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신 여긴바 되었던 우리가 하나님을 업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한데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고” (사무엘하 12장 9, 10절).

 

 

            자기의 아내인 사울의 딸 미갈로 부터 없신 여긴바 되었던 다윗 왕은 하나님의 말씀을 업신 여겼습니다(삼하12:9).  즉, 업신 여긴바 되었던 다윗 왕은 하나님을 업신 여긴 것입니다(10절).  그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궤를 인하여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갔습니다(삼하6:12).  올라가면서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은 즐거이 부르며 나팔을 불고 하나님의 궤를 메어 왔습니다(15절).  그런데 하나님의 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그녀의 남편인 다윗 왕이 하나님 앞에서 에봇을 입고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겼습니다(14, 16절).  그러나 자기 아내가 심중에 자기를 업신여긴 줄도 모르고 하나님의 궤를 메고 다윗성에 들어온 다윗 왕은 장막 가운데 그 예비한 자리에 하나님의 궤를 두고 제일 먼저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를 드렸습니다(17절).  그리고 나서 그는 만군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축복하였습니다(18절).  또한 그는 온 이스라엘 무리들에게 떡 한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떡 한떵이씩 나눠주었습니다(19절).  그런후 다윗 왕은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갔을 때 그의 아내인 미갈이 나와 그를 맞으면서 그녀는 마음으로 업신 여겼던 그녀의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20절).  그 때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미갈의 아비인 사울과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자기를 택하사 그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기에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I will celebrate before the Lord)(21절)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이보다 너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22절)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14, 16절) 뛰놀리라고 말하였습니다(21절)

 

