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

 

 

 

[잠언 2821-28]

 

 

저는 언젠가 새벽 기도회 때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예수님의 기적에 대한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특히 5-6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했습니다: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예수님과 그 외에 사람들(나사로, 마르다, 마리아)의 시간의 의미가 좀 달랐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사로와 그의 두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시간의 의미는 매우 귀하고 귀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나사로는 병이 들었고 그 병은 결국 죽게 만들었는데 죽기 전까지 나사로에게는 한 시간 한 시간이 매우 귀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의 두 여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장에서도 사랑하는 오빠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었을 때 그녀들에게 시간의 의미는 얼마나 중요하고 귀하고 절박했을까 생각합니다. 그것을 어디서 좀 느낄 수 있는가하면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은지 4일이나 되었을 때(39절) 베다니(1, 18절)로 오신다는 말을 듣고 마중을 나간 마르다가 예수님께 말한 내용에서입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21절). 이 비슷한 내용의 말을 그녀의 동생이 마리아도 예수님께 하였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32절). 이 두 내용의 말을 보면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께서 좀 빨리 오셔서 “여기 계셨더라면” 자기들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마르다와 마리아의 입장에서는 시간이 촉박했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들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알려드린 것입니다(3절).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들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셨습니다(6절). 아니 어떻게 예수님께서는 속히 베다니로 가서 병든 나사로를 치유해 주시지 않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실 수가 있으십니까. 분명히 예수님은 마르다와 마리아와 나사로를 사랑하고 계셨는데(5절) 왜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3절) 나사로가(5절) 병들었다는 사실을 아시면서도(3, 6절) 속히 베다니로 가셔서 그들의 집에 들어가 병든 나사로에게 안수 기도해 주셔서 그의 병을 치유해 주시지 않으셨을까요? 오히려 예수님은 “우리 친구 나사로”(11절)가 죽은 줄을 아시고(11, 14절) 제자들에게 “유대로 다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7절). 왜 예수님께서는 그리하셨을까요? 왜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으셨으면서 머물고 계셨던 곳에 2일을 더 머무셨을까요? 그 이유는 15절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를 위해 내가 거기 없었던 것을 나는 기뻐한다. 이것은 너희가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현대인의 성경).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하여 그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욱더 믿게 하시려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신 것입니다(6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비록 우리에겐 그 “이틀”(6절)이란 시간이 없고, 하루도 기다릴 수 없을 정도로 우리가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믿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비록 우리가 기도하고 기대하던 대로 주님의 역사가 없어 보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아니, 주님의 역사는 커녕 우리의 상황이 더욱더 나빠지고 악화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모든 상황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인 줄 믿어야 합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그 이유는 주님의 마음은 항상 우리를 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15절). 저는 주님이 우리를 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통하여 조금이나마 저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을 깨닫게 될 때에 힘이 났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저와 여러분에게 힘이 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2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이기적인 사람은 재산을 모으는데 급급하지만 가난이 자기에게 밀어닥칠 것을 모르고 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하반절에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는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이 있다고 생각되어 그 말씀 중심으로 오늘 본문을 한 8 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뇌물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21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십시오: “불공평한 처사가 좋은 것이 아닌데도 사람은 빵 한 조각에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개역개정) “사람의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읽었던 책 중에 성자 어거스틴의 “참회록”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저는 어거스틴이 자기가 오래 전에 배가 고파서 빵을 훔친 죄를 크게 여기고 자복하는 내용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저는 그 내용을 읽으면서 속으로 ‘아니 그 빵 하나 훔친 것 가지고 그리도 큰 죄로 여겼을까’라는 식으로 좀 의아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정도는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어떻게 어거스틴은 그의 참회록에서 과거에 빵 한 조각 훔친 것을 그리도 큰 죄로 여기고 고백했을까 생각해 볼 때 저는 그 이유가 ‘하나님의 임재’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므로 자신의 과거의 죄들을 더 크게 깨달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어거스틴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의 크기를 더 깊이, 더 많이 깨닫게 된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오래 전에 원로 목사님을 통해서 들은 사도 바울에 관한 설교 말씀 때문입니다. 그 설교 말씀의 내용은 한 마디로 사도 바울은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가운데 자신의 죄를 더 깊이, 더 많이, 더 뼈저리게 깨달아 더욱더 겸손해 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근거로 원로 목사님에 설교 때 인용하신 사도 바울의 편지 중 성경구절 3개가 있습니다: (1) (고전 15:9)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 (2) (엡 3: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 (3) (딤전 1:15) “… 죄인 중에 괴수니라.”

