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숙한 여인

 

 

[잠언 3110-31]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오래전 남가주에 있는 어느 대학에 누군가를 만나러 기숙사에 갔다가 거실에 있는 액자에 영어로 “현숙한 여인”(Noble woman)에 대한 잠언 31장 10-31절을 말씀을 수놓은 성경구절을 본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는 그 총각 형제가 성경 잠언 31장에 나와 있는 현숙한 여인과 같은 자매와 결혼하고 싶어서 사모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 그 형제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모든 총각 형제들이 아니라면 수많은 형제들이 잠언 31장 10-31절에 나와 있는 현숙한 여인을 자기의 미래 배우자로 꿈꾸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현숙한 여인”이란 말은 문자적으로는 “능력의 여인”을 의미하는데, 그것은 “도덕과 예의의 실행력 있는 여자”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저는 개인적으로 “현숙한 여인”이 성경 잠언 31장에만 나오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다가 2009년도엔가 룻기서를 읽다가 룻기 3장 11절에서도 “현숙한 여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내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말대로 네게 다 행하리라 네가 현숙한 여자인 줄을 나의 성읍 백성이 다 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이제 그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게. 내가 그대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겠네. 그대가 현숙한 여인이라는 것은 우리 성 주민들도 다 아는 일이네”]. 이 말은 보아스란 유대인이 룻이란 모압 여인에게 한 말로서 보아스는 성읍 백성들이 룻이 현숙한 여자인 줄 다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룻이 어떠한 여인이기에 보아스와 그의 성읍 백성이 룻이 현숙한 여자인 줄을 알고 있었을까 한 3가지로 묵상했었습니다:

 

첫째로, 룻은 은혜를 사모하는 여자였습니다. , 현숙한 여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그 은혜를 받은 룻은 자기는 이방 여인이어늘 어찌하여 자기 같은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돌아보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음을 고백했습니다(2:10). 그러한 가운데서 보아스로부터 위로를 받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들은 룻은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2:13). 자기를 가리켜 보아스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다고 말했습니다(13절). 이렇게 현숙한 여인인 룻은 겸손히 보아스의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제 자신이 먼저 현숙한 그리스도인이 돼야 함을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현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사모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리할 때 생각나는 말씀은 로마서 5장 20절입니다: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계속해서 들춰지는 저의 죄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깨달아가길 원합니다. 그리할 때 저는 시편 기자처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여호와여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알아주시며 인생이 무엇이기에 그를 생각하시나이까”(시 144:3). 또한 저는 점진적으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깨달아갈 때에 룻이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룻2:10)라고 고백한 말씀과 사도 바울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고백한 말씀(딤전1:15)처럼 ‘주님, 저는 죄인 중에 괴수인데 어찌하여 이렇게 저에게 크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지요?’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저 같은 죄인 중에 괴수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감당할 수 없기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저는 주님 앞에서 겸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치 룻이 보아스에게 “내 주여 … 나는 당신의 시녀의 하나와 같지 못하”옵니다(룻2:13)라고 말한 것처럼, 그리고 탕자가 아버지에게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한 것처럼(눅 15:21), 저 또한 주님께 ‘하나님, 저는 주님의 종의 하나와도 같지 못합니다(룻 2:13). 저는 죄인 중에 괴수이니 제가 하나님의 보배롭고 존귀한 자로 여김 받기를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사 43:4).

 

둘째로, 룻은 순종하는 여자였습니다. , 현숙한 여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씀에 순종하는 며느리였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말씀대로 다 행하는 순종하는 며느리였습니다(룻 3:5-6). 룻은 은혜를 아는 여인이었고 또한 그 은혜를 더욱더 사모하는 자였기에 겸손함 가운데서 순종하는 마음 자세가 돼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의 명에 아무 토를 달지도 않고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순종하되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가 “너는 목욕을 한 다음 몸에 향수를 바르고 제일 좋은 옷으로 차려 입고 타작마당으로 내려가거라. 그러나 너는 그가 저녁 식사를 끝낼 때까지 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그가 눕는 곳을 잘 알아 두었다가 잠이 들면 너는 그의 발치로 가서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워라. 그러면 네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그가 일러 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도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대로 다 하겠습니다”라고 한 후 실제로 “그 날 밤에 타작마당으로 내려가서 시어머니가 지시한 대로” 다했습니다(룻 3:3-6,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현숙한 여인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순종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제가 현숙한 그리스도인 되기 위해선 하나님의 풍족한 은혜를 깨달아 알아가는 가운데서 그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리할 때 생각나는 말씀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 말씀이 생각난 이유는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점진적으로 더욱더 알아가는 자는 더욱더 겸손해 질 수밖에 없을 뿐만 아니라[“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9절),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엡 3:8), “…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 1:15)]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받은 사명인 복음 증거하는 일을 완수함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행 20:24). 그러므로 저 또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깨달아 가는 신앙생활 속에서 더욱더 낮아지고 겸손해지므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복종하길 원합니다(빌 2:8).

 

마지막 셋째로, 룻은 인애를 베푸는 여자였습니다. , 현숙한 여자는 인애를 베풉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명에 순종하여 보아스가 누울 때에 그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웠던 룻은(룻 3:4, 7) 밤중에 놀라 돌이켜 룻을 발견한 보아스는 룻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주시기를 원하노라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10절). 이렇게 룻은 인애를 베풀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제가 현숙한 그리스도인 되기 위해선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더욱더 사모하는 가운데 그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더욱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보다 점진적으로 더욱더 충만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할 때 생각난 찬송이 바로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새찬송가 314장)입니다: “… 내 진정 소원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1절),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2, 3절). 제가 이 찬양 가사 대로 저의 진정 소원 주님을 더욱더 사랑하길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저를 보실 때에 제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 보다 나중이 더욱더 주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길 원합니다.

