로 두셨다는 뜻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다윗을 유혹하여 범죄케 하는 것을 허락하셨다(permissive will of God)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삼하24:1) 그들을 대적하셨기(대상21:1)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진노하시사 다윗을 대적하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시사 그들을 대적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대적하신 이유는 그들이 일시 동안 압살롬의 반역을 따랐고(삼하 15:12) 또한 세바의 반란을 지지하였기(삼하20:1-2) 때문입니다(박윤선).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벌하시기 위하여 다윗 왕의 실수함을 그대로 방임하셨던 것입니다(박윤선).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시므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칠만 명이나 되었습니다(삼하24:15). 

 

            한국에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나 된다는 말(한국 인구의 4분의 1), 과연 믿을 만한 통계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왠지 많이 부풀려진 교인 숫자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언제가 읽은 기독교 신문 기사가 생각납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교인 숫자가 제일 많은) 교회 50개중 약 24개 교회인가가 한국에 있다는 소식이요.  모르겠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가 자랑할 만한 대형교회 숫자와 교인 숫자인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표면적으로는 영혼 구원과 전도, 선교라고 외치면서 교인 숫자를 증가시키고는 있지만 이것이 과연 주님께서 구원받는 자들을 교회에 더하시는 것(add)인지 아니면 우리들이 이미 구원 받은 자들을 곱하는 것인지(multiply) 모르겠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한국 교회 현상을 보시고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사단이 우리 교회 지도자들을 유혹하여 이 교인 숫자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자랑하게 만드는 일을 허락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이 사단의 유혹을 막아주지 않으시고 그냥 내어버려 두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목회자들 뿐만 아니라 우리 온 교우들에게 진노하시사 우리를 대적하고 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진노하고 계시며 대적하고 계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주님께 반역(betray)하며 반란(rebel)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쩌면 우리가 주님을 늘 배반하며(찬송가 412장) 또한 우리가 마치 사춘기 청소년들처럼 주님께 반앙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다윗처럼 우리 마음을 자책(conscience-stricken: 양심에 찔림바 되어)하고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백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24장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거룩한 말씀 앞에서 겸손하며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보시기에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작게 여길 수 있는 죄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미련하게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아직도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있을 것입니까? 

 

둘째로, 우리는 다윗처럼 우리가 곤경에 있을 때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의지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24장 14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다윗은 땅의 칠년 기근이나 그의 대적에게 쫓겨 석달을 그 앞에서 도망하는 것보다 오히려 땅에 삼일 동안 온역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13절).  그 결과 다윗은 그 130만(9절) (참고: 역대상 21장 5절에서는 157만이라고 적혀 있음)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 7만명을 잃습니다(15절).  우리도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징계를 선택해야 합니다.  설상 우리가 교인을 많이 잃어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그분들이 떠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겸손히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는 교인 숫자에 많음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양 무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사무엘하 24장 17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백성을 치는 천사를 보고 곧 여호와께 아뢰어 가로되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 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 하니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 목자의 마음입니까.   우리도 다윗처럼 이러한 목자의 마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 무리를 사랑하는 마음,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줄 알고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마음….   우리가 이 마음은 언제 품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한 영혼”이 아닌 “많은 영혼”을 마음으로 사모하며 부르짖고 있지는 않습니까?  많고, 크고, 넓고 높게 ….  자꾸만 우리 마음의 욕심의 영역이 이렇게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마지막 넷째로, 우리는 다윗처럼 값 없이는 여호와께 예배를 드리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사무엘하 24장 24절을 보십시오: “왕이 아라우나에게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다 내가 값을 주고 네게서 사리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 하고 은 오십 세겔로 타작마당과 소를 사고”.  우리는 다윗처럼 결코 값을 치루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준비되지도 않은 예배를 드려서는 아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다윗이 “내가 결단코 상당한 값으로 사리라 내가 여호와께 드리려고 네 물건을 취하지 아니하겠고 값 없이는 번제를 드리지도 아니하리라”(대상21:24)고 말한 것처럼 우리 또한 상당한 값(the full price)을 치루기로 결단하고 행동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리시고 계시는 재앙이 그칠 것입니다(25절). 

 

우리 목회자들은 더 이상 교인 숫자의 노예가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다”라는 명분아래 우리의 “욕심”대로 목회를 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아니, 이미 지금 내리고 계시는 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 무리들이 영적으로 굶주려서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리 사단의 먹이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들 앞에서 쇼(show)나 회중들을 즐겁게 해주는 오락(entertainment) 예배를 하나님께 드려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리를 진실되지 않은 마음으로 전파해서는 아니됩니다.  진리를 사모하며 목회자에게 진실된 성품을 찾아 해메는 성숙한 성도님들은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더 이상 우리들의 가려운 귀를(딤후4:3) 즐겁게 해주는 바르지 못한 교훈에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더 이상 우리들의 사욕을 좇을 목사님들을 많이 두어서는 아니됩니다(참고: 딤후 4:3).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하며 그 선포한 진리대로 살아가고자 씨름(마치 야곱이 압복강 가에서 천사와 씨름하듯)하는 진실된 삶을 추구하는 목회자를 스승으로 두어야 합니다.  마치 다윗처럼 자신의 미련한 죄를 진실되게 자백하며 하나님의 손에 징계를 받기를 원하고 또한 양무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목회자,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배의 댓가(cost of worship)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치루고자 결단한 목회자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