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의 눈

(A Jealousy Eye)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사무엘상 18장 9절).

 

 

            “질투”하면 저는 1992년 6-7월에 MBC에서 방송했던 드라마 “질투”가 생각납니다.  텔런트로는 최수종씨와 고 최진실씨가 등장하여 젊은이들의 풋풋하면서도 가슴저린 사랑이야기를 그린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는 성숙한 사랑을 깨닫게 되기까지의 아픔과 기다림, 아름다움을 경쾌하게 담아내어 시대가 요구하는 멜로드라마의 전형으로 인정받았다고 합니다(인터넷).  아직도 어염풋이 기억나는 것은 그 드라마 주제곡인 “질투”의 가사 중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거야 내가 지금 여기 눈 앞에 서 있는데 …  많은 것을 바라진 않아 그저 사랑의 눈빛이 필요 할 뿐이야 나의 마음 전하려 해도 너의 눈동자는 다른 말을 하고 있잖아 …”(인터넷).  그 때 제 나이 24세, 그 드라마와 주제곡을 들으면서 젊은 총각의 마음을 자극하게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그 주제곡을 들어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 때 들었을 때하곤 너무 달리 좀 싱겁다는 생각이 들게 만듭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질투”란 그리 싱겁게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질투란 사람을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질투란 무서운 사단의 무기라 생각합니다. 

 

질투란 무엇입니까?  위키 낱말 사전을 보닌까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진 무엇을 못마땅히 여겨 탐내거나 혹은 이유 없이 미워하고 없애려는 하는 태도”(인터넷).  이 정의를 읽고 또 읽으면서 제 자신에게 비춰볼 때 참으로 할말이 없습니다.  이유 없이 주님 안에서 한 지체를 참 미워했던 생각이 났기 때문입니다.  그 지체는 저에게 아무 잘못한 것도 없었는데 저는 그냥 미워했었습니다.  원치 않은데도 자꾸만 미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질투하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다른 사람이 저보다 더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시기하려고 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물론 제 내적 사람의 모습입니다.  제 마음 속에서 드는 질투 또는 시기는 결국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 이러한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질투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처럼 마음을 비웠기 때문입니다(빌2:5-8).  만일 제가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아 가고 있다면 질투하고 시기하기보다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제 자신보다 다른 지체들을 낫게 여길 것입니다(빌2:3).  

 

물론 성경에는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질투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질투심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25장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느하스의 질투심은 “위로부터 난”것(약3:17)으로써 성경적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질투심입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바로 비느하스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질투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 사무엘상 18장9절에 나오는 사울과 같은 질투심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사울의 질투심은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기 때문입니다(약3:15).

 

 오늘 본문 사무엘상18장9절을 보면 우리는 질투하는 사울 왕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보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주목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영어 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NIV)를 보면 ‘질투의 눈으로 계속 보았더라’(“And from that time on Saul kept a jealous eye on David”)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동사를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The New Strong's Dictionary of Hebrew and Greek Words에 의하면 ‘to watch with jealousy eye’(질투의 눈으로 보다)입니다.  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보았습니까?  그 대답은 “그 날 후로” (삼상18:9)에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날”, 즉 다윗이 불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6절) 뛰놀며 창화하여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고 하므로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8절)라고 말한 날 후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드라마의 주인공이였던 사울 왕, 그러나 골리앗을 죽이므로 조연출도 아니였던 목동 다윗이 주인공으로 등극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다윗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고(1, 3절) 또한 사울의 딸 미갈도(20, 28절) 그리고 온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도 다 다윗을 사랑하였습니다(16절).  그러니 사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특히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심을 보고 알았던 사울(12, 14, 28절)은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힘 있게 내리므로(10절)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을 계속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무서운 것은 질투의 눈으로 다윗을 바라보던 사울은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타고 있을 때 다윗을 벽에 박고자 손에 든 창을 다윗에게 던졌습니다(10-11절).  실패로 돌아갔지만 사울은 그 때부터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질투는 살인의 죄까지 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고 알므로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습니다(29절).  그는 평생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사울 왕은 전쟁에서 죽습니다.  질투하여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이 오히려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된 질투심의 결말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사울과 같은 죄악된 질투심을 어떻게 극복해 나아갈 수 있습니까?  저는 그 대답을 시편 73편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시편 기자 아삽이 악인의 형통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여(3절) 거의 실족할 뻔 했지만(2절)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악인의 결국을 깨닫게 되어(17절) 죄악된 질투심을 극복했습니다.  즉, 시편 기자 아삽은 그의 눈을 하나님께 맞추었을 때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인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을 깨닫고(17-20절) 또한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음을 깨달았을 때에(25절) 그는 죄악된 질투심을 극복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죄악되고 살인적인 질투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투의 눈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에 살며시 스며드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질투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질투의 눈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보고 계시기에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사울의 질투의 눈을 경계하고 비느하스의 질투의 눈을 추구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