 

현숙한 여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사모하는 자요, 더욱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요 또한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입니다. 이러한 현숙한 여인은 진주보다 더 소중합니다(잠31:10,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혹시 ‘진주는 아픔의 보석이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저는 어느 한 인터넷 기사를 통해 왜 진주가 아픔의 보석인지에 대해 좀 알게 되었습니다. “조개가 먹이활동, 호흡활동 등 생존을 위한 갖가지 활동을 하는 동안 조개의 체내로 모래알이나 작은 벌레 등 이물질이 침투하여 살 속을 파고들게 되는데, 이때 조개는 그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분비물을 계속 분비한다고 합니다. 이물질이 들어와 견딜 수 없는 고통이 시작되면서부터 생명을 지키기 위한 싸움도 시작되고, 분비물이 얇게 한 겹 한 겹 싸임으로 ‘아픔의 결정체’는 자라난다고 합니다. 상처를 입을수록 분비물이 분비되어 더욱 크게 자라며 더욱 영롱해지는 보석이기에 진주를 가리켜 ‘아픔의 보석’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진주층, 곧 분비물 층이 두꺼울수록 광택은 더욱 아름다워지고 광택과 두께는 진주의 품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합니다. 진주층이 두꺼우며, 흠집이 없는 것이 바로 ‘극상품의 진주’가 된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마태복음 13장 4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이렇게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서 살 정도로 극히 값진 것이 진주인데 성경 잠언 8장 11절에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지혜는 진주보다 낫고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비교가 안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지혜가 값지고 중요하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잠언 31장 10절에서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들 르무엘 왕에게 ‘현숙한 여인(아내)은 진주보다 더 소중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지혜로운 어머니입니까? 사랑하는 아들 르무엘에게 진주보다 더 귀하고 값지고 소중한 현숙한 여인(아내)에 대해서 교훈하고 있는 르무엘의 어머니야 말로 지혜로운 어머니라 생각합니다. 왠지 저는 르무엘의 어머니가 아들 르무엘에게 진주보다 소중한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교훈한 이유가 그녀의 아들이 그러한 현숙한 여인을 찾아 아내로 얻길 바래서 그리 교훈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러면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본 진주보다 더 소중한 현숙한 여인의 가치는 한 마디로 어떠한 여인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 31장 29절을 보십시오: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세상에는 훌륭한 여성들이 많이 있지만 당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여성이오.' 하고 칭찬한다”]. 진주보다 더 소중한(10절) 현숙한 여인의 가치는 그녀의 남편이 보기엔(28절) “모든 여자보다 뛰어”납니다(29절). 그래서 그 남편은 자기의 현숙한 아내에게 “세상에는 훌륭한 여성들이 많이 있지만 당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여성이오.' 하고 칭찬”을 한다는 것입니다(29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녀의 자녀들은 자기 어머니인 현숙한 여인에게 “일어나 감사”한다[“그 자녀들은 자기 어머니를 고맙게 생각하며”(현대인의 성경)]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8절). 그러면 이러한 여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르무엘 왕의 어머니도 오늘 본문 10절 상반절을 보면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라고 말한 것을 보면 이러한 현숙한 여인을 우리가 “누가”(Who?) “어떻게”(How?) 찾을 수 있을까요?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체의 미만을 찾는 자는 이런 능력 있는 여자를 만나기 어렵다.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찾는 자만이 이런 능력 있는 여자를 만난다. 그런 아내는 하나님의 선물이다”(박윤선). 그러면서 그는 두 성경 구절을 말했습니다: “아내를 얻는 자는 복을 얻고 여호와께 은총을 받는 자니라”(18:22), “집과 재산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지만 슬기로운 아내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선물이다”(19:14,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잠언 31장 10절을 보면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그녀의 아들인 르무엘 왕에게(1절)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누가 현숙한 아내를 얻겠느냐? 그녀는 진주보다 더 소중하다”(현대인의 성경)](10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잠언 31장 10-31절 말씀 중심으로 “현숙한 여인”이란 제목 아래 한 6가지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현숙한 여인은 남편에게 신뢰를 줍니다.

 

오늘 본문 잠언 31장 11-12절을 보십시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그런 여자의 남편은 아내를 믿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일평생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남편을 해치지 않는다”]. 참 믿을 사람 하나도 없는 세상 같습니다. 사람을 믿었다가 실망하며 상처를 입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섣불리 누군가를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부부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혹시나 내 남편/아내가 다른 여자/남자하고 바람을 피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는 부부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한번 바람을 피워 부부의 신뢰 관계를 깬 배우자를 다시금 신뢰한다는 것은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지금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도 신뢰하지 못하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불신의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신뢰를 두텁게 쌓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짝이어 주신 우리 배우자와 신뢰를 두텁게 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4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신뢰를 두텁게 쌓기 위해선 제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신뢰를 하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부부는 서로를 신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수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뢰가 있을 때에야 만이 수평적인 사랑하는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신뢰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신뢰를 두텁게 쌓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2)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신뢰를 두텁게 쌓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줘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서로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면 할수록 그들은 서로를 더욱더 신뢰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를 신뢰하되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신뢰를 기대하기 이전에 먼저 상대방에게 신뢰를 줘야 합니다. 신뢰를 주된 그 사랑하는 상대방에게 신뢰할 만한 것이 있을 때에만 신뢰를 주기보다 신뢰할 만한 것이 없어 보일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그 사랑하는 사랑에게 신뢰를 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무조건적인 것처럼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줘야 합니다. 그러다가 실상 사랑하는 배우자에게 배반을 당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중심된 부부는 자기 백성에게 배반을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의지하므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나갑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그는 자신을 배신한 배우자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합니다. 우리의 명철로 생각할 때는 불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가능케 하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신뢰를 줘야 합니다.

 

(3)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신뢰하기 위해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듯이 그 사람 앞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거짓을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들은 서로를 속이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뿐만 아니라 서로들 앞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들이 어느 정도로 서로들 앞에서 진실 돼야 하는가 하면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빌 1:8)라고 서로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실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다 보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듯이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진실해야 합니다.

 