오늘 본문 잠언 28장 21절을 보면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불공평한 처사가 좋은 것이 아닌데도 사람은 빵 한 조각에 잘못을 저지르고 만다.” 개역개정은 “사람의 낯을 보아 주는 것이 좋지 못하고 한 조각 떡으로 말미암아 사람이 범법하는 것도 그러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러분, “사람의 낯을 보아 주는 것”이란 말이 무슨 뜻이라 생각하십니까? 사람의 낯을 보아주는 불공평한 처사를 우리는 주로 어디서 보나요? 우리는 법정에서 봅니다. 예를 들어, 재판장이 공평하게 재판을 해야 하는데 사람의 낯을 보아주면 그 재판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코 올바른 판결을 내리지 못할(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이 왜 현재 법정에서 일어나는 것인가요? 그 이유는 바로 ‘뇌물’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는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습니다. 그들은 ‘돈이 힘이다’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기적인 목적과 야망을 이루고자 뇌물을 주는 것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그 예가 성경 에스라 4장에 나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유다 땅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려고 했을 때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그 소식을 듣고(1절) 스룹바벨과 그 밖에 유대 지도자들에게 왔습니다(2절). 그들은 스룹바벨과 유대 지도자들에게 자기들도 유다 백성들과 함께 성전을 건축하게 하라고 말했지만(2절) 스룹바벨과 예수아 및 다른 지도자들은 거절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홀로 건축하리라”(3절). 그 때부터 “그 땅에 살고 있던 사람들이 유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성전 공사를 방해하”였습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성전 건축을 방해한 방법 중에 하나가 바로 “뇌물”이었습니다(5절). 유다의 대적자들은 “바사와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성전건축) 계획을 막았”습니다(5절). 성경 느혜미야 6장에서도 유다 백성들의 대적자들인 도비야와 산발랏은 스마야에게 뇌물을 줘서 느헤미야에게 (거짓된) 예언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 예언의 내용은 “그들이 너를 죽이러 올 터이니 우리가 하나님의 전으로 가서 외소 안에 머물고 그 문을 닫자 저들이 반드시 밤에 와서 너를 죽이리라”[(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성소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숨어 있어야겠습니다. 틀림없이 그들이 밤에 와서 당신을 죽일 것입니다”]는 것이었습니다(10절). 그 말을 들은 느헤미야는 스마야에게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총독인 내가 어떻게 달아날 수 있으며 나 같은 사람이 목숨을 구하겠다고 어떻게 성소에 들어가 숨을 수 있겠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겠소”(11절, 현대인의 성경). 느헤미야는 그 때 스마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미야와 산발랏에게 뇌물을 받고 자기에게 이런 예언을 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왜 유다 백성들을 대적한 도비야와 산발랏이 스마야에게 뇌물을 줘서 그리 거짓 예언을 한 것입니까? 성경 느헤미야 6장 13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뇌물을 준 까닭은 나를 두렵게 하고 이렇게 함으로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나를 비방하려 함이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스마야를 매수하여 나를 위협한 것은 그 일로 나를 범죄하게 하여 내 이름을 더럽히고 나를 비방하기 위해서였다”]. 결국 뇌물을 준 목적은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인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케 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유다 백성들의 재판관이 뇌물을 받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면 결코 그 재판관은 공의와 정의를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구약 시대 때 유다 백성들의 지도자들이나 재판관들은 뇌물을 받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현대인의 성경) “너의 지도자들은 반역자요, 도둑들과 한패이며 하나같이 뇌물과 선물받기를 좋아하고 고아와 과부의 억울한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는구나”](사1:23),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현대인의 성경) “모두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하여 관리들과 재판관들은 뇌물을 요구하고 부자들은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그들과 결탁한다”](미7:3). 그 결과 뇌물을 받은 재판관은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에게서 그 공의를 빼앗”았습니다(사5:23). 다시 말하면, 그는 무죄한 의인을 해하였습니다(시15:5). 이렇게 뇌물을 받는 재판관은 판결을 굽게하였으며(삼상8:3) 그러한 잘못된 판결로 말미암아 억울하게 (암5:12)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을 당하는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재판장의 잘못된 판결이 얼마나 불공평하게 생각되겠습니까(잠28:21). 