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잠언 2912-21]

 

 

여러분은 여러분이 사랑하는 가족 식구가 잘못을 하고 있으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적어도 한번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마디 책망은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사랑하는 가족 식구가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잘못을 하면 여러분은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로마서 1장을 묵상하다가 얻은 교훈은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신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징벌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로마서 1장 24, 26, 28절을 보면 세 번이나 성경은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는 말씀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24절), (2)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26절), (3)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8절). 여러분,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 마음의 죄악 된 본능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시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 성경 구절 3개를 들어보십시오: (마15:19)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그리고 비방이다”, (갈 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 (딤후 3: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이 세 성경구절만 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악의 본능대로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면 우리는 이러한 끔찍한 죄를 하나님께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우리의 죄악 된 본능대로 살도록 그냥 내버려 두시 마시고 우리를 붙잡아 주시사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게 해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15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꾸짖고 때려서라도 교육을 시키면 지혜를 얻게 되지만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자식이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라는 제목 아래 한 5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귀로 하여금 거짓말을 들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12절을 보십시오: “관원이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통치자가 거짓말에 귀가 솔깃하면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악하기 마련이다”]. 여러분이 진심으로 진실을 말해도 상대방이 여러분의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과장된 거짓말을 들으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매우 억울하고 답답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또 다른 질문은, 여러분이 믿고 신뢰하던 사람이 조금씩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특히 그 사람이 여러분에게 진실성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거짓말을 진실처럼 말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사귀지 말고 멀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기도 하지만 그 사람의 거짓말에 우리 자신이 안 좋은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 주위에 거짓말 하는 사람들로도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연단하시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있는 불순물인 거짓을 다 제거하시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진실 되게 만들기도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관원은 거짓말을 들으면 그의 하인들은 다 악하게 되는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통치자가 거짓말에 귀가 솔깃하면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악하기 마련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한 나라의 지도자가 거짓말을 들으면 그 지도자 밑에 있는 사람들도 악하게 될까요? 저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권력을 가진 한 나라의 지도자가 거짓말을 들으면 거짓되게 행할 것이요 그 사람 밑에 있는 사람들도 그 지도자의 거짓된 행위에 동참할 수밖에 없을 확률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권력이 막강한 한 나라의 지도자가 거짓말을 듣고 거짓된 행위를 할 때에 그 지도자 밑에 있는 사람들도 그 권력의 힘을 거부하지 못하고 결국에는 자신들도 거짓되게 행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 한 예가 바로 성경 열왕기상 21장 나오는 악한 이스라엘 왕 아합의 부인인 이세벨이 자기 남편 아합을 위하여 그가 원하는 나봇의 포도원을 뺏어서 그에게 주고자(6절) 아합의 이름으로 편지들을 써서 그 인을 치고 봉하여 나봇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보냈습니다(8절). 그 때 그 이세벨 왕후의 편지를 받은 나봇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은 어떻게 행했습니까? 과연 그들이 악하고 거짓된 이세벨이 쓴 편지 내용대로 행했습니까 아니면 거부했습니까? 성경 열왕기상 21장 11절을 보면 그들은 이세벨의 지시대로 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왕후와 그 밑에 있는 악한 장로와 귀족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새빨간 거짓말을 할 수 있나요? 악한 이세벨이 나봇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에게 지신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불량자 두 사람을 세워서 백성들 모인 자리에게 나봇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였는데 그 거짓 증언이란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13절). 이렇게 악한 이세벨 왕후는 거짓말을 시켰고 그녀 밑에 있는 나봇의 성읍에 사는 장로와 귀족들도 그 거짓말을 하도록 불량자 두 사람을 거짓 증인으로 세웠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보다 힘 있고 권력 있는 지도자의 거짓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 지도자가 우리 보다 힘이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다스리시는 주님을 의지하여 그 지도자의 거짓말을 듣지 말고 오직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이유는 우리가 듣지 말아야 할 사탄의 거짓말을 듣기 때문입니다. 아예 우리는 사탄의 거짓말을 듣지도 말고 사탄과는 말을 섞지도 말아야 하는데 이미 우리 생각의 영역에서 사탄의 거짓말과 섞고 있으면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무시하고 있다는 증거요 그 결과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오히려 사탄의 거짓말에 순종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그 말씀 듣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들은 진리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씀 인격화 되어가는 진실 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주위에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쳐 그들 또한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여 진실 된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를 제멋대로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자녀 교육 참 도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 자녀들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데로 양육해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언젠가 읽은 인터넷 기사에 보면 “4차 산업혁명 자녀교육은?”이란 제목 아래 점점 다가오고 있는 인공지능과 인간이 어울려 사는 세상에서 우리 부모들이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양육해야 하는지를 제안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 한 예로, 어느 드라마에 인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체할 수 없는 인공지능에 대한 열등감에 어느 한 가정의 큰딸은 더 이상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성적이 떨어진 이유에 대해 묻은 부모에게 그 딸아이는 울먹이며 이렇게 말합니다: "최선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요" 무엇을 하건 인공지능이 더 뛰어난데 공부할 필요가 뭐가 있어요?” 저는 이 기사 제목이 흥미로워서 쭉 읽어보았습니다. 읽다가 그 내용 중에 좀 제 관심을 끌었던 기사 내용 부분이 있어 여러분과 나눕니다: “더 이상 ‘우리 아이를 무엇을 더 가르쳐야만 경쟁력 있을까?’하는 고민은 이미 경쟁력이 없는지도 모른다. 다만,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이야기하는지가 더 중요한 세대이기에 시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자녀가 인간답게 존중받을 수 있는 진짜 핵심 키는 인간의 '유능함'이 아닌 인간의 '인간다움임'을 기억하자”(인터넷).