(4)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신뢰하기 위해선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못을 했을 때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변화하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고 그에게 거짓말을 뱉었다면 우리는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에게 우리의 잘못한 죄를 솔직하고 정직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다시는 똑 같은 잘못된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라고 헌신할 뿐만 아니라 그 헌신을 그에게 행동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우리에게 자기가 잘못한 죄를 용서를 구할 때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하되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을 우리 마음에 오랫동안 기록해 놓으면 아니 됩니다(고전 13:5). 하나님께서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우리) 죄악을 지워주”신 것처럼(시 51:1) 우리는 그/녀의 잘못한 것을 우리 마음에서 다 지워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를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기로 헌신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사랑하는 그를 신뢰하기로 재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변질될 수 있는 사랑하는 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오히려 주님 안에서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숙한 사람들로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1장 11-12절을 보면 잠언 기자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들인 르무엘에게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하니라”(10절)고 말하면서 그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런 여자의 남편은 아내를 믿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일평생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남편을 해치지 않는다”].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 르무엘 왕에게 진주보다 값진, 즉 천하의 모든 보물보다 귀한(박윤선)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둔 남편은 그 아내를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즉, 그 현숙한 여인의 남편은 그녀를 신뢰한다는 말입니다. 왜 그는 자기의 현숙한 아내를 신뢰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그 가까운 이유가 12절에 적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런 여자는 일평생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남편을 해치지 않는다”](12절). 즉, 현숙한 여인의 남편이 그녀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 현숙한 아내는 “살아 있는 동안에”(“일평생”)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일평생 자기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현숙한 여인은 선을 행하는 “선한 여인”이요 또한 남편에게 선을 행하되 일평생 그리한다는 것은 그녀는 “신실한 여인”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녀의 남편은 현숙한 자기 아내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가까운 12절에 나와 있는 이유 외에 왜 현숙한 여인의 남편이 그녀를 신뢰하는지 좀 더 궁극적인 이유를 오늘 본문 30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즉, 현숙한 여인의 남편이 그녀를 신뢰하는 이유는 그녀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현숙한 여인은 악을 미워합니다(8:13). 그리고 그러한 여인은 악을 미워할 뿐만 아니라 선을 사랑합니다(암5:15). 또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께 속한 여인은 악한 것을 본받지 않고 선한 것을 본받아 선을 행합니다(요삼 1:11). 저는 개인적으로 제 사랑하는 자녀에게 앞으로 결혼할 때 상대방 배우자의 성품(character)이 매우 중요하다고 권면하곤 합니다. 그리고 제가 그들에게 강조하는 성품은 “진실성”입니다. 저는 제 자녀에게 거짓말 하는 사람을 경계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제가 제 자녀에게 성품의 진실성을 강조한 이유는 배우자를 위하여 기도하며 찾을 때 신뢰할 만한 사람(trustworthy)을 만나길 기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께서 신뢰할만한 신부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신부인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님이 보시기에 믿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주님의 교회는 이 땅에 존재하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신랑 되신 예수님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기서 신랑 되신 예수님에게 교회가 선을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선하신 뜻(롬 12:2)을 교회가 이 땅에 이루어드림에 있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들(엡 2:10)로서 선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신랑 되신 예수님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히 일합니다.

 

결혼을 했어도 사랑하는 배우자가 나에게 매력을 느낄 수 있도록 부지런히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노력 중에는 육체적인 매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매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격적인 매력 속에서는 우리가 지난 번 11-12절 말씀에 근거해서 배운 ‘첫 번째로 현숙한 여인은 남편에게 신뢰를 줍니다’라는 교훈처럼 상대방 배우자에게 신뢰를 줄만한 진실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부부가 서로 노력해서 갖추어야 할 인격적인 매력 중 하나는 서로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진실성이란 말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부부가 서로 노력해야 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부지런함”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매주 수요기도회 때마다 묵상한 잠언을 뒤돌아보면 잠언 기자는 게으름과 부지런함에 대해서 자주 언급을 했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 기자는 게으름에 대해서 잠언 6장 10절과 24장 3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자.” 이렇게 게으른 자는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있자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좀 더 자고 졸고 누워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게으른 자는 깨야할 시간에 깨지 않고 나중으로 미룹니다. 또한 게으른 자는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일을 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룹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고 다른 것(상황, 사람 등등)을 탓합니다. 즉, 게으른 자는 책임을 질 줄을 잘 모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잠언 6장 11절과 잠언 24장 34절을 보십시오: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무슨 말씀입니까? 게으른 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난이 오되 마치 피해자가 강도를 만나 압도당하는 것처럼(24:33) 가난이 온다는 뜻입니다(MacArthur).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잠언 24장 30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게으른 자”(the sluggard)의 밭과 “지혜 없는 자”(the man who lacks judgment)의 포도원을 지나가면서 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언 기자는 게으른 자와 지혜 없는 자를 동의어(synonym)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게으른 자는 지혜 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지혜 없는 자”란 영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을 하면 ‘판단력이 부족한 자’란 의미입니다. 과연 게으른 자가 부족한 판단력이란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이 우선순위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게으른 자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해야 하는지 그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는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33). 그런데 학개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집보다 먼저 자기들의 집을 짓는데 바빴습니다(학 1:4, 9). 그들은 하나님의 집인 성전은 황폐하게 되도록 놓아두고 자기 집을 화려하게 짓는 데만 바빴습니다. 그들의 우선순위는 잘못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그 벌이란 무엇입니까? 성경 학개 1장 6절과 9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많이 뿌릴지라도 수확이 적으며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며 마실지라도 흡족하지 못하며 입어도 따뜻하지 못하며 일꾼이 삯을 받아도 그것을 구멍 뚫어진 전대에 넣음이 되느니라”(6절),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9절상).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의 농작물에 흉년(한재)이 들게 하시사(학 1:11) 그 수확을 빈핍하게 하셨습니다(6, 9절)(박윤선).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않을 때에 우리의 재정에 가뭄을 들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궁핍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우선순위를 바로 하지 않으면 우리는 궁핍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게으른 자는 지혜가 없어서 먼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므로 가난하게 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잠언 6장 6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게으른 자는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까? 그 말씀 자체가 이미 게으른 자는 개미보다 미련하다는 뜻이 아닙니까? 과연 게으른 자가 개미에게 배워야 할 지혜는 무엇입니까? 2 가지입니다(박윤선): (1) 개미는 감독하는 자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협력하며 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6장 7절을 보십시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게으른 사람은 감독하는 개미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서로 상부상조의 정신으로 협력하면서 부지런히 일하는 개미들에 가서 자세히 보고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2) 개미는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6장 8절을 보십시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성경은 개미보다 못한 사람에게 개미에게 가서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잠언 30장 25절에서도 성경은 개미를 “여름에 예비하는 개미”, 즉 자기들의 음식을 여름에 미리 준비하는 개미들이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개미들은 “여름”에 겨울 음식을 미리 준비하는 것일까요?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여름이 추수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에 개미들은 겨울철 먹을 것을 모아 들인다고 합니다(박윤선). 이렇게 개미들은 추수 때에 자기들이 겨울철에 먹을 음식들을 미리 준비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1장 13-19절을 보십시오: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밭을 살펴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현대인의 성경) “그녀는 양털과 삼을 구해 부지런히 일하며 상선처럼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서 가족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여종에게 할 일을 일러 주고나가서 밭을 보고 생각해 두었다가 그것을 사며 자기가 번 돈으로 포도원을 만들고 언제나 강인하고 근면하며 열심히 일한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유익한 줄 알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며 손수 물레질을 하여 실을 뽑고 베를 짜며”]. 이 부분의 말씀은 현숙한 여인의 노동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한 마디로 말한다면 현숙한 여인은 근면히 사업을 운영하는 “노동의 미”를 소유했다는 것입니다(박윤선). 박윤선 박사님은 현숙한 여인이 어떻게 근면히 사업을 운영을 했는지 한 3가지로 말했습니다:

 

