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사모하는 자

 

 

 

[잠언 291-5]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능력이란 바로 말씀의 능력과 사랑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지혜의 책들을 계속해서 묵상해 나아가면서 또 하나의 능력을 사모하게 되었습니다. 그 능력은 바로 “지혜의 능력”입니다. 물론 그 지혜의 능력을 구하게 된 동기는 지혜의 책들을 묵상하게 되면서 더욱더 제 자신이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들춰지는 가운데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제가 지혜의 능력을 사모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악을 미워하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가 하나님께 지혜의 능력을 구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악을 저 또한 미워하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선을 저 또한 더욱더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3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현대인의 성경)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란 제목 아래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무엇을 또는 누구를 사모하는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첨 보다 책망을 사모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1절과 5절을 보십시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고집을 피우는 사람은 예기치 않은 패망을 당하고 구제가 불가능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 이웃 사람에게 아첨하는 자는 자기 발 앞에 그물을 치는 사람이다”]. 여러분은 책망을 듣는 것이 좋으십니까 아니면 아첨을 듣는 것이 좋으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여러분을 아첨하는 사람은 여러분 앞에서만 거짓말로 여러분을 기쁘게 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는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래도 그 아첨을 계속해서 듣고 싶겠습니까? 아니면 비록 책망을 듣는 그 당시에는 기분이 좀 안 좋겠지만 그 사람이 여러분을 사랑해서 여러분을 위하여(여러분을 세우고자) 책망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자면 여러분은 그 사람의 그 책망에 오히려 귀를 더 기울이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잠언 28장 23절에서 “사람을 경책하는 자(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는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사람을 경책하는 자”(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을 경책하는 자가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23절).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본능은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기보다 지금 사랑을 더욱 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상대방에게 더욱 사랑을 받는 방법은 우리가 그 상대방의 잘못을 정신 차리도록 꾸짖기(경책) 보다 그 사람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아부(아첨)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5절을 보면 성경은 “이웃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이웃 사람에게 아첨하는 자는 자기 발 앞에 그물을 치는 사람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웃에게 ‘아첨한다’라는 말은 이웃에게 매끄러운 것(smooth thing)을 말한다는 뜻으로서 “그것은 상대방의 죄악 성품에 잘 영합하여 듣기 좋게 말함입니다(박윤선). 그 좋은 예가 열왕기상 22장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악한 왕 아합에게 듣기 좋게 아첨한 거짓 선지자 400명입니다. 그 당시 아합 왕은 유다의 여호사밧 왕에게 자기와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가서 아람과 싸우려고 했을 때였습니다(4절). 그 때 여호사밧 왕은 아합 왕에게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보자고 하였습니다(5절). 그래서 아합 왕은 선지자 400명쯤 모으고 그들에게 “내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고 물었습니다(6절). 그러자 그 선지자들은 아합 왕에게 “올라가소서 주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라고 아첨을 했습니다(6절). 또 다른 예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귀에 듣기 좋은 거짓 예언을 했습니다. 그 거짓 예언이란 평강이 없는데 그 거짓 선지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거짓말을 했습니다(렘 6:14, 8:11). 아니,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회개치 않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평강이 있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의 거짓 예언이요 이스라엘 백성의 귀에 듣기 좋은 거짓말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거짓 선지자들은 아첨한 것일까요? 