그래서 성경 잠언 18장 5절을 보면 “악인을 두둔하는 것과 재판할 때에 의인을 억울하게 하는 것이 선하지 아니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재판석에서 악인을 옹호하고 의로운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뇌물은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출 23:8, 신 16:19, 삼상 12:3) 우리의 마음을 부패하게 하여(전 7:7,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만들므로(겔 22:12) 우리의 판단력을 굽힙니다(삼상 8:3). 그 결과 뇌물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낯을 보아 주는 좋지 못한 일을 하게 만들고 또한 잘못을 저지르게 만듭니다(잠 28:21). 뇌물은 우리로 하여금 그릇된 길로 가게 합니다(욥 36:18). 그러므로 우리는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신 10:17, 대하 19:7)을 본받아 우리는 뇌물을 받지 말고 사람의 낮을 보아 줘서는 아니 됩니다(잠 28:21).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빵 한 조각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정도로 뇌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느 6:13). 그러므로 우리는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탐심을 품은 사람은 가난이 자기에게 밀어닥치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크리스마스 동화인 “구두쇠 스크루지” 할아버지 아시죠?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쓴 이 동화 이야기의 내용은 인정이라곤 손톱 끝만치도 없는 수전노인 주인공 스크루지가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같이 사업을 하던 동업자 말리의 유령을 만나 자기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고서는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사람다운 마음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인터넷). 저는 어릴 때 이 동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구두쇠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을 배웠을 텐데 저는 이 동화 이야기보다 더 어릴 때인 국민(초등) 학교 때 들은 “흥부와 놀부”란 동화 이야기가 더 잘 생각이 납니다. 저는 그 때 그 어린 나이에 이 동화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흥부처럼 착한 사람이 되어야지 욕심 많은 놀부처럼 되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세월이 많이 지나서 제 삶을 뒤돌아 볼 때 어릴 때 배운 교훈대로 제가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볼 때 오히려 정반대로 욕심 많은 놀부처럼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적어도 구두쇠 스크루지 할아버지는 나중에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사람다운 마음을 찾게 되었는데 저는 아직도 제 마음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어서 제 자신과 싸우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제 안에 있는 “탐심”과 싸우고 있습니다. 성경 사무엘하 12장 14절 말씀에서 주신 깨달음처럼 탐심은 간음과 살인과 도둑질을 하게 만들어 하나님의 원수가 크게 비방할 거리를 얻게 한다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경계해야 함을 다시금 생각하게 됩니다. 안 그래도 지금도 교회와 교계의 지도자들이 탐심을 품어 하나님 보다 물질이나 명예나 여자를 더 사랑하므로 하나님께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고 있는데(미가1:7, 2:2, 골3:5) 어떻게 해야 이 탐심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기도하며 말씀 중심으로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0장 33-35절에서 주신 교훈은 제가 탐심의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선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2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재산을 모으는데 급급하지만 가난이 자기에게 밀어닥칠 것을 모르고 있다”(현대인의 성경)[(개역개정)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 성경은 “악한 눈이 있는 자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하고 빈궁이 자기에게로 임할 줄은 알지 못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악한 눈”은 ‘탐심을 품은 자의 눈’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즉, 탐심을 품은 자의 눈은 악하다는 것입니다(22절). 이렇게 악한 눈을 가지고 있는 탐심을 품은 이기적인 사람은 오늘 본문 22절을 보면 재산을 모으는데 급급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급급하다’는 말은 악한 눈을 가지고 있는 탐심을 품은 자는 “속히 부하고자” 한다는 말(20절) 또는 부자가 되려고 서두른다는 말입니다(20절, 현대인의 성경). 