(1) 현숙한 여인은 직물(fabric/cloth) 생산에 종사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1장 13, 18, 19절을 보십시오: “그는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하며 … 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현대인의 성경) “그녀는 양털과 삼을 구해 부지런히 일하며 …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유익한 줄 알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며 손수 물레질을 하여 실을 뽑고 베를 짜며”]. 현숙한 여인은 집 안에서 작은 규모로 손과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생산하는 작은 규모의 공업을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현숙한 여인은 “양털과 삼을 구하여 부지런히 손으로 일”을 합니다. 일하되 그녀는 “손수 물레질을 하여 실을 뽑고 베를” 짠다고 19절(현대인의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으로 “장사”를 하는데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않을 정도로 밤늦게까지 일을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8절).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가정에서 부인들이 이 현숙한 여인처럼 가내 수공업을 귀히 여겨 생산적인 작은 규모의 공업을 하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부인들이 집에서 가내 수공업 외에 컴퓨터 인터넷으로 등 다양한 작은 규모의 생상적인 사업을 충분히 운영할 수 있는 시대라 생각합니다. 그 말은 부인들이 가정에서 자녀를 돌보면 가정 살림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사업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각자 부인들의 달란트대로 집 안에서도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 부지런히 사업을 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2) 현숙한 여인은 가정생활을 잘 운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1장 14-1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며”[(현대인의 성경) “상선처럼 먼 데서 양식을 가져오고 날이 밝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서 가족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하며”].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하면서 가정생활은 등한히 하는 자매님은 균형을 잃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그 자매님의 남편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일 경우, 그녀가 자기의 가정생활을 등한히 하는 것은 성경 베드로전서 3장 1절 말씀을 어기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현대인의 성경) “아내된 여러분은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주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남편이라도 말없이 실천하는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하나님을 믿게 될 것입니다”]. 지금 믿지 않는 남편을 둔 많은 예수님을 믿는 아내들이 교회 생활은 열심히 하면서 가정생활은 등한히 하고 있습니다. 그녀들은 교회 안에서는 본이 되고 있는지 모르지만 가정 안에서는 본이 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균형을 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혜로운 아내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특히 가정 안에서도 본이 됩니다. 그녀는 주님께 하듯 불신자 남편에게 복종하므로 가정 안에서도 본이 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불신 남편이 그 아내의 신덕을 보고서 복음의 진실성을 깨닫게 되어 회심 할 수 있다. 그것은 실행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함이다. 우리의 복음 증거가 우리의 선한 생활과 병행하지 않으면 무력하다”(박윤선). 지혜로운 아내는 복음 증거를 말로만 하지 않습니다. 결코 그녀는 불신자 남편에게 ‘교회 나가자’고 말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녀는 주님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므로 복음의 진실성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삶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그녀를 사용하여 그녀의 불신자 남편도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1장 14-15절 상반절을 보면 르무엘 왕의 어머니가 그녀의 아들인 르무엘 왕에게 현숙한 여인에게 대해서 말하면서 그녀는 “상인의 배와 같아서 먼 데서 양식을 가져 오며 밤이 새기 전에 일어나서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 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자기 가족을 위하여 멀리서라도 양식을 구입해서 집으로 가지고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멀리서 가지고 오는 양식은 그저 보통 음식이 아니라 제일 좋은 음식이라는 것입니다(MacArthur).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녀)가 양식을 먼 곳에서 구입하는 목적은 우량품을 싼 값으로 구입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그(녀)는 가정의 식량 정책을 민첩하게 쏜다.” 이러한 민첩함이 우리 아내들에게 있어야 하지 않나요? 가정의 식량 정책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가정 살림을 함에 있어서 현숙한 아내들은 지혜롭게 재정을 잘 운영해서 허비하지 않고 오히려 저렴한 가격은 좋은 물품을 구입하는 등 그래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돈을 팍팍 쓰면서 재정을 허비한다면 그 가정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실제로 잠언 기자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오늘 본문 잠언 31장 27절에서 현숙한 여인은 “자기의 집안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한다고 말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자기 집안일을 잘 보살피며 놀고먹지 않는다”]. 현숙한 여인은 자기 집안일을 부지런히 잘 보살피며 열심히 일해서 양식을 먹습니다. 이렇게 현숙한 여인은 자기 가족을 위하여 멀리서라도 우량품을 싼 값으로 구입할 뿐만 아니라 “날이 밝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서 가족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상, 현대인의 성경). 아마 신혼 초에는 아내가 차려주는 아침 식사를 하고 출근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물론 신혼부부라고 해서 다 그러리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어떤 신혼부부는 시작부터 각자 아침을 해결하든지 아니면 아침을 거의 건너뛰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특히 요즘같이 맞벌이 하는 부부들이 많은 세상에서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특히 어린 자녀들까지 있는 가정의 아내가 남편뿐만 아니라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 잠언 31장 15절에서는 현숙한 여인은 “날이 밝기도 전에 일찍 일어나서 가족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박윤선 박사님은 이리 말했습니다: “… 그는 친히 가족들에게 음식을 만들어서 제공한다. 그 가정의 식탁은 이렇게 정성스럽게 준비되며, 거기에 가정의 따뜻함이 있고 기쁨이 있다.” 현숙한 여인은 사랑하는 식구를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아침 일찍 미리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그녀는 부지런히 가정 일을 한다는 말입니다.

 

(3) 현숙한 여인은 산업을 발달시킵니다.

 

