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한 자의 작정
[고린도전서 2장 1-5절]
여러분 작정 헌금이란 말 들어 보셨습니까? 작정헌금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웹싸이트에 보닌까 작정헌금이란 “무엇을 ‘작정’하고 주님께 ‘드리는’ ‘돈’입니다”라고 써 있더군요. 다시 말하면, 작정헌금이란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리기로 결심하고, 그 목적을 위해 쓰여질 것을 바라면서 바치는 돈”이라는 말입니다(인터넷). 주로 교회에서 작정헌금을 하십시다 할 때에 그 목적은 성전건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혹시 여러분은 다른 목적으로 작정헌금을 하는 것을 보셨습니까? 예를 들어 구제나 전도나 선교를 위하여 작정헌금을 하는 것을 보신적이 있으십니까? 또한 작정헌금 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작정하여 헌신해야 할 것은 없는지요?
세상의 지혜를 구하였던 헬라인들의 입장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미련한 자였습니다. 그리고 표적을 구하면서 강한 메시야를 기다렸던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바울은 연약한 자라고 밖에 볼 수가 없었을 것임. 이렇게 세상 사람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한 바울이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면 작정(결심)하는 모습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For I determined to know nothing among you except Jesus Christ, and Him crucified). 오늘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세상 사람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한 자의 작정”이란 제목 아래 과연 바울이 무엇을 작정했는지, 그리고 그는 자신이 작정한 대로 어떻게 실천에 옮겼는지를 오늘 본문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은혜를 겸손히 받아 저와 여러분 또한 바울처럼 작정하여 실천에 옮기는 삶을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바울이 작정한 것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는 것이였습니다(2절). 무슨 말입니까? 무지함을 추구하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두 가지를 아는데 헌신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 두 가지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입니다. 저는 이 사도 바울의 작정을 묵상할 때 제 마음에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그 당시 세상의 지혜를 추구했던 불신자 헬라인들이나 표적을 구했던 불신자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이 미련하고 연약한 것인데 왜 바울은 그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의 못박혀 죽으심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했을까?’ 그러면서 저는 제 자신에게 이러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습니다: ‘지원아, 너는 지금 세상 사람들이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거나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모하마드나 석가모니와 같은 그저 위대한 선생들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도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의 못박혀 죽으신 것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바울과 같은 작정을 하시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암흑의 시대라 저는 생각합니다. 마치 구약 성경(말라기)과 신약성경(마태복음) 사이에 400년이 암흑의 시대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러한 암흑의 시대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왜 구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와 신악 성경이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 사이에 400년이란 공백 기간이 왜 암흑 시대였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부재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내서 말씀을 주시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그 400년 기간을 가리켜 침묵기 또는 암흑시대라고들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바로 저와 여러분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이 바로 침묵기요 암흑시대입니다. 아모스 8장 11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찌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사람이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구하려고 달려 왕래하되 얻지 못하리니”.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가뭄을 맞이했습니다. 여기 저기 하나님의 말씀을 구하려고 다녀보아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여기 저기서 홍수처럼 쏟아져 나아고 있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듣는 것은 변질된 ‘복음’입니다. 이 세상은 지금 가짜 복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된 성도들, 진리를 사모하는 하나님의 양 떼들은 굶주려 여기 저기 헤매며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기독교 인터넷 웹싸이트를 보닌까 구약과 신약 사이에 400년 공백 기간이 있는 이유에 대한 대답을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하였습니다: “신약 성경과 구약 성경 사이에 400년이라는 기간이 있는 이유는 그만큼 유대교회가 깊은 어둠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에 각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유대교회를 깨우시고 성경을 기록하게 섭리하셨는데,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오는 400년의 기간 동안 유대교회는 그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깊은 암흑 속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이 4천 년 동안 기다려왔던 메시아를 거절하게 된 것입니다”(인터넷).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왜 예수님이 약 2천년 전에 유대 땅에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거절한 이유를요? 그러면 지금 약 2천년이 지난 후 왜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거절하고 있는 것일까요? 같은 기사 내용의 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구약과 신약 사이의 400년 동안 성경이 없었던 이유에 대한 답변을 찾아보면 그 속에서 우리는 유대교회가 메시아를 거절하게 되었던 배경을 보게 됩니다. 예수께서 가장 유대교회가 어두웠을 때 초림하셨던 것처럼, 이 세상 종말에도 기독교회가 가장 깊은 어둠 속에 있을 때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유대교회가 초림을 준비하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하여 소수의 사람들만 메시아를 영접하고 신약 시대를 여는 주인공이 되었던 것처럼, 말세에도 기독교회는 주의 재림을 준비하는 일에 철저하게 실패함으로써 적은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짐승의 표를 거절하고 주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인터넷).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참된 지식입니다. 우리는 이 지식을 추구해야 합니다. 비록 헬라인들이 보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미련하게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결코 그들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폐하신 세상의 헛된 지식을 우리는 추구해서는 아니됩니다. 그러한 세상적인 헛된 지식은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전파하는 것에 걸림돌 밖에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사도 바울과 같은 이러한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빌 3:7-8a).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 즉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일을 아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비록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결코 강한 메시야가 아니요 참으로 자기 자신도 구원하지 못하는 연약한 예수로 생각할지라도 우리는 이 십자가에 행하신 예수님의 일을 아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결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유대인들이 생각한 것처럼 결코 거리끼는 것, 즉 걸쳐 넘어지게 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사도 바울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갈 6:17).
