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배우는 사람

 

 

[잠언 301-9]

 

 

여러분은 신앙의 여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계십니까? 제가 신앙의 여정에서 배우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나는 할 수 있다”에서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하실 수 있습니다”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사역을 하다보면 참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절실히 필요함을 느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중에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할 때가 많습니다. 저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를 광야로 삼고 목회하면서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력함을 철저히 깨달아 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더 의지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결코 잘못된 기도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선순위에는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즉, 저는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께 구하기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구해야 함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을 마음을 구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빌1:8)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들을 사랑하고 싶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3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란 오늘 본문 1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야게의 아들 아굴”을 가리킵니다. 이 아굴이란 사람은 성경 전체에서 여기에만 나와 있기에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다만 오늘 본문 1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그의 아버지 이름은 “야계”이고 “아굴”이란 이름의 뜻은 “gatherer”(채집하는 사람)입니다(Tyndale Concise 성경주석). John MacArthur 목사님에 의하면 아굴이란 사람은 아마도 솔로몬 시대에 지혜의 학생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MacArthur). 이 아굴이란 사람이 오늘 본문 잠언 30장 3절 상반절에서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다고 말했는데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좀 반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저는 나는 아굴처럼 지혜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되기보다 지혜를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혜를 배우는 사람”이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잠언 30장 1-9절 말씀을 통하여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압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2-3절을 보십시오: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현대인의 성경) “나는 너무 어리석어서 짐승만도 못하며 내게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지각이 없다. 나는 지혜를 배운 적도 없고 또 거룩하신 분을 아는 지식도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알아가야 합니다. 알아가되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므로 우리 자신을 알아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성경 요한1서 4장 16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진리를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사랑이 없는 사람들인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또한 성경 레위기 11장 45절은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 수록 우리가 얼마나 성스럽지 못한지(unholy)를 알아가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므로 우리 자신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처럼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으므로 교인들이 많아질수록 하나님께 범죄하고 있습니다(호 4:6, 7).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이유는 우리가 그 지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6절).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힘써 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3). 우리가 하나님을 힘써 알아갈 때 진정으로 우리 자신을 알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과 천지 차이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사 55:9). 우리는 우리의 표준과 하나님의 표준이 천지 차이임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2-3절을 보면 잠언 기자 아굴은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 내게는 사람의 총명이 있지 아니하니라 나는 지혜를 배우지 못하였고 또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거니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 어리석어서 짐승만도 못하다고 말했습니다(2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시편 73편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했던 시편 기자 아삽은(3절)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 악인의 종말을 깨달은 후(17절)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리석고 무식하여 주 앞에 짐승같이 되었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결국 아삽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악인의 종말만 깨달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어리석고 무식하여 주님 앞에서 짐승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22절). 잠언 기자 아굴이 오늘 본문 잠언 30장 2-3절에서 “나는 다른 사람에게 비하면 짐승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는 자기 자신에게 사람의 총명이 없고 지혜를 배우지 못했으며 또한 거룩하신 자를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아굴은 자기 자신이 짐승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다는 것은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혜와 총명이 없다는 것은 짐승이나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아굴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고백하되 누구에게 그리 고백했는가 하면 오늘 본문 1절을 보면 “이디엘과 우갈”이란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아굴이 제일 좋아하는 학생들이었을 것입니다(MacArthur). 아굴은 이 두 사람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그의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현대인의 성경)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가? 바람을 오목한 손에 모은 자가 누구인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이며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가? 그의 이름이 무엇이며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네가 알면 말해 보아라”](4절). 아굴이 이리 질문한 이유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깨달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아굴은 자기 자신의 무지함을 이디엘과 우갈에게 고백하므로 자신의 겸손함을 보여준 것입니다(MacArthur).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지혜는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바른 신앙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마태복음 16장 15절부터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15절). 그 때 사도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16절). 그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바요나 시몬안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결국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그리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배우는 사람들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겸손히 자신의 무지함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잠 30:3).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이는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혜를 배우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무지함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더욱더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계시하시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의지합니다.