오늘 본문 잠언 31장 15절 하반절에서 19절까지 보십시오: “… 여종들에게 일을 정하여 맡기며 밭을 살펴보고 사며 자기의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구며 힘 있게 허리를 묶으며 자기의 팔을 강하게 하며 자기의 장사가 잘 되는 줄을 깨닫고 밤에 등불을 끄지 아니하며 손으로 솜뭉치를 들고 손가락으로 가락을 잡으며”[(현대인의 성경) “… 여종에게 할 일을 일러 주고 나가서 밭을 보고 생각해 두었다가 그것을 사며 자기가 번 돈으로 포도원을 만들고 언제나 강인하고 근면하며 열심히 일한다.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유익한 줄 알고 밤늦게까지 일을 하며 손수 물레질을 하여 실을 뽑고 베를 짜며”]. 이 말씀을 보면 현숙한 여인은 혼자서 집안일을 하며 작은 규모의 공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일을 일러주는 여종과 함께 일을 한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현숙한 여인은 자기 여종에게 무슨 일을 해야 할지를 알려준 것을 보면 그녀 나름대로 지도력(leadership)이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녀는 “밭을 살펴보고 사며 자기 손으로 번 것을 가지고 포도원을 일”군 것(16절)을 보면 자기가 집에서 작은 규모로 공업을 해서 번 돈을 모아서 나름대로 “깊이 생각하고”(박윤선) 포도원 밭을 사서 그 포도원 밭을 일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만큼 지혜로운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히 가정 살림뿐만 아니라 나름대로 일도 해서 자기의 산업을 확장시켜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수입을 늘이기 위해 자기 생산품을 먼 곳까지 수술하기에 노력하며 산업을 발전시킨다(17-19).” 이렇게 현숙한 여자는 경제적 실력이 강한데 그것은 그녀의 근면에 의한 것입니다(박윤선)[(17절, 현대인의 성경) “언제나 강인하고 근면하며 열심히 일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하는 일이 유익한 줄 알고 밤늦게까지 일을” 합니다(18절, 현대인의 성경). 그 유익한 일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24절에서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옷과 허리띠를 만들어 상인들에게 넘기기도 한다”(24절, 현대인의 성경). 요즘은 젊은 자매들도 인터넷으로 옷을 팔고 하는 것을 보면 지혜로운 현숙한 여인은 집에서 가정 살림을 잘하면서도 부지런히 옷 같은 것을 인터넷으로 파는 사업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혜로운 현숙한 여인은 자기가 하는 일이 유익한지 아니면 무익한지 구별합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무익한 일을 하지 않고 유익한 일을 열심히 그리고 부지런히 합니다. 그리고 근면이 있는 현숙한 여인은 경제적 실력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가 번 돈을 모아서 신중히 사용하고 근면 있게 일을 하므로 자기의 산업을 발달시키고 확장시킵니다.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된 우리 교회가 이래야 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무엇이 유익한지를 알아 열심히, 부지런히 주님의 일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야 합니다.

 

셋째로, 현숙한 여인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줍니다.

 

언젠가(2018. 5. 8.) 미주 중앙일보 인터넷 신문에 “기독교인 10명 중 7명 ‘가난한 이웃 도와’”란 제목의 기사기 있어서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사 내용을 보면 “여론조사 기관 바나 리서치는 최근 '세계적인 빈곤 문제에 대해 희망을 가질 수 있는 3가지 이유'라는 주제로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바나 리서치에 따르면 실천적 기독교인 10명 중 7명(75%)은 "가난한 사람 또는 저소득층 가정에 음식을 제공해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실천적 기독교인”이란 “종교 활동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면서 교리에 대해 실천적으로 살고 있다고 답한 교인”을 가리킵니다. “기독교인들은 '돈을 포함한 옷이나 가구 등을 기부한 적이 있다(72%ㆍ일반 성인 64%)', '특정 시간을 정해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도한다(62%ㆍ일반 성인 33%)', '지역 사회 저소득층을 위해 자원봉사를 한 적이 있다 (47%ㆍ일반 성인 29%)', '미국 내 자원봉사 기관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 (39%ㆍ일반 성인 24%)',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해외로 나간 적이 있다 (10%ㆍ일반 성인 6%)' 등 모든 부분에서 일반 성인들 보다 응답률이 더 높았다”고 합니다. “바나 리서치는 빈곤 문제 해결에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로 ▶실천적 기독교인은 미국과 전 세계에 걸쳐 다양한 자선 활동에 참여하고 있음 ▶빈곤 해결에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다른 사회적 이슈에도 관심이 많음 ▶빈곤 퇴치에 희망을 갖는 사람들은 해결 방안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경향이 있음 등을 꼽았다”고 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31장 20절을 보면 르무엘 왕의 어머니는 그녀의 아들인 르무엘 왕에게 현숙한 여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곤고한 자에게 손을 펴며 궁핍한 자를 위하여 손을 내밀며” [(현대인의 성경)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준다”]. 여기서 ‘손을 내밀다’는 단어의 의미는 “멀리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친절히 구제의 물질을 보냄”을 가리킵니다(Matthew Henry, 박윤선). 이 말은 현숙한 여인은 가까이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 친절히 구제를 할 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가난한 자들에게까지 친절히 구제의 물질을 보낸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왜 그녀는 가까이 있는 가난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가난한 사람들까지 친절히 구제를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녀는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서라 생각합니다. 즉, 현숙한 여인은 궁핍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친절히 구제를 베푼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생각할 때 헨리 나우웬이 말한 “긍휼”에 대한 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는 “긍휼”이란 원어 히브리어로 “라카밈’(rachamim)인데, 이것은 야웨(하나님)의 자궁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인터넷에서 “자궁”에 대한 글을 찾다가 자궁의 3가지 특징을 좀 알게 되었는데 저는 그 3가지 특징을 하나님의 긍휼과 이렇게 비교해 보았습니다: (1) 마치 자궁이 “이물질”을 거부하지 아니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용납하신다는 것입니다. (2) 마치 자궁이 태반 혈관의 침투를 받아들이므로 태반을 자라나게 하도록 영양을 공급하는 것처럼 성자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인들의 ‘죄 침투’까지 용납하시므로, 즉 죄를 대신 걸머지시므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의 떡을 공급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떡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이젠 더 이상 ‘죄 침투’를 막으시사 온 몸과 영혼을 더럽히지 못하게 ‘죄의 소통’을 막으신다는 것입니다. (3) 더 나아가서 마치 자궁에서 아기가 자라나는 동안 세포의 자연사를 자궁내막이 막아 주고 또한 임신 후기에는 산모의 배 벽에서 태아의 움직임을 편하게 만들고자 자궁 이 얇고 부드럽게 되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생동력 있고 주님 안에서 마음껏 움직이도록 신앙생활을 하게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자는 가난하고 힘든 사람을 구제하되 예수님의 마태복음 6장 2-4절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흥미로운 점은 긍휼히 여기는 자는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선 행위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도 드립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사람은 이웃 사랑에 있어서 구제도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도 생활을 신실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구제함”에 대해서 말씀 하신 후 5절부터 15절까지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사도행전 10장에 나오는 경건한 사람 고넬료입니다. 사도행전 10장 2절을 보십시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고넬료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31절). 즉,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경건은 기도와 구제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1장 20절에서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히 일하고(13절) 근면하며 열심히 일해서(17절, 현대인의 성경) 자기 산업을 확장시켜(15하-19절) 자기 집안에서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양식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14절) 이웃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 구제합니다. 저는 이 현숙한 여인을 생각할 때 그녀는 “지혜로운 부자”라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지혜로운 부자는 하나님을 경외하여(잠 22:4, 31:30) 부지런히 일을 하며 또한 겸손한 자세로 가난한 자들의 사정을 알고(29:7) 그들을 불쌍히 여겨(시 72:13) 그들을 구제하며(잠 28:27) 도와주기 때문입니다(31:20). 이러한 지혜로운 부자는 마음을 높이지 않고, 소망을 정함이 없는 재물에 두지 않으며 오직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둡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부자는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며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는 너그러운 자입니다(딤전 6:17-19). 성경 잠언 28장 27절은 이렇게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 오히려 성경 잠언 11장 24절은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안디옥 교회처럼 구제하는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안디옥 교회는 큰 기근으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유대 형제들을 돕고자 각각 자신의 경제적인 능력에 따라 자원하여 구제 헌금을 내어 모아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의 장로님들에게 구제금을 보냈습니다(행11:29-30). 이렇게 안디옥 교회처럼 우리 교회가 가까운 이웃뿐만 아니라 또한 멀리 선교지에 힘들고 어려운 교회를 도와 주님의 교회를 세우고 주님 중심된 꿈을 가진 귀한 일꾼들을 세우는데 물심양면으로 돕는다면 이것이 바로 신랑 되신 예수님의 아름다운 신부된 교회가 아니겠습니까.

