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지 말아야 합니다.

 

 

[잠언 3010-17]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돼야 할까요? 언젠가 “이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란 제목을 걸고 이런 글을 쓴 적이 있었습니다: “이해하려고하기 보다 너무 빨리 오해하는 사람, 진심으로 칭찬하기보다 비판하기를 속히 하는 사람, 참고 인내하기보다 너무 쉽게 함부로 분노하는 사람, 남의 이야기를 듣고자 하기보다 자기 주장하기 바쁜 사람, 이러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 텐데 .... ㅠ” 과연 우리는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저는 오늘 본문 잠언 30장 10-17절 중심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한 7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비방(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10절을 보십시오: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남의 종에 대하여 그 주인에게 비난하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저주하여 네가 그 대가를 단단히 받게 될 것이다”]. 어느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제목이 “말 많은 ‘수다쟁이 직장동료’ 퇴치법”이란 글이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인터넷). 그 기사에 의하면 “많은 직장에서 갈등의 원천이 되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생활을 지나치게 공유하는 직장 동료의 끊임없는 수다”라고 합니다. 어느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전문직 및 기업 근로자 5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5명 중 3명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사생활을 지나치게 공유하는 직장 동료가 한 명 이상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다쟁이들은 동료들의 업무를 방해하는 경우가 잦으며 자신의 경력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의 경력도 위험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일하고 있는 직장에 이러한 수다쟁이 직장 동료가 한 사람이 여러분 주위에 있다면, 그래서 그 직장 동료가 여러분의 사장님에게 가서 여러분에 대해 수다를 떨다가 여러분에 대해 비방을 했다면 어찌 될 것 같습니까? 그 동료가 사장님에게 여러분을 비웃고 헐뜯어서 말하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사장님과의 관계가 어찌 되겠습니까? 안 그래도 여러분의 재정 사정이 힘들어서 꼭 그 직장에서 계속 일을 해야 하는데 그 직장 동료가 사장님에게 가서 여러분에 대해 비난을 하므로 사장님이 여러분을 안 좋게 본다면 여러분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혹시나 사장님이 여러분에 대한 비방의 말을 여러분의 직장 동료를 통해 듣고 여러분을 해고한다든지 해서 여러분이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다면 그래서 재정적으로 더 힘들어진다면 여러분은 그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30장 10절을 보면 성경은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너는 남의 종에 대하여 그 주인에게 비난하지 말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종의 신분으로서 상전을 섬기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와서 자기 상전에게 자기에 대해서 비방을 하면 그 종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종은 자기 상전에게 불이익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그 비방이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거짓 비난(false accusation)임에도 불구하고 그 종의 상전이 그 말을 믿고 그 종을 수상하게 볼뿐만 아니라 안 좋게 본다면 그 종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종을 그 상전에게 훼방하면, 그것은 그에게 대한 상전의 사랑을 끊어주는 악한 짓이다. 종의 생계가 그 상전에게 달려 있는데, 만일 그 상전이 그를 미워하게 된다면 그는 비참해진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를 그 상전 앞에서 훼방함은, 훼방의 죄만 아니라 약자를 짓밟아 버리는 잔인한 죄까지 범함이다.” 성경 신명기 23장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네게로 도망하거든 너는 그의 주인에게 돌려주지 말고”[(현대인의 성경) “만일 어떤 종이 그의 주인을 떠나 도망치면 여러분은 그를 억지로 돌아가게 하지 말고”]. 여기서 종이 그의 주인을 피하여 도망한 이유는 그의 주인이 부당한 주인(an unjust master)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종이 당신에게 도망 왔다면 그 종을 억지로 그의 주인에게 돌아가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종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상전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는 종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과 달리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비난)하는 사람, 그 사람을 향하여 그 종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30장 1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가 너를 저주하겠고 너는 죄책을 당할까 두려우니라”[(현대인의 성경) “…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저주하여 네가 그 대가를 단단히 받게 될 것이다”]. 그 종은 자기 상전에게 거짓 비난을 한 사람을 저주할 뿐만 아니라 그 대가를 치르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가는 값비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상전에게 종에 대한 거짓 비난(비방)의 대가는 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너는 종을 그의 상전에게 비방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남의 종에 대하여 그 주인에게 비난하지 말아라”]고 말씀한 것입니다(잠 30:10).

