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지혜로운 삶?

 

 

[잠언 3018-33]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저는 제 아들 딜런을 위하여 기도할 때 그의 이름의 뜻대로 신실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길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계속해서 기도해 오다가 몇 년 전에 둘째 예리의 일로 인하여 예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기 시작하다가 예리뿐만 아니라 막둥이 예은이나 첫째 딜런을 위해서도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 큰 이유 중 하나는 제 자신이 지혜가 부족하기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는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제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 죄악 된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함을 깨닫게 해주고 계시기에 저는 제 자신뿐만 아니라 저의 세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는 솔로몬의 마지막 인생에 우상숭배의 큰 죄를 범한 것을 생각할 때 저와 제 자녀들이나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실하게 지혜로운 삶을 사는 게 참 중요하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과연 지혜로운 삶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 30장 24절을 보면 성경은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4 동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가장 지혜로운 삶”이란 제목을 걸고 오늘 본문 잠언 30장 18-33절 말씀 중심으로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가장 지혜로운 삶은 무엇인지 한 5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가장 지혜로운 삶은 위선을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우리가 원하는 것들과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충돌을 일으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 된 옛 본능대로 행하는 것이고 성경에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므로 우리의 옛 본능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두 가지가 충돌을 일으켰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마 우리 모두의 대답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우리는 죄악 된 옛 본능대로 살아야 한다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로 우리는 우리가 말하고 믿는 데로 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안에 분수에 넘치는 욕심과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순간 우리의 양심은 우리 욕심대로 행하지 말라고 하지만 이미 우리는 우리 욕심 따라 행하기로 마음에 결심을 하고 그리 행할 때가 있습니다. 저의 경우는 저는 제가 믿고 말(설교)한데로 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결국 저의 위선이 들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저는 또 다시 성도님들 앞에 서서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라고 설교를 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제 입술에는 '하나님의 은혜' 그러나 제 마음 깊은 곳에는 '내 공로' 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저는 하나님의 귀한 은혜를 싸구려 은혜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영광이 결코 아닌 사람인 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있는 것뿐입니다. 여러분, 위선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것입니다. 위선이란 우리의 교회 안에서의 언행과 교회 밖에서의 언행이 다른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말과 행동이 조심스럽고 옳게 보이며 본이 되는 듯 한데 교회 밖에서는 전혀 다르게 세상 사람들과 별다를 바가 없이 말고 행동을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한 위선이란 우리의 말과 마음이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마음으로는 상대방을 미워하면서도 겉으로는 친절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위선자는 상대방을 향하여 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입술로는 매끄러운 말을 하고 상대방의 비위를 마치되 자기의 악한 마음을 매우 따뜻한(열렬한) 사랑의 말로 가장합니다(잠언 26:23). 우리는 이미 잠언 26장 23-28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위선자의 입술과 마음은 어떻게 다른지 한 6가지로 배웠습니다: (1) 위선자의 입술은 온유하지만 그의 마음은 악합니다(23절), (2) 위선자는 자기의 미운 감정을 아첨으로 숨깁니다(24절), (3) 위선자는 그의 말을 좋게 할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추악한 생각이 가득합니다(25절), (4) 위선자는 속임으로 자기의 미움을 감출지라도 반드시 그의 악은 회중 앞에서 드러날 것입니다(26절), (5) 위선자는 함정을 파지만 자기가 그 함정에 빠집니다(27절), 그리고 (6) 위선자는 거짓말을 합니다(28절).

 