왜 그들은 아합 왕에게 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듣기 좋게 말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 듣기 좋은 소리를 듣고 있었던 아합 왕이나 이스라엘 백성이나 죄를 짓고 있었기에 그들의 죄악 성품에 그 거짓 선지자들의 아첨은 자신들의 죄악 된 뜻과 이익에 맞아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아첨하는 것은 자신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라고 오늘 본문 잠언 29장 5절 하반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왜 사냥꾼이 그물을 칩니까? 사냥하는 동물을 잡고자 그러는 것 아닌가요? 자기 이웃에게 아첨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이란 말씀은 비록 처음에 이웃에게 아첨할 당시에는 별 문제 없어보일지라도 그것은 자기 발 앞에 그물을 치는 것으로서 결국에 가서는 그 그물에 잡힌다(걸려든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아첨하는 자는 패망을 가져온다는 말입니다(26:28). 성경 예레미야 9장 8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혀는 사람을 죽이는 화살과 같다. 그들은 항상 거짓을 말하고 입으로는 자기 이웃에게 다정히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를 잡을 덫을 놓고 있다.” 아첨하는 사람의 혀는 죽이는 화살과 같습니다. 아첨하는 사람은 입으로 항상 거짓을 말합니다. 자기 입으로 이웃에게 다정히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잡을 덫을 놓고 있습니다. 이렇게 아첨하는 자는 두 마음으로 거짓을 말합니다(시 12:2). 그러므로 우리는 두 마음을 품고 우리에게 아첨하는 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지혜로운 자는 아첨하는 자를 경계합니다. 물론 먼저 우리 자신이 사도 바울처럼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살전 2:5). 특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지 말아야 합니다(유 1:16). 우리가 경계해야 할 아첨하는 자들은 아첨의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합니다(롬 16:18). 결코 그들은 진리를 말하지 않고 교묘하게 진리와 거짓을 섞어서라도 우리에게 아첨의 말을 하여 우리로 하여금 미혹되어 교만한 가운데서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첨의 말을 듣기를 거부하고 오히려 우리를 사랑으로 경책하는 자의 책망을 듣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잠 28:23).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첨보다 책망을 사모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 본문 잠언 29장 1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을 곧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이 곧은 사람”이란 매우 고집이 완강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사람은 “가르치기 어려운, 말을 잘 듣지 않는” 영(unteachable spirit)이 있는 사람입니다(MacArthur). 성경에 이렇게 매우 고집이 완강한 목이 곧은 사람하면 누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 왕 바로가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내리실 때까지 바로 왕은 계속해서 마음을 완강하게 해서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 뜻을 고집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10번째 재앙을 받고서야 자기의 완강한 고집이 꺾여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바로 왕 외에도 성경에 나는 매우 고집이 완강한 사람을 생각할 때 요나 선지자도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셨습니다(욘 3:10). 니느웨 백성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10절).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4:1). 그는 죽고 싶을 정도로(3절) 매우 싫어하고 성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자기의 뜻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요나의 뜻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였습니다(3:4). 그래서 그는 니느웨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내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4:5). 그가 기대한 "무슨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니느웨 성읍이 무너지는 것이었습니다(3:4).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완강하게 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묵은 땅을 기경하듯이 우리의 마음의 농사를 부지런히 해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불과 방망이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녹이고 부서트려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찌르고 찔러서 우리 마음을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이 부드러워서 우리를 사랑으로 책망하는 사람의 말을 겸손히 배우는 자세로 듣고 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특히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책망하시는 것을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시 39:11).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책망하여 우리의 죄를 우리 눈앞에 낱낱이 드러내실 때에 우리는 그 책망을 겸허히 받아들어야 합니다(50:21). 그러므로 우리의 들춰진 죄들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의 죄들을 인정하고 고백하며 회개할 수 있는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뇌물 보다 정의를 사모합니다.

