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의인
[잠언 29장 6-11절]
여러분, 우리 모두가 “찬양과 경배”라는 말을 많이 들어봐서 알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엔 “찬양”은 무엇이고 “경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래 전에 읽었던 책 중에 예수전도단에서 섬겼던 홍성건 목사님이 쓴 책에서 찬양과 경배에 대해서 읽은 글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 글 내용은 홍 목사님에 의하면 “찬양”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찬양하는 것이며, “경배”는 하나님의 존재, 즉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예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 저는 이 글 내용을 읽으면서 좀 설득을 당했다고 할까요 마음에 좀 다가왔습니다. 특히 저는 찬양과 경배의 차이를 생각할 때 제가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저는 하나님께서 저의 삶 속에 행하시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을지라도, 그래서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할 때가 수 없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알아가고 믿을 때에 저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성경 느헤미야 9장 6절을 보면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갓미엘과 바니와 하삽느야와 세레뱌와 호디야와 스바냐와 브다히야”(5절)가 이스라엘 자손에게(1절)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6절)고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전에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오직 주는 여호와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6절). 우리는 “주는 하나님 여호와시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7절).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의로우사 우리에게 하신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긍휼이 여기사 크신 긍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 하나님,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O God, You are my God)라고 진심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영어 복음 성가 중에 “Step by Step”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그 노래 가사를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Oh God, You are my God And I will ever praise you …” (오 하나님,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당신을 찬양합니다 …).
저는 오늘 “지혜로운 의인”이란 제목 아래 지혜로운 의인은 어떻게 행하는지 한 3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혜로운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6절을 보십시오: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악인은 자기 죄로 덫에 걸리지만 의로운 사람은 노래하고 즐거워한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왜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하는 것일까요? 무슨 좋은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어느 누가 나쁜 일이 있는데 노래하고 기뻐하겠습니까. 그러면 노래하고 기뻐하는 의인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해선 6절 상반절 말씀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나 ….” 여러분, 악인이 죄를 범하는 것은 어느 면으로 보면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악인이기에 죄를 범하는 것이지 의인이기에 죄를 범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악인이 범하는 죄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잠언 29장 10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피 흘리기를 좋아하는 자는 온전한 자를 미워하고 정직한 자의 생명을 찾느니라.” 즉, 악인이 범하는 죄 중에 하나는 정직한 자와 온전한 자를 미워하여 그의 생명을 찾아 피 흘리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악인이 정직한 자와 온전한 자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미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악인의 죄가 정직하고 온전한 자로 인하여 들춰지기 때문입니다(참고: 엡 5:11). 이러한 악인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정직하고 온전한 자를 미워하여 그의 생명을 찾아 피 흘리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성경 잠언 28장 1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 악인의 결과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28:10). 오늘 본문 잠언 29장 6절에서는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스스로 덫에 걸린다(현대인의 성경)]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2장 13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려도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아도 악인은 그물에 걸린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전절인 5절에는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6절 에서는 “악인이 범죄하는 것은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것” 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악인은 정직한 자와 온전한 자를 미워하여 그의 생명을 찾아 피 흘릴 뿐만 아니라 이웃에게 아첨하므로 결국에는 자기 발 앞에 그물을 치며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올무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인은 악인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좀 이해하기가 쉬우리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의인은 악인처럼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그러므로 스스로 올무가 되게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6절). 오히려 성경 잠언 12장 13절 하반절을 보면 “의인은 환난에서 벗어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왜 의인이 노래하고 기뻐하는지 좀 알 수가 있습니다(29:6). 즉, 의인이 노래하고 기뻐하는 이유는 주님께서 의인을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비록 악인이 정직하고 온전한 의인을 핍박(박해)하므로 의인은 환난을 당하지만 주님께서는 의인을 그 환난에서 건져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의인은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신앙을 지키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 찬양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인한 찬양이요 그 기쁨은 구원의 기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가 어떻게 옥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을까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아직 옥에서 건짐을 받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 옥에서 하나님을 찬미하였을까 라는 질문입니다. 