오늘 본문 잠언 30장 18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내가 심히 기이히 여기고도 깨닫지 못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라고 말하면서 4가지 자취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4가지란 첫째로 독수리의 자취, 둘째로 뱀의 자취, 셋째로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 넷째로 남자와 여자와 함께 한 자취, 음녀의 자취입니다(19-20절). 이 4가지 자취 중 잠언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바로 음녀의 자취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십시오: “음녀의 자취도 그러하니라 그가 먹고 그의 입을 씻음 같이 말하기를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음란한 여자의 자취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나쁜 짓을 하고서도 시치미를 떼고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잠언 기자가 음녀는 음행의 죄를 범하고서도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현대인의 성경)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녀가 자기의 범죄를 감추려고 하는 것(conceal)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가 감춰져 있듯이, 바위 위로 기어 다니는 뱀의 자취와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와 남자가 여자와 함께 한 자취가 감춰져 있듯이, 음녀는 자신의 음행의 죄의 자취를 감추려고 입술로는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7장 10절을 보면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한 지혜 없는 어리석은 소년을 맞이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서 “간교한 계집”이라고 성경이 말씀한 이유는 그녀가 그 소년을 맞이함에 있어서 숨겨진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간교한 창녀는 그 지혜 없는 어리석은 소년을 맞이함에 있어서 자신의 진정한 의도는 숨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간교하다’라는 히브리어 원어의 문자적 의미는 바로 ‘숨기다’(hidden)입니다(MacArthur). 과연 그녀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일까요? 성경 잠언 23장 27-28절을 보십시오: “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그는 강도 같이 매복하며 인간에 궤사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 음녀가 한 지혜 없는 자를 창녀의 옷같이 입고 맞이하는 숨겨진 의도는 “함정”을 놓아 그로 하여금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게(faithless)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음녀의 숨겨진 참된 의도는 많은 결혼한 남자들로 하여금 결혼할 때에 언약하였던 것을 파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박윤선). 이렇게 음녀는 악을 행하면서도 “내가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30:20). 이것은 그 음녀의 위선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오늘 본문에서 잠언 기자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가장 지혜로운 자는 위선을 버리고 또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참고: 벧전 2:1,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위선을 버리고 또 버릴 수 있을까요? 먼저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의 위선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위선적인 면을 들춰내시고 책망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7장 5절을 보십시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현대인의 성경) “위선자야, 먼저 네 눈 속의 들보를 빼내어라. 그러면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도 빼낼 수 있을 것이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위선을 책망하시고 들춰내시사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실 때 우리는 우리의 위선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것처럼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죄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마 23:28). 또한 우리는 겉과 속이 일치한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 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거짓을 버리고 언행일치의 삶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잔과 접시의 겉을 깨끗하게 하면서 그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마 23:25, 현대인의 성경).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늘의 지혜를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늘의 지혜는 위선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하늘에서 온 지혜는 첫째 순결하고 다음에는 평화를 사랑하고 너그럽고 양순하고 자비와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위선이 없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우리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우리 하나님은 무질서한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예를 들어,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의 질서를 보면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하여 주님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창조 질서를 무시하고 마음의 정욕과(롬1:24-25) 부끄러운 욕심에 이끌려 순리대로 행하지 않고 바꾸어 역리하여 남자가 남자하고 여자가 여자하고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26-27절). 이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한 일[“악한 일”(현대인의 성경)]입니다(28절). 성경 고린도전서 14장 4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우리는 이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되 우리는 먼저 가정에서 질서를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가정에서 각자가 자기의 성경적인 책임을 신실하고 겸손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 아내의 책임이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보시기에 마땅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골 3:18). 이것은 아내의 의무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가정 제도에 아내가 주님께 하듯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적합한 것(it is fitting)입니다. 또한 아내는 하나님께서 가정의 가장인 남편에게 주신 신적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요즘 남편의 권위가 가정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은 여러 가지이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아내가 남편의 권위를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자녀들도 그들의 어머니를 본받아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의 권위를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가장인 남자에게 신적 권위(divine authority)를 주셨는데 그 권위에 그의 아내가 복종하지 않으므로 말미암아(엡 5:22) 남자의 권위가 가정에서 세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the wife must respect her husband)(엡 5:33)라고 명하고 있는데 남편을 경외/존경하기를 거부하는 그의 아내로 인하여 남자의 권위가 가정에서 무시되고 있으며 그 결과 가정의 질서가 깨지고 있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가 가정의 질서를 세우기 위해선 가정의 부인들과 자녀들이 하나님께서 가장인 남편/아버지에게 주신 권위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아내는 남편을 경외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어머니의 그 모습을 보는 자녀들도 아버지를 경외하고 존경하여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 아버지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남용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를 남용할 때 우리는 결코 우리 자녀들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권위를 지혜롭게 사용하여 가정의 평화와 질서를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질서를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므로 결국 분수에 넘치는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을 가볍게 여기던지 더 나아가서 하잖게 여겨서는 결코 안 됩니다. 우리는 직분자로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민수기 16장 9절에 나오는 레위 자손 고라처럼 당파를 지어 교회란 조직에 질서를 깨는 화평을 깨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신데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화평을 깨는 자들은 교만함 가운데서 분수에 넘치는 언행을 삼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 보기에 더 크고 높은(?) 직분을 시기하며 탐하는 가운데 결국 인간의 힘으로 교회 직분을 얻고자 당파를 교회 안에서 짓고 교회 회중 앞에서 스스로 높이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비방과 정죄를 함부로 하며 악성루머까지 사용하여 교회 안에서 당파를 짓는 행위는 분명히 분수에 넘치는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직분자로서 교회 회중 앞에서 스스로 높이려고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분수에 넘치는 언행을 삼가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을 하나님의 큰 은혜로 여겨야 합니다. 결코 직분이 주어진 첫 순간에만 은혜로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직분자로서 섬기면 섬길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깊이 깨달아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우리는 겸손 또 겸손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직분을 겸손히 감당해야 합니다. 다른 직분자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직분자로서 맡겨진 책임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겸손히 감당해야 합니다.

 

둘째로, 가장 지혜로운 삶은 질서 있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21-23절을 보십시오: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과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과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세상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서넛 있으니 종이 임금이 되는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과 계집종이 자기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21-23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질서가 거꾸로 된 상태 4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그 4가지 상태란 (1) 종이 임금이 된 것, (2)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22절), (3)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 그리고 (4)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입니다(23절). 이 4가지 상태의 공통점은 모두 다 무자격자들이 높은 지위에 앉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여러분, 종이 임금이 될 자격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잖습니까? 그런데 오늘 본문 21-22절 말씀처럼 종이 임금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이 견딜 수 없게 하는 것”[“세상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현대인의 성경)]이란 것입니다. 그러면 “미련한 자가 음식으로 배부른 것”은 어떻습니까?(22절) 이 말씀의 의미는 미련한 자가 부자 된 것을 말하는데(박윤선) 이것이 세상에서 용납이 될 만한 것입니까? 아니잖습니까? 어떻게 미련한 자가 부자가 될 수 있습니까?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 간 것”(23절)은 어떻습니까? 어떻게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을 갈 수가 있나요? 시집갈만한 자격이 없는 여자가 시집을 갔다는 것이 용납하기가 힘든 사실이 아닌가요?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23절), 다시 말하면, “계집종이 자기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23절, 현대인의 성경) 또한 용납하기 힘든 사실 아닌가요? 이렇게 4가지 상태 모두 다 무자격자들이 높은 지위에 앉음을 받았는데 이것은 질서가 거꾸로 된 상태를 말합니다(박윤선).