 

얼마 전 대학 후배를 만나서 식사를 같이하는데 그 후배가 하는 말이 ‘요즘 세상은 돈과 힘(권력)만 있으면 다 되는 것 같다’고 하면서 한탄하는 모습을 좀 엿보았습니다. 아마 그 후배만 그러한 한탄을 하는 것을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바라볼 때 돈과 권력의 힘만 있으면 자기들 마음대로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돈과 권력만 있으면 잘못을 범하고서도 형벌을 받지 않고 빠져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그 방법 중에 하나는 아마도 뇌물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판장이 공평하게 재판을 해야 하는데 사람의 낯을 보아주면 그 재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28:21) 결코 올바른 판결을 내리지 못할(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왜 현재 법정에서 일어나는 것인가요? 그 이유는 바로 ‘뇌물’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돈이 힘이다’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과 야망을 이루고자 뇌물을 주는 것도 서슴지 않고 있습니다. 그 예가 성경 에스라 4장에 나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유다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을 때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그 소식을 듣고(1절) 스룹바벨과 그 밖에 유대 지도자들에게 왔습니다. 그들은 스룹바벨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기들도 유다 백성들과 함께 성전을 건축하게 하라고 말했지만(2절) 스룹바벨과 예수아 및 다른 지도자들은 거절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3절). 그 때부터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성전 공사를 방해”했습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한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뇌물”이었습니다(5절). 유다의 대적자들은 “바사와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 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성전건축) 계획을 막았”습니다(5절). 성경 느혜미야 6장에서도 유다 백성들의 대적자들인 도비야와 산발랏은 스마야에게 뇌물을 줘서 느헤미야에게 (거짓된) 예언을 하게 하였습니다(12절). 그 예언의 내용은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성소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숨어 있어야겠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이 밤에 와서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는 것이었습니다(10절).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스마야에게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총독인 내가 어떻게 달아날 수 있으며 나 같은 사람이 목숨을 구하겠다고 어떻게 성소에 들어가 숨을 수 있겠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소”(11절, 현대인의 성경). 느헤미야는 그 때 스마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미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자기에게 이런 예언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왜 유다 백성들을 대적한 도비야와 산발랏이 스마야에게 뇌물을 줘서 그리 거짓 예언을 한 것입니까? 성경 느헤미야 6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스마야를 매수하여 나를 위협한 것은 그 일로 나를 범죄하게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고 나를 비방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뇌물을 준 목적은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케 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2절과 4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 … 공정하고 의로운 왕은 나라를 안정되게 하지만 뇌물을 강요하는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이 즐거워하지만 악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이 탄식한다. … 공정하고 의로운 왕은 나라를 안정되게 하지만 뇌물을 강요하는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 만일 권력을 가진 정치인들이 시민들에게 뇌물을 강요하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이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특히 대통령이 사람들이게 뇌물을 강요하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뇌물을 강요하는 왕은 나를 망하게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4절). 실제로 오늘 본문 2절 하반절 말씀처럼 이 세상에 많은 나라들 중에 악인들이 권세를 잡아 나라를 다스리면서 사람들에게 억지로 뇌물을 내게 만드는 지도자(대통령, 왕)들이 있지 않습니까?(4절) 그러한 악한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4절) 그리고 자기 나라를 망하게 하는 자기 나라 지도자를 보는 시민들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오늘 본문 2절 하반절 말씀처럼 탄식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서 7장 7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뇌물은 사람의 마음을 부패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뇌물을 받는 왕이나 대통령의 마음이 부패해지면 과연 그러한 지도자가 자기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그러한 왕은 부패한 마음으로 가난한 시민들을 천대하며 압박할 것입니다. 아모스 선지자 시대 때 재판장들이 뇌물을 받고 가난한 자를 천대하며 압박했습니다(암 5:12). 이러한 일이 부패한 재판장으로 인해 법정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한 나라의 부패한 대통령으로 인해 그 나라에서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까? 그 부패한 대통령이 악한 부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가난한 시민들은 천대하며 압박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29장 2절 하반절과 4절 하반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 악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이 탄식한다”](2절하), “…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뇌물을 강요하는 왕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4절하). 그러나 반대로 오늘 본문 잠언 29장 2절 상반절과 4절 상반절 말씀처럼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2절) “왕은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합니다(4절상). 여기서 저는 하나님 아버지를 즐겁게 하는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3절) 뇌물을 사모하지 않고 정의를 사모한다는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4절). 실제로 잠언 기자가 살고 있었던 시대 때나 지금이나 별 다를 바가 없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악한 사람들이 권세를 잡았을 때가 있었는가 하면 또한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의로운 지도자들이 권세를 잡았을 때가 있었고 지금도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두 종류의 지도자들은 항상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바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지도자들이 뇌물이나 억지로 내게 하는 악한 사람들이 아니라 모두 다 정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하는 의로운 사람들이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종종 뉴스를 통해서 우리나라 지도자들인 정치인들이 뇌물을 받아 법정에 서고 형벌을 받는 모습을 보면 참 돈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죄를 범하게 만드는구나 라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습니다. 성경 잠언 17장 8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뇌물을 마법처럼 생각하여 그것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다”[(공동번역) “뇌물은 요술방망이 같아 어디에 쓰든 안 되는 일이 없다”]. 진짜 이 세상에는 뇌물을 요술방망이 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뇌물이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정의를 행하기를 싫어합니다(21:7). 그러나 우리는 정의를 사모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뇌물을 미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뇌물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헛되고 거짓된 믿음을 버리고 뇌물을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는 하박국 선지자가 살고 있었던 사회처럼 정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있는 사회라 생각합니다. 성경 하박국 1장 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오니 이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짐이니이다”[(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법이 무시되고 정의가 실현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의로운 자를 둘러싸고 있으므로 부정이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호소하되 어찌하여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인을 벌하지 않으시는지 불평하고 있습니다. 그 불평의 내용은 율법이 해이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이 무시되고 마비되어 있기에 정의가 전혀 실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악인이 의인을 에워쌌으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만큼 의인보다 악인들이 많아서 그 수많은 악인들이 의인들을 에워싸고 있었기에 부정이 판을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참 심각한 문제는 교회 안에서도 공의와 정의가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작년 12월에 쓴 글을 잠깐 나눕니다: “교회 안에서 공의와 정의가 행해지지 않을 때 의로운 심령들이 마음의 깊은 상처를 입으며 또한 마음이 찢기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그 때 의로우신 재판장이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는 교회를 책망하며 경고하시며 사랑으로 징계하실 것입니다. 그 징계를 받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책망과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서 주님께 징계를 받기 전에 공의와 정의를 행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행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렘 9:24).