 

우리는 우리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하고 어떻게 양육해야 할까요? 전에 어느 집사님이 저에게 보내준 이 메일 글을 보면 2006년 미국의 유학생(대학과대학원)수는 약 60,000명 정도라고 합니다. 이 숫자는 인도, 중국에 이어 3위를 차지하였고 전체유학생수의 10%를 훨씬 상회하는 숫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보다 더한 사람들이 유태인들 입니다. 그들의 가정교육, 자녀교육은 정말 특별납니다. 단연 세계제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사사기 2장 10절에는 자녀교육에 실패한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후손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이것이 바로 가나안 정복이 끝난 후 사사들의 치리가 시작되기 전,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상태였습니다. 분명히 성경 신명기 6장 7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라고 말씀하셨는데 ,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사건, 만나, 여리고 전쟁에서의 승리 등등 ... 이 모든 것을 그들의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쳤음이 분명한데 왜 그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지를 못했을까요? 그 원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치 아니함(삿2:2)에 있습니다. 두려움과(철병거가 있으므로..) 환경을 보고, 불의와 타협함(사역을 시키고..)으로 불순종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이방인들을 완전히 쫓아내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옆구리의 가시가 되었으며 올무가 된 것입니다.

 

흔히 자녀들은 "부모의 등"을 보고 배운다고 합니다. 거짓이 없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며 솔선수범을 하는 것을 보며 배운다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과연 지금 저와 여러분은 부모로서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는지요?

 