 

이렇게 질서가 거꾸로 되면 가정이나 교회나 사회나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특히 우리 자신이 자격이 없는 자임을 깨닫지 못하고 ‘종이 나는 마땅히 임금이 되어야 해’, ‘미련한 자가 나는 마땅히 부자가 되어야 해’, ‘미움 받는 여자가 나는 마땅히 시집을 가야 해’, ‘여종이 나는 마땅히 여주인의 자리를 차지해야 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교만함을 드러내는 것이지 않습니까? 이러한 교만함이 우리 마음에 있으면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과 교회 등은 무질서해 질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만함을 결코 용납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이 교만해지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수에 넘치는 생각과 언행을 하므로 가정과 교회의 질서를 깨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가정과 교회의 질서를 잘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특히 영원히 죽어 마땅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이 낮고 낮은 땅에 오셔서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으로 인해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하나도 없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다는 이 놀라운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된 것입니다. 이것은 종이 임금 되고 미련한 자가 부자가 되고 미움 받는 여자가 시집가고 여종이 주모를 이은 것과 비교도 되지 않는 놀라운 신분 상승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더 깨달아 알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의 힘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가정과 교회의 질서를 잘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가장 지혜로운 삶은 개미같이 근면하고, 사반과 같이 위험을 내다보고 거처를 견고케 하고, 메뚜기 같이 단결하고, 그리고 도마뱀 같이 재빠르고 꾀 있게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무엇을 배우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언젠가 읽었던 강준민 목사님의 칼럼인 “폭풍 속에서 배우는 지혜”를 다시 한 번 읽어 보았습니다. 그리고 한 2 가지만 요약해서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한 가지는, 산다는 것은 배우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배우는 사람으로서 배움을 갈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배움에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올바로 배워야 올바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잘 배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잘 배우는 법을 배우면 일평생 유익합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배움은 능력이라는 것입니다. “배움은 폭풍 속에서도 성장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가끔 풍랑을 만납니다. 가끔 광야를 통과하게 됩니다. 가끔 고난의 풀무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물론 인생이 고난만 계속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환란을 만나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배움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자세를 갖고 살아간다면 모든 인생 경험을 배움의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폭풍은 학교입니다. 고난은 스승입니다”(강준민). 여러분, 배움에 있어서 우리는 동물에게서도 배워야 합니다. 한 2년 전에 헬스조선에서 읽은 기사가 있어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그 기사 제목은 “닭에게 배우는 건강 습관 5”입니다(인터넷): (1)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닭은 동트기 직전인 새벽 4~5시부터 ‘꼬끼오~’ 울며 활동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반면 밤에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2) 새끼를 극진히 아낀다는 것입니다. 닭은 모성애가 뛰어난 동물이라고 합니다. 알을 따뜻하게 보호하기 위해 가슴 털을 뽑는 희생도 마다하지 않고, 알을 품는 20여 일 동안 추위, 더위를 안 가리며 꼼짝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닭은 모이도 거의 안 먹는다고 합니다. (3) 골고루 먹는다. 닭은 잡식성으로 음식 종류를 가리지 않고 먹는다고 합니다. 사람도 ‘골고루' 먹는데 중요합니다. (4) 부지런히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닭은 끊임없이 움직인다고 합니다. 꾸준한 운동은 신체 건강을 위한 필수 조건이기도 합니다. (5) 물을 많이 먹는다는 것입니다. 닭이 물 먹고 하늘 보는 행동을 누구나 한번쯤은 봤을 것입니다. 닭은 물을 자주, 많이 마신다고 합니다. 물은 인체의 약 70%를 차지하는 몸의 주요 구성 성분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24-28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것 넷이 있나니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있는 도마뱀이니라.” 이 4 종류의 동물들은 미약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본능적 지혜에 의하여 잘 사는 동물들입니다(박윤선).

 

(1) 개미를 생각해 보십시다.

 

과연 우리가 개미에게서 배워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 잠언 6장 6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우리가 개미에게 배워야 할 지혜는 무엇입니까? 적어도 2가지입니다(박윤선):

 

(a) 개미는 감독하는 자가 없어도 자발적으로 부지런히 그리고 협력하며 일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6장 7절을 보십시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개미”하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저는 개미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인터넷 글을 읽어 보니까 개미에 대한 흥미로운 점들이 있어 한 3가지 나눕니다(인터넷):

 

(i) 개미들은 서로 사려(thoughtful)가 깊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로 “개미”하면 여왕개미하고 일개미로 생각하지만 “척후 개미”(patrolling ant)가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개미는 척후 개미를 보내어 먹이를 찾아낸다고 합니다. 찾아 낸 후 척후 개미는 미숙한 동료를 데리고 천천히 세로로 나란히 가며(병렬주행) 새로 발견한 먹잇감이 있는 곳으로 이끈다고 합니다. 그리고 따라오는 개미는 인도자 선생 덕분에 지식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따라가는 개미가 꾸물거리면 안내자도 속도를 늦추며 뒤쪽 개미가 다시 따라붙으면 다시 빨리 이동할 만큼 인도자 개미와 따라가는 개미 모두 매우 사려 깊다고 합니다.

 

(ii) 개미들은 서로 상부상조(help each other) 한다고 합니다.