 

우리가 우리나라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처럼 정의와 공의를 행하는 지도자들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정의와 공의를 행할 때에 우리나라가 견고하게 될 수 있습니다(잠 29:4). 그리할 때 우리 시민들이 즐거워할 수가 있습니다(2절). 비록 점점 더 악인들이 많아져 의인들을 에워싸므로 정의가 굽게 행하여지는 나라가 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계속해서 하박국 선지자처럼 하나님께 부르짖으십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하박국 선지자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사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합 2:4).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이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길 원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비록 이 사회가 법이 무시되고 정의가 전혀 시행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공의와 정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21:3).

 

마지막 셋째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창기보다 아버지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지금 미국은 “미투(Me too) 운동”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미투 운동”이란 성폭력을 당했던 사람들이 침묵을 깨고 “나도 이렇게 당했다”며 “미투”라고 폭로하는 운동입니다. 작년 2017년 12월 6일에 미국 시시주간지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침묵을 깬 사람들’(Silence Breakers)을 선정했습니다. 이들은 “나도 이렇게 당했다”며 “미투” 운동에 참여해 유력 인사들의 성폭력을 폭로한 불특정 다수 여성들입니다. 올해의 인물로 이들을 선정하면서 “할리우드 거물 하비 와인스타인에 대한 첫 번째 성추행 고발 자부터 ‘미투’를 이용해 자신들의 피해 이야기를 공유한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을 뜻한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뉴욕타임스가 ‘와인스타인 스캔들’을 보도한 것은 지난 10월 초다.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이 여성 수십 명을 성적으로 괴롭혔다는 것이다. 이후 앤젤리나 졸리, 귀네스 팰트로, 레이디 가가 등 유명 연예인들의 폭로가 잇따랐고, 결국 와인스타인은 자신의 영화사에서 쫓겨났다. 배우 앨리사 밀라노는 ‘와인스타인 스캔들’ 보도 이후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소셜미디어에 ‘나 역시 피해자였다’는 의미의 ‘미투’에 해시태그를 붙여 각자 경험을 고백하는 ‘미투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캠페인으로 미국 사회 전반에 ‘성폭력 고발 열풍’이 일었고, 영화계를 넘어 정계·경제계·노동계·언론계 등 각 분야에서 수백만 건에 달하는 성폭력 피해가 폭로·고발됐다”(인터넷).

 

여러분, 왜 이렇게 수백만 건에 달하는 성폭력 피해가 있었을까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이런 성폭력 피해가 끊이지 않을 텐데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1) 저는 그 원인이 안목의 정욕이라고 생각합니다(요일2:16).