오늘 본문 잠언 29장 15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꾸짖고 때려서라도 교육을 시키면 지혜를 얻게 되지만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자식이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개역개정)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자녀 교육에 있어서 자녀로 하여금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달리 말한다면, 우리 부모들은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방관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삶속에 들어가 어느 정도 것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우리 자녀들을 교육하되 너무나 지나치게 개입해서 그들의 삶을 지배하고 컨트롤하려고 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선을 긋기가 쉽지 않습니다. 너무나 컨트롤 하는 부모가 되지 않으면서 또한 너무나 자녀를 방관하는 부모가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인데 그 경계선을 어디에 그어야 하는지는 하나님의 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언젠가 제 아내가 저는 좀 자녀를 방관(neglecting)하는 스타일이고 자기는 좀 컨트롤링(controlling)하는 스타일이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어느 면으로 보면 저희 부부는 하나님이 저희 부부에게 은혜의 선물로 주신 세 자녀들을 양육함에 있어서 서로가 필요하고 서로가 부족함 점들을 보완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15절은 우리가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자녀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그 자녀가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고 말씀하면서 자녀 교육에 있어서 “채찍과 꾸지람”이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미국에선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의 징계 차원에서 매를 들어 때리면 매를 맞은 자녀가 자기 아버지를 고소하면 경찰에 잡혀간다고 하지만 저는 잠언의 말씀대로 자녀 징계는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성경 잠언 13장 24절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다. 진정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성실하게 자식을 징계한다”]. 성경은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아끼는 것은 자식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성실히 우리 자녀를 징계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요? 자문하고 또 자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잠언 23장 13절은 이렇게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현대인의 성경) “자식을 훈계하는데 주저하지 말아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않는다”]. 아마 어느 부모도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할 때에 자녀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매를 들어 때리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리 자녀로 인해 아버지가 화가 난다고 해도 자녀를 때려서 죽게 하기까지는 안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정반대로 자녀를 전혀 징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훈계하는 것조차 주저한다면 그 자녀가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 자녀가 계속해서 삐뚤어 나아가므로 결국 자녀도 잘못되겠지만 그것이 결국 부모님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29장 1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현대인의 성경)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러면 그가 네 마음에 기쁨과 평안을 줄 것이다”]. 여러분, 둘 중에 하나입니다. 자녀 마음대로 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므로 부모가 욕을 먹든지 아니면 자녀를 징계하므로 부모가 평안하고 마음에 기쁨을 얻던지 둘 중에 하나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징계해야 할 때 사랑으로 징계해야 합니다. 그것이 꼭 우리가 욕을 먹지 않고 평안과 기쁨을 얻기 위해서라기보다 우리 자녀가 하나님 보시기에 잘 자라나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Tripp 목사님의 말처럼 ‘대화와 몽둥이’가 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녀 양육에 있어서 몽둥이만 있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녀와 대화를 시도하고 또 시도해야 합니다. 자녀와의 대화 중요성은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은 더 이상 말로만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사랑의 매를 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19, 21절을 보십시오: “종은 말로만 하면 고치지 아니 하나니 이는 그가 알고도 따르지 아니함이니라 … 종을 어렸을 때부터 곱게 양육하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하리라” [(현대인의 성경) “말만 해서는 종을 바로잡을 수 없다. 이것은 그가 다 알면서도 말을 듣지 않기 때문이다 … 종을 어려서부터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그가 나중에는 자식인 체 할 것이다”]. 물론 이 말씀은 잠언 기자 당시의 종을 얘기하고 있지만 이 말씀을 자녀 양육에 있어서 적용할 때 우리는 첫째로 우리 자녀를 무조건 오냐오냐하면서 곱게만 양육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는 우리 자녀는 버릇없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자녀가 고쳐야 할 점이 있을 때 우리는 부모로서 그 자녀와 대화를 시도해야 합니다. 무조건 먼저 몽둥이를 들고 우리 자녀를 때려서는 아니 됩니다. 그런데 대화를 통해서도 우리 자녀가 자기가 고쳐할 점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고치지 않고 계속해서 잘못을 행한다면 우리는 사랑으로 징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점이 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데도 우리가 계속해서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계속해서 불순종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랑의 매로 우리를 징계하시지 않으십니까? 성경 히브리서 12장 6절과 1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주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꾸짖고 나무라시며 그가 아들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다 채찍질하신다 …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징계하여 그분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비록 육신의 아버지는 자기의 뜻대로(자신이 좋다고 생각하는 대로 잠시) 우리를 징계하지만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참여하게 하시고자 우리를 징계하십니다(10절).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의 징계는 축복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의 징계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우리를 향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게, 더 많이, 더 크게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우리의 아내인 밧세바를 범하고 그 죄를 덮고자 결국에는 우리아도 죽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 징계 중에 하나로 아들 압살롬을 피신하여 유다 광야로 도망갔었을 때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시 63:3).

 