 

개미들이 서로 상부상조하는 것은 그들의 “의사소통” 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개미는 페로몬(같은 종의 동물끼리의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화학적 신호를 말함)으로 서로 소통한다고 합니다. 개미의 화학 신호는 다른 벌목 곤충보다 훨씬 발달하였는데 다른 곤충과 마찬가지로 개미는 길고 가늘며 움직일 수 있는 더듬이로 냄새를 맡는다고 합니다. 더듬이 한 짝에서 냄새의 강도나 방향에 대한 정보를 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개미 대부분이 땅에 살고 있으므로 지표에 페로몬으로 길을 남겨 다른 개미들이 따라올 수 있게끔 한다고 합니다. 무리지어 정찰하는 종중에서는 먹이를 찾는 척후 개미는 먹잇감에서 개미집 방향으로 흔적을 표시한다고 함. 다른 개미들이 이 흔적을 따라가며, 이들이 먹이를 들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냄새 길을 더욱 보강한다고 합니다. 그 곳 먹이가 다 없어지면 돌아오는 개미가 표시를 하여, 냄새는 천천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이런 행동은 개미가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가령 먹잇감과 이어진 냄새길이 장애물로 막히면 척후 개미는 길을 벗어나 새로운 통로를 찾는다고 합니다. 한 개미가 새 길을 찾으면, 개미는 돌아오면서 지름길을 냄새로 표시하는 것입니다. 좋은 길로 개미들이 몰리게 되어, 지름길의 냄새는 강해지고 점차 최선의 통로를 찾는다고 합니다.

 

(iii) 개미들은 크기에 따라 전문 직종을 나눈다고 합니다.

 

개미들의 “식량 재배”를 보면 대부분의 개미는 잡식 포식자이자 죽은 생물을 처리하는데 그러나 그 밖에 특별한 영양 공급 방법을 발전시킨 개미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개미를 “가위개미”라고 하는데 그 개미들은 자기네 개미집 안에서만 버섯을 재배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계속 잎을 모아 자신의 군체로 가져와서 작은 고작으로 자르고 버섯 농장에 놓는데 일개미들은 크기에 따라 전문 직종을 나눈다고 합니다. 가장 큰 개미는 줄기를 자르고, 더 작은 일개미는 잎을 씹으며, 가장 작은 개미는 버섯을 돌본다고 합니다.

 

(b) 개미는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6장 8절을 보십시오: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잠언 30장 25절을 보십시오: “곧 힘이 없는 종류로되 먹을 것을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와.”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이를 아시죠? 그 유명한 이야기를 보면 개미는 여름에 열심히 일하는 동안 베짱이는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개미들을 조롱합니다: “어이, 개미들, 여름에 겨울 준비를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그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개미들은 무더운 여름날에도 추운 겨울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매일 일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며 살다가 겨울에 되서는 먹을 음식이 없어 밥을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이 동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개미처럼 되어야지 베짱이처럼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개미처럼 근면성실하게 살아야 하지 베짱이처럼 게으르게 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나이가 들어서 이 이솝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저 개미처럼 근면성실해야 한다는 교훈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 잠언 6장 8절에서 성경은 개미보다 못한 사람에게 개미에게 가서 장래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잠언 30장 25절에서도 성경은 개미를 “여름에 준비하는 개미”, 즉 자기들의 음식을 여름에 미리 준비하는 개미들이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왜 개미들은 “여름”에 겨울 음식을 미리 준비하는 것일까요?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여름이 추수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때에 개미들은 겨울철 먹을 것을 모아 들인다고 합니다(박윤선).

 

(2) 사반을 생각해 보십시다.

 

이렇게 우리는 개미에게서 먹을 것을 여름에 미리 준비하는 근면을 배워야 하며 그 다음에 사반[“너구리”(현대인의 성경)]에게서는 앞으로 닥칠 위험을 내다보고 거처를 견고케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26절을 보십시오: “약한 종류로되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 사반과”[(현대인의 성경) “약하지만 바위산에 집을 짓고 사는 너구리와”]. 이 사반이란 동물은 산토끼처럼 작고 겁이 많은 약한 동물이라고 합니다(인터넷). 그렇지만 사반은 엄청나게 지혜롭다고 합니다(The Pulpit 주석). 그래서 사반은 자기 자신을 큰 동물들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앞으로 닥칠 위험을 내다보고 자기 집을 바위 사이에 짓는다고 합니다(박윤선). 흥미로운 점은 사반은 그룹으로 바위의 갈라진 틈에 서식을 하고 보초병을 세워서 주위에 감시하게 한다고 합니다. 이 보초병이 찍찍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여 신호를 주면 모두가 동굴로 들어간다고 합니다(인터넷). 성경 시편 104편 18절을 보십시오: “높은 산들은 산양을 위함이여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로다”[(현대인의 성경) “높은 산은 들염소가 사는 곳이며 바위산은 너구리의 피난처이다”]. 여기서 “너구리”란 오늘 본문 잠언 30장 2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반”입니다. 즉, 사반(너구리)하면 바위 사이에 집을 짓는 피난처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피난처”하면 우리 주님이 생각납니다. 그 이유는 주님만이 우리의 견고한 피난처가 되시기 때문입니다(시 14:6; 46:1, 7, 11; 59:16; 61:3; 62:8; 91:2; 142:5). 또한 주님은 우리의 힘의 반석이 되시며(62:7) 또한 구원의 반석이 되십니다(삼하 22:47). 그리스도는 우리의 반석이십니다(고전 10:4).