 

요즘 우리는 SNS를 통해 유명 연예인 등 많은 사람을 비방하는 댓글을 수 없이 보게 됩니다. 그 비방의 댓글들로 인해 그 유명 연예인들 등은 극심한 스트레스 및 우울증까지 걸리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제가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한 유명 연예인이 온라인 SNS상에서 자기에 관련된 악의적인 허위사실 유포, 인신공격, 성적 희롱 등 명예훼손 게시글/댓글 사례에 대해 강경 대응인 법적 대응으로 형사 고소장을 서울 강남 경찰소 사이버 수사팀에 제출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인터넷). 인터넷상에서 댓글의 말 하나하나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하는 시대를 맞이한 듯합니다. 청와대 웹사이트에 어느 사람이 올린 글을 보니까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사람을 자살로 이르게 하고 비난 비방하고 정말 언어의 살인자들입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더욱더 입 조심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신중해야 합니다(제 자신이 그리 잘 못하고 있기에 제 자신에게 말하는 것임). 특히 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비난/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14장 4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그가 서 있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자기 주인에게 있으매 그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그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라”[(현대인의 성경) “누가 감히 남의 종을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가 서든 넘어지든 그의 주인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세우실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서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남의 하인(종)을 비판(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로마서 2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또한 성경 야고보서 4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현대인의 성경) “형제 여러분, 서로 헐뜯지 마십시오. 형제를 헐뜯거나 판단하는 사람은 율법을 헐뜯고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재판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직장 동료이든 교회의 형제, 자매이든 심지어 가족 식구이든 다른 사람들에게(앞에서) 판단하며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잠 30:10). 만일 그리하지 않으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대가를 단단히 받게 될 것입니다(10절).

 

