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2)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룻기 4장 6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실용적인 선택을 해야 합니까 아니면 비실용적인 선택이지만 성경적인 선택을 해야 합니까?
지난 번 룻기 1장 15-17절 중심으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라는 제목 아래 선택에 기로에 서 있었던 세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사람은 엘리멜렉으로서 그는 풍족한 가운데 있었으면서도(1:2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a famine)이 들었을 때 잠시[(1절) “우거”] 위기를 모면하고자 살고 있던 유다 베들레헴을 등지고 모압 지방으로 이사갔습니다(1절). 그의 실용적인 선택의 결과는 모압 지방에서 결국 생명을 잃는 것이였습니다. 흉년에 자신의 풍족함을 지키려다가 결국 자기 생명을 잃고만 것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죽은 엘리멜렉의 두 아들인 말룐과 기룐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방인들인 모압 여인들을 아내로 삼았습니다(4절). 유다 땅으로 돌아가서 같은 동족인 유대 여인들을 아내로 삼았어야 하는데 그들은 모압 땅에 살면서 모압 여인인 오르바와 룻을 아내로 삼은 것입니다. 그들의 실용적인 선택의 결과는 자기들의 아버지처럼 생명을 잃었습니다(5절). 마지막 세 번째 사람은 바로 오르바와 룻의 선택입니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권면으로 며느리 오르바는 그녀의 백성과 그녀의 신을 선택하고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유다 땅으로 가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실용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며느리 룻은 자기의 동서와 달리 비실용적인 선택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자기 고향인 모압 땅을 선택하기보다 시어머니가 가시는 곳인 유대 땅을 선택하였고, 자기 백성인 모압을 선택하기보다 시어머니의 백성인 유다 백성을 선택하였으며 자기의 모압 신들을 선택하기보다 시어머님의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16절). 룻은 성경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녀는 믿음으로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룻은 그녀의 기업 무릇 자인 보아스와 결혼하여(4:10)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습니다(17절). 그리고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을 그리고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십니다. 그러므로 룻은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지게 됩니다(마1:5).
오늘은 룻기 4장 6절 중심으로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2)”라는 제목 아래 선택에 기로에 서 있었던 두 사람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두 사람 다 오늘 성경을 보면 “기업 무를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기업 무를 자”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기업을 무를 자"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고엘이라는 단어인데 '되찾다', '구속하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고엘을 두는 제도는 하나님께로부터 할당받은 기업을 영구히 보존하고, 혈족을 유지하며, 그리고 부당한 피해를 당했을 경우 이를 보상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났습니다. 따라서 고엘(Goel)이 된 자는 '고엘의 의무'를 감당해야 했는데, 그것은 곧 (1)가난한 혈족의 땅을 도로 사주어야 했고(레 25:25,26), (2)부당한 피해를 당한 친족을 위해 복수할 책임을 져야 했으며(민 35:12,19,21), (3)그 친족의 미망인과 결혼하여 대(代)를 이어주어야 함은 물론, 심지어 그 친족의 죄값을 대신 받기까지 했습니다(민 5:8) (인터넷).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첫 번째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던 기업 무를 자는 바로 기업 무를 자인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었습니다(3:12). 그에게는 두 가지 선택권(option)이 있었습니다.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이행하던지(13절) 아니면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던지(4:6) 그는 둘 중에 하나는 선택했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보아스는 룻에게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그녀에게 이행코자 아니하면 자기가 그 책임을 그녀에게 행하겠다고 하나님의 사심으로 맹세하였습니다(3:13). 그리고 나서 보아스는 성문에서 만난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성읍 장로 십 인을 청하여 증인으로 세워(4:1-2)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3-4절). 그리했을 때 그 기업 무를 자는 “내가 무르리라”(4절)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찌니라”(5절)고 말했을 때 그는 마음이 변하여 자기의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그 권리를 이양하였습니다(6절).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자기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6절). 무슨 손해입니까? 이방인 모압 여인인 룻과 결혼하므로 오는 손해입니다. 웃기지 않습니까? 그 기업 무를 자는 처음에 보아스가 나오미가 관할하고 있는 죽은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자기가 나오미의 손에서 사는 것(4절)만 얘기했을 때에는 손해볼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기업을 무른다고 말했다가 보아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한다(5절)라는 말을 듣고서는 자기의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한 것(6절)이 어이가 없지 않습니까? 우리가 볼 때에 이 기업 무를 자의 변심이 어이가 없어 보일지라도 그 사람에게는 너무나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옳바른 선택히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엘리멜렉의 소유지인 밭만 산다는 것은 사업적으로 생각해 볼 때 죽은 자기 친족의 밭을 사는 것은 자기에게 유익이되면 되었지 결코 손해가 되는 일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그 밭을 사는 날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해서 그녀의 죽은 전 남편인 말룐의 이름으로 그 기업을 잇게 하여야 한다는 것(5절)은 충분히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손해가 될 수 있었기에(6절) 그는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하고 보아스에게 그 권리를 이양한 것입니다. 