 

(3) 메뚜기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러면 “메뚜기”에게는 우리가 어떠한 지혜를 배워야 할까요? 오늘 본문 잠언 30장 27절을 보십시오: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현대인의 성경) “왕은 없지만 대열을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와”]. “메뚜기”하면 성경에서 어떤 말씀이 생각나십니까? 저는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리신 10개의 재앙 중 여덟 번째 재앙인 메뚜기 떼가 애굽 온 지면을 덮었던 일이 생각납니다(출 10:1-20). 애굽 왕 바로가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내보내지 않았을 때(10:3) 하나님께서는 애굽에 “메뚜기 떼”를 보내시사 애굽 온 지면을 덮어 땅이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4-5절, 현대인의 성경). 그 결과 메뚜기가 애굽 온 땅을 덮어 그 피해가 막심했습니다(14, 15절,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잠언 30장 27절에서 잠언 기자가 땅에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동물 중 하나인 “메뚜기”에 대해서 말하면서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라고 말했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메뚜기”하면 출애굽기 10장뿐만 아니라 요엘 1장 4절도 그렇고 하나님의 징벌의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한 나라에 재앙을 내리실 때에 메뚜기 떼를 사용하셨다는 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의 징벌의 도구로 쓰임 받은 메뚜기 떼는 지도자(“임금”)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잘 정렬되어서 움직이는 군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체계적으로 움직여 명확한 지시와 엄격한 규율 아래에서 행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Thru the Bible With J. Vernon McGee 주석). 결국 잠언 기자가 오늘 본문 잠언 30장 27절에서 임금이 없으되 다 떼를 지어 나아가는 메뚜기를 말한 이유는 우리가 메뚜기 같이 단결해야 함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박윤선).

 

저는 이 교훈을 가정과 교회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우리 가정과 교회도 메뚜기 같이 단결해야 합니다. 비록 여러모로 다르지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한 가정으로서 마음과 힘을 한데 뭉쳐야 합니다. 특히 메뚜기 떼는 지도자가 없는데도 그렇게 잘 단결한다면 지도자가 있는 가정과 교회는 얼마나 더 잘 단결해야 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 생각합니다.

 

(4) 도마뱀을 생각해 보십시다.

 

잠언 기자는 오늘 본문 잠언 30장 28절에서 땅에서 작고도 가장 지혜로운 동물 도마뱀을 말하고 있습니다: “손에 잡힐 만하여도 왕궁에 도마뱀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이지만 왕궁에 사는 도마뱀이다”]. 아마 우리 모두가 도마뱀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저도 저희 집 앞에서 도마뱀을 여러 번 보았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몇 년 전에 필리핀 의료 선교에 가 계신 윤 장로님을 뵈러 갔다가 호텔에 묵고 있는데 천장에 붙어있는 도마뱀을 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28절 말씀처럼 제 손에 잡힐 만한 작은 도마뱀이었지만 저는 아예 그 도마뱀을 잡으려고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도마뱀이 벌레를 잡아먹기 때문인 것도 있겠지만 제가 그것을 잡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도마뱀이 오늘 본문 28절을 보면 왕궁에 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혹시 도마뱀의 특징에 대해서 들어보셨습니까? 도마뱀의 특징은 위험에 직면하면 자기 꼬리를 흔들어 적을 유인한 다음, 자기 꼬리를 잘라 적이 당황하는 동안 도망치는 것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가장 지혜로운 삶은 도마뱀 같이 재빠르고 꾀 있게 행하는 것입니다(박윤선).

 

여러분은 성경에서 재빠르고 꾀 있게 행한 사람하면 누가 생각나십니까? 성경 사무엘상 17장 48-49절 새번역을 보면 다윗이 골리앗하고 싸울 때에 골리앗이 몸을 움직여 다윗에게 점점 가까이 다가오자 다윗은 재빠르게 골리앗이 서 있는 대열 쪽으로 달려가면서 주머니에 손을 넣어 돌을 하나 꺼낸 다음, 그 돌을 무릿매로 던졌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돌로 골리앗의 이마에 맞혀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마10:16) 고 말씀하신 것 기억하시죠? 여기서 “뱀”은 지혜의 상징입니다. 주님께서 뱀의 지혜를 말씀하신 것은 무엇보다 뱀은 자기에게 닥쳐오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조심성 있게 대처하여서 그 어려움을 모면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뱀이 지혜롭다는 것은 신중한 분별력을 말합니다. 뱀의 지혜로움은 모든 사리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우리가 뱀같이 지혜로워야 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파송하셨는데 이 세상에는 겉으로는 양의 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인 거짓 선지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마 7:15; 10:16).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지혜롭게 말하고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넷째로, 가장 지혜로운 삶은 위풍과 후퇴하지 않는 강함이 있고 솔선적으로 앞장서서 문제를 파악하며 선두에서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지도하는 것입니다.

 