저는 이 질문을 던지면서 다시금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바울과 실라에 관한 말씀 묵상하였습니다. 그럴 때 저는 참 하나님의 섭리가 흥미롭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에 이르러서(행16:12) 기도처가 있는지 찾고 있었는데(13, 16절) 그들의 기도처가 바로 깊은 옥이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을 치유하므로 말미암아(16-18절) 결국에는 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와 실라는 결국 옥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찬미하였다는 것입니다(23-25절).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배당에서 기도케 만드시지 않으시고 깊은 감옥과 같은 곳에서 기도케 만드시기도 하신다는 사실이 여러분은 흥미롭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실라는 어떻게 옥에서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25절) 그들은 아직 주님께서 옥에서 건져주시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 제 생각엔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옥에서 건져주실 줄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옥에서 건져주실 줄 믿는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에 그들은 옥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한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실라처럼 이러한 믿음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지혜로운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 때문입니다. 비록 악인은 지혜로운 의인을 미워하여 죄를 범하지만 그것은 악인 스스로에게 올무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악인의 박해로 인하여 의인은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그 고난 가운데서도 지혜로운 의인은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주신 구원의 은총 때문입니다. 성경 이사야 38장 20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실 것이니 우리가 평생 여호와의 성전에서 수금으로 노래하며 찬양하리라”].
둘째로, 지혜로운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줍니다.
여러분의 사정을 제일 잘 아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의 배우자인가요? 여러분의 부모님? 여러분의 제일 친한 친구? 그 누군가가 우리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람을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사정을 아무리 잘 안다할지라도 충분히 알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사정을 알아주는 사람으로 인하여 위로를 받으며 힘을 얻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정을 알아가다 보면 흔히 우리가 말하듯이 각 사람이나 가정이나 속사정이 없는 사람이나 가정이 없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겉으로 보기에는 별 문제 없이 행복하게 잘 사는 부부인 것 같지만 대화를 하다보면 그 부부만의 속사정이 있고 그 속사정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성경 창세기 40장 14절을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게 갇혀있는 요셉이 애굽 왕 바로의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 준 다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요셉은 그 술 맡은 관원장이 꿈의 해석대로 전직을 회복되면 자기를 생각하고 자기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애굽 왕 바로에게 자기 사정(“내 사정”)을 아뢰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술 맡은 관원장은 만 2년 동안 요셉을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즉, 그는 요셉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고 요셉의 사정을 바로 왕에게 아뢰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만 2년 후 바로 왕이 꿈을 꾸었고 그의 꿈을 해석할 사람이 없었을 때 그 때서야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하고 바로 왕에게 요셉에 대해서 말했습니다(41:9-13). 그 결과 요셉은 바로 왕 앞에 서게 되어 또한 그의 꿈을 해석하므로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 이야기를 묵상하면서 이런 글을 써 보았습니다: “내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잘 되었으면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었어야 하는데 나를 기억치 못하고 나를 잊어버렸습니다(창 40:14, 23). 나는 충분히 낙심할 수 있었지만 오히려 나의 사정을 제일 잘 아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습니다. 만 2년 후에 하나님께서는 내 사정을 아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어떠한 계기를 통하여 나를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내 부탁을 들어주었습니다(41:9-13). 그 결과 하나님은 나를 건져주셨을 뿐만 아니라 나를 높이셨습니다(37-43절).” 여러분, 우리 하나님이 우리의 사정을 어느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둬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7절을 보십시오: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사람은 가난한 사람의 사정을 생각하여도 악한 사람은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정을 알아주되 의인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14:31, 19:17),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주며(22:9) 구제합니다(28:27). 의로운 왕은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여 주며(29:14) 또한 가난한 자의 생명을 보호합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악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 줄 지식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9:7). 그래서 악인은 귀를 막아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21:13) 가난한 자를 못 본체합니다(28:27). 그 이유는 악인은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신 15:7). 오히려 악인은 가난한 자를 조롱하며(잠17:5) 협박하며(13:8)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까지 합니다(22:16). 그 성경적인 예가 바로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 아합입니다. 그는 “더 아름다운 포도원”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의 왕궁에서 가까운 나봇의 포도원을 그리도 원했습니다(1-2절). 그런데 나봇은 “내 조상의 유산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시기에(3절) “내 조상의 유산을 왕께 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4절, 참고: 6절). 그 때 아합 왕은 “근심하고 답답하여 왕궁으로 돌아와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리고 식사를 아니”했습니다(4절). 그 모습을 보고 그의 아내 이세벨 왕후가 아합에게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5절)라고 물었고 아합 왕은 그녀에게 다 말했습니다(6절). 결국 이세벨 왕후는 계략을 세워 나봇을 죽이고 그의 포도원을 뺏어서 아합에 줬습니다. 성경은 아합은 자기 자신을 팔아(20, 25절)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0절). 성경은 그와 같이 그 자신을 팔아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5절).