 

사탄은 우리의 안목의 정욕을 자극하여 성적으로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안에 욕심을 자극하여 우리로 하여금 분수에 넘치게 다른 여자를 탐내게 만듭니다. 만일 우리가 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면 우리는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우리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쳐다봅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아무리 많은 여자를 보아도 만족함을 모릅니다. 전도서 1장 8절을 보십시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이렇게 안목의 정욕을 족함이 없기에 다른 여자를 보고 또 보면서 그 여자를 탐내는 것입니다.

 

(2) 저는 그 원인이 육체의 정욕이라고 생각합니다(요일2:16).

 

사탄은 우리의 육체의 정욕을 자극하여 성적으로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 안에 우리 아내 아닌 다른 여자들을 탐하게 합니다. 사탄은 우리 아내의 품을 항상 만족하게 여기지 못하게 하며 그녀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잠 5:19). 그 결과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성추행이나 성폭행이나 강간 등 성범죄를 짓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불륜의 관계를 맺는 원인은 탐욕입니다. 탐욕은 족한 줄을 모릅니다(사 56:11). 그러므로 탐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아내를 만족하게 여기지 못하고(잠 5:19) 우리 이웃의 아내를 탐내게 만듭니다(출 29:17). 이 땅에 있는 육체의 욕망은 결국에는 음란과 더러운 짓과 정욕과 악한 욕망과 지나친 욕심으로 성적인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골 3:5).

 

(3) 저는 그 원인인 미련함’(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좋은 예가 잠언 7장에 나오는 한 지혜 없는 자, 즉 미련한 자입니다. 그 미련한 자는 말로 호리는 음녀의 유혹에 빠진 자입니다(5절). 어떻게 사단은 이 미련한 자를 유혹했을까요? 한 3가지로 생각했었습니다:

 

(a) 사단은 한 지혜 없는 자로 하여금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가도록 유혹합니다.

 

잠언 7장 8절을 보십시오: “그가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 집으로 들어가는데.” 이 어리석은 자는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지나갈 때(8절) 그 길을 피하고 지나가지 말며 오히려 돌이켜 떠났어야 했습니다(4:15). 그러나 그 어리석은 소년은 그 음녀의 길을 돌이켜 떠나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걸어가되 그 음녀의 집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그것도 해가 저물고 황혼 때, 깊은 밤 흑암 중에 그 어리석은 소년은 그 음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7:9). 그는 아무도 자기를 보길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어리석은 소년은 남에게 자기 행위를 감추려고 은밀히 깊은 밤에 창녀에게로 간 것입니다(박윤선).

 

(b) 음녀는 숨겨진 의도로 한 지혜 없는 자를 나와서 맞이합니다.

 

잠언 7장 10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한 지혜 없는 어리석은 소년이 사단의 유혹에 넘어가 깊은 밤중에(9절) 거리를 지나 음녀의 골목 모퉁이로 가까이 하여 그녀의 집으로 갔을 때(8절) 그 음녀는 마치 몸 파는 창녀처럼 옷을 입고 그 어리석은 소년을 맞이했습니다(10절). 여기서 “간교한 계집”이라고 말씀한 이유는 그녀가 그 소년을 맞이함에 있어서 숨겨진 의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간교한 창녀는 그 지혜 없는 어리석은 소년을 맞이함에 있어서 자신의 진정한 의도는 숨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여기서 ‘간교하다’라는 히브리어 원어의 문자적 의미는 바로 ‘숨기다’(hidden)입니다(MacArthur). 과연 그녀의 숨겨진 의도는 무엇일까요? 잠언 23장 27-28절을 보십시오: “대저 음녀는 깊은 구렁이요 이방 여인은 좁은 함정이라 그는 강도 같이 매복하며 인간에 궤사한 자가 많아지게 하느니라.” 음녀가 한 지혜 없는 자를 창녀의 옷같이 입고 맞이하는 숨겨진 의도는 “함정”을 놓아 그로 하여금 결혼생활에 충실하지 못하게(faithless) 만드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그 음녀의 숨겨진 참된 의도는 많은 결혼한 남자들로 하여금 결혼할 때에 언약하였던 것을 파기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박윤선).

 

(c) 음녀는 입술의 호리는 말로 한 지혜 없는 자를 꾑니다.

 

잠언 7장 21절을 보십시오: “여러 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어떻게 음녀가 한 지혜 없는 남자를 유혹하여 타락시십니까?

