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의지하는 자

 

 

[잠언 2922-27]

 

 

여러분은 주님의 말씀이면 충분하십니까? “의지하는 것이 믿음이다”라는 글을 보면 영국 교회의 복음적인 교역자인 케논 배터스비(Canon Battersby) 목사님이 가버나움에서 가나까지 예수님을 찾아와서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청한 왕의 신하 이야기를 본문으로 한 설교를 들으면서 깨닫게 된 교훈이 나옵니다. 그 교훈은 다름 아닌 왕의 신하는 “가라 네 아들이 살았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다는 것입니다(요4:50). 그리고 그는 그 아들은 완쾌된 말씀을 들으면서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보호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비록 내가 세상에서는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지라도 “주님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요 의지함이라는 것입니다(인터넷).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믿음이란 ‘주님의 말씀이면 충분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신앙이라 생각하십니까? 저는 이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져볼 때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나는 주님께서 승리장로교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 16장18절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한가?’ 아니면 ‘나는 이 약속의 말씀 외에 혹시나 자주 내 자신이나 그리고/혹은 다른 사람들을 의지하고 있지는 않는가?’ 만일 지금 제가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음으로 목회를 감당하고 있다면 분명히 저는 아무도 또한 어떠한 상황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아무 무엇으로 인해 불안해하며 낙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만 충분하다고 믿고 확신하는 영혼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우리는 새찬송가 543장 “어려운 일 당할 때”의 가사처럼 세월 지나 갈수록 아무 일을 만나도 의지할 것 주님 밖에 없음을 고백하는 신앙생활을 하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지만 여호와를 신뢰하면 안전할 것이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란 제목 아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어떻게 하는지 한 2 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5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현대인의 성경) “사람을 두려워하면 덫에 걸리지만 …”]. 우리에게는 여러 종류의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불확실한 미래의 상황을 생각하며 두려워하고 불안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힘들게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결혼하기 전 싱글이었을 때 연애를 하고 싶어도 두려움이 앞설 때가 많았었습니다. ‘과연 저 자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좋아한다고 고백하면 나를 거절하지 않을까?’ 등등 이러한 생각 속에서 상대방의 거절을 두려워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이 제 안에 있다 보니 저는 하나님의 크기보다 상대방의 반응의 크기를 제 상상력을 동원하여 확대시키므로 더욱더 상대방을 향하여 두려움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만일 우리 안에 이러한 두려움이 있다면 이 두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상대방의 기대와 요구에 부응하는 거짓 자아를 형성하게 될 수가 있습니다(김준수). 이렇게 우리에게는 이런 저런 종류의 두려움이 있을 수 있지만 제 생각엔 그 중에 제일 보편적인 두려움은 바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되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9장 22-27절에서 한 4부류의 사람들을 우리가 두려워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우리는 노하는 자 또는 성내는 자를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2절을 보십시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현대인의 성경) “노하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키고 성미가 급한 사람은 죄 짓는 일이 많다”]. 부부 관계에 있어서 분노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Gary & Greg Smalley가 쓴 “THE HEART OF REMARRIAGE”란 책을 읽으면서 부부 관계에 있어서 두 가지 분노에 대해서 이런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부부 관계에서 의로운 분노(righteous anger)는 건강한 변화(healthy change)를 가지고 오기에 필요합니다. 그러나 불의한 분노(unrighteous anger)는 서로의 언행으로 죄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부부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마 우리가 주로 부부 관계에 있어서 “분노”하면 “불의한 분노”를 생각하지 의로운 분노는 잘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노”하면 우리는 부정적인 면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의로운 분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의로운 분노는 부부 관계에 있어서 건강한 변화를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불의한 분노를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불의한 분노는 우리로 하여금 서로에게 죄를 범하게 할뿐 아니라 하나님께도 죄를 범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부 관계에 있어서 노하기를 더디 하여 시비를 그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5:18). 그런데 많은 때에 우리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분을 쉽게 내므로 우리 배우자와 다툼을 합니다(15:18, 21:9, 19).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분노하는 자는 과격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15:1). 과격한 말을 하되 그것도 한두 번 하는 것이라 마치 연거푸 떨어지는 물방울(19:13)처럼 말을 끊지 않고 분노 가운데 계속 상대방 배우자에게 말을 쏟아 붇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박윤선) 특히 우리나 우리 배우자가 미련한 자라면 어찌되겠습니까? 성경 잠언 17장 12절을 보면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 자신이나 우리 배우자가 미련하여 새끼 빼앗긴 무서운 암곰보다 분노할 때 들 합리적(이성적)이면 그 부부 싸움이 어찌 되겠습니까?