둘째로, 우리는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11절을 보십시오: “아비를 저주하며 어미를 축복하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자기 아버지를 저주하고 자기 어머니를 축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더 이상 부모님을 공경하는 시대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이 시대는 더 이상 부모님께 효를 하는 시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이리 생각하는 성경적인 근거는 바로 디모데후서 3장 1-2절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현대인의 성경) “말세에 어려운 때가 있으리라는 것을 잊지 마시오. 그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뽐내고 교만하고 하나님을 모독하고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감사할 줄도 모르고, 거룩하지도 않으며”]. 지금은 말세요 고통 하는 때입니다. 이 어려운 말세 때 징조 중 하나는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이 세대 사람들은 부모님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순종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 세대 사람들은 자기 부모님을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11절을 보면 성경은 “자기 아버지를 저주하고 자기 어머니를 축복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말씀대로 지금도 자기 아버지를 저주하는 자녀들이 많이 있지 않습니까? 제가 알게 된 지체들 중에 아버지와의 관계가 무척 안 좋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지체는 자기 아버지하고의 관계를 끊고 지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아버지에게 큰 상처를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로 아버지와 자식과의 관계가 매우 안 좋은 지체들이 여기저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머니하고의 관계는 어떠한가 생각해 볼 때 대체적으로 지체들이 어머니하고의 관계가 아버지와의 관계보다 좋은 듯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들의 어머니를 오늘 본문 말씀처럼 축복하고 있을까 생각해 볼 때 의문이 들긴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11절 말씀을 보면 좀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그 흥미로운 점은 잠언 기자 아굴이 “저주”란 단어와 “축복”이란 단어를 둘 다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아굴은 ‘자기 아버지와 자기 어머니, 혹은 자기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 아버지를 저주하고 자기 어머니를 축복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라고 말했을까요? 저는 거기에 저자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도란 부모님은 “저주”의 대상이 아니라 “축복”의 대상임을 알려주기 위해서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모님을 축복해야지 저주해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입니다. 성경 레위기 20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현대인의 성경) “누구든지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여라. 그는 자기를 낳아 준 부모를 저주하였으므로 죽어야 마땅하다”]. 또한 마태복음 15장 4절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부모를 저주하는 사람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참고: 막7:10). 이렇게 성경은 부모님을 저주하는 것을 죽을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길 원하고 계십니다. 공경하되 우리는 우리 부모님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로 우리는 부모가 자녀를 축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책 제목이 “하루에 한번 자녀를 축복하라”는 것처럼 우리 부모는 우리 자녀를 하루에 한 번씩 축복하는 것 좋다(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마도 우리는 자녀가 부모님을 하루에 한 번씩 축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잘해보지 못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경이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고 말씀하고 있다면 우리를 사랑하는 우리 부모님을 축복하고 축복해야지 저주해서 되겠습니까. 성경 누가복음 6장 28절이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심지어 우리 부모님이 우리를 저주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 부모님을 축복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Y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데 어느 여자가 어느 남자가하고 대화를 하는데 옆에 있는 제가 들릴 정도로 소리를 내서 대화를 하길래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가 얼마나 “F…”욕을 해가면서 대화를 하는지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 때 저는 제 마음 속으로 어떻게 저렇게 욕을 해가면서 대화를 할까라는 생각 속에서 ‘저 여자의 입이 추하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며칠 후에 저는 인터넷 뉴스를 보다가 작년 미국 NBA 농구 서부 결승전에서 한 유명한 독실하다는 기독교 농구 선수가 ‘F…’욕을 했는데 자기 어머니로부터 면책을 받았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 후 저는 제가 운영하고 있는 ‘목사, 강도사, 전도사, 사모’ 페이스 북에다가 ‘우리는 마음으로라도 욕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글과 함께 그 인터넷 뉴스 기사를 나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지금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F …’욕 뿐만 아니라 다른 욕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마음과 입술이 정화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욕을 하는 것만의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욕만 하고 다른 죄는 범하고 있지 않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한국 어느 교회의 “새 가족에게 꼭 가르쳐야 할 5가지 원리”라는 성경교제를 보니까 이런 글이 실려 있어 여러분과 나눔니다: “… 우리는 마음으로 죄를 많이 짓습니다. 성경은 음욕을 품는 것만으로 간음했다고 하고 형제를 미워만 해도 살인한 것과 같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간음한 자요 살인한 자요 더럽고 추한 죄입니까?”(인터넷) 그래서 우리는 종종 거룩하신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우리 자신을 가리켜 ‘이 더럽고 추한 죄인’이라고 기도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면서 자기 자신을 ‘이 더럽고 추한 죄인’이라고 자백(인정)해보신 적이 없으시다면 다른 사람이 그리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 기도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 30장 12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스스로 깨끗한 체하면서도 자기의 더러움을 씻지 않는 사람이 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엔 어떠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고 있나요? 여러분은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도 자기의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사람하면 누가 생각나십니까?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 잠언 30장 1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는 자들은 누구를 가리키는가 하면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자들의 특징이4가지가 있습니다(박윤선): (1)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종교의 외부적 규례에 치중하고 심령 상태를 등한히 합니다(마 23:25-27), (2)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한 2가지 잘 한 것을 가지고 자기들의 인격 전체가 완전해진 듯이 높아집니다(눅 18:12), (3)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남들을 자기만 못한 자로 여기고 차별합니다(11절), (4)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하는 자들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교만하여져서 속죄하여주시는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 4가지 특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 당시의 종교 지도자였던 바리새인들이 추구했던 의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였습니다. 여기서 “자기 의”란 자기의 종교적인 행실을 의지하며 하나님 앞에 서고자 하는 자세를 말합니다. 이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이러한 “자기 의” 곧 “율법의 의”로는 결코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롬 3:20; 갈 2:16). 그 이유는 사람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들은 자기 자신의 의를 마치 더러운 옷과 같이 여깁니다(사 64: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는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롬 3:21-22). “하나님의 의”란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근거로 한 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를 근거로 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셨습니다(행 13:38).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어(롬 4:25) 우리는 오직 우리에게 전가된 예수님의 의만 의지합니다(3:22).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를 의지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의, 예수님의 의만 의지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 안에 “자기-의”(self-righteousness)를 추구하는 본능적인 ‘이기심’(selfishness)이 오늘도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자랑(self-glory)하게 만들어 ‘자아-숭배’(self-idolatry)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우리는 오직 주님만을 경배하여 주님을 자랑하며 주님처럼 이타적인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더럽고 추한 모든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3일 만에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롬 4:25).