성경 잠언 28장 20절을 보십시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현대인의 성경) “성실한 사람은 풍성한 복을 받아도 부자가 되려고 서두르는 사람은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여러분, 이렇게 탐심을 품은 이기적인 사람이 속히 부하고자 하면 그는 올바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부하고자 하기보다 옳지 않은 방법으로 부하고자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옳지 않은 방법은 바로 ‘속임수’(거짓말)와 ‘강포’(폭력) 라고 잠언 21장 6-7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 악인의 강포는 자기를 소멸하나니 이는 정의를 행하기 싫어함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속여서 얻은 재물은 사라지는 안개와 같고 죽음의 덫과 같다 악인은 자기가 쓴 폭력에 자기가 망한다. 이것은 악인이 옳은 일을 거절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속히 부하고자 속임수와 강포를 사용하여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안개와 같고 죽음의 덫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들은 악인이요 이러한 악인은 “옳은 일을 거절”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1:7, 현대인의 성경). 그러기에 그들은 옳지 않는 방법인 속임수나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재물을 모으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그 결과는 바로 “빈궁”(가난)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속히 부하고자 하는 탐심을 품은 자들은 빈궁(가난)이 자기들에게 임할(밀어닥칠) 줄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28:22하). 그들은 처음에는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는데 성공하는 것같이 보여 자신들이 소득이 자신들의 마음의 소원보다 많고(시73:7) 자신들의 재산은 날로 늘어만 가고 언제나 편안한 생활을 합니다(12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시편 73편을 쓴 시편 기자 아삽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 그 악인들의 종말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종말은 무엇입니까? 성경 시편 73편 18-2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참으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시며 파멸에 던지시니 그들이 어찌하여 그리 갑자기 황폐되었는가 놀랄 정도로 그들은 전멸하였나이다 주여 사람이 깬 후에는 꿈을 무시함 같이 주께서 깨신 후에는 그들의 형상을 멸시하시리이다”[(현대인의 성경) “주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셔서 파멸에 밀어 넣으시므로 그들이 순식간에 멸망하여 끔찍한 종말에 이릅니다. 그들은 아침이 되면 사라지는 꿈과 같은 자들 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일어나시면 그들이 꿈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 디모데전서 6장 9-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현대인의 성경)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시험과 함정에 빠지고 사람을 파멸시키는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에 떨어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온갖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가지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처럼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눅 16:14). 우리는 돈을 사랑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돈을 사랑하므로 돈을 탐내면 우리는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돈을 이 땅에 쌓아두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성경 마태복음 6장 19절 하반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듯이 이 땅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 우리가 돈이나 재물을 쌓아두면 둘 중에 하나라는 말입니다. 그 모든 돈이나 재물이 다 해하여 지던지 아니면 도둑이 훔쳐가던지 이 둘 중에 하나입니다(MacDonald). 한 마디로, 왜 우리가 이 땅에 돈이나 재물을 쌓아두지 말아야 하냐면 다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5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 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우리는 이 말세에 이 땅에 재물을 쌓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보물을 하늘에 쌓아둬야 합니다(마 6:20). 그 방법을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은 방법은, 땅에서 나의 모든 좋은 것들(물질 뿐 아니라 노력과 재능과 그 밖에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하여 희생함이다”(박윤선).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서 이 땅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의 가진 것들을 주님을 위하여 희생해야 합니다. 우리의 물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시간과 몸과 가족 등 모든 것에 주님을 최우선순위로 모시고 주님과 주님의 교회와 복음 사역을 위해서 희생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이웃을 사랑함에 있어서 우리의 것을 나눠야 합니다(눅 18:22). 바로 이것이 하늘에 우리의 보화를 쌓아놓는 것입니다(22절).