 

분노하고 배우자는 충분히 두려울 수가 있습니다. 특히 그 배우자가 미련하다면 우리는 충분히 분노하는 배우자가 두려울 수가 있습니다. 배우자뿐만 아니라 우리 이웃이나 직장 사람들 중 쉽게 분노하는 사람은 두려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신1:29).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정탐한 10명의 불신의 보고를 듣고 낙심하며 그 가나안 족속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을 무서워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성경구절 외에도 성경에는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에게 분노하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분노를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두려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2) 우리는 교만한 사람을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현대인의 성경)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고 겸손하면 존경을 받는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한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저는 전에 성경책 에스더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만이란 사람 중심으로 교만한 사람은 어떠한 사람인지를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a) 교만한 사람은 만족할 줄 모릅니다(5:13).

 

하만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자기에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이 모든 일”이란 하만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이나 왕후 에스더가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자기 밖에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11-12절).

 

(b) 교만한 사람은 착각을 잘 합니다(6:6).

 

아하수에로 왕이 자기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고발한 유다 사람 모르드개(2절)를 존귀하게 하기를 원해서 하만을 불러다가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고 물었습니다(6절). 그 때 하만은 “심중에 이르되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자는 나 외에 누구리요”라고 착각을 했습니다(6절).

 

(c) 교만한 사람은 높임(존귀함) 받기를 좋아합니다(6:7-9).

 

모르드개를 존귀케 하고자 하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하만은 자기를 존귀케 하고자 하는 줄 착각해서 왕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 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7-9절). 하만은 자기가 높임(존귀함)을 받을 줄 알고 아하수에로 왕에게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7절)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말했는데 그 내용을 보면 그는 높임을 받기를 좋아하나 사람인 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교만이 침투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만족할 줄 모르고 착각을 잘하며 높임(존귀함) 받기를 좋아했던 하만의 교만함을 짧게나마 묵상하면서 혹여나 우리 자신이 하만과 같은 교만한 사람이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성경 시편 73편을 보면 마음이 정결한 시편 기자 아삽이(1절)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여기서 악인의 형통함이란 “그들이 일평생 아무런 고통도 없이 건강하게 지내며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병으로 고생하는 일도 없”는 것(4-5절, 현대인의 성경) 등등 여러 가지 입니다. 그 중에 악인들은 “교만을 목걸이로 삼고 폭력을 옷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6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높은 데서 거만하게 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이러한 교만한 악인이 두렵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는 교만한 자를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29장 2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현대인의 성경)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고 겸손하면 존경을 받는다”]. 우리가 교만한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낮추실 것이기 때문입니다(23절, 참고: 삼하 22:28, 욥 40:11).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교만할 때 우리를 낮추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낮추시되 하나님께서는 마치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먹이시므로 그들을 낮추신 것처럼(신 8:16)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시므로 우리를 낮추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약 4:10). 우리는 어린 아이와 같이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마 18:4). 낮추되 우리는 자신을 낮추시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빌 2:8)을 본받아 우리 자신을 낮추어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는 주님의 때에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약 4:10). 성경의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낮추는 자를 높이시는 주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사(잠 3:34, 벧전 5:5) 그 겸손한 자를 구원하십니다(욥22:29, 시149:4). 성경은 겸손하면 영예를 얻을 것이라(존경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29:23).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 입니다(15:33).

