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의 사역
(바나바 사역)
어젯밤 저녁에 성경을 읽다가 사무엘상 1장에서 시선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주로 한나라는 여인에게 초점을 맞추었었던 저는 그날 밤 엘리 제사장이란 인물에 대해 관심이 가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엘리 제사장과 한나와의 대화를 통하여 목사인 저로서 성도님들을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를 생각케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을 정리하고자 이렇게 다시금 새벽기도회 설교 후 몇 자 적어보는 것입니다.
저는 사무엘상 1장9-18절 중심으로 엘리 제사장과 한나와의 대화 가운데서 한 세 가지 위로의 사역의 원리를 찾아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이 세 가지 원리를 제 자신의 위로의 사역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첫째로, 위로의 사역 원리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로버트 스트랜드의 “위로의 영성”이란 책을 보면 머리말에서 헨리 나우웬은 ‘돌봄(care of soul)은 같이 있어 주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돌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 왠지 우리의 분주한 마음은 고통당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1장9절을 보면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올라갔었을 때 “제사장 엘리는 여호와의 전 문설주 곁 그 의자에 앉았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나가 괴로움 가운데서 여호와의 집에서 기도하고 통곡하고 있었을 때 엘리 제사장은 과연 어떻게 한나 성도와 함께 하였는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드는 생각은 유부녀 여성도가 홀로 교회에서 통곡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과연 목사가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드는 것입니다. 신학교에서 상담학인가를 공부하면서 그러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 조심하여 될 수 있는데로 한 교회 건물에 목사와 여성도가 함께 있는 것을 피하라고 배운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이 가르침을 엘리 제사장에게 적용한다면 그는 한나가 여호와의 집에 들어와 간구할 때에 문설주에도 앉아 있지 말아야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 제사장은 여호와의 집 문설주에 앉아 있었고 더 나아가서 사무엘상 1장26절을 보면 그 당시엘리 제사장은 한나 “곁에”(beside you)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괴로운 한나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에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이 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꼭 무엇인가를 (말)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낄 때가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저 곁에 있어 주는 것도 큰 위로와 힘이 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아무 말이 필요가 없을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저 침묵 속에서 고통당하는 사랑하는 이 곁에 함께 잠잠히 있어 주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 때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위로의 사역 원리는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로마서 12장15절 말씀에 근거한 위로의 사역 원리입니다.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실천으로 옮기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제 마음에 ‘brokenness’(부서짐)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슬픈 여자”(15절) 한나가 나옵니다. 그녀는 자기 남편 엘가나의 또 다른 아내인 브닌가로 인하여 울었던 여자입니다(7절). 그래서 그녀는 마음이 괴로워서(10절) 하나님의 전에 올라가 자기의 심정을 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15절).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엘리 제사장은 한나가 속으로 말하며 입술만 동하고 기도하고 있었을 때 그녀의 입을 주목하면서(12절) 그녀가 독주에 취한 줄 착각한 것입니다(13절). 그러므로 그녀에게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14절) 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엘리 제사장은 섞불리 잘못 판단하여 슬픈 여자인 한나를 “악한 여자”(16절)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람을 더 괴롭게 만드는 말입니까? 어찌하여 슬픈 여자를 악한 여자로 취급하는 발언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러나 우리 또한 엘리 제사장과 별 다를바가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겉 모습을 보고 섞불리 판단하고 정죄하는 죄악된 경향이 우리 인간에게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 자신의 생각과 기준과 경험 또는 편견 속에서 함부러 상대방에 대하여 생각하고 속으로 먼저 판단하는 경향이 어느 누구에게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좀 더 함께 있는 가운데 잠잠히 기다리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한 가운데 상대방으로 하여금 마음 문을 열고 자신의 괴로운 심정을 토해내도록 함께 하였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면 적어도 한나와 대화를 시작하되 바른 질문을 던져서 상대방으로 말할 기회를 줬으면 어떠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러나 엘리는 이상하게도 기도하고 있는 한나의 입을 주목하였고 그녀의 마음은 주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점은 자신의 두 제사장 아들인 홈니와 비느하스(3절)가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2장12-17절) 엘리 제사장은 무지하였고 또한 나중에 가서 알았어도 면책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3장13절 – “그가(엘리) 자기 아들들이 저주를 자청하되 금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자기 아들들의 범죄를 면책하지 않고 오히려 괴로워하는 한나에게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1장14절)고 면책하는 이 엘리 제사장을 보면서 위로의 사역에 있어서 사역 자체보다 사역자의 영적으로 깨어있음과 영적 민감함 등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케 되는 것입니다. 즉, 위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사역자가 성령충만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위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영적 민감한 가운데서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지체들을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섞불리 속으로 판단하는 경향을 절제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개인의 편견이면 더욱더 절제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아파하는 형제, 자매와 함께 아파하기를 기원하는 마음으로 다가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파하는 형제, 자매가 자신의 아픈 마음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열때까지 앞에서 잠잠히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의 귀를 활짝 열고 그 아픔 마음의 고통 소리를 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그 소리가 작다고 생각할찌라도 상대방에게는 큰 소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아니될 것입니다.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며 느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고통을 내 마음에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서져가는 마음으로 마음이 무너진 형제, 자매들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아파하고 함께 울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위로의 사역 원리는 ‘중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한나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엘리 제사장은 한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너의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장17절). 이제 한나의 이야기를 듣고 그녀의 심정을 알게된 엘리 제사장은 그녀와 같은 마음이 되어 함께 하나님께 기원하는 모습을 우리는 보는 것입니다.
고통을 당하는 형제, 자매를 위하여 중보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헌신이 없이는 습관적인 중보기도가 되기가 싶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교제함에 있어서 서로에게 헌신하지 않고서는 같은 마음을 품기가 불가능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함께 하는 것과 함께 우는 것은 중보기도함에 있어서 꼭 필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함께 하고 싶어도 함께 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요? 예를 들어 거리상 서로 너무나 떨어져서 만날 수가 없을 때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요? 저는 개인적으로 제한된 상황 속에서라도 마음과 마음의 대화를 하는데 헌신하면 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습니다. 오히려 서로에게 거리가 있을 때에 나누는 마음과 마음의 대화를 통하여 주님 안에서의 형제, 자매 관계가 나름대로 더 깊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안에서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 서로를 위하여 중보기도할 때에 우리는 비록 거리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영으로 또는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고통당하는 형제, 자매들을 위하여 중보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사랑의 표현이요 또한 특권인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고통당하는 형제, 자매를 위하여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선이요 죄인 것입니다. 우리는 중보기도하되 성령님의 인도하심따라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결핍된 가운데서 누군가를 위하여 중보기도한다는 것은 왠지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서로의 관계에 헌신해야 합니다. 헌신이 없는 관계는 주님 안에서 사랑의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헌신하여 마음과 마음의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아픔을 품고 주님의 마음으로 중보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왠지 그러한 중보기도는 우리를 거리를 초월하여 한 마음을 품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서로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위로 받기 보다 위로를 주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내 고통과 내 아픔, 내 괴로움이 크게 보이고 느껴질 때 일수록 위로를 받기보다 위로를 주는 일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내 마음도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위로의 사역의 세 원리를 우리 삶 속에 적용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함께 하며, 함께 울며, 함께 기도하는 이 위로의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교회 안에서는 바나바와 같은 위로자들이 많이 세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불타는 위로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하는,
제임스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