 

셋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사람을 경책하는 것이 혀로 아첨하는 것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사랑하는 누군가가 여러분의 잘못을 지적하면 기분이 어떠할 것 같습니까?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대학을 다닐 때 몇몇 선배님들과 어느 목사님을 모시고 제자 훈련을 받았었는데 그 때 그 목사님이 저에게 ‘제임스는 아직도 혈기가 많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을 때 좀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저 또한 대학 다닐 때 사랑하는 후배에게 ‘너는 교만하다’라는 말을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그 때 그 말을 들은 그 형제의 마음과 기분은 어땠을까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잠언 27장 5절 말씀을 어려워합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그 성경 말씀을 대할 때마다 고민이 됩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Better is open rebuke than hidden love). 현대인의 성경은 “맞대 놓고 책망하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라고 번역하였는데 저는 누군가를 맞대 놓고 책망을 잘못하겠습니다. 저는 그 이유가 제 성격상 그리 못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제가 상대방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책망할 정도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곤 합니다. 저는 숨은 사랑도 제대로 못하는 저로서는 그보다 나은 사랑의 면책은 더욱더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고민이 되고 또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특히 목회 가운데 제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 떼 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으로 면책했어야 했을 때 하지 않았던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맞대 놓고 책망한 사람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저는 다윗 왕을 맞대놓고 책망한 나단 선지자가 생각납니다(삼하 11장).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성경 이야기는 다윗 왕이 우리아의 처 밧세바와 동침하여 아기가 잉태한 것을 알고 죄를 덮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결국 자기의 충선된 군인 우리아까지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합니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기에(27절)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한 성에 있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죄를 면책하십니다(12:1-4). 그 때 다윗은 크게 노하여 나단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말하였습니다(5절). 죄를 덮고 덮으려다가 자기 양심마저 덮어버려서 그랬던 것인지 다윗은 자기가 그 “마땅히 죽을 자”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면책했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7절). 이 얼마나 충격적인 면책입니까? 다윗 자신은 분명히 자기 자신은 그 “마땅히 죽을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 텐데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면책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가 내가 행한 일들이 죄라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들춰내실 때 우리의 양심은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8장 23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결국 아첨하는 자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는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어떠한 자인지를 질문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경책하는 자”(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인지 아니면 “혀로 아첨하는 자”(아첨하는 자)인지 둘 중에 어떠한 사람인지를 우리 각자에게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어떠한 사람입니까? 이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사람을 경책하는 자”(잘못을 지적해 주는 사람)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을 경책하는 자가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23절하). 그런데 실제로 우리의 본능은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기보다 지금 사랑을 더욱 받고 싶어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상대방에게 더욱 사랑을 받는 방법은 우리가 그 상대방의 잘못을 정신 차리도록 꾸짖기(경책) 보다 그 사람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아부하는 것(아첨)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직장에서 우리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그러는 것 같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우리의 상관이 잘못한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사랑하는 경책하기보다 오히려 우리의 혀로 아첨하기까지 하는 경우를 보지 않나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경책(책망)하기보다 그냥 덮어주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 제가 그리하는 제일 큰 이유는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 싫어서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유는 제가 그 사람을 책망하므로 우리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고 끊어질까바 두려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러한 두려움 안에는 어쩌면 그 사람이 저를 싫어할까봐 하는 염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그냥 덮어주고 넘어갈 때에 제 변명은 잠언 17장 9절이 될 수 있지 않을까도 생각합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현대인의 성경) “허물을 덮어 주는 사람은 사랑을 추구하는 자이며 그것을 거듭 말하는 사람은 친한 친구를 이간하는 자이다”]. 분명히 성경은 “허물을 덮어주는 사람은 사랑을 추구하는 자이”다(17:9)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동시에 성경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27:5)고 말씀하고 있으니까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인지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의 허물을 덮어줘야 하나요 아니면 면책해야 하는 것인가요?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떤 때에 허물을 덮어줘야 하며 어떤 때에 사랑으로 면책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은 상대방의 허물을 거듭 말하므로 친한 벗을 이간하지 않기 위해서 사랑을 구하는 자는 허물을 덮어줘야 하지만(17:9) 그 허물이 거듭 행해지되 심각한 죄의 결과까지 가지 않도록 적절한 타이밍에 사랑으로 면책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27:5).

