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보기에 미련한 것과 약한 것

 

 

[고린도전서 1장 25-31절]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약하게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자랑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지난 주일 고린도전서 1장 18-24절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의 도”에 대해서 묵상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고 십자가의 못박혀 죽으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이 십자가의 도가 오직 부르심을 입은(24절) 구원을 받은 바울이나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였지만(18, 24절) 세상의 지혜을 추구하였던 불신자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18절)이요 표적을 구했던 불신자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23절)이였다는 것을 우리는 배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복음)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1:16)이지만 예수 드리스도의 복음을 받지 않는 불신자들, 즉 멸망하는 자들에게는(18절) 미련한 것이요 거리끼는 것이였습니다.  세상의 지혜인 철학을 추구하였던 헬라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도는 미련한 것이였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폐하신 이 세상의 지혜로(19-20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었기에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선택하신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방법에 있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사 인간의 몸을 입게 하시고 33년 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사 그의 백성들을 구원케 하신 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표적을 구했던 유대인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이 어떻게 들렸습니까?  유대인들은 구약에서 예언하였던 메시야가 오시면 그들을 로마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사회적 정의와 경제적 풍성을 가져다 줄 줄 기대하고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예수란 젊은이가 여기 저기 다니면서 많은 표적들을 행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기대하고 기다렸던 강한 메시야인 줄 알고 그를 유대인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처형당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보기엔 예수는 강한 메시야가 아니라 그저 연약한 한 인간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연악한 인간 예수를 전하는 사도 바울과 복음 전파자들의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걸쳐 넘어지게 하는 것이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기에 전도의 연약하고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고 지금도 기뻐하고 계십니다(21절).  비록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예수 십자가의 도(복음)가 미련하고 연약하게 보일찌라도 우리 예수님을 믿는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바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24절).  그러므로 구원 받은 우리가 보기에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한 것입니다(25절).  무슨 말입니까?  예수 십자가의 복음은 이 세상 지혜를 찾는 헬라인들이 보기에는 미련한 것이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이 보기에는 연약한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지혜와 능력이 충만하신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사람이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므로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지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을 이 세상들이 과연 지금 어떻게 보고 있을까요?  한 마디로, 세상 사람들은 저와 여러분을 미련하고 약하게 본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장 2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사람이 보기에 미련한 것과 약한 것”이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장 25-31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오늘 본문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Brothers, think of what you were when you were called)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무슨 권면의 말씀입니까?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은 그 때를 생각해 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그들의 구세주로 영접했을 때 그들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하였기 때문입니다.  2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무슨 말씀입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대다수가 육체적으로 우수한 조건 때문에 개종된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박윤선).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지혜롭고 능력있고 문벌이 좋아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사 부르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게 하시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 아니다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27-28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 그리고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자들들 선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게 하시사 예수님을 믿어 구원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난 주 한 기독교 웹싸이트 뉴스를 보닌까 “기독교, 이렇게 가다가는 망한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어 읽어보았음.  얼마전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을 해체하는 운동을 벌이겠다고 한 손봉호 교수님과 같이 예장고신에 속해 있으면서 ‘학생신앙운동’(SFC)를 함께 했고, 치열한 역사의식을 바탕으로 바른 기독교 세계관과 복음주의적 가치관 구현에 평생을 바친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님의 인터뷰 기사 내용이었습니다(인터넷).  이 인터뷰에서 이 교수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교회는 갈수록 커지거나 커지려고 하고, 큰 교회에 돈과 권력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영성을 품고 있으려면 주변에 있는 작고 가난한 이들을 돕고 섬기는 데 써야 합니다. 교회가 물질을 움켜쥐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교회는 스스로 작아져야 합니다. …  작은 교회가 된다는 것은 자기를 비우는 것입니다. '가난 실천'과 '작은 교회 만들기'와 같은 새로운 교회 개혁 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한국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교수님의 인터뷰 기사 내용을 읽으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우리 안에 교회가 커지는 것을 원하고 있으면 또한 돈과 권력이 집중되면서 우리 교회가 물질을 움켜쥐고 있으려는 풍부함의 위험을 보게 됩니다.  특히 저는 얼마전 새벽기도회 때 묵상한 신명기 17장 16-17절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교훈을 잊지 못하겠습니다.  그 교훈이란 “많음”이란 것이 우리를 미혹하여 옛 죄악된 본능으로 돌아가 하나님께 범죄할 수 있다는 위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일 그들이 이방인들처럼 왕을 원할 때 그 왕은 말(horse)과 아내와 은금이 많으면 안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만열 교수님이 말한 것처럼 교회는 작아져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자기를 비워야 한다는 말에 저는 동의합니다.  요즘 교회 안에는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똑똑하고 지혜로우며 학벌 좋고 돈 있는 사람들이 점점 더 모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한국 서울 강남 지역 교회에 큰 교회들에게 좀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큰 교회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고린도전서 1장 말씀에 비춰볼 때 저는 그 근본적인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 “세상의 약한 것들”, “세상의 천한 것들” 그리고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듣게 하시사 예수님을 믿어 구원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입니다(29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지혜롭게 여기고 강하게 여기며 문벌이 좋다고 생각하며 가진 것이 많이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을 자랑하기보다 우리 자신을 자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다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하며 자랑하기보다 우리 자신의 공로와 우리 자신의 능력과 우리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면서 우리 자신을 자랑하므로 말미암아 결국에 가서는 고린도 교회처럼 우리가 추종하는 지도자를 자랑하면서 교회 안에 당파를 지어 분쟁을 일으킬 수 밖에 없음(10-13절).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게 하게 됩니다(17절).  그래서 오늘 본문 27-28절에 와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며 멸시 받고 없는 자들을 택하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게 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시사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이유는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지 결코 사람의 공로와 사람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님을 저와 여러분이 알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30절에서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by His doing you are in Christ Jesus)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나 우리들은 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게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 예수님이 바로 저와 여러분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다고 바울은 오늘 본문 30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들은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31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주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Let him who boasts, boast in the Lord).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은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서 자기 자신을 구원하지 못한 무능력한 자, 약한 자로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는가 하면 마태복음 27장 39-44절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때 지나가는 자들이 자기 머리를 흔들여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40절)고 예수님을 모역하였고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함께 “저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42절)고 예수님을 희롱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의 모역과 희롱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예수는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연약하고 무능력한 자다’가 아닙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보기에 자기 자신도 구원할 수 없는 무능력하고 연약한 예수님으로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련하고 약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시는 방법으로 저와 여러분들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 바로 저와 여러분이 오직 주님만을 자랑케 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 안에서 예수 십자가를 자랑케 하시고자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한 방법으로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동안 세상 사람들 보기에 미련하고 연약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사람이 보기에 미련하고 약한,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