여러분, 성경 이사야 32장 7절은 “악한 자는 그 그릇이 악하여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련한 자를 멸하며 가난한 자가 말을 바르게 할지라도 그리함이거니와”[(현대인의 성경) “못된 건달의 주된 무기는 악이다. 그는 악한 계획을 세우며 거짓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그들이 바른 말을 하는 경우에도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악한 자는 악한 계획을 세워 거짓말로 가난한 사람들을 파멸시키고 그 가난한 사람들이 바른 말을 하면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한 자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결코 악한 자는 가난한 자의 사정에 신경을 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아주지도 못합니다. 그 이유는 악인은 알아 줄 지식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잠 29:7). 그러므로 악한 관원은 가난한 백성을 압제합니다(28:15). 그리고 악한 재판관은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그의 권리를 박탈까지 합니다(사10:2). 그러나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줍니다(잠 29:7). 그래서 의인은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합니다(건져줍니다)(시 72:4). 하나님을 아는 의인은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해 줍니다(렘 22:16, 현대인의 성경). 무엇보다도 의인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합니다(사 61:1). 즉, 의인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눅7:22).
여러분,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눅 7:22).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우리에게 임했으니 우리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4:18). 그리고 우리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잠 28:8) 그를 보살피며(시 41:1) 또한 그를 구제해야 합니다(에 9:22).
마지막 셋째로, 지혜로운 의인은 노를 그치게 합니다.
Gary & Greg Smalley가 쓴 "THE HEART OF REMARRIAGE"란 책을 읽으면서 저는 부부 관계에서 의로운 분노(righteous anger)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의로운 분노가 있어야 부부 관계에 있어서 건강한 변화(healthy change)를 가지고 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의한 분노(unrighteous anger)는 서로의 언행으로 죄를 지으므로 말미암아 부부 관계를 악화시킵니다. 제 생각엔 부부 관계의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분노 조절이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도 분노 조절이 되지 않으면 부부 갈등의 작은 불씨를 충분히 산불로 만들어 부부 관계를 다 태워버릴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을 다른 가족 식구들에게 표출해서는 아니 됩니다. 죄악 된 분노를 가족 식구들에게 표출하는 것도 나쁜 습관입니다. 그 나쁜 습관을 고치는 방법 중에 하나는 우선 우리 자신에게 왜 화가 났는지, 그것이 우리 자신의 잘못임을 겸손히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8절을 보십시오: “거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하게 하여도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거만하고 냉소적인 사람은 도시를 소란케 하지만 슬기로운 사람은 분노를 그치게 한다”]. 여기서 “거만한 자는 성읍을 요란하게 하여도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성읍을 요란하게 하는 거만한 자는 교만한 자요 분노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노하며 교만한 자는 다툼의 불씨에 바람을 불어 넣어서 성읍을 요란케 합니다(MacArthur). 성경 잠언 26장 21절을 보십시오: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숯이 깜부기불을 일게 하고 나무가 타는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하듯이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싸움을 부채질 한다”]. 상상이 되십니까? 숯불 위에 숯을 더하고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불이 더 크게 잘 타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이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싸움을 부채질해서 작은 싸움을 고래 싸움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29장 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면 지혜로운 자가 노하든지 웃든지 그 다툼은 그침이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지혜로운 자와 미련한 자가 다투게 되면 미련한 자가 노하든 웃든 그 다툼은 쉽게 그치지 않는다”]. 이렇게 교만하고 다투기를 좋아하는 분노하는 자는 미련한 자요, 미련한 자의 분노는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더 위험하다고 성경 잠언 17장 12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미련한 사람이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분노할 때 들 합리적(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MacArthur).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미련한 자가 비이성적으로 당장 분노를 나타내는 것(12:16)이 상상이 되십니까? 미련한 자는 비이성적으로 당장 분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한 오랫동안 삐뚤어진 생각으로 분노를 품고 있다가 상대방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 예로 우리는 구약 성경 사무엘하 13장에 나오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누이를 강간한 암논을 죽이고자 2년 동안 분노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분을 오래 동안 품으면 반드시 죄를 범하게 됩니다(박윤선). 이렇게 분을 오래 동안 품게 되면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를 요란케(시끄럽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엔 쉽게 분노를 내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잠12:16). 오랫동안 삐뚤어진 생각으로 분노를 품는 사람은 멀리해야 합니다(삼하 13장). 분노할 때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사람은 아예 만나지도 말아야 합니다(잠 17:12).