            저는 이 말씀 묵상하면서 저는 이러한 상상을 해보면서 제 자신에게 적용해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저 같은 죄인 중에 괴수를 사랑하사 선택하여 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시므로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저 같은 죄인을 부르시사 기름부어 세우셔서 주님의 종이 되게 하신 것을 생각할 때 너무 기쁘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주일 찬양 예배 때 목사 가운을 입고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 하는데 예배 당 맨 뒷 좌석에 앉아 있는 아내가 저를 보고 마음으로 저를 업신 여겼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다윗 처럼 제 아내가 저를 마음으로 업신 여겼다는 것도 모르고 하나님께 먼저 찬양과 경배를 드린 후 모인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님들 위하여 축복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점심 시간에 저는 성도님들과 함께 식탁 교제를 나누면서 마음과 마음을 나누다가 다들 집에 가고 저 또한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 가보니 먼저 집에 가서 저를 기다리던 아내가 가족을 축복 기도하려는 저에게 ‘왜 당신 찬양 예배 때 목사 가운까지 입고 그렇게 염치없이 부끄럽게 교인들 앞에서 춤을 추며 찬양을 드렸어요?’라고 말했습습니다.  그랬을 때 과연 저는 다윗처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21-22절)고 말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생각 가운데 저는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서 나 같은 죄인을 선택하사 예수님을 믿게 하시고 주님의 종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아 마음에 감출 수 없는 감사와 기쁨으로 “여호와 앞에서”(21절)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사무엘하 6장에서 사랑하는 아내에게 업신 여긴바 되었지만 감출 수 없는 마음에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며 뛰놀았었던 다윗 왕은 사무엘하 11장에 와서는 목욕을 하고 있었던 심히 아름다와 보이는(2절)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3절)와 더불어 동침하여(4절) 그녀로 하여금 임신케 한 후(5절) 그 사실을 덮으려고(숨기/감추려고) 요압 장군을 통하여 우리아를 불러들여(6절) 그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내려가게 하고자 했습니다(8절).  왜 다윗 왕은 그리 했을까요?  그 당시 DNA 시험도 할 수 없었기에 우리아가 다윗 왕의 말대로 자기 집으로 내려 갔으면 전쟁에서 군인으로 고생하다가 집으로 온 우리아는 분명히 자기 아내 밧세바와 동침했을 것이고 그 결과 다윗은 그의 의도대로 밧세바의 뱃속의 아기가 자기와의 동침해서 생긴 아기라는 사실을 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충성된 군인 우리아는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않고 왕궁 문에서 그 주의 신복들로 더불어 잡니다(9절).  그의 이유는 “언약궤와 이스라엘과 유다가 영채 가운데 유하고 내 주 요압과 내 왕의 신복들이 바깥 들에 유진하였거늘 내가 어찌 내 집으로 가서 먹고 마시고 내 처와 같이 자리이까”였습니다(11절).  그는 “이 일을 행치 아니하기로 왕의 사심과 왕의 혼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였습니다(11절).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 있었던(27졀) 다윗 왕과 대조가 됩니까?  결국 다윗 왕은 우리아로 하여금 먹고 마시고 취하게 하여(13절) 그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내려가게 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12절).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충성된 군인 우리아는 이번에도 자기 집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고 그 주의 신복으로 더불어 침상에 누었습니다(13절).  그래서 다윗은 마지막 카드를 사용하였습니다.  그 마지막 카드란 우리아를 전쟁에서 고의적으로 죽이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편지를 써서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 장군에게 보냅니다(14절).  어떻게 다윗 왕은 자기의 죄를 덮으려고 자기의 충성된 군인 우리아를 죽이려고 “너희가 우리아를 맹렬한 싸움에 앞세워 두고 너희는 뒤로 물러가서 저로 맞아 죽게 하라”(15절)는 내용의 편지를 그것도 우리아의 손에 부쳐 요압에게 전달할 수 있습니까?  이해가 안되는 다윗의 행동입니다.  그런데 더 이해가 안되는 점은 우리아가 전쟁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 다윗 왕의 반응입니다.  한 번 들어 보십시오: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저를 담대케 하라 하니라”(25절).  아니 어떻게 의도적으로 충성된 군인을 죽인 후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죽이느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이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기에(27절)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단 선지자를 보내셨습니다(12: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를 통하여 다윗 왕을 책망하셨습니다(1-12절 ).  그 책망 중 한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12장 9-10절입니다.  그리고 그 책망 내용 중 마음에 다가오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왜 너가 나의 말을 업신여겼느냐?’, ‘왜 너는 나를 업신여겼느냐?’였습니다.  이제는 다윗 왕이 그의 아내 미갈에게 업신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업신을 당하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떻데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더 낮아져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6:22) 하나님 앞에서 뛰놀리라 헌신했던 다윗이 어떻게 교만해져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고도 자신의 죄를 덮고자 한 유부녀를 간음한 것도 모자라 그녀의 남편을 의도적으로 죽였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왜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던 다윗 왕이 사람들 앞에서 힘을 다하여 죄를 덮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인으로 변질된 것입니까?  혹시 다윗 왕은 그의 아내인 미갈과의 부부 관계가 안좋아서 딴 유부녀인 밧세바를 바라본 것은 아닐까요?  혹시 하나님과의 친밀했던 교제가 소홀해 져서 “여호와 앞에서”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하기보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자신이 범한 죄를 덮으려고 애쓴 것은 아닐까요?  어쩌면 다윗 왕은 하나님의 언약의 축복의 말씀들을 받고(7장) 하나님께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므로(8:6, 14) 교만해 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기 위하여 그에게 기름을 붓고 그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12:7)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그의 주인의 집과 처들도 주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맡겼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부족하였을 것 같으면 그에게 “이것 저것을 더 주”셨을텐데(8절) 왜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충성되이 여기시는 우리아를 의도적으로 죽이면서까지 밧세바와 동침한 사실을 숨기려고 한 것일까요?  왜 그는 밧세바가 “내가 잉태하였나이다”(I am pregnant)(11:5)라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 자백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오히려 죄를 숨기고자 더 큰 죄를 범하였을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기쁨과 감사를 숨김없이 힘을 다하여 춤을 추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며 백성들을 축복하며 나누는 삶을 살았던 다윗 왕이 충성된 군인 우리의 아내와 간음한 후 죄를 숨기고자 힘을 다하되 하나님께 예배도 드리지 않고 백성들을 축복하기보다 우리아를 오히려 죽이므로 그의 아내를 빼았는 사람으로 변질되었을까요?  혹시 우리가 지금 다윗처럼 변질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 우리가 하나님께 숨기고 있는 죄가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변질된 자가 아니길 바라는,

 

제임스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