 

(i) 음녀는 보이는 것으로 어리석은 남자를 유혹합니다.

잠언 7장 10절을 보십시오: “그 때에 기생의 옷을 입은 간교한 계집이 그를 맞으니.” 여기서 “기생의 옷”을 입었다는 말은 요즘 말로 하면 그 음녀는 창녀같이 옷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창녀들이 유혹적으로 옷을 입는다는 것은 노출이 심하되 남자들의 안목의 정욕과 육신의 정욕을 성적으로 자극할 정도로 옷을 입습니다. 어리석은 우리 남자들을 유혹하기에 참으로 자극적입니다.

 

(ii) 음녀는 만지는 것으로 어리석은 남자를 유혹합니다.

 

잠언 7장 1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계집이 그를 붙잡고 입을 맞추며 ….” 노출이 심하게 옷을 입은 음녀가 어리석은 남자에게 돌진하여 두 팔로 그를 꼭 끼어 앉고 입술에 키스를 한다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그리했을 때 그 어리석은 남자는 안 그래도 그 음녀의 창녀같이 입은 옷을 보고 시각적으로도 이미 성적 흥분을 느끼고 있었을 텐데 그 음녀를 자기를 붙잡고 입까지 맞췄다면 그 때에는 성적충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간교한 음녀는 한 지혜 없는 자를 유혹함에 있어서 육체적 접촉까지 사용합니다. 그 음녀가 만지고 키스까지 하므로 그 어리석은 청년을 유혹할진대 그 혈기왕성한 청년이 얼마나 성적으로 자극을 받겠습니까?

 

(iii) 음녀는 들리는 것으로 어리석은 남자를 유혹합니다.

 

음녀는 어리석은 남자를 유혹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고운 말로”(with persuasive words), “입술의 호리는 말로”(with her smooth talk) 유혹합니다(21절). 여자도 마차가지라 생각하지만 특히 남자는 오감에 있어서 시각, 촉각과 청각이 약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남자가 여자에게 유혹 받을 때 여자의 몸매 보므로 유혹 당할 수도 있고 스킨십을 통해서도 유혹을 당할 수 있겠지만 그 여자가 하는 말을 들음으로도 충분히 유혹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9장 3절을 보십시오: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비를 즐겁게 하여도 창기와 사귀는 자는 재물을 잃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아버지를 기쁘게 하여도 창녀와 사귀는 사람은 재산을 허비하게 된다”]. 오늘 성경은 창기와 사귀는 사람은 재산을 잃어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창녀와 사귀는 사람은 재산을 허비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 재산이 아버지의 것이라면 미련한 아들은 창녀와 사귀므로 아버지의 재산을 허비하고 잃어버린다면 그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결코 기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5장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탕자 비유가 생각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서 자기 분깃을 받아 먼 나라에 가 거기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께 받은 그 재산을 다 낭비하였습니다(눅 15:13). 결국 그 탕자는 가진 것을 다 써 버리고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해졌습니다(14절). 그는 굶어 죽게 되었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만일 그 사실을 그 탕자의 아버지가 알았다면 그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은 창녀를 사귀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잠29:3). 우리는 창녀를 사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성경은 지혜를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3절). 우리는 이미 오늘 본문 잠언 29장 1-5절 말씀 중심으로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어떠한 자인지 한 2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즉, 우리는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첨 보다 책망을 사모할 뿐만 아니라(1, 5절) 또한 뇌물 보다 정의를 사모한다고 배웠습니다(2, 4절). 이렇게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버지를 기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7장 11절에서도 성경은 “내 아들아,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내 마음을 기쁘게 하여라 …”(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지혜로운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왜 지혜를 사모하는 자가 아버지를 기쁘게 할까요? 저는 그 이유를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먼저 지혜로운 자녀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미워하기에(8:13)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합니다. (2) 또한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므로(3:1, 3)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합니다. (3) 지혜를 사모하는 자녀는 하나님의 징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기에(3:11-12)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지혜를 사모하는 자들이 되십니다.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아첨 보다 책망을 사모하며 뇌물 보다 정의를 사모합니다. 지혜를 사모하는 자는 창기보다 아버지 하나님을 사모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