 

성경 잠언 27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친구는 상처를 주어도 신실한 우정의 표현이지만 원수는 입을 맞춰도 조심해야 한다”]. 성경은 “숨은 사랑보다 맞대 놓고 책망하는 것이 더 낫다”(5절, 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면서 그 이유는 비록 친구가 우리를 맞대 놓고 책망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는 상처가 되겠지만 그 상처는 신뢰할 만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절). 성경은 이것이 원수의 거짓된 입맞춤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원수는 우리를 미워하기에 거짓된 입맞춤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무너트리고자 하는 반면에 친구는 우리는 사랑하기에 진실 된 면책으로 우리를 세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도서 7장 5절에도 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우매자의 노래”는 바로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성경은 우리에게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해야 합니까? 우리가 우매자의 노래, 즉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그 위로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6절). 여러분,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우매자의 노래가 아니라 바로 지혜자의 책망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혜자의 채찍질이 미련한 자의 칭찬(격려)보다 더 낫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 시편 118편 18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심히 경책하셨어도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도다.” 얼마나 심하게 하나님께 경책을 받았기에 그는 “죽음에는 넘기지 아니하셨다”라고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이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를 반드시 경책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3:9). 그리고 사도 바울도 그의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너는 …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말한 것을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경책해야 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다. 사람을 경책하는 것이 혀로 아첨하는 것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넷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강도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부모님의 물건을 도둑질한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있습니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제가 국민(초등)학교 때 어머님은 동전이 들어 있는 돈지갑을 교회 사택 부엌 찬장 안에 넣어 두셨습니다. 그런데 그 부엌이 좀 깊이 파여 있었고 찬장은 좀 높은데 있어서 제가 그 찬장 윗부분의 문을 열어서 그 안에서 어머님의 지갑을 꺼내 동전을 훔치는 것은 쉽지가 않았습니다 ㅋㅋ. 지금 생각하면 그 때 제가 거의 스파이더 맨(spider man)처럼 제 몸을 찬장에 달라붙어서 살며시 찬장 끝으로 가서 그 윗부분 문을 열어 돈을 가지고 간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아마 제가 100원 동전을 하나를 훔쳤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앞길에 있는 구멍가게에서 100원짜리 소라(과자)를 매우 사먹고 싶어서 그랬을 것입니다. ㅎㅎ 저는 이렇게 부모님의 돈을 훔치는 것이 당연히 도둑질이지만 이 외에 우리가 부모님에게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는 것도 도둑질이란 생각이 듭니다. 성경 마태복음 15장 5-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으로서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였는가 하면 분명히 하나님의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였는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부모님에게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은 하나님께 드렸다고만 하면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가르침대로 하나님께 헌금을 했다고만 하면 부모님에게 용돈을 드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부모님의 것을 우리가 도둑질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성경 잠언 28장 24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 받게 하는 자의 동류니라”[(현대인의 성경) “부모의 것을 도둑질하고서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강도와 다를 것이 없다”]. 여러분, 왜 성경은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십계명 중에 열 번째 계명처럼 이웃의 물건을 탐해서 그것을 도둑질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고 왜 성경은 하필이면 부모님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쩌면 그 이유는 성경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 말씀대로 부모님을 공경하며 효를 행하기보다 오히려 부모님의 물건을 도둑질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unthinkable) 죄를 범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오늘 본문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재물을 얻기에만 급한 “악한 눈이 있는 자”, 즉 탐심을 품은 자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2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욕심이 많은 자”는 심지어 부모님하고도 다툼을 일으키면서까지 부모님의 재물을 욕심내서 훔치는 도둑질을 충분히 할 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부모님의 물건을 도둑질한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는 자가 바로 강도요 그러한 강도가 충분히 가정에도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왜 자식이 부모의 물건을 훔치고도 도둑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왜 자식이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그 도둑질을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잠언 14장 8-9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슬기로운 사람이 지혜로운 것은 자기 앞 길을 알기 때문이며 미련한 자가 어리석은 것은 속이기 때문이다. 미련한 사람은 죄를 대단치 않게 생각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죄를 두렵게 여긴다”]. 이 말씀을 보면 자식이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그는 자신의 죄를 심상히 않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14:9). 그리고 그가 자신의 죄를 대단치 않게 여기고 있는 이유는 그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8절, 약 1:22).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원인은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잠 14:7). 그리고 우리가 지식이 없는 원인은 우리가 거만하기 때문입니다(6절). 우리가 거만한 원인은 우리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3절). 그리고 우리가 교만한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2절). 결국 제가 어릴 때 부모님의 돈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은 제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고 있었던 사람이 성경에도 나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사사기 17장에 나오는 “미가”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어머니의 은 1,000을 훔쳤습니다(삿 17:2). 그런데 자기 어머니가 은 1,000을 훔쳐간 사람을 저주하는 소리를 듣고 자기가 그 은을 훔쳤다고 어머니에게 말하고 그 은 1,000을 자신의 어머니에게 돌려줬습니다(2-3절). 그런데 미가의 어머니는 자기 아들 미가의 말을 듣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3절). 콩가루 집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자식이 어머니의 돈을 도둑질하고 또한 그 도둑질한 돈을 다시 어머니에게 돌려드렸을 때 그 어머니는 자식의 죄를 사랑으로 면책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돈을 사용하여 자기 자식을 위한답시고 신상(우상)을 만들어 줍니까. 자식이나 어머니이나 그들은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을 경멸히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잠 14:2).