 

넷째로, 우리는 거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13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눈이 대단히 높고 거만한 자가 있으며”(“눈이 심히 높으며 눈꺼풀이 높이 들린 무리가 있느니라”). 여러분, 우리 안에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지 않나요? 저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본능을 생각할 때 성경에 나오는 사울 왕이란 인물이 생각납니다. 물론 우리는 “사울 왕”하면 그 유명한 성경 구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삼상15:22)는 말씀이 생각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성경 문맥에서 다시금 살펴보면 사울 왕은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했어야 했었는데(3절) 그는 이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원인은 교만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그가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도 자기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기보다 사무엘에게 이렇게 요청했습니다: “내가 범죄하였소. 하지만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할 수 있게 하여 적어도 내 백성의 지도자들과 모든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만이라도 나를 높여 주시오” (30절,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하나님께 죄를 범한 후 책망을 받은 와중에서도 사울 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과 모든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만이라도 자기 자신을 높여 달라고 사무엘에게 요청할 수가 있었을까요?

 

저는 그 원인이 스스로 작게 여길 정도로(17절) 겸손했던 사울 왕이 교만한 자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변질의 원인이 적어도 2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겸손에서 교만으로 변질되는 원인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보는 것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많은 때에 믿음으로 행하기보다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행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가 위급한 상황에 쳐해 있을 때 우리는 그 상황에 위급함 속에 휘말려 믿음으로 행하기보다 상황에 이끌림을 받을 때가 많습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사무엘상 13장 6절부터 보면 해변의 모래 같이 많은 블레셋 사람들이 믹마스에 진 쳤을 때(5절)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saw that their situation was critical) 모두 다 두려워 떨면서(7절) 사울에게서 흩어져(8절) 여기 저기 숨었습니다(6절). 자기 앞에서 그리 흩어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또한 믹마스에 모인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을 보고(11절)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바를 지키지 아니하였습니다(13, 14절). 그는 사무엘의 오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친히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9-10, 12절). 제사장만이 드릴 제사를 사울 왕은 자기가 친히 하나님께 드리므로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것은 신성한 제사법을 무시한 사울 왕의 불신앙이며 또 교만이었습니다(박윤선).

 

(2) 겸손에서 교만으로 변질되는 원인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보다 자기 자신의 영광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도둑질 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영광 받을 만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릴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사울 왕이 그랬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말렉과 전쟁에서 승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웠습니다(삼상 15:12). 아니 어떻게 자기 자신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웁니까? 오히려 사울 왕은 그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았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참고 14:35) 왜 그는 이렇게 어리석게 행하였습니까? 그 원인은 이미 사울 왕의 마음에 교만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놀라운 것은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했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전쟁에 승리케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그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13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눈이 대단히 높고 거만한 자가 있으며.” 여기서 “눈이 대단히 높”다는 말씀은 “교만한 눈”(6:17) 또는 “마음이 교만한 것”(21:4)을 말합니다. 이렇게 눈이 대단히 높은 교만한 자가 바로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 아삽이 말한 형통하는 악인들[잘되는 악인들(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시73:3). 그들은 교만을 목걸이로 삼고(6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7절) 또한 그들은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합니다(8절). 어느 정도로 그들은 거만하게 말하는가 하면 그들은 “입으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대적”합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가장 높으신 분이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 수는 없다”라고 말합니다(11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9장 8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거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하게 하여도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거만한 자”는 교만한 자요 분노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하며 교만한 자는 다툼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 넣어서 성읍을 요란케 합니다(MacArthur).