 

(3) 우리는 도둑과 공모자를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4절을 보십시오: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도둑과 공모하는 사람은 영혼을 증오하는 자이다. 그는 사실대로 진술하라는 소리를 들어도 법정에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 나오는 유명한 도둑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가룟 유다입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베나니에 이르셨을 때 그 곳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습니다(요 12:1-2, 현대인의 성경). 그 때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3절).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 중 예수님을 팔아넘길 가룟 유다가 왜 이 향유를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느냐고 마리아에게 했습니다(4-5절, 현대인의 성경). 성경은 가룟 유다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는 도둑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은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말씀했습니다(6절). 가룟 유다는 표면적으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겠지만 실제로 그는 도둑이었습니다. 이러한 도둑이 힘과 권력이 있는 나라 지도자들이나 거짓된 종교 지도자들과 짝하면(한 패가 되면) 어찌되겠습니까? 성경 이사야 1장 23절을 보십시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현대인의 성경) “너의 지도자들은 반역자요, 도둑들과 한패이며 하나같이 뇌물과 선물받기를 좋아하고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는구나”]. 가룟 유다와 같은 도둑이 고관들/지도자들과 짝하면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나 과부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4절을 보면 성경은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그는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아니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도둑과 짝하는 자”는 도적과 함께 도적질을 계획하고 그 배후에 앉은 자”입니다(박윤선). 그 좋은 예가 바로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은 아합과 이세벨입니다(박윤선). 남편인 아합 왕의 마음에 무슨 근심이 있어 식사를 안 하고 있는지 물어본 왕후 이세벨은(왕상21:4,5) 고작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포도원을 자기에게 주지 않겠다는 것 때문임을 알고(6절) 자기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왕이 지금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이래서야 어떻게 이스라엘 왕으로 행세할 수 있겠습니까?” (현대인의 성경)]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라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7절). 그리고는 그녀는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쓰고 그 인을 치고” 나봇이 살고 있는 성읍의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냅니다(8절). 그 편지 내용의 핵심은 나봇을 모함하여 ‘그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 하였다’ 하여 나봇을 돌려 쳐 죽이라는 것이었습니다(9-10절). 참으로 “술수”가 많은(왕하 9:22) 간악한 여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녀의 편지를 받은 그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은 “이세벨의 지시, 곧 그(녀)가 자기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대로 하여”(왕상 1:11) 결국 나봇은 성읍 밖으로 끌려 나가 돌로 쳐 죽임을 당합니다(13절). 결국 이세벨은 자기의 남편에게 약속한 것처럼(7절) 아합이 원하는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게 합니다(15절). 그녀는 나봇을 죽여서라도(14, 15, 16절) 그의 포도원을 빼앗아 아합에게 준 것입니다. 그녀가 바로 아합을 배후 조정하는 사람입니다. 그녀가 바로 아합을 충동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게 한 자입니다(25절). 그녀가 바로 아합으로 하여금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게 만든 사람입니다(26절). 이렇게 상대방을 죽여서라도 상대방 것을 빼앗은 도둑과 께 도적질을 계획하고 그 배후에 앉은자는 우리가 충분히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물론 이사야 41장 10절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하나님이 되셔서 우리를 굳세게 하시며 우리를 도와주시며 하나님의 의로운 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계시기에 우리는 도둑이나 도둑과 짝하는 그 배후 인물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진리는 오늘 본문 잠언 29장 24절을 보면 “도둑과 짝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자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열왕기상 21장 20절과 25절을 보면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하였”다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영혼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을 팔아 도둑과 짝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자기 영혼을 미워하는 사람들이나 행하는 악한 죄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영혼을 미워하여 자기 자신을 팔아 도둑과 짝하는 자는 오늘 본문 잠언 29장 24절 하반절을 보면 저주를 들어도 진술하지 않는다[(현대인의 성경) “그는 사실대로 진술하라는 소리를 들어도 법정에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도둑과 짝하는 자는 사실대로 진술하라는 소리를 들어도 법정에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까요? 그 이유는 자기의 영혼을 미워하는 도둑과 공모하는 자는 악하고 거짓되기 때문입니다. 악하고 거짓된 자는 결코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짓말을 밥 먹는 것보다 더 하겠지요.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는 도둑과 공모하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의지하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우리를 지키십니다(시 121:4-5).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우리의 영혼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실 것입니다(7, 8절).