우리는 우리 자녀를 제멋대로 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녀로 하여금 우리를 욕되게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를 꾸짖고 사랑의 매를 들어 징계해서라도 교육을 시켜 지혜를 얻게 해야 합니다(잠 29:15,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와 여러분의 자녀를 지혜로운 하나님의 자녀로 양육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악인이 많아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시기에 이 세상엔 악인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리 생각하신다면, 여러분 생각엔 가난한 악인들이 많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부자 악인들이 더 많을 것 같습니까? 제 생각엔 이 세상엔 악인들이 많고 특히 부자 악인들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성경 잠언 28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거짓된 부자”들 말입니다. 여기서 “거짓된 부자”들이란 “두 길로 속이는 부자”들로서 겉으로는 선한 길을 가는 체 하지만 실제로는 악한 길로 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박윤선). 이렇게 두 길로 행하는 부유한 자가 행하는 악한 길 중에 하나는 바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입니다(3절). 학대하되 좀 더 구체적인 예는 야고보서 2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며 법정으로 끌어가는 사람들은 부자들이 아닙니까?”(현대인의 성경). 두 길로 행하는 부유한 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함에 있어서 그들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을 괴롭히며 또한 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기 까지 해서 해를 입힙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와 보지 않은 뒤에서의 불일치된 행함으로 인하여 두 길로 속이는 부자들은 재물을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물을 모으되 잘 모으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고통당하는 가난한 의인들은 어떻게 그러한 이중인격인 악한 부자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을 더욱 불어나”는지(시 73:12)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헛되도다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수가 있습니다(13절).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길로 속이는 이중인격인 부자들은 그리 재물을 쌓는 가운데 자신들의 악도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자들은 “곧 넘어”질 것[갑자기 패망할 것(현대인의 성경)]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8:18). 그들에게는 반드시 넘어지는 한 때가 올 것입니다(박윤선). 성경 잠언 10장 16절을 보십시오: “… 악인의 소득은 죄에 이르느니라”. 악인은 소득이 많아지면 질수록 더 죄를 많이 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악인에게 늘어나는 재산은 물질의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16절을 보십시오: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현대인의 성경) “악인이 많아지면 죄가 증가하겠지만 의로운 사람은 그들이 망하는 것을 볼 것이다”]. 무슨 뜻입니까? 악인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죄도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히 많아지고 있는 그 악인들이 세상 적으로 힘이 있고 권세가 있는 자들이라면 우리가 이미 12절에서 묵상한 것처럼 그들 밑에 있는 사람들도 악하게 되므로 악인들을 더욱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 결과 그 많아 지는 악인들이 범하는 죄들도 더욱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북한과 같은 공산 국가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독재자가 죄악을 범할 때에 그 독재자 밑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악하게 되어서(12절) 그들 또한 독재자의 명령에 따라 죄악을 범할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악인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죄다 더욱더 많아지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함을 얻은 의인들입니다. 그 이유는 의인들은 악인들이 점점 많아지므로 죄가 더욱더 많아질 때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악인들의 악한 짓을 날마다 볼 때에 그들의 의로운 심령이 상할 것이기 때문입니다(몹시 괴로워 할 것이기 때문임). 그 좋은 예가 바로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었던 의로운 롯입니다. 죄악의 도시인 소돔과 고모라 성에 살고 있었던 롯은 악하고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방탕으)로 인하여 큰 고통을 받되 그는 몹시 괴로워했습니다(벧후 2:6-8, 현대인의 성경). 그 때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는 악인들을 어떻게 하셨고 의인인 롯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성경 베드로후서 2장 7, 9, 1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특별히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는 형벌할 줄 아시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악한 자들의 방탕으로 큰 고통을 받던 의로운 롯은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경건한 사람을 시험에서 건져내시고 악한 사람은 심판 날까지 계속 벌을 받게 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다. 특별히 육체의 정욕대로 살며 하나님의 권위를 멸시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큰 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을 심판하시사 형벌을 내리셨고 의인은 건져내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까? 악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에 사는 악인들을 심판하셨을 뿐만 아니라 노아 시대 때에도 홍수라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을 심판하시지 않으셨습니까?(벧후 2:5) 그러나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의로운 롯을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건져주셨고 노아의 홍수 때에도 다들 홍수로 멸망을 당했지만 노아와 일곱 식구들은 구원해 주셨습니다(5절). 출애굽 당시에도 하나님께서는 홍해 바다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좇던 애굽 군인들은 심판하시사 전멸시키셨고 그들의 손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내셨습니다(출 15장).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원의 확신과 더불어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악인을 심판하신다는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살아가되 우리는 악인들이 많아지므로 죄도 많아지는 모습을 마냥 쳐다만 보면서 그냥 내버려 둬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로마서 12장 21절 말씀처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새 창조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선한 일을 힘써야 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 어두운 세상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춰 그들이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양(영광)하게 해야 합니다(마 5:16).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한 영혼이라고 예수님께 인도하는데 힘을 써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는 사람들이 무질서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여러분, 어느 조직이나 질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여러분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만일 조직의 질서가 무너지면 혼란(chaos)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질서가 지켜지면 그 조직에는 화목과 화평(peace)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정의 질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만일 한 가정의 남편이나 아내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고 있다면 그 가정에는 올바른 질서가 확립되어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각 사람이 가정에서 자기의 성경적인 책임/의무를 감당하지 않고 질서를 어기게 되면 그 가정에는 다툼과 불화로 인하여 평화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적인 예를 들어, 아내인 사라가 남편인 아브라함을 존경하여 순종하지 않고 아브라함에게 자기의 여종인 애굽 사람 하갈과 동침하게 하므로(창 16:1-4) 결국에는 그 가정의 불화로 인하여 평화가 없었습니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임신하므로 자기 주인인 사라를 멸시하였고 사라는 하갈을 학대했습니다(6절).