 

저는 제 자신의 교만함을 생각할 때 어떻게 제 안에 교만함이 있는지 알 수 있는가 하면 저를 사랑해 주시는 성숙한 신앙인의 충고를 듣지 않는 건가 그분의 책망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저의 교만함은 저를 사랑해서 책망해주신 분을 싫어하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제 안에 거만함은 진리의 교훈과 책망을 멸시하여 거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만함은 저로 하여금 세상의 어리석음의 소리와 유혹의 소리를 너무나 속히 듣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혜의 소리를 들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9:8).

 

여러분, 교만은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입니다(잠 6:16).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용납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 101:5). 성경은 하나님께서 교만한 눈을 낮추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8:27).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함을 본 받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낮추시사 이 땅에 오셔서 섬김을 받으시기보다 섬기신 것처럼 우리도 겸손히 낮아져서 섬김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다섯째로, 우리는 남의 것을 착취하여 우리 자신의 영리만 추구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 혹시 “갑의 착취”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한국 뉴스를 통해 종종 듣는 말 중에 하나가 바로 ‘갑질한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그 단어는 한국에서 무슨 계약을 체결할 때 계약서 첫 머리에는 반드시 갑(甲)과 을(乙)이 등장한다. 계약당사자를 간단히 표시하는 글자다. 갑은 대개 계약을 주는 쪽이고 을은 계약을 받는 쪽이다. 그래서 대체로 갑이 더 힘이 센 쪽이다. 그러므로 계약서는 갑에게 유리하게 작성되기 마련이고, 갑이 부당한 요구를 해도 을은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이런 갑의 횡포를 “갑질”이라 하는 것 같다. 갑같이 오만하게 행동한다는 뜻일 것이다”(인터넷). 이렇게 갑이 을에게 오만하게 행동하는 것 중에 하나라 바로 ‘착취’입니다. 갑의 위치에 있는 사람이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고 노동력이나 분배되어야 할 몫을 착취하는 짓이 바로 ‘갑의 착취’입니다(인터넷). 갑은 수많은 을을 착취하되 노동착취 같은 것을 하여 자기보다 힘이 없고 약한 을에게서 약속의 돈을 충분히 지불하지 않으므로 돈까지도 착취합니다.

 

성경에서는 “갑의 착취”는 시편 73편 6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강포가 저희의 입는 옷이며”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곧, 악인들의 모든 행동과 표현이 남을 압제하며 착취하는 포학뿐이라는 뜻입니다(박윤선). 그런데 이러한 착취의 행동을 악인들만 한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 5장 7-9절을 보면 유다 지도자들도 자기 동족에게 행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신중히 생각한 다음 지도자들과 관리들을 꾸짖으며 '당신들은 당신들의 형제들을 착취하고 있소!' 하고 책망하였다. 그리고서 나는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큰 집회를 열고 지도자들과 관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이방인들에게 팔린 우리 형제 유다 사람들을 도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오게 했는데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의 형제들을 팔려고 합니다. 그것도 여러분의 동족에게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할 말이 없는 듯 침묵을 지켰다. 그때 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여러분의 소행이 옳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옳은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우리 원수인 이방 사람들에게 우리를 비웃을 구실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느헤미야는 당시의 지도자들이 부당하게 백성을 착취하기 때문에 시련이 더 심각하게 되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어려운 시기를 이용하여 돈을 빌려 주고, 갚지 못하는 사람들의 자녀들을 노예로 삼는 ‘형제의식’의 결핍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이방인들이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데 우리가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않느냐고 지적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경외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입니다"(이동원).”