 

저는 “연단”하면 욥기 23장 10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잠 17:3). 연단하시되 하나님은 우리를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우리)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택하”셨습니다(사 48:10). 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연단시키시는 것입니다. 연단시키시되 하나님은 고난의 통로를 걷게 하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순금같이 되게 만드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찌끼와 혼잡물과 같은 우리의 믿음(사1:25)을 고난의 용광로를 통하여 정화시키시사 우리의 믿음을 순금 같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정결케 하십니다(단 11:35).

 

오늘 본문 잠언 30장 5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말씀은 순수하여 자기를 피난처로 삼는 자에게 그는 방패가 되신다”]. 잠언 기자 아굴은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순전하다’는 말은 “은이나 금을 녹여 불순물을 제하고 순수하게 한 것”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여러분, 은에서 찌꺼기를 어떻게 제하는 줄 대충 아시죠? 은을 용광로에 넣고 높은 열을 가하여 불순물인 찌꺼기를 제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불순물은 쉽게 빠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순수한 은을 얻으려면 여러 번 높은 열로 제련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일을 위하여 대장장이는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높은 열과 싸우고 수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대장장이는 원하는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이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합니다(인터넷). 성경 잠언 17장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마치 대장장이가 순수한 은을 얻기 위해서 여러 번 높은 열로 은을 제련하듯이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고자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십니다(사 48:10).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서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육신적이고 이 땅에 속한 더러운 것들이 불순물처럼 들어 있을 때에 우리들로부터 이러한 것들을 제하고 이에 대하여 벗어나게 하기 위하여 연단의 불인 시련과 고난을 겪도록 허락하신다는 말입니다(인터넷). 그 좋은 예가 바로 구약 욥기에 나오는 욥입니다. 성경 욥기 23장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왜 하나님께서는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시려고 우리를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시는 것일까요? 성경 잠언25장 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 무슨 뜻입니까? 쓸 만한 그릇이 되게 하시고자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시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풀무 불을 지나가게 하시사 우리로 하여금 결국에는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는 것입니까? 성경 디모데후서 2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게 준비시키셔서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우리를 귀히 쓰시고자 하시는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잠 30:5). 그 말씀은 시편 12편 6절을 보면 “…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현대인의 성경) “… 확실하여 용광로에 일곱 번이나 정련한 은처럼 순수합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순수한(순결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정화시키사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우리의 책임은 무엇입니까? 한 3가지로 간략하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벧전 2:2).

 

우리는 섞이지 않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하되 우리는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더하지 말아야 합니다(잠 30:6).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실 것이며 우리는 거짓말쟁이가 될 것입니다(6절, 현대인의 성경).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너무나) 사모하다 보면 그 말씀에 더하는 유혹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요한계시록 22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현대인의 성경) “나는 이 책에 쓰인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경고합니다. 누구든지 이 예언의 말씀에 무엇을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을 더하실 것입니다”].

 

(2) 우리는 그 순전한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30:5).