 

우리는 우리가 범하는 도둑질 등 모든 죄를 심상히 여기면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죄를 심각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는 자신이 범한 죄를 심상히 여기지만(잠14:2, 9)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여깁니다.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하지 않고 부모님에게 드려야 할 것을 드리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드렸다고만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죄입니다. 어느 면으로 생각하면 그것은 부모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입술로만 부모님을 공경해서는 아니 됩니다(마 15:8). 우리는 마음으로 부모님을 공경해야 합니다. 마음으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는 부모님의 유익을 위하여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기쁜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립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을 즐겁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잠 23:25).

 

다섯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욕심을 다툼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인간관계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성경 야고보서 4장 1-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너희는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므로 다투고 싸우는도다 ….” 성경은 우리가 다투는 원인이 “싸우는 정욕” 때문이요 우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여” 다투고 싸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안에 싸우는 정욕과 우리가 욕심을 내므로 다투고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안에 욕심이 있으면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 전도서 1장 8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 하는도다.” 눈이나 귀가 보고 또한 들어도 족함이 없다는 이 말씀은 마치 바다가 언제나 흘려오는 물로 차지 못함 같이(7절) 사람의 욕심도 만족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박윤선). 참으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가 봅니다. 그 끝없는 욕심을 만족시키고자 이 헛된 세상에서 이것저것을 추구해 보지만 결국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전도서를 쓴 솔로몬 왕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전도서 2장 10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했습니다. 그는 보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누려보았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10절). 그런데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절). 우리 안에 욕심이 있으면 오히려 우리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불만족 속에서 불평하며 원망하는 죄를 범하게 됩니다. 불만족은 우리로 하여금 불평하게 만듭니다. 왜 우리는 불만족하며 불평하는 것입니까? 그 원인은 욕심입니다. 이렇게 욕심이란 무섭고 참 위험합니다. 그러나 만족과 자족은 우리로 하여금 감사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에는 평강이 넘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넉넉한 마음입니다.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은 욕심을 내지 않습니다. 아니 낼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모든 영적 축복들을 세면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도 바울처럼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궁핍함이나 풍부함을 경험하는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불만족 속에서 불평하는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2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욕심이 많은 사람은 다툼을 일으켜도 여호와를 신뢰하는 사람은 부유하게 된다”]. 성경은 “욕심이 많은 자”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를 대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욕심이 많은 자”를 생각할 때 이 욕심이 많은 자는 우리가 이미 묵상한 2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악한 눈이 있는 자”(탐심의 눈을 가진 자)와 연관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욕심이 많은 자가 다툼을 일으키는 이유는 자신의 탐심 속에서 재산을 모으는데 급급하기 때문에(22절)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과 다투기가 쉽기 때문입니다(25절). 이러한 욕심이 많은 사람은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아첨까지 해가면서(23절)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부모하고도 다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욕심이 많은 사람은 24절 말씀처럼 자신의 부모의 것도 도둑질하는 양심이 마비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24절). 그만큼 사람의 욕심이란 양심도 마비시켜도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모의 물건까지 훔치기에 그 과정 속에서 충분히 부모와 다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욕심은 우리에게 해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는 이유는 이미 우리에게 있는 것을 족한 줄 모르는 자족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기에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마음으로는 모르기 때문입니다(전5:15). 그러기에 욕심이 많은 사람은 탐심 속에서 돈을 사랑하여 부하려고 합니다(딤전 6:6-10).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다른 사람과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잠 28:25). 성경 창세기 16장을 보면 한 여자의 욕심이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자기의 남편을 움직여 하나님 보시기에 그가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하게 만드는 이야기 나옵니다. 그 이야기는 바로 아브람과 사래의 이야기 입니다. 사래는 출산하지 못하므로(창 16:1) 자기 남편인 아브람에게 “여호와께서 나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시니 당신은 내 여종과 함께 잠자리에 드세요 아마 내가 그녀를 통해서 자식을 얻을 수 있을거예요”라고 하였습니다(2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그녀의 남편인 아브람은 사래의 말을 따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오히려 그는 사래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처럼 이삭을 주실 것을 믿고 그녀를 사랑으로 책망하고 지도했어야 했는데 아브람은 그녀의 지도를 받아 그녀의 여종인 하갈과 동참하였습니다(4절). 그 결과 하갈이 임심하므로 교만하여 자기 여주인이 사래를 무시하고 멸시하였습니다(4절). 그리고 사래는 남편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은 당신의 잘못입니다. 내가 내 여종을 당신의 첩으로 주었는데 그녀가 임신한 것을 알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 바랍니다”(5절, 현대인의 성경). 좀 웃기지 않습니까? 사래는 자기가 남편 아브람에게 자기의 여종인 하갈하고 동침하라고 했으면서 자기 말대로 한 아브람에게 “당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게 좀 웃기지 않습니까? 이렇게 사래의 욕심은 자기 남편까지 자기의 욕심을 만족케 하는 도구로 사용하지만 그 결과는 하갈이 사래를 멸시하고 사래는 자기 남편인 아브람에게 “당신의 잘못”이라고 말하는 다투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는 욕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욕심은 다툼을 일으키므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욕심은 불행의 지름길이기에 우리는 욕심을 경계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오늘 본문 잠언 28장 25절 하반절 말씀처럼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신뢰하는 사람)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누가복음 5장에 나오는 시몬 베드로 입니다. 예수님께서 게네사렛 호숫가에서(1절)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앉으사 배에서(3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온 많은 사람들을(1절, 현대인의 성경) 가르치셨습니다(3절). 말씀을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4절). 안 그래도 밤새도록 애써봤지만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시몬 베드로는(5절) 자기 배에서 나와서 이미 그물을 씻었을 텐데도 불구하고(2절) 예수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므로 그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5절).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4절). 그 결과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습니다(6절, 현대인의 성경). 결국 시몬 베드로는 주님의 의지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풍족하게 된 것입니다(잠 28:25). 바라기는 모든 욕심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의지하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풍족한 은혜를 누리는 여러분과 제가 되길 기원합니다.