우리가 가까이하고 만나야 할 사람을 오늘 본문 잠언 29장 8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슬기로운 자는 노를 그치게 하느니라.” 교만하여 쉽게 분노하는 자는 가정이나 교회나 도시를 요란케 하지만 슬기로운 자는 분노하는 자의 노를 그치게 합니다. 어떻게 슬기로운 자는 분노하는 자의 노를 그치게 할까요? 한 2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먼저 잠언 15 18절을 보십시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성미가 급한 사람은 다툼을 일으켜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시비를 그치게 한다”].
슬기로운 자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11절 하반절의 말씀처럼 지혜로운 자는 분노를 억제합니다. 즉, 그는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약1:19). 그는 성미가 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시비를 그치게 합니다(잠15:18). 그러나 우리가 성미가 급하여 화를 쉽게 내면 우리는 다툼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분노 가운데 입을 절제하지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하되 과격한 말, 상대방에게 상처 입히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4절).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날 때 우리의 입을 좀 다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화가 나 있을 때에는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분노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과격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1절).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할 때 말하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약 1:19).
(2) 또한 잠언 25장 15절을 보십시오: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깎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인내력 있는 설득은 완강한 통치자의 마음도 돌이켜 놓을 수 있으며 부드러운 혀는 뼈도 꺾을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부드러운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의 부드러운 말은 “뼈를 꺾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의미는 힘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Walvoord). 지혜로운 자의 부드러운 혀가 무슨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성경은 부드러운 혀는 “관원”의 마음도 돌이켜 놓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 여기서 “관원”이란 말은 재판관과 같은 고위층의 관리를 말합니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어떤 옳은 판결을 청구하는 자는, 그 재판관의 태만한 것 때문에 분개하기 쉽지만 지혜로운 자는 끝까지 온유한 태도를 지키면 그 재판관도 감동된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우리가 부드러운 혀로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도 돌이켜 놓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인내력 있는 설득”으로 가능합니다(15절).
성경 잠언 15장 1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혀도 과격한 말은 분노를 일으킨다”]. 지혜로운 자는 부드러운 말로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힙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노를 그치게 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지혜로운 의인은 노래하고 기뻐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의인을 환난에서 벗어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로운 의인이 노래하며 기뻐하는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 때문입니다. 비록 그는 고난을 당할 수 있지만 그 고난 가운데서도 지혜로운 의인은 하나님께 찬양하며 기뻐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에게 주신 구원의 은총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줍니다. 그는 가난한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 주며 궁핍한 자의 자손을 구원합니다(건져줍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의인은 가난하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모든 일을 잘 처리해 줍니다. 무엇보다도 의인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합니다. 즉, 의인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합니다. 지혜로운 의인은 노를 그치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좀처럼 화를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분노를 억제하며 노하기를 더디 합니다. 그는 부드러운 말과 유순한 대답으로 상대방의 노를 그치게 할 뿐만 아니라 인내력과 설득력으로 상대방의 노를 그치게 하여 화평케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지혜로운 의인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