 

넷째로, 현숙한 여인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염려할 일들이 참 많은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이런 저런 일들로 염려할 일들이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는 믿은 자들로서 성경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대로 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야 하는 것도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를 돌보시는 주님께 우리의 모든 염려를 맡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2장 22절과 29절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25절). 우리가 염려한들 무슨 소용이 있나요. 아무 도움도 안 되고 아무 유익도 안 되는 염려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됩니다. (2) 그 두 번째 이유는, 우리는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26절). “이처럼 사소한 일도 못하면서 왜 다른 일들까지” 염려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26절, 현대인의 성경). (3) 그 세 번째 이유는, “이런 것들은 모두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애써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마 6:32, 현대인의 성경). (4) 그 네 번째 이유는, 우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눅 12:30,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다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는 염려하고 또 염려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믿음이 작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28절). 우리는 믿음이 작은 자들이기에 오늘도, 내일도 우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우리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합니다(22절).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까마귀를 생각해야 합니다(24절). 우리는 공중의 새를 보아야 합니다(마6:26). 아직도 기억납니다. 지난번에 영어사역 연합 수련회를 산으로 가서 아침에 숙소 밖 뒷 베란다에 있는 의자에 앉아 날라 다니다가 나무에 앉았다 하는 새들을 바라보면서 마태복음 6장 26절 말씀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그래서 저는 그 새들을 보면서 잠시나마 그 말씀을 묵상했을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새들도 기르고 계시는데 이것들보다 훨씬 귀하고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있는 나를(사 43:4)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 기르시지 않으시겠는가.’ 실제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를 기르시사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되 풍족히 주셔서 음식이 없어서 굶은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입을 것을 공급해 주셔서 한 번도 옷이 없어서 벌거벗고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음식이나 옷이나 넘치도록 과분하게 누리면서 살게 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런 저런 일들로 염려를 합니다. 저는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염려합니다(마 10:19). 또한 저는 “세상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합니다(고전 7:33). 저는 교회 일로 염려하고 근심합니다(고후 11:28, 참고: 눅 10:41). 교인들 중에 교회를 떠나고 예수님을 떠날까봐 염려합니다(신 29:18). 특히 저는 제 자신이 사탄의 유혹에 빠질까 염려합니다(딤전 3:7). 이렇게 저는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눅 21:34) 또한 이렇게 “세상의 염려”를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막혀 결코 결실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막 4:19). 저는 이러면 안 되다는 것을 알면서도(막 4:19) 지금도 여러 가지 일들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일 때문에도 염려를 하지만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내일(미래) 일루도 염려를 합니다. 이러한 저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 6:34).

 

오늘 본문 잠언 31장 21-22절을 보십시오: “자기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자기 집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하지 아니하며 그는 자기를 위하여 아름다운 이불을 지으며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으며” [(현대인의 성경) “그녀는 모든 가족에게 입힐 따뜻한 옷을 마련해 놓았으므로 겨울이 닥쳐도 염려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 침실을 아름답게 꾸미며 아름답고 고운 모시옷과 자색 옷을 입는다”]. 이 말씀을 보면 현숙한 여인은 자기 집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을 정도로 다 홍색 옷을 입혔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세마포와 자색 옷을 입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홍색 옷이나 자색 옷은 다 비싼 옷들이었습니다(Bible Knowledge 주석). 그것을 보면 우리는 현숙한 여인은 자기 식구들을 궁핍하지 않고 오히려 풍족하게 만들고 살았다는 것을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정도로 현숙한 여인은 부지런히 일을 해서(13절) 자기의 산업을 발달시켜서(15하-19절) 자기 가족들로 하여금 생활을 걱정하지 않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21-22절). 어느 정도였냐면 그녀의 남편은 신뢰하는 그 현숙한 아내로 말미암아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였습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결국 현숙한 여인이 자기 집 사람들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는 자신의 가족들이 생활 걱정하지 않도록 집안일을 잘 보살피기 때문입니다[“자기 집안일을 잘 보살피며 놀고먹지 않는다”(27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31장 25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그녀는 능력과 품위가 있고 앞날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염려하지 마십시다. 특히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 앞에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부모님들이 자녀들 앞에서 염려를 하면 우리 자녀들은 불안해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기도로 맡기는 모습을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연약하여 우리가 염려를 하는 것을 우리 자녀들 앞에서 숨기고 부인하는 등은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는 모습을 보여줘야 합니다. 제가 약 4년 전(2015년)에 경험한 은혜는 하나님께서는 제 믿음의 연약한 저의 염려를 이미 다 아시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저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신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 때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를 이 만큼이나 사랑해 주시고 계시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 때 저는 순간순간 믿음으로 살아드려야 하는데 자꾸만 눈으로 보는데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잠잠히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기보다 제 명철을 의지하여 조급히 행동을 옮기면서 결과 등을 예상을 하려고 하면서 염려하는 제 자신을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젠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이젠 저는 더 이상 불안해하고 염려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다 맡기고 믿음으로 살길 원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식구들이 모든 염려를 신랑 되신 예수님께 믿음으로 맡기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신랑 되신 주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여 더 이상 염려하지 마십시다.