여기서 ‘의지한다’는 말은 ‘숨는다’(to hide oneself) 혹은 ‘피한다’란 뜻입니다. 이 뜻의 의미는 어렵고 위태한 때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새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 1절 가사와 후렴이 생각납니다: (1절) “어려운 일 당할 때 나의 믿음 적으나 의지하는 내 주를 더욱 의지 합니다” (후렴) 세월 지나갈수록 의지할 것뿐일세 아무 일을 만나도 예수 의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순전한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의지하되 우리는 주님의 순전한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그 약속의 말씀을 주신 진실하신 언약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찾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은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30:5). 주님은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실 것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1장 22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하여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고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성경 시편 119편 9절을 보십시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현대인의 성경) “청년이 어떻게 깨끗한 마음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다만 주의 말씀에 따라 사는 길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순전합니다(잠 30:5).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으로 우리를 정결케 하십니다. 정결케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의 모든 가증한 것들을 제거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순결성을 지켜 나아가십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를 단련시키시고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하며 또한 경험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여러분은 죽기 전에 하나님께 꼭 기도 응답 받고 싶은 기도 제목은 무엇입니까? 미치 앨봄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이란 글을 보면 “죽기 전에 자신을 용서하라 그리고 다른 사람도 용서하라”는 글이 있습니다. 저는 이 글 내용 중심으로 이러한 글을 써보았습니다: “죽기 전에 용서해야 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아름다운 죽음이 될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다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자세로 죽음을 맞이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자 십자가의 죽으셨듯이 우리는 죽음 앞에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다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진정한 용서를 죽음 앞에서라도 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죽기 전에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더 깊이, 더 많이, 더 넓게, 더 높게 깨달아서 자기에게 죄 지은 사람을 다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한 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간절한 기도가 돼야 하며 그 기도를 하나님께 응답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성경 민수기 27장 16-17절을 보면 자기 형 아론처럼 죽게 될 것(13절, 현대인의 성경)을 알고 있었던 모세가 하나님께 자기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가 하나님께 구했던 것은 자기의 삶을 연장시켜 달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참고: 왕하 20:6). 심지어 모세는 하나님께 그가 그리도 가고 싶었던 가나안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간구하지도 않았습니다(참고: 신 34장). 실제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비람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가나안 땅을 보기만 하고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다(민 27:12-13). 그러면 모세가 죽기 전에 원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가 원했던 것은 한 사람을 이스라엘 회중 위에 세워서 하나님의 회중으로 하여금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었습니다(16-17절). 즉, 모세는 자기가 죽으면 자기 대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할 수 있는 지도자를 이스라엘 회중 위에 세워달라고 하나님께 죽기 전에 간구한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모세는 자기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더 생각한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는 자기 자신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더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7-8절을 보십시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현대인의 성경) “나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한 적이 있다.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이것을 허락하소서 내가 속이고 거짓말하지 않도록 나를 도우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 다만 나에게 매일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잠언 기자 아굴은 주님께 두 가지 일을 구했습니다. 그는 주님께 이 2가지 기도 제목을 자기가 죽기 전에 허락해 주시길 기원했습니다.

 

(1) 첫 번째 기도 제목은,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현대인의 성경) “내가 속이고 거짓말하지 않도록 나를 도우시며”]입니다(8절상).

 

우리도 아굴처럼 주님께 이러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주님께 ‘헛된 것을 내게서 멀리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헛된 것”을 생각할 때 2010년도에 묵상한 전도서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헛된 세상”(전 1:1-11), “헛된 지혜”(1:12-18) 그리고 “헛된 쾌락”(2:1-11).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아무 유익(남는 것)이 없기 때문이요(1:3), 한 평생 사는 인생은 결국 별 수 없이 티끌로 돌아가기 때문이요(5-6절), 인간의 욕심에는 만족함이 없기 때문이요(8절) 그리고 후세의 사람들이 이 시대 사람을 기억함이 없기 때문입니다(11절). 이 세상의 지혜가 헛된 이유는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들을 탐구한 결과 이것은 괴로운 일이며(10절), 인간의 지혜로는 망할 인간을 구원할 길이 없으며(15절) 또한 “다 헛되이 바람을 잡으려는 것”(14절)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은 이 세상의 쾌락을 누려보려고 시험적으로 술을 시도해 보았을 뿐만 아니라(2:3) 큰 사업도 시도해 보았으며(4절) 또한 자신의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고자 처와 첩들을 많이 두었지만(8절) 결론은 “이것도 헛되도다”였습니다(1-2절). 이렇게 헛되고 헛된 것들을 우리는 가까이 하지 말고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아굴처럼 주님께 이 모든 헛된 것들을 우리에게 멀리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잠언 기자 아굴은 “헛된 것” 뿐만 아니라 “거짓말”도 멀리해주시길 주님께 구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거짓말”하면 요한복음 8장 44절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잠언 기자 아굴처럼 주님께 “거짓말”을 멀리하기를 구하는 것은 우리가 거짓의 아비인 사단을 멀리하는 것이요 또한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아굴의 기도 제목을 생각할 때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 보시기에 유익한 것과 진리를 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헛된 것을 멀리하게 해주시길 기도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보시기에 유익한 것을 가까이하게 해주시길 기도해야 하며 또한 우리가 거짓말을 멀리하게 해주시길 기도할 때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까이하게 해주시길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기도 제목은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현대인의 성경) “나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 다만 나에게 매일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였습니다(8절하).