하버드 의대 심리학자인 스티븐 버글래스는 “성공증후군”에 대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엄청난 성취감을 얻었다하더라도, 그것을 지탱할 기본적인 성품이 없다면 파멸로 향하게 된다. 그는 그러한 사람들이 다음의 4 가지의 A중 하나 이상에 빠져들게 된다고 믿고 있다: (1) Arrogance(거만), (2) Painful feeling of Aloneness(외로움의 고통), (3) Destructive Adventure-Seeking(파괴적인 모험추구), (4) Adultery(간음). 이 4 가지는 약한 성품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값을 치루기에 언제나 턱없이 비싼 값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현재 자신이 처한 골짜기, 즉 4 가지 A 중 하나 이상 빠져든 상황에서는 결코 시간이나 돈 또는 더 많음 명성으로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버글래스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성품의 균열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깊이가 더해가며 더 파괴적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나, 직장에서나, 모임에서 사람들을 이끌 때, 성품이 우리의 가장 중요한 자산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멕스웰). 미드 파크(Mid Park, Inc)사의 알랜 버나드 회장은 성품에 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리더십이 반드시 갖추어야할 존경심, 그것은 개인의 윤리적 삶을 필요로 한다. 리더는 옭고 그른 것의 경계선, 그 위에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회색지대’가 없는 투명한 삶을 살아야만 한다”(멕스웰). 지도력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목록은 성품이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일꾼들(potential leaders)을 찾아 성숙된 평신도 사역자로 세워 파송하기 위해선 “성품 만들기”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품 만들기”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위기 혹은 역경입니다. 그 이유는 위기가 반드시 성품을 형성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성품을 드러내는 것만큼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역경은 성품과 타협이 만나는 교차로로, 인생은 언제나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합니다(멕스웰).

 

오늘 본문 잠언 30장 29-31절을 보십시오: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와 및 당할 수 없는 왕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의젓하고 위풍 있게 걸어다니는 것이 서넛 있으니 그것은 모든 짐승 중에 가장 강하며 어떤 짐승 앞에서도 물러설 줄 모르는 사자와 으스대며 걷는 수탉과 수염소와 군대를 거느린 왕이다”]. 여기서 잠언 기자는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 서넛이 있”다고 하면서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않는 사자와 사냥개와 숫염소 그리고 왕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언 기자는 지도자(왕)의 자격을 가르치기 위하여 동물 중 3가지 실례를 들고 있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리고 그는 이 3가지 동물들을 가리켜 “잘 걸으며 위풍 있게 다니는 것”[(현대인의 성경) “의젓하고 위풍 있게 걸어다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9절). 즉, 사자나 사냥개나 숫염소는 위풍 있게 걸어 다닌다는 말은 그 동물들은 당당하고 위엄 있게 걸어 다닌다는 뜻입니다(박윤선). 그와 같이 한 나라의 지도자인 왕에게는 당당하고 위엄 있는 덕을 소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박윤선). John MacArthur 목사님은 위엄(dignity)과 자신감(confidence) 이라고 말했습니다(MacArthur). “위엄”(dignity)하니까 저는 제가 한국에서 공부하며 사역을 하고 있었을 때 섬기던 교회 담임 목사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그 때 그분 말로는 제가 교회 장로님들과 권사님들 앞에서 그 분의 위엄을 다 깎아 내렸다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하. 그 때 저는 그 분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위엄”이란 단어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위엄”이란 단어의 사전적인 의미는 “의젓하고 엄숙함, 감히 범할 수 없는 존엄성, 거룩한 두려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존경할 만한 위세가 있어 점잖고 엄숙함. 또는 그런 태도나 기세를 말한다”(네이버 사전)] 지도자에게는 이러한 위엄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자신감”(confidence)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언젠가 “지도자에게 필요한 3 C’s”란 제목 아래 쓴 글을 다시금 찾아 읽게 되었습니다: (1) 첫째 “C”는, Conviction(확신)입니다. 우리가 확신 없이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지도자가 하고자 하는 일에 있어서 성령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의 확신이 없다면 그 지도자를 좇는 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먼저 주님의 뜻인지 아닌지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2) 둘째 “C”는, Confidence(자신감)입니다. 주님의 뜻인 것을 확신 있게 아는 지도자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인 줄 확신하기 때문에 누가 뭐라고 해서 낙심하고 흔들리며 우왕좌왕하지 않습니다. 이 자신감에 근거는 성령 하나님께서 주신 확신입니다. 주님의 뜻인 줄 믿기 때문에 주님께서 신실하게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줄 확신하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는 것입니다. (3) 셋째 “C”는, Consistency(일관성)입니다. 확신과 자신감이 있는 지도자는 일관성 있게 일을 처리합니다. 지도자는 이랬다저랬다 하면 안 됩니다. 지도자는 좇는 사람들에게 일관성이 없다는 말을 들어서는 아니 됩니다. 왜 어떤 지도자들에게는 일관성이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일까 생각해 볼 때에 저는 그 이유는 확신과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너무나 많은 지도자들이 일관성의 가치 혹은 중요성을 잊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뜻이라고 믿고 확신하는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일관성에 일을 완수해야 합니다. 지도자가 일관성이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면 좇는 자들은 혼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외에도 특히 오늘 본문 잠언 30장 30-31절에 나오는 3 동물들을 생각할 때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 3가지가 있다고 교훈을 받습니다:

 

(1) 지도자는 짐승 중에 가장 강하여 아무 짐승 앞에서도 물러가지 아니하는 사자”(30)처럼 위풍과 후퇴하지 않는 강함이 있어야 합니다(박윤선).

 

지도자는 위엄과 자신감 속에서 물러서지 않는 강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좋은 성경적인 예가 바로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 당당하고 서서 골리앗에게 담대하게 말한 다윗입니다. 성경 사무엘상 17장 45-47절을 보십시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2) 지도자는 사냥개처럼 뚜렷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솔선적으로 앞장 서야 합니다.

 

우리고 알고 있듯이 사냥꾼의 사냥을 돕는 사냥개는 사냥꾼보다 앞서 가서 사냥감을 추적합니다(인터넷). 이와 같이 지도자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솔선적으로 앞장 서야 합니다. 그리할 때 좇는 자들도 지도자를 따라 동일한 목표를 가지고 좇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사도 바울이라 생각합니다. 빌립보서 3장 13-14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3) 지도자는 숫염소처럼 선두에서 보호자 역활을 해야 합니다(박윤선).