 

오늘 본문 잠언 30장 14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착취하여 자기 영리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있다”[(개역개정) 앞니는 장검 같고 어금니는 군도 같아서 가난한 자를 땅에서 삼키며 궁핍한 자를 사람 중에서 삼키는 무리가 있느니라]. 여기서 개역개정에서 말씀하고 있는 “앞니는 장검 같고 어름니는 군도 같”다는 말씀은 잔인성을 비유하는 시적 표현입니다(박윤선). 즉,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람들의 잔인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 탐심을 채우는 자들로서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그들에게서 잔인하게 착취하여 자기 영리만을 추구합니다. 그 좋은 성경적인 예가 바로 이스라엘 왕 아합입니다. 열왕기상 21장을 보면 아합 왕은 자기의 충성된 시민인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여 결국에 가서는 아무 죄 없는 나봇을 죽였습니다. 또 다른 예는 이사야 선지자 시대 때 이스라엘 목자들이 탐심 속에서 자기 배만 채우려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했습니다. 성경 이사야 56장 11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그들은 욕심꾸러기 개처럼 만족할 줄 모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몰지각한 목자들이다.” 이스라엘 목자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서 쾌락을 추구하며 오늘도 또한 내일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안일을 좋아하였고(10절) 탐심이 많았습니다(11절). 그러면서도 각성이 없었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11절). 그들은 자기 사정만 돌아보면서 술에 취하여 쾌락을 누렸습니다(11-12절).

 

우리는 자기 사정만 돌아보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고린도전서 13장 5절 말씀처럼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이웃의 유익을 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마 22:39). 사도 바울은 이 예수님의 명령대로 이웃을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이웃인 에베소 교회 성도들의 유익을 구했습니다. 에베소 교회 장로들 앞에서 마지막 이별 설교를 한 사도 바울은 3년 동안 에베소 교회 형제, 자매들을 섬길 때에 그들에게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어 그들에게 전하여 가르쳤습니다(행 20:20). 그가 그들의 유익을 위하여 거리낌이 없는 전하고 가르쳤던 것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21절).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가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을 여기지 않았습니다(24절). 또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했습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11장 9절을 보면 그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함께 있었을 때 비용이 부족하였지만 그는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는 일에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고 또 조심했습니다(9절).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해를 받았습니다. 어떠한 오해였는가 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바울이 자기들을 착취했다고 간교하게 속임수로 말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12:16, 현대인의 성경). 이 때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사랑하기에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스스로 그리도 조심하였는데 그가 자기들을 착취했다고 간교하게 속임수로 말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바울의 마음은 어떠했었을 까요? 새찬송가 212장 “겸손히 주를 섬길 때”가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 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겸손히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되 우리 자신의 유익보다 우리 이웃의 유익을 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여섯째로, 우리는 불만족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탐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마음은 이 세상의 어떠한 사랑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오직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만이 온전히 만족 할 수 있습니다. 성경 시편 90편 14절을 보십시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현대인의 성경) “아침마다 주의 한결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만족하게 하셔서 우리가 평생 기쁨으로 노래하고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도서 3장 1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모든 것을 때를 따라 아름답게 만드시고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가 없다”]. 영원을 사모하는 우리의 마음은 오직 주님의 영원한 사랑으로만이 만족감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나느니라”(고후 3:5). 결코 우리 스스로에게서 난 만족은 온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금 불만족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불만족하는 마음은 무익한 것을 추구합니다(전 5:10, 11).

 