 

우리의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사람들이 무질서하다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인터넷 신문 “크리스천 투데이”에 “질서의 하나님, 무질서한 사람”이란 제목 아래 쓴 글이 있어 읽어보았습니다(인터넷). 그 글 내용 중에 그 글을 쓰신 장로님은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 이야기를 하시면서 “사탄의 유혹으로 높아지고 하나님을 의심하여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했던 탐심 때문에, 인간은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렸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러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던 창조의 질서를 오직 나의 뜻, 그리고 나만의 달콤한 탐욕 때문에 새로운 질서로 바꾸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오직 나의 뜻”, “나만의 달콤한 탐욕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과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세우신 새로운 질서를 우리가 무너트리면서 세상적인 질서로 바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만드신 질서는 '무한 경쟁 '이 아니며 자신의 탐욕을 위해 약자들의 처절한 경쟁을 강요하는 것은 하나님의 질서가 아닌, 불의한 인간의 질서일 뿐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이러한 불의한 인간의 질서를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 본문 잠언 29장 18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백성이 무질서하겠지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개역개정)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묵시 또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사람들이 방자히(무질서)하게 행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방자히”행한다는 단어는 출애굽기 32장 25절에 두 번이나 나옵니다: “모세가 본즉 백성이 방자하니 이는 아론이 그들을 방자하게 하여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하였음이라.”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방자하였습니다(32:25). 그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아론에게 자기들을 인도할 신을 자기들을 위하여 만들라고 말하므로(1절) 결국에는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8절). 모세가 보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방자(out of control)했습니다(25절). 그 원인은 아론이 그들로 방자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25절). 그러므로 원수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한 것입니다(25절). 참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방자히 행하는 백성이었습니다(25절). 참으로 그들은 부패한 백성이요(7절)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8절)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목이 곧은 백성이었습니다(9절).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방자히 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에스겔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나님 보시기에 방자히 행하였습니다. 방자히 행하되 성경 에스겔 16장 30절은 그들의 행위를 가리켜 “방자한 음부의 행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입히신 영화로 온전케 된 화려함을 믿고 자신들의 명성을 인하여 행음하되 음란을 많이 행하였습니다(14-15절). 그들은 색스러운 산당을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 만들고 거기서 행음을 했습니다(16절).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물질의 축복들로 우상을 만들고 행음했습니다(17절).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의 자녀들을 우상에게 받쳤습니다(20절).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들의 음행을 작은 일로 여겼습니다(20절). 그들은 자신들의 음욕이 차지 아니하여 “또 앗수르 사람과 행음하고 그들과 행음하고도 오히려 부족히 여겨 장사하는 땅 갈대아에까지 심히 행음하되 오히려 족한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28-29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방자한 음부 행위”입니다(30절). 그들의 마음은 너무 약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방자한 음부 행위를 하였던 것입니다(30절).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에스겔 선지자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방자한 음부 행위를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왜 우리는 방자히 행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9장 18절 상반절을 보면 그 이유는 묵시가 없기 때문에 또는 하나님의 계시가 없기 때문에 우리는 방자히 행하며 무질서하게 행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부족하고(the lack of the Word)(참고: 삼상 3:1) 또한 그 말씀을 듣는 것이 부족하기에(the lack of hearing the Word)(참고: 출 32:25, 레 13:45, 민 5:18)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의 뜻에 반항하여 방자히 행한다는 것입니다(MacArthur). 실제로 지금 우리는 아모스 8장 11절 예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가뭄)을 맞이했습니다. 인터넷이나 미디어 등을 통해서 설교 말씀은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지금 우리는 귀가 있어도 그 말씀을 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교훈을 모르므로 우리 마음대로, 우리 뜻대로 행하므로 방자히 행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잠언 29장 1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의 귀를 열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들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령님의 조명과 깨달음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교훈해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안에, 가정과 교회 안에 질서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방자히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성급하게 말하도록 (조급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면 안 됩니다.