 

이스라엘 민족에 있어서 양과 염소 이야기는 친숙하고 흥미 있는 이야기로서 염소 없이 양만으로 목축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양 3마리당 염소 1 마리를 섞어서 키우는 게 일반적이라고 합니다(삼상 25:2). 이렇게 염소를 양들과 함께 섞어 키는 이유는 2가지로 합니다:

 

(a) 첫째 이유는 초장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광야는 비가 많이 오지 않는 척박한 환경이기 때문에 양들이 뜯어먹을 충분한 양의 풀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초장을 보호해야 하는데 염소는 다 자란 풀의 잎사귀만 살살 뜯어먹는데 비해 양은 어린잎과 다 자란 잎을 구분하지 않고 뜯어 먹는다고 합니다. 게다가 잎사귀만 살살 뜯어먹는 염소와 달리 줄 기채 다 뜯어먹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수의 염소를 섞어 키우면 양들이 묵묵히 따라한다고 합니다.

(b) 둘째 이유는 광야의 험한 길과 높은 바위를 지날 때 염소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유대광야에서 푸른 초장으로 가는 길은 ‘장밋빛 길’이 아니고 때로는 높은 바위를 올라타야 하고 때로는 험준한 비탈길을 내려가야 하는데, 비온 뒤에 골짜기에 잔잔한 물가가 생기므로 필연적으로 험준한 비탈길을 내려가야 한다고 합니다. 양은 두려움이 많은 동물인고로 ‘돌격대’ 역할을 해주는 것이 바로 염소라고 합니다(인터넷). 이와 같이 지도자는 어느 면으로 보면 자기를 좇는 자들을 위하여 돌격대 역할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도자는 앞(선두)에 서서 담대하게 좇는 자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그들을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지혜로운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지혜로운 지도자의 삶에는 위엄과 자신감을 보여주는 위풍과 후퇴하지 않는 강함이 있습니다. 또한 지혜로운 지도자는 솔선적으로 앞장서서 문제를 파악하며 선두에서 보호자 역할을 합니다. 이러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우리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마지막 다섯째로, 가장 지혜로운 삶은 입을 막고 멈춰야 할 때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 안에서나 교회 안에서 서로 덕을 세우기 위해선 오래 참아야 합니다(살전 5:11, 13). 오래 참되 특히 우리는 상대방을 향하여 분노가 일어날 때 그 분노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자는 자기의 분노를 억제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냅니다(잠29:11). 이렇게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게 되면 다툼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22절).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분노가 일어날 때 우리는 먼저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입을 다물지 않으면 분노 속에서 상대방을 향하여 과격한 말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5:1). 그 결과 과격한 말을 들은 상대방은 상처를 입을 뿐만 아니라 분노가 일어나 자기도 과격한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다툼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욥기 21장 5절을 보면 욥은 자기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나를 보면 놀리라라 손으로 입을 가리리라.” 욥이 자기 친구들에게 자기를 보고 놀라고 손으로 입을 가리라고 말한 이유는 비록 그 친구들은 고통당하는 욥을 위로하고자 왔지만 욥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자기를 조롱하므로(3절) 욥은 그들을 가리켜 “다 재난을 주는 위로자들”(16:2)[“번뇌케 하는 안위자”(개역한글)]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욥기 16장 2절을 보십시오: “… 너희는 모두 나를 위로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괴롭히려고 온 자들이구나!” (현대인의 성경). 고통당하고 있었던 욥은 자기를 위로하러 온 친구들에게 전혀 위로를 받지 못하고 오히려 괴로움을 당했기에 그들에게 입을 가리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친구들에게 입을 가리라고 말한 욥은 욥기 40장 4절에 가서는 자기 손으로 자기 입을 가립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욥에게 “네가 아직도 전능한 자와 다투겠느냐? 나 하나님을 책망하는 너는 이제 대답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2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욥은 “나같이 보잘것없는 자가 주께 무엇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다만 손으로 내 입을 가릴 뿐입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욥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입을 가린 것을 생각할 때 전도서 5장 2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 우리는 이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32-33절을 보십시오: “만일 네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였거나 혹 악한 일을 도모하였거든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현대인의 성경) “네가 만일 미련하게도 잘난 체하였거나 악한 일을 계획했다면 네 손으로 입을 막아라 우유를 저으면 버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처럼 분노를 일으키면 다툼이 생긴다”]. 왜 성경은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가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경은 우리가 미련하면 우리 손으로 우리 입을 막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두 가지로 우리가 미련함을 나타낼 수가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미련함이란 첫째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은 체하는 것 또는 잘난 체 하는 것과 둘째로 악한 일을 도모하는 것 또는 악한 일을 계획하는 것입니다(32절). 즉 성경은 만일 우리가 미련하여 우리 자신 스스로를 높은 체하였거나 잘난 체하였다면 우리의 손으로 우리 입을 막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은 만일 우리가 미련하여 악한 일을 계획(도모)했다면 우리의 손으로 우리 입을 막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여기서 “네 손으로 입을 막으라”는 말씀은 그것을 멈추라는 말입니다(The Nelson Study Bible). 즉, 성경은 만일 우리가 미련하여 스스로 높은 체 하거가 악한 일을 계획했거든 그것을 멈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높은 체할 때에 우리 손으로 우리 입을 막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입을 막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입에서 교만한 소리를 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만한 소리를 내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것이기에 우리는 스스로 높은 체할 때에 우리 손으로 우리 입을 막아야 합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악한 일을 계획했다면 우리 그 계획을 멈춰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그 계획을 멈추지 않으면 우리는 분명히 그 악한 일을 행하므로 하나님께 죄를 범할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높은 체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잘난 체해서도 아니 됩니다. 만일 우리가 교회 안에서 스스로 높은 체 하거나 잘난 체하면 우리의 교만함으로 인해 교회 안에 연합을 깨고 다툼과 분쟁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광야 교회입니다(행 7:38). 그 광야 교회의 지도자는 모세와 아론이었는데 레위 사람 고라와 르우벤 자손 다단과 이바람와 온이란 사람들이 당파를 져서(민 16:1) 이스라엘 회중에 유명한 250명 족장들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렸습니다(2절). 그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3절). 그 말을 들은 모세는 먼저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4절). 그리고 나서 그는 고라와 그 모든 무리에게 이렇게 면책했습니다: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7절). 고라와 그 모든 무리들이 너무 분수에 지나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작게 여겼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성막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섬기게 하신 그 귀한 직분을 가볍게 여겼습니다(9절). 그래서 그들은 아론과 같이 제사장 직분을 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직분을 작게 여기고 가볍게 여기므로 말미암아 분수에 넘치게 생각하여(스스로 자기 자신들을 높이는 교만) 분수에 넘치는 행동과 더불어 분수에 지나친 말을 모세와 아론에게 한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그들 마음에 허영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광야 교회에서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거슬렀던 이유는 그들은 헛된 영광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모세와 아론만을 거슬린 것이 아니라 그 두 분을 광야 교회에 세우신 하나님도 거슬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1절). 이와 같이, 우리 마음에 허영심이 있으면 분수에 넘치게 생각하여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이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은 체 하고 그러면 우리는 분수에 넘치는 말고 행동으로 인해 다른 형제, 자매들을 분노케 하여 서로 다투게 될 확률이 많습니다(잠 30:33). 결국 우리가 교회 안에서 스스로 높은체하면 우리는 교회의 화목과 연합을 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련하게 스스로 높은 체(잘난 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악한 일을 도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악한 일을 계획해서는 아니 됩니다(32절). 설마 우리가 무슨 악한 일을 계획을 세울까 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합했던 사람 다윗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한 것을 보면 우리도 그럴 위험이 더 많지 않을까요? 왜 다윗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했나요? 성경은 분명히 "남의 아내를 가로채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살전 4:6, 현대인의 성경) 다윗 왕은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를 가로챘습니다(삼하11:27). 그것도 그는 의도적으로 계획을 세워서 밧세바의 남편인 충성된 군인이었던 우리아를 죽인 후에 말입니다(14-26절). 왜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행한 것일까요?(27절) (1) 그는 하나님께서 그가 어디로 가든지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을 때(8:6, 14) 조심하지 않고 긴장을 풀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로 전쟁이 시작되는 때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 군과 요압을 출전시키고 자기는 예루살렘 왕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11:1, 2, 현대인의 성경). (2) 그는 밧세바가 목욕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2절). 그리고 그는 그녀가 심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2절). 그는 보지 말아야 할 광경을 본 것입니다. (3) 그는 사람을 보내 밧세바에 대해 알아보게 하였습니다(3절). 그리고 그는 밧세바가 우리아의 아내, 즉 유부녀인 줄 알았습니다(3절). (4) 그는 전령을 보내 밧세바를 데려오게 하여 그녀와 더불어 동침했습니다(4절). (5) 그는 밧세바가 임심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5절). (6) 그래서 그는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두 번이나 보내려고 시도했습니다(8, 12-13절). 그 이유는 다윗은 자기와 동침하여 임신한 밧세바를 우리아가 동침하면 그 아기가 자기의 아이가 아니라 우리아의 아기라고 속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7) 다윗의 자기의 계획대로 우리아가 집으로 내려가지 않으니까 결국 요압과 짜고 우리아를 전쟁에서 죽입니다(14-26절). (8) 그런 후 우리아의 장례를 마친 후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밧세바를 왕궁으로 내려와 자기의 아내로 삼았습니다(27절). 성경은 다윗이 이렇게 행한 그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7절).