오늘 본문 잠언 30장 15-16절을 보십시오: “거머리에게는 두 딸이 있어 다오 다오 하느니라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곧 스올과 아이 배지 못하는 태와 물로 채울 수 없는 땅과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이니라”[(현대인의 성경) “거머리처럼 지칠 줄 모르며 족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서넛 있으니 그것은 지옥과 임신하지 못하는 태와 비로도 흡족하지 않는 메마른 땅과 걷잡을 수 없이 타오르는 불길이다”]. 여기서 “거머리”나 거머리의 “두 딸”이나 스올과 배지 못하는 태와 물과 불은 모두 다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 족한 줄을 알지 못하여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것 … 족하다 하지 아니하는 불 …”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지금 잠언 기자가 말하고 있는 요점은 이 모든 것은 만족할 줄 모르고 달라고만 하는 탐심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박윤선). 예를 들어, “거머리”란 환형동물은 몸길이가 3-4cm밖에 안되지만 몸의 양끝에 빨판이 있어 다른 동물의 살에 붙어 피를 빨아먹는데 아주 팽팽할 때까지 피를 빤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런데 그 거머리에게 두 딸이 있는데 그들의 이름이 “다오 다오”(give give)인 것을 보면 끊임없이 피를 빨아들이는데 족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Believer’s Bible 주석). 박윤선 박사님은 “스올”은 죽은 자를 삼키고 또 삼켜도 차지 않고, “아이 배지 못하는 태”는 늘 잉태하기를 원하고, “땅”은 물을 붓는 대로 다 스며들고, “불”은 연료를 계속 공급해도 그것을 다 연소시키며 더 일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이렇게 거머리나 거머리의 두 딸이나 스올이나 아이 배지 못하는 태나 물로 채울 수 없는 땅이나 족하다 하지 않는 불이나 이 모든 것들이 다 만족하지 못하는 것들로서 성경은 우리에게 탐심으로 인한 불만족을 매우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 외에 성경 에스겔 16장 28-29절을 보면 족한 줄 알지 못하는 것이 또 있는데 그것은 “음욕”입니다: “네가 음욕이 차지 아니하여 또 앗수르 사람과 행음하고 그들과 행음하고도 아직도 부족하게 여겨 장사하는 땅 갈대아에까지 심히 행음하되 아직도 족한 줄을 알지 못하였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네가 음욕이 차지 않아서 앗시리아 사람들과도 음행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상업의 나라 바빌로니아 사람들과도 음행하였으나 너는 만족을 얻지 못하였다”]. 족한 줄을 모르는 음욕 외에 성경은 사람의 눈은 만족함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27:20). 즉, 눈의 욕심은 만족함이 없습니다. 우리 사람의 눈은 음란으로 가득 차서 끊임없이 죄를 짓습니다(벧후 2:14). 그래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책 “영적 광명”에서 욥기 31장 1절인 “내가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는 말씀 중심으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눈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보면, 마음도 그것을 따라갑니다. ... 만일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혹을 받게 하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것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 여러분의 눈이 어떤 것들을 탐하지 말게 하십시오. 똑바로 앞만 바라보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십시오. … 여러분은 눈과 언약을 맺고 앞만 똑바로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지시하는 방향, 거룩과 하늘만 주목하고 나가십시오." 여러분, 만일 우리 마음에 욕심이 있다면 그 욕심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만족을 모릅니다. 마치 바다가 언젠가 흘러오는 물로 차지 못함 같이(전 1:7) 사람의 욕심에는 끊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끝없는 욕심을 만족시키고자 이 헛된 세상에서 이것저것을 추구해 보지만 결국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 왕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전도서 2장 10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자기 눈이 원하는 것을 그는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자기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그가 막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보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누려보았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2:10). 그런데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절).

 

우리 안에 욕심이 있으면 오히려 우리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만족 속에서 불평하며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불만족은 우리로 하여금 불평하게 만듭니다. 왜 우리는 불만족하며 불평하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욕심입니다. 이렇게 욕심이란 무섭고 참 위험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욕심은 우리에게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는 이유는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을 족한 줄 모르는 자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마음으로는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욕심이 많은 사람은 탐심 속에서 돈을 사랑하여 부하려고 합니다(딤전 6:6-10).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다른 사람과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잠 28:25). 여러분, 우리는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인생의 유익과 의미는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의 길을 걸으면서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림자 같은 일평생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영혼은 영원을 사모하기 때문에 영원한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혼을 만족케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일곱째로, 우리는 우리 부모님을 조롱하며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을 순종해야 합니다.

 