 

우리가 마음이 조급하면 어떻게 됩니까? 실수를 범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이 조급해서 실수를 범한 후 다시는 조급해 하지 말고 신중해야 하는데 그리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뒤돌아 볼 때 저는 성격도 급한 면도 제게 있지만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인내하지 못하고 너무나 조급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조급하게 생각하다 보면 언행의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보다 더 큰 위험은 하나님의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르칩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보다 앞서 가므로 그르치는 것입니다. 제 마음에 조급함은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앞지르게 하고 그 분의 뜻을 기다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제 마음의 조급함은 저로 하여금 잘못된 계획과 방법들을 생각하게 만들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며 고통스러운 결과를 내게 만듭니다. 결국 제가 제 자신을 보면 왜 조급한가 생각해 볼 때 그 원인은 “교만한 마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8절). 교만한 마음에는 참는 마음(인내심)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만한 마음에는 조급함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언행뿐만 아니라 생각의 영역에서도 조급하게 주님 보다 앞서갑니다.

 

그 성경적인 좋은 예가 창세기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입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기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인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롬 4:18, 창 15:5)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녀가 의심하게 된 원인은 그녀는 분명하게 보이는 자신의 현실을 보이지 않는 미래 보다 더 믿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보이는 현실이란 자기의 태가 죽은 것 같다는 것이고(물론 남편 아브라함도 자기 몸이 죽은 것 같았음)(롬 4:19) 보이지 않는 미래란 하나님의 약속대로 나중 하나님의 때에 그들의 후손들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75세 때 하나님께 받은 약속의 말씀이 하나님의 때인 25년 후 그가 100세가 될 때까지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하고 10년 후인(창 16:3) 그의 나이 85세 때 남편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자기의 몸종인 하갈과 동침케 합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의 나이 86세 때 이스마엘을 낳습니다(16절). 사라는 믿음으로 인내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조급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자기 힘으로 성취해 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 스스로에게 “내 마음에 조급함을 경계하자”라는 글도 써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자. 기대하지 않았던 어려운 상황으로 인하여 놀라 걱정 근심 가운데 마음이 조급해져서 성급하게 잘못된 선택을 하지 말자. 내 마음에 조급함을 경계하고 오직 믿음으로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자. 분명히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은 이루어 질 것이다. 내 수단과 내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때에 … .”

 

오늘 본문 잠언 29장 20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아무 생각 없이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미련한 자에게 더 희망이 있다.”[(개역개정) “네가 말이 조급한 사람을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여러분은 말이 조급한 사람, 아무 생각 없이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혹시 여러분도 말을 조급하게 한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특히 별 생각 없이 상대방에게 말을 성급하게 했다가 후회하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성경 잠언 10장 19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언젠가(2013년 7월) 제가 잠언 14장 말씀 중심으로 “자기 집(가정)을 허는 미련한 여인”에 대해서 한 11가지로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묵상을 오늘 본문과 연관해서 다시금 생각해 볼 때 이러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자기 가정을 허는 미련한 사람은 조급하고(잠14:29) 방자하여(16절) 분을 쉽게 내며(17절) 입술에는 지식이 없어서(7절) 과격한 말을 하면서도(15:1) 자신이 범한 죄를 심상히 여긴다(14:9)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러한 미련함이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말에 조급한 자는 다른 행동에도 조급한 법인데, 그 실수로 가져오는 불행이 여러 가지가 있다고 말하면서 한 4가지를 언급했습니다: (1) 욕을 당함(18:13), (2) 궁핍해짐(21:5), (3) 어리석음을 나타냄(14:29) 그리고 (4) 죄를 범함(19:2). 이렇게 말에 조급한 자는 이러한 결과를 가지고 오기에 희망이 없습니다(29:20).

 

우리는 조급해 하지 말고(잠 29:20, 딤후 3:4) 갈급해 해야 합니다(시 42:1). 성경 시편 42편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더디다고 생각되어 낙심하며 불안해하기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5, 11절)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사모하는 마음으로(8절, 현대인의 성경) 계속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8절). 우리는 갈급한 마음으로(1, 2절) 우리의 반석이 되시는 하나님(9절)을 찾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