마지막 둘째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는데 그는 그 작정한 것을 어떻게 실천에 옮겼습니까? 오늘 본문은 한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첫째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이 보기에 웅변가처럼 말 잘함과 철학자처럼 우월한 지혜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2장 1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이미 작정하였었기에 그가 전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했을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란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은 곧 바울은 전에 고린도 교회에서 사역을 하였을 때 유창하게 말을 잘하는 웅변가처럼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고 또한 “철학의 풍채”를 가지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상상이 되십니까? 여러분은 바울이 우리 승리장로교회에 와서 설교를 하는데 말 잘하는 웅변가처럼 너무나 유창하게 설교도 막히지 않고 술술이 말이 잘 나오는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바울이 강단에서 설교하는 모습이 그 당시 헬라인 철학자들처럼 드러나 보이는 모습이 너무나 학문적이고 지혜롭게 보이는 등등 그러한 바울의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만일 바울 목사님이 그렇다면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 우리들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너무나 설교를 잘한다’, ‘와 저렇게 풍채가 목사처럼 보인다’ 등등… 이러한 말을 한다면 결국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그 목사님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말씀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그 목사님의 웅변 실력과 풍채에 초점에 맞추지 않겠습니까? 요즘 저와 여러분이 듣고 있는 많은 목사님들의 복음 전파 설교에 예수님과 십자가가 있습니까? 전적으로 타락한 죄인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무조건적으로 선택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 전파 설교를 듣고 계십니까? 아니면 예수님을 믿고 선행을 하므로 구원을 받는다는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파하는 거짓 복음을 듣고 계십니까? 아니면 아예 무엇이 참된 복음이고 무엇이 거짓된 복음인지를 아직 구별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저는 주님이 세우셨고 지금도 세우시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바울처럼 오늘 이러한 결심을 합니다. 저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사람이 보기에 웅변가처럼 말잘함과 철학자처럼 우월한 지혜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합니다. 이 결심을 제가 신실하게 지켜 나아갈 수도 있도록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 또한 여러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러분들 또한 복음을 전하매 있어서 사람이 보기에 말잘하고 풍채가 있어보이고 등등 이런 겉모양에 초점을 맞추어 실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메시지를 희석시키는 복음 전도자가 아닌 진정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알아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는 참된 복음 전도자로 세움 받기를 위하여 기도하겠습니다. (2) 둘째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에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2장 4절을 보십시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자기가 전에 고린도에 그들 가운데 거하고 있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오늘 본문 3절에서 봅니다. 왜 바울은 고린도에 있을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는가 의문이 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를 John MacArthur 목사님은 한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MacArthur): 첫째로, 바울이 약하다고 말한 이유는 그가 고린도에 오기 전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많이 매를 맞고 옥에 갇히는 등(행16:22-24)을 많이 당하였기에 아마도 그는 육체적으로 약해있을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거할 때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던 이유는 그의 미션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함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복음 전파함의 심각성을 느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구원을 이루라고 명하고 있는데(빌2:12) 과연 저와 여러분은 전도자들로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자기의 말(메시지)과 전도함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말로 하지 않았고 다만 성령의 능력의 나타남으로 하였다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4절).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얼마나 많은 유혹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보다 우리 자신의 능력을 의지하고 싶은 유혹, 복음은 구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믿지 못하고 너무나 많은 때에 우리는 어떻게 말을 잘해서 상대방을 설득시켜 예수님을 믿게 하고 싶은 충동이 들곤 하지 않습니까?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람을 설득시켜 예수님을 믿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하시지 않으셨나요?(행16:14) 사도 바울인 복음 전파함에 있어서 오직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한 목적은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2장 5절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만일 바울이 다른 지혜로운 웅변가들처럼 사람에 근거한 지혜로 다른 사람을 믿게 하였다면 그 믿음의 근거는 사람이지 결코 하나님이 아니기에 바울은 복음 전파함에 있어서 오직 성령을 나타남과 능력을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복음)를 듣는 자들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성령 하나님께서 마음 문을 열고 예수님을 믿게 하사 구원케 하시길 원하여 오직 성령이 나타남과 능력으로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그 믿음의 근거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5절). 저 또한 사도 바울처럼 저를 통하여 전파되는 복음이 참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요 또한 저의 복음 전파가 사람의 지혜의 권하는 말이 아니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되어지길 기원합니다. 결코 저는 여러분들의 믿음이 인간이 지혜에 근거하길 원치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지혜가 끝날 때에 여러분들의 믿음도 끝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의 영원성을 보존하기 위해선 저와 여러분들의 믿음이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만 의존되어야 합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저는 오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마음으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세상 사람 보기에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은 미련하고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 이유는 저와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복음)는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는 미련하고 연약한 것입니다. 비록 저와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할지라도 우리는 작정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오늘 작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예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복음)를 전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살든지 죽든지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귀 영광 받으시길 기원합니다.
오직 예수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를 전파하기를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