 

저는 이 두 번째 기도 제목을 생각할 때 저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주기도문)이 생각났습니다. 그 주기도문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현대인의 성경)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라고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마 6:11). 여기서 “일용할 양식”(daily bread)란 그날 필요한 양식을 말하는데 이 말씀은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하루 동안 먹을 양식’만 가져갈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출 16:4). 그 말씀의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 온 회중이 애굽에서 나온 지 꼭 한 달째 되는 2월 15일에(1절, 현대인의 성경) 모세와 아론을 원망합니다(2절). 그 원망의 내용은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였습니다(3절). 그 원망의 소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4-5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온 회중의 원망도 들으시고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려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책임은 “매일 나가서 그날 그날 필요한 양식을 거두”는 것이었습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했지만 그들은 모세의 말을 듣지 않고 거둔 음식을 아침까지 남겨두므로 다음 날 아침에 보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20절,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잠언 30장 8절 하반절에서 잠언 기자 아굴이 하나님께 구한 두 번째 기도 제목은 우리로 하여금 출애굽 당시 원망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살지 말고 오히려 예수님의 주기도문 가르침처럼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길 하나님께 구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굴의 기도처럼 하나님께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우리를 먹여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 말은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가 원하는데로 양식(daily bread that we want)을 주시길 구하지 말고 오직 우리가 필요한 양식(daily bread that we need)을 주시길 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잠언 기자 아굴의 두 번째 기도 제목 중에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라는 기도 내용을 묵상할 때 저는 빌립보서 4장 11하-12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 나는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가난하게 사는 법도 알고 부유하게 사는 법도 압니다. 배가 부르건 고프건 부유하게 살건 가난하게 살건 그 어떤 경우에도 스스로 만족하게 생각하는 비결을 배웠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바울은 어떤 형편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자족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이 가난에 처하는 것이나 부유함에 처하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는 자기에게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었기에(13절) 그에게는 가난함이나 부유함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30장 8절 하반절에서 아굴이 하나님께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길 구한 이유는 9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이 얼마나 공감되는 이유입니까. 물론 우리가 가난하다고 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명 중 여덟 번째 계명인 “도둑질하지 말라”(출20:15)는 말씀을 어기고 도둑질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왜 아굴이 하나님께 “부하게도 마옵시”길 구했는지 그 이유가 많이 공감이 됩니다. 그 이유는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아굴의 이유가 많이 공감되는 이유는 제가 성경을 묵상해 오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풍부해졌을 때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아굴처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배우는 우리도 아굴처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헛된 것과 거짓말을 우리에게서 멀리해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사 우리를 도와주시길 기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굴처럼 두려워해야 합니다.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혹여나 우리가 부하게 되어 배불러서 하나님을 저버리고 하나님이 누구냐 할까봐 두려워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혹여나 우리가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봐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굴처럼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대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현대인의 성경)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혜를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자신의 무지함과 미련함을 압니다. 우리는 지혜를 배우는 사람들로서 우리의 무지함과 미련함을 겸손히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계시를 더욱더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계시하시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알아가게 해주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의지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정화시키사 깨끗하게 하시는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사모하길 원하십니다. 우리는 그 순전한 말씀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에 순종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의 영혼과 행실을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기도하되 하나님께 헛된 것과 거짓말을 우리에게서 멀리해주시길 기도하며 또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길 기도합니다. 지혜를 배우는 사람은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라고 기도합니다. 계속해서 지혜를 배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