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1)
“나오미가 또 가로되 보라 네 동서는 그 백성과 그 신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룻이 가로되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서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룻기 1장 15-17절).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유다 사람 엘리멜렉(나오미의 남편)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 선택의 기로란 흉년이 든 유다 땅(1절)에 계속 사는 것이냐 아니면 다른 지방으로 이사가는 것이냐였습니다. 그 때 엘리멜렉이 선택한 것은 가족식구들인 부인 나오미와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과 함께 고향인 유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이사가는 것이였습니다(1-2절). 왜 그는 이러한 선택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유다 땅에 흉년이 들었기 때문입니다(1절). 그리고 그가 모압으로 이주한 동기는 도피였습니다. 즉, 엘리멜렉은 그의 가족 식구들과 함께 흉년이 든 유다 땅을 떠나 모압으로 도피한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그는 실용적인 선택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흉년이 듣 유다 땅에서 사는 것보다 모압 지방에서 사는 것이 실용적인 관점으로 볼 때 바른 선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그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살면서 그의 삶이 풍족했었는데(21절) 흉년이 유다 땅에 왔기에 그 땅을 떠나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것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선택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용적인 관점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선택을 한 엘리멜렉은 모압 지방으로 이주한 후 그 이방인 땅에서 죽습니다(3절).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3절). 적어도 흉년이 듣 유다 땅에 살 때는 풍족한 가운데서 네 식구가 살았었는데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도피한 후에는 네 식구가 아니라 세 식구만 남았습니다. 모압 지방으로 와서 풍부한 물질은 잃지 않고 보존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귀한 생명은 잃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엘리멜렉은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을 때 옳바른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압 지방에서 엘리멜렉은 죽은 후 부인 나오미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그 선택의 기로란 그녀의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지금 거주하고 있는 모압 지방에서 아빙인 모압 여인하고 결혼시키느냐 아니면 유다 땅으로 돌아가 유대 여인과 결혼을 시키느냐는 것이였습니다. 물론 나오미는 유다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기와 두 아들처럼 모압 지방에 사는 유대 여인들이 있으면 그 여인들을 며느리로 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선택은 유다 여인들이 아니라 이방인 모압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선택은 실용적인 관점에서 볼 때에는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이방인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데 나오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오르바와 룻을 며느리로 삼았습니다(4절). 그리고 그 모압 지방에서 거주한 지 십 년쯤에 나오미의 두 아들인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습니다(5절). 적어도 흉년이 듣 유다 땅에 살 때에는 풍족한 가운데서 네 식구가 살았었는데 흉년을 피해 모압 지방으로 도피한 후에는 네 식구가 아니라 이젠 나오미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물론 두 며느리도 남긴 했지만). 나오미는 귀한 세 사람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이 보실 때 나오미는 올바른 선택을 한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흉년이 든 유다 땅에서 모압 지방으로 이주하는 엘리멜렉의 선택이나 두 아들을 모압 여인과 결혼시키는 나오미의 실용적인 선택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비극이었습니다. 네 가족 식구들 중 세 명이나 모압 지방에서 죽었습니다. 죽음의 고통과 아픔의 세월을 보내면서 가족들의 상실을 뼈저리게 경험하였습니다. 두 아들의 이름이 이러한 사실을 증거합니다. “말론”이란 이름의 뜻은 “질병”이고, “기룐”은 “상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십 년이란 세월을 낭비하였습니다. 룻기 1장 1절에 나오는 “우거”라는 말은 “잠시 머문다”는 뜻인데 룻기 1장 4절을 보면 10년의 세월히 흘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지름길을 찾았으나 더 긴 시간이 낭비된 것입니다(프리셉트 성경공부 교제).