 

다섯째로, 현숙한 여인은 자기의 남편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게 합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어떠한 여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신여대 심리학 교수가 20년간 부부 상담을 하면서 정리한 주요 내용 중 “남편이 아내에게 원하는 일곱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남편은 “아내가 존중해 주고 자존심을 북돋아 주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남편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아내에게 무시당한다는 느낌입니다. 특히 아내가 자신을 다른 집 남편과 비교하는 것을 아주 싫어합니다. 여성들이 자신의 남편과 비교하는 단골 메뉴는 월급봉투, 선물, 휴가, 처가에 잘하는 것, 집안 일 도와주는 것 등이라고 합니다. 채 교수는 여성들이 자신의 남편을 다른 남자들하고 비교해서 남편의 행동을 수정하려 시도하지 말고, 남편의 현행동에 초점을 두어 잘하는 행동을 지적하고 원하는 행동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2005년 5월 22일에 “지혜로운 아내”란 제목 아래 쓴 글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지혜로운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는 아내요 남편을 경외 혹은 존경하는 아내입니다. 그러나 요즘 시대에 “복종”이나 “경외”라는 말은 부부관계에서 찾아보기가 힘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변하지 않는 말씀이 변하는 시대에 적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변하는 시대의 걷잡을 수 없는 흐름에 많은 크리스천 부부들이나 총각, 처녀들이 변치 않는 영원한 말씀의 원리를 무시하고 있지 않나 염려됩니다. 주님을 경외함으로 주님께 하듯 남편을 복종하는 것이 아내의 마땅한 도리요 (골3:18) 그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남편에게 구원을 얻게 하는 것이 아내의 큰 신적 소명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명을 잘 감당하지 못하는 아내들이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또한 아내로서 남편을 존중하는 것이 남편을 세우는 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즘 많은 아내들이 남편들을 무시하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지혜로운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복종하며 그를 존중하므로 가정을 아름답게 세우는 자들이 되십시오!”

 

오늘 본문 잠언 31장 23절을 보십시오: “그의 남편은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으며”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 남편도 지도급 인사로 알려져 존경을 받게 된다”]. 이 말씀을 보면 현숙한 여인은 지혜로운 여인임을 좀 알 수 있는 것은 그녀는 자기의 남편을 세우되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게 하는데 중요한 이바지(significant contribution)했다는 것입니다(MacArthur). 이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성문”이라는 곳은 도시나 기타 지방에서 그곳 주민들의 사건을 처리하는 지도자들이 자리하고 있었던 곳이었다고 합니다(욥 31:21)(박윤선). 그런데 그 곳에 현숙한 여인의 남편이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가 평민이 아닌 “지도급 인사로 알려져” 있었던 것입니다(잠 31:23,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현숙한 여인의 조력이 없었다면 그녀의 남편이 지도급 인사가 될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남편의 성공은 그의 현숙한 아내의 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현숙한 여인은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사람으로 세운다는 것입니다(23절). 결혼한 자매님들, 여러분의 남편이 사회에 나가서 나름대로 성공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기쁘지 않겠습니까?

 

제가 오늘 기독교 인터넷 웹사이트를 여기저기 보다가 한 흥미로운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 내용은 그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의 사모님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기사 제목은 ‘당신이 스펄전 목사님의 사모님에 대하여 몰랐던 3가지’ (“3 Things You Didn’t Know About Spurgeon’s Wife”)이었습니다. 그 3가지란 첫째로, 스펄전 목사님의 사모님이신 스산나(Susannah) 사모님은 결혼에 대해서 힘든 교훈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일과 복음 사역을 위해서 큰 책임이 있는 남편과 살면서 아내로서 자기 자신을 남편의 마음에 결코 첫 번째로 둘 수 없다는 것을 힘들게 배웠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자기 남편의 하나님의 나라 사역과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장애가 되지 않기로 헌신했어야 했습니다. 둘째로, 스산나 사모님은 자신의 질병과 고통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격을 빚으시사 자기로 하여금 더욱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우울증과 병으로 고생하는 남편을 도와야 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극심한 의학전 문제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깨짐을 통해 자신의 인격을 빚으시고 계시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육체적인 고통을 통해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셋째로, 스산나 사모님은 전 세계 사역을 설립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The Book Fund”라는 자선단체를 조직해서 3,058 신학 책들과 71,000 복사본을 빈곤한 목사님들에게 나눠줬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렇게 믿음이 훌륭한 지혜로운 아내가 있었기에 그녀의 남편인 스펄전 목사님이 주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많은 큰일들을 행하는 영향력 있는 목사님이시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1장 23절로 말한다면, 현숙한 스산나 사모님은 자기 남편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목사님으로 세웠다는 것입니다.

 

현숙하고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남편을 존경할 뿐만 아니라(엡 6:33) 또한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게 합니다(잠 31:23). 그러면 현숙한 여인은 어떻게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그 땅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게 하고 사람들에게 인정과 존경을 받는 자로 세우는데 크게 기여를 할 수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오늘 본문 잠언 31장 11-12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런 자의 남편의 마음은 그를 믿나니 산업이 핍절하지 아니하겠으며 그런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 그의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아니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런 여자의 남편은 아내를 믿기 때문에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런 여자는 일평생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남편을 해치지 않는다”]. 현숙한 여인은 평생에 자기 남편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않으므로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자기를 믿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현숙한 아내를 믿는 그녀의 남편은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을 것”이기에(11절, 현대인의 성경) 그는 그녀의 도움을 받아 “그 땅의 장로들과 함께 성문에 앉으며 사람들의 인정(존경)을 받”지 않았나 생각합니다(23절).

저는 “남편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아내, 말로 상처 주는 남편”이란 기사가 있어서 읽어보았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 남편은 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좌절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아내로부터 세상에 나가 싸워 이길 힘을 얻지 못하고, 그만 좌절하며 모든 에너지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아내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남편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그 사실을 모르며 간과할 때가 많이 있다”(인터넷). 자매님들, 여러분은 여러분이 여러분의 남편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그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매님들이 남편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제일 좋은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에베소서 5장 33절로서 현숙한 여인은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숙한 아내는 자기 남편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에게도 존경 받는 자로 세웁니다. 여러분, 신부된 우리 교회는 신랑 되신 예수님을 존경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존경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되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답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마치 사도행전에 나오는 안디옥 교회처럼 말입니다. 그리할 때 신랑 되신 주님께서 이 세상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으실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현숙한 여인은 지혜로운 입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치 혀를 잘 놀려야 한다"라는 말 들어본 적이 있으시죠? 무슨 뜻입니까? “세치의 혀”란 약 10cm 정도 길이의 혀라는 의미로서 짧은 혀로 하는 말이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입니다. 그 만큼 혀는 짧지만(3치라 표현), 혀로부터 나오는 말의 결과는 엄청나다는 것입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 5절 보십시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우리 혀로부터 나오는 말이 어떤 이들은 엄청난 상처와 좌절과 실망과 저주가 되고, 어떤 이들은 희망과 용기와 생명을 얻기도 하며, 또 어떤 경우에는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도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 잠언 18장 2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가 이미 묵상한 성경 잠언 15장 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어떠한지 4가지로 묵상했었습니다:

 

(1)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상대방의 분노를 쉬게 합니다.