 

(4) 우리는 불의한 자를 두려워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자를 미워하고 …”].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의문을 하다보면 하나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의심하다 보면 하나님을 불신하게 됩니다. 그 불신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만들고 결국에 가서는 우리로 하여금 불의를 행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불의”란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 수군수군, 비방, 하나님을 싫어함, 능욕,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를 거역, 우매함, 배악함, 무정함, 무자비함입니다(롬 1:29-31). 우리가 이러한 불의를 행할 때 하나님은 진노하시사 우리를 징계하실 것입니다. 성경 민수기 22장을 보면 점술가(7절; 수13:22) 브올의 아들(민22:5) 발람이란 인물이 나옵니다. 성경은 발람의 꾀를 이스라엘 백성들이 따라(31:16)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벧후 2:15)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머물러 있었을 때 그들은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였을 뿐만 아니라(민 25:1)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여자들의 신들에게 절한 것입니다(2절).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셨고(3절)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의 수령들이 태양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목매어 죽임을 당하고(4절) 이스라엘 백성 중 24,000명이나 염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9절). 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까? 그 원인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였던 발람 때문이었습니다(벧후 2:15). 이렇게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불의한 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불의를 행하게 만들므로 다같이 하나님께 죄를 범합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시사 벌을 내리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7절 상반절을 보면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불의한 자가 의인에게 미움을 받을까요? 그 이유는 불의한 자는 불의를 좋아하고 불의를 좋아하는 자는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살후 2:12). 그러므로 진리를 믿고 의를 사랑하는 의인은 불의한 자를 미워할 뿐만 아니라 그 불의한 자의 모든 불의도 미워합니다. 성경은 의로우신 하나님께 불의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9:14). 우리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은 의로우사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습 3:5). 또한 성경은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 그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1:18). 그러므로 우리는 불의한 자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불의한 자를 미워하며 그들의 불의를 미워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는 노하는 자(성내는 자)나 교만한 자나 도둑과 짝하는(공모하는) 자나 불의한 자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올무(덫)에 걸린다고 오늘 본문 잠언 29장 2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러한 사람들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크고 두려운 하나님이 우리 중에 계신다는 사실을 불신하는 것이요(신 7:21), 하나님을 믿지 못함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두려워할 때 그 두려움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올무에 걸리게 만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므로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10장 28절을 보십시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실 수 있는 이를 두려워하라.”

 