모압 지방에서 거주하신 십 년 동안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나오미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6절) 나서 선택을 합니다. 그 선택은 두 며느리와 함께 모압 지방을 떠나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였습니다(6-7절). 그러다가 나오미는 자신의 선택을 좀 변경하여 두 며느리 함께 유다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혼자 유다 땅으로 돌아가기로 선택을 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두 며느리에게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8절)고 이릅니다. 그리했을 때 두 며느리의 선택은 자기들의 친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기 보다 시어머니인 나오미와 함께 유다 백성에게로 돌아가는 것을 선택하였습니다(10절). 그리했을 때 시어미니인 나오미는 다시 그들에게 “되돌아 가라”(12절)고 권면하면서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라고 말했습니다(13절). 그 때 며느리 오르바는 나오미에게 입맞추고(14절) 자기 백성과 자기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15절). 어느 면으로 보면 오르바의 선택은 실용적이며 어느 누가 봐도 당연한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며느리인 룻은 시어머니의 백성과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선택하였습니다(16절). 룻이 그녀의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16-17절). 왜 룻은 오르바처럼 실용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비실용적인 선택을 한 것일까요? 왜 룻은 모압 여인이요 남편을 잃은 과부로서 과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좇아 자기에게 이방 나라인 유다 땅으로 가기로 선택하였을까요? 여러분 같으면 룻과 같은 비실용적인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믿음으로 결정한 룻의 선택의 결과는 유다 땅 베들레헴에서 친족 중 유력한 자 보아스를 만나고(2장) 그리고 그와 결혼하여(4장) 다윗의 할아버지인 오벳을 낳습니다(4:17). 그리고 오벳은 이새를 이새는 다윗을 그리고 다윗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야이신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결국 룻의 믿음의 선택을 통하여 룻이란 이름은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게 되었습니다(마1:5). 이 얼마나 귀한 믿음의 선택의 결과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룻과 같은 선택을 하기보다 오르바과 같은 선택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룻의 비실용적인 선택보다 오르바의 실용적인 선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선택보다 비성경적이요 인본적이며 세상적인 선택을 선호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선택하기보다 보는데로 선택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좁은 길, 힘든 길, 광야의 길보다 넓은 길, 편한 길, 도시의 길을 더 좋아하는 옛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가 옛 본능대로 선택을 한 후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그 넓고 편한 길을 걸으면서 모든 일을 다 잘 되어갈 때 우리가 바른 선택을 했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잘 선택하여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고 건강도 얻고 편안함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실용적인 선택이 비성경적인 선택이요 그리고 우리의 비성경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얻었을지라도 제일 중요한 우리의 영혼과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는 줄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마치 다윗이 도시 한 복판에 있는 왕궁에서 밧세바를 간음하고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인 것을 꾀하여 결국 전쟁터에서 우리아를 죽인 것처럼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큰 죄를 범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부도 잃고 명예와 권력도 잃고 건강도 잃어버리곤 합니다. 한 순간에 우리는 다 잃어버리고 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나 명예나 건강이나 다 잃어버려도 우리의 영혼과 신앙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저는 그 잃어버림이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다 잃어버린 후에도 우리가 우리의 영혼과 신앙을 되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최고로 불쌍한 자들입니다. 이것은 비극 중에 비극입니다.
우리 이민 교회를 볼 때에 점점 더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엘리멜렉과 같은 선택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흉년이 든 요즘은 그 흉년을 피하고 자기의 부를 지키든지 또는 부를 얻고자 우리는 여기 저기로 이주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녀 교육을 위해서라도 여기 저기로 이주합니다. 그리고 더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오미와 같이 자기 자녀들을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결혼을 시키고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는 자와 멍에를 매게 해서는 아니되는대도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최고를 주고자 애쓰며 또한 준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 자녀들이 오르바처럼 하나님의 백성보다 세상 사람들을 선택하고 하나님보다 세상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실용적이지만 비성경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녀들의 영혼과 신앙을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세상의 죄악된 것들로 중독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길에서 돌이킬 생각을 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모압의 신들과 모압 백성들을 선택한 오르바처럼 세상의 우상들과 세상 사람들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언제 우리는 룻처럼 하나님을 선택할 것입니까? 언제 우리는 룻처럼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선택할 것입니까? 언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흘리신 보배로운 피를 의지하여 우리의 죄악을 자백하며 회개하면서 우리의 비성경적인 선택에서 돌이켜 성경적인 선택을 할 것입니까? 언제 우리는 모압 지방에서 유다 땅으로 다시 돌아온 나오미처럼 세상에서 돌이켜 주님께로 돌아올 것입니까? 바라기는 나오미(“나오미”의 뜻: “나의 즐거움”)처럼 괴롭게 하심이나 쓴 맛(“마라”의 뜻)(20절)을 본 후라도 하나님께 돌아오는 은혜를 덧입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을 때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고 믿음으로 선택하여 하나님의 즐거움이 “나의 즐거움”(“나오미”)이 되는 은혜를 경험하기를 원하는,
제임스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