 

잠언 15장 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 지혜 있는 자는 상대방이 분노하고 있을 때 함께 분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혜 있는 자는 상대방이 분노하고 있을지라도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18절). 그러한 가운데 그는 분노하고 있는 상대방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순한 대답으로 그 상대방의 분노를 쉬게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 있는 자는 부드러운 말로 그 상대방의 분노를 쉬게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지혜 있는 자는 인내심을 가지고 분노하는 사람을 대합니다(25:15). 대하되 지혜 있는 자는 부드러운 혀로 상대방을 설득시켜 그 분노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의 분을 쉬게 합니다.

 

(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풉니다.

 

잠언 15장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 무슨 뜻입니까? 지혜 있는 자의 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말함을 의미 합니다(박윤선). 즉, 지혜 있는 자의 혀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말하되 지식을 전파합니다(spread knowledge)(7절). 그 이유는 지혜 있는 자의 눈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의 귀는 지식을 구하며(18:15) 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 주야로 묵상하기 때문입니다(시 1:2). 즉, 지혜 있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기에 그 지식을 잘 전한다는 말입니다.

 

(3)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상처를 치료합니다.

 

잠언15장 4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 여기서 “온량한 혀”란 ‘치유하는 혀’를 가리킵니다. 즉, 미련한 자의 입술은 과격한 말을 하므로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지만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상처를 치유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혀를 가지고 있고 싶지 않으십니까? 과연 어떻게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상처를 치료합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말하므로 상처를 치료합니다(2절). 하나님의 말씀을 잘 말하되 지혜 있는 자의 혀는 부드러운 말(유순한 대답)(1절상)로 잘 말하여 상대방의 상처 입은 마음을 치료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 치유하는 혀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 혀는 진실하고도 화평스럽게 하는 말로서 듣는 자를 위로하며, 살려주며, 소망을 가지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가리켜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고르게 함 같은” 말이라고 합니다(골 4:6)(박윤선). 이렇게 지혜 있는 자의 혀는 듣는 자를 위로하고, 살려주며, 소망을 가지게 하기에 “생명나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15:4). 다시 말하면,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생명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므로 죽어가는 영혼을 치료하는 생명나무입니다.

 

(4) 지혜 있는 자의 혀는 때에 맞는 말을 합니다.

 

잠언 15장 23절을 보십시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은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 저는 실제로 종종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적합한 때에 적합한 말을 하게 하시는 경험을 하곤 합니다. 예를 들어 인터넷 채팅으로 상담을 할 때 서로 말을 주고받으면서 성령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생각나게 하시는 성경구절을 나누게 하시므로 상대방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을 엿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 자신도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 하나님께서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이 그 때 그 지체에겐 적합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잠언 25장 11-1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쟁반에 금사과니라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 무슨 뜻입니까? 경우에 합당한 충고의 말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의미입니다(박윤선). 여기서 “경우”라는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바퀴”란 뜻입니다. 곧, 그 때 형편과 경우에 잘 조절하여 돌아감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충고하는 자가 상대방에게 말할 때에 여러 가지를 고려하여 잘 조절해야 될 것을 가르칩니다(박윤선):“충고하는 자 자신이 사랑과 화평을 지니고 있을 때에 말해야 됩니다. 능욕하는 태도로 말하지 않아야 됩니다. 성급하게 말하지 않아야 됩니다. 예의 없이 말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렇게 충고할 때 상대방이 잘 받아들일 때에 이것은 그 충고하는 자에게 큰 대접(“은쟁반에 금사과”와 “금고리와 정금 장식”의 의미)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오늘 본문 잠언 31장 26절을 보십시오: “입을 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현대인의 성경) “말을 지혜롭고 친절하게 하고”]. 현숙한 여인은 그저 좋은 가정주부일 뿐만 아니라 부지런히 일을 해서 자기의 산업도 발달시키지만 또한 자기의 가족을 지혜의 말들로 잘 인도합니다(The Pulpit 주석). 여기서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의 말들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녀의 입에서는 나오는 지혜의 말들이란 지식이요(15:7), 그 지식이란 바로 진리(truth)라 생각합니다(8:7). 그 이유는 그녀의 마음에는 생명의 진리의 말씀이 풍성하기 때문입니다(18:4, 박윤선). 지혜로운 현숙한 여인의 입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흘러 나와야 합니다. 그녀의 입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전파 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이 전파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흘러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이 나와야 하며 지혜의 말들이 흘러 나와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은 현숙한 여인은 그녀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6절). 현대인의 성경은 그녀는 말을 친절하게 한다고 번역을 했습니다. 현숙한 여인의 마음에는 생명의 진리의 말씀만 풍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또한 풍성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자신의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말하되 그녀의 혀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규제된 혀로 인애의 법을 말합니다(The Pulpit 주석). 저는 그 인애의 법이 새언약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 적용한다면 예수님의 이중계명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중계명이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입니다(마 22:37, 39). 이 이중계명을 현숙한 아내는 가정 안에서 그녀의 남편과 자녀에게 삶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입술을 열어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랑 되신 예수님의 신부인 우리 교회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야 말로 예수님의 이중계명에 순종하여 삶으로 하나님의 인애의 법을 보여줘야 할 뿐 아니라 우리는 우리의 입을 열어 그 진리의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전하되 우리 교회는 우리의 입을 열어 참 지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랑 되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현숙한 신부인 교회의 모습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제 친 할머님이 살아계셨을 때 제 앞에서 하신 말씀 중 잊혀지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은 바로 잠언 31장 30절이었습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제가 양로원에 찾아뵈었을 때 무슨 대화를 하다가 할머님께서 그 성경 구절 말씀을 외우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히 기억나는 것은 할머님께서는 연로하셔서 얼굴에 주름도 많으셨지만 잠언 31장 30절을 제 앞에서 외우셨습니다. 저는 그 때 할머님을 통해서 그 말씀을 들으면서 “고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 라는 말씀을 좀 더 피부 적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 여인의 미모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생각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칭찬 받는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여자는 지혜로운 여인이요 현숙한 여인입니다. 현숙한 여인이란 그녀의 남편에게 신뢰를 주며, 부지런히 일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도와주며,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현숙한 여인은 지혜로운 입을 가지고 있으며 그녀의 남편도 사람들에게 인정(존경)을 받습니다. 그녀의 자녀들은 자기 어머니에게 감사하며(고맙게 생각하며),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나다”(세상에는 훌륭한 여성들이 많이 있지만 당신은 그 중에서도 가장 위대한 여성이오”)라는 칭찬을 받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교회로서 신랑 되신 주님께 신뢰를 주는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부지런히 주님의 일을 하며, 가난하고 불쌍한 자들을 도와주며,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지혜로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전하며 가르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께 ‘잘했다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