마지막 둘째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안전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현대인의 성경) “… 여호와를 신뢰하면 안전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빌립보서 3장 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같은 말을 다시 쓰는 것이 내게는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여러분에게 안전합니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안전하길 원하며 편지를 쓴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 편지 내용 중에 바울은 3장 2절에서 이렇게 세 번이나 “삼가라”, 즉 “조심(주의)하라”고 말했습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여기서 ‘개들을 삼가라’는 말씀은 유대주의자들을 염두하고 말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대주의자들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이 구약의 의식들(특히 할례의식)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 유대주의자들과 그들의 거짓된 복음을 이단이라고 말하면서 심지어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진짜 신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 교회에서 복음의 명료성을 훼손하고, 복음을 심각하게 더럽혔으며 또한 이방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그 혼란에 원인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바울의 논리는 누군가가 (1) 먼저 그리스도를 믿고, (2) 그런 다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3) 다음에 즉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준비를 한다고 말한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누군가가 (1) 그리스도를 믿고, (2)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3) 그리고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메이첸). 이 차이가 아주 미묘한 차이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차이 입니다. 그 차이란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반면에 유대주의 자들은 인간이 노력하여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파하였던 참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지만(은혜),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한 거짓된 복음은 죄인인 사람들이 행하는 일에 초점을 맞췄습니다(공로). 한 마디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유대주의자들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거짓 가르치는 유대주의자들을 가리켜 “개들”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물질을 탐하여 스승으로 자처하고 돌아다니는 까닭이었”습니다(3:19).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 거짓된 복음(가르침) 을 전하는 거짓 스승들인 유대주의자들이 위험하기에 그들을 주의(조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거짓 복음을 전하는 거짓 목사들이나 교사들을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다는 참된 복음을 전하지 않고 믿음 더하기 인간의 노력이나 인간의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거짓된 복음을 주의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공로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간의 공로에 초점을 맞추는 모든 가르침을 주의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5절 하반절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어떠한 자일까요? 한 3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겸손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게 되겠고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으리라” [(현대인의 성경) “사람이 교만하면 낮아지고 겸손하면 존경을 받는다”]. 교만한 자는 자신을 믿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교만한 자를 하나님께서는 낮추십니다. 그러나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달리 말한다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겸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의 건지심을 구합니다. 그리고 그는 위험할 때에도 피난처가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께 피합니다(시 31:1).

 

(2)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사람에 대한 정당한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6절을 보십시오: “주권자에게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으나 사람의 일의 작정은 여호와께로 말미암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자들이 많으나 사람에 대한 정당한 판단은 여호와께서 하신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특히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우리는 우리보다 힘이 있고 권력이 있는 자를 의지하여 그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자 환심을 사려고 하는 생각이 들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고 할 때 우리는 아부성 있는 말(발언)을 할 수도 있으며 또한 뇌물성 있는 선물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언행들은 우리가 그 만큼 하나님 보다 그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을 더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잠언 29장 25-26절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고 말씀하면서 그러한 자는 사람에 대한 정당한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을 믿고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일의 작정은 통치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말미암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바르게 행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7절을 보십시오: “불의한 자는 의인에게 미움을 받고 바르게 행하는 자는 악인에게 미움을 받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사람은 정직하지 못한 자를 미워하고 악한 사람은 정직한 자를 미워한다”]. 하나님 보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 보다 사람을 두려워합니다(25절). 그러므로 그러한 자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보다 사람(통치자)에게 은혜를 구합니다(26절). 달리 말한다면,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자는 바르게 행하지 않고 불의를 행합니다. 그러므로 의인에게 미움을 받습니다(27절).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25절)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26절) 불의를 행하지 않고 바르게 행합니다(27절). 그는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정의를 행합니다(렘 7:5). 그는 모든 거짓 행위를 미워하고(시 119:128) 미련한 것을 즐겨하지 않습니다(잠 15:21).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성경 시편 146편 3절은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도울 힘이 없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 보기에 유명한 자들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사람을 의뢰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간 신뢰는, 하나님 신뢰의 길을 차단시키는 악한 사상이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남들로 하여금 하나님 신뢰의 행위에 나아가게 하려고, 먼저 인간 신뢰의 죄악을 금지시킨다”(박윤선). 도울 힘이 없는 사람들을 신뢰하는 행위는 진정한 우리의 도울 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막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도울 힘이 없는 인간을 신뢰하는 것을 중단해야 합니다. 더 이상 사람들을 의뢰하는 행위를 멈춰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안전할 것입니다(잠 29:25).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노하는 자 또는 성내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교만한 자나 도둑이나 도둑과 짝하는 공모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불의한 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안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겸손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사람에 대한 정당한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바르게 행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기에 그는 안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