“늙어가는 부모님 얼굴 볼 때마다 하는 후회 6가지”란 기사가 있어서 읽어보았습니다(인터넷): (1) 부모님 가슴에 상처 주는 말을 한 것, (2) 부모님에 대한 무관심, (3) 애정표현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4)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한 것, (5)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못한 것 그리고 (6) 부모님의 건강을 미리 챙기지 못한 것. 점점 연세가 들어가시는 우리 부모님들, 우리는 그 분들이 질병으로 고통당하시는 모습을 봅니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우리 부모님이 서로 간병을 하시면서 서로 사랑하시는 모습도 봅니다. 심지어 생사의 갈림 길에 놓여 있는 아버님 또는 어머님을 뵈면서 우리 자녀들은 자책하면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현실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일들로 인하여 힘들어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을 떠나보내야 하는 우리는 과연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잠언 30장 17절을 보십시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현대인의 성경) “자기 아버지를 조롱하며 자기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힐 것이다”]. 여러분, 자녀가 자기 아버지를 조롱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네이버 사전을 보니까 ‘조롱하다’라는 단어의 의미는 ‘비웃거나 깔보면서 놀리다’라고 적혀 있습니다(인터넷). 원어 히브리어 의미는 다른 사람을 폄하할 정도로 비웃는 또는 조롱하는 것을 말합니다(DBL Hebrew). 그 예가 바로 잠언 17장 5절의 말씀처럼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주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그러면 자녀가 아버지를 어떻게 조롱할 수 있을까요? 물론 자녀가 아버지를 폄하하는 말로 아버지를 조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는 아버지의 가치를 깎아내리는 발언으로 아버지를 조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말로만 자녀가 아버지를 조롱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이사야 37장 2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유다 백성들이 앗수르 왕을 멸시하고 조소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 하반절에 보면 “…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는 말씀을 보면 자녀가 아버지에게 머리를 흔들므로 조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자녀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자녀가 아버지에게 등을 보이고 걸어가면서 머리를 흔들거린다면 이 얼마나 아버지를 무시하고 멸시하는 비언어적인 행동입니까. 그러면 왜 이렇게 자녀는 자기 아버지를 조롱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자녀가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성경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출 20:12; 신 5:16; 마 19:19; 엡 6:1, 2) 아버지를 조롱하는 자녀는 이 말씀을 무시하고 있기에 자기 아버지를 무시하고 멸시하며 조롱하는 것입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한다면, 아버지를 조롱하는 미련한 자녀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지 않기에(레 19:32) 자기 아버지를 공경하고 있지 않으므로 그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자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자기 육신의 아버지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아버지를 멸시하고 조롱하는 것입니다(참고: 말 1:6).

 

그러면 왜 자녀가 자기의 어머니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것일까요? 왜 자녀는 자기 어머니를 업신여기는 것일까요? 물론 그 이유는 그 자녀가 교만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교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그 말씀을 업신여기므로 어머니를 업신여기고 어머니 순종하기를 싫어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녀가 지혜가 없으면(잠11:12), 즉 미련하면(23:9) 자기 어머니를 멸시하고 업신여겨 그녀의 말씀 순종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렇게 교만하고 미련한 자녀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고 멸시하기에(13;13)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의 어머님을 공경하며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님 순종하기를 싫어하고 조롱하며 업신여기는 자녀에는 반드시 보응이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보응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30장 17절을 다시 보십시오: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공중의 새들이 죽은 시신을 먹는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특히 까마귀나 독수리가 공중에서 날아다니다가 죽은 시체를 발견하면 내려와서 시체에 올라서 시체의 삶을 쪼아 먹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으십니까? 그 장면을 생각할 때 우리는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고 순종하지도 않고 오히려 멸시하고 조롱하며 업신여기면서 불순종하는 자녀의 결말이 얼마나 두려운지 깨달아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 잠언 23장 22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를 낳아 준 아버지에게 순종하고 늙은 어머니를 업신여기지 말아라”(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우리 부모님을 업신여기거나 조롱하거나 멸시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을 공경하며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출 20:12; 신 5:16; 마 19:19; 막 10:19; 엡 6:2). 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며 또한 우리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 잠언 30장 10-17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를 한 7가지로 배웠습니다: (1) 우리는 비방(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10절), (2) 우리는 저주하지 말아야 합니다(11절), (3) 우리는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12절), (4) 우리는 거만하지 말아야 합니다(13절), (5) 우리는 남의 것을 착취하여 우리 자신의 영리만 추구해서는 아니 됩니다(14절), (6) 우리는 불만족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탐심을 경계해야 합니다(15-16절), 그리고 (7) 우리는 우리 부모님을 조롱하며 업신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부모님을 순종해야 합니다(17절). 이 말씀에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