 

우리는 입을 막아야 할 때 막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 마음에 미련함이 있으면 우리는 입을 막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련하여 우리 자신을 스스로 높은 체하거나 잘난 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악한 일을 도모하거나 계획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상대방의 분노를 격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상대방의 분노를 격동하는 일을 멈추지 않으면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입을 막아야 할 때 막아야 하며 멈춰야 할 때 멈춰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이 험악한 죄악 된 세상에서 우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마 10:16). 우리는 오늘 본문 잠언 30장 18-33절에서 가장 지혜로운 삶은 무엇인지 한 5가지로 묵상했습니다: (1) 가장 지혜로운 삶은 위선을 버리는 것입니다. (2) 가장 지혜로운 삶은 질서 있게 사는 것입니다. (3) 가장 지혜로운 삶은 개미같이 근면하고, 사반과 같이 위험을 내다보고 거처를 견고케 하고, 메뚜기 같이 단결하고, 그리고 도마뱀 같이 재빠르고 꾀 있게 행하는 것입니다. (4) 가장 지혜로운 삶은 위풍과 후퇴하지 않는 강함이 있고 솔선적으로 앞장서서 문제를 파악하며 선두에서 보호자 역할을 하면서 지도하는 것입니다. (5) 가장 지혜로운 삶은 입을 막고 멈춰야 할 때 멈추는 것입니다.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