무엇이 손해입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어떻게 그 기업 무를 자가 유대인 여인도 아닌 이방인이 모압 여인과 결혼하여 유대 땅에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분명히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인데 그 율법을 어기고 이방인 룻과 결혼하여 유대 땅에서 살아간다면 그 얼마나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손해가 되겠습니까? 그것도 과부 이방 여인과 결혼해서 유대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 이 얼마나 그에게 손해가 되겠습니까? 그리고 결혼해서 순수한 유대인 피가 흐르는 아이가 아니라 혼혈아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기업 무를 자는 충분히 자기에게 손해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에 그는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가 생각한 것처럼 죽은 엘리멜렉의 소유지와 그의 아들인 죽은 말룐의 처인 룻과 결혼하여 기업을 무르는 일이 손해였을까요? 비록 그 기업 무를 자가 보기엔 손해라고 생각하여서 기업 무를 권리를 포기했지만 보아스는 그리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보아스가 선택에 기로에 서 있었던 두 번째 사람이였습니다. 보아스는 자기보다 더 가까운 친족과 달리 모압 여인 룻과 결혼하여 기업을 무르는 일을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는 그리 생각하였을까요? 그 이유를 한 마디로 말하자면, 보아스는 모압 여인 룻이 “현숙한 여자”(a woman of excellence)인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3:11). 그는 룻이 남편이 죽은 후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특히 시모에게 순종한 것(2:22-23; 3:4-5)]과 고국인 모압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유다 백성에게로 온 일을 분명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2:11). 더 나아가서, 그는 모압 여인 룻이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2절). 보아스는 그의 육의 눈으로 룻이 유대 여인이 아니라 이방 여인이라는 사실을 보기보다 그의 영의 눈으로 시모인 나오미의 하나님을 선택한 것(1:16)과 그 하나님의 날개 아래 보호를 받으로 온(2:12) 룻의 신앙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룻이 자기에게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함을 경험하였기에(3:10) 그는 룻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국 보아스는 자기보다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친족이 선택하지 않은 룻을 선택하여 그녀와 결혼하여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을, 그리고 다윗의 혈통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저는 오늘 선택에 기로에 서 있었던 그 기업 무를 자와 보아스를 묵상할 때 한 두 가지 교훈을 받게 되었습니다. 첫째로 기업 무를 자를 생각할 때 얻는 교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좀 손해도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 사람들은 이 기업 무를 자처럼 손해 보는 일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느 누가 손해보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가 묵상했듯이 룻과 결혼하는 것은 손해가 아니라 오히려 축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부 룻이 이방 여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 기업 무를 자는 그녀와 결혼하는 것을 축복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그는 룻이란 여인이 현숙한 여자인 줄을 알지 못했기에 그녀와 결혼하는 것을 손해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와 달린 보아스는 룻이 이방 여인이었을지라도 그냐가 현숙한 여자인 줄 알고 있었기에 그녀와 결혼하는 것을 손해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현숙한 여자 룻을 놓치지 않고 그녀를 선택하여 결혼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할 때 손해라고 여겨지는 것은 어쩌면 손해가 아닐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손해라는 생각하고 있는 원인인 우리의 불신앙과 이기심과 계산적인 사고 방식 입니다. 문제는 현숙한 여자를 현숙한 여자로 못보는 우리 자신이지 그 현숙한 여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둘째로 보아스를 생각할 때 얻는 교훈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숙한 사람 즉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왠지 저는 보아스를 생각할 때 예수님이 생각납니다. 그 이유는 보아스는 참된 기업 무를 자이신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보아스가 죽은 말룐의 소유지인 밭을 기업으로 무른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을 예수님의 보혈로 값주고 사시사 진정한 약속의 땅인 천국을 우리에게 기업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치 보아스가 이방 여인 룻과 결혼한 것처럼 천국에서 이뤄질 결혼은 신랑되신 예수님과 신부된 영광스러운 교회로서 여기서 교회는 비록 이방인들이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는 이방인들이거든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러한 큰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우리를 돌아보고 계시는 것입니까? (2:10)
-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 왜 내게 굳센 믿음과 또 복음 주셔서 내 맘이 항상 편한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 왜 내게 성령 주셔서 내 맘을 감동해 주 예수 믿게 하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 주 언제 강림하실지 혹 밤에 혹 낮에 또 주님 만날 그 곳도 난 알 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잘 아는 주님 늘 돌보아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찬송가 410장 – “아 하나님의 은혜로”)
신랑되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