 

여섯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고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살면서 ‘나는 다른 사람은 절대 안 믿어. 나는 나 자신만 믿어’라고 말하는 사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고등학교 때 친구 중 하나가 저에게 자기는 무신론자라고 말하면서 자기는 아무 신도 믿지 않고, 어느 누구도 믿지 않으며 오직 자기 자신만 믿는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저는 그 때만해도 신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는 것에 대해 무신론자가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학교에 가서 로마서 1장 말씀에 관한 죤 칼빈에 해석을 공부하다가 칼빈의 관점대로 이 세상엔 무신론자가 있을 수 없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근거는 바로 로마서 1장 19-21절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현대인의 성경)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 대하여 알 만한 것을 그들에게 나타내셔서 그것이 그들에게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때부터 보이지 않는 그의 속성,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을 통해 분명히 나타나서 알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서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생각은 쓸모없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속성, 곧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만물을 통해 분명히 보여 알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고 감사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여러분 생각엔 우리가 이렇게 “미련한 마음”을 믿을 수 있나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믿는 것도 힘든 일이겠지만 우리 자신의 마음을 믿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성경 잠언 28장 25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 마음에는 욕심(탐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욕심이 우리 마음에 있으므로 우리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재산을 모으는데 급급합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러한 자는 심지어 자기 부모의 물건까지도 도둑질하기까지 합니다(24절). 한 마디로, 우리의 마음을 믿을 수 없는 이유는 우리의 마음은 “그 무엇보다도 거짓되고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렘17:9,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얼마나 사람의 마음이 거짓되고 부패한가요?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7장 20-2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거기서부터 악한 생각, 음란, 도둑질, 살인, 간음, 지나친 욕심, 악독, 속임수, 방탕, 시기, 중상모략,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것들이 다 속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또한 성경 창세기 6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여러분, 이러한 마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 잠언 28장 26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자니라”[(현대인의 성경)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은 미련한 자이지만 지혜롭게 처신하는 사람은 안전할 것이다”]. 성경은 “자기의 마음을 믿는 자는 미련한 자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것 아닌가요? “미련한 마음”(롬1:21)을 믿는 자는 당연히 “미련한 자”가 아닌가요?(잠 28:26) 성경은 미련한 자의 미련한 마음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어리석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1:22). 그래서 어리석은 그들은 “영원히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오히려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23절). 또한 어리석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깁니다(25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부패한 마음으로 악한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28절,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자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사 5:21).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3:7).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아야 합니다(롬 12:16).

 

오히려 성경 잠언 28장 26절 하반절은 우리에게 “지혜롭게 행하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귀를 기울여 지혜 있는 자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22:17).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 마음에 보존해야 합니다(18절).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19절). 그래서 성경 잠언 3장 5-6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7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로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여기서 지혜롭게 행한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는 것입니다(7절).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진리를 사랑할 때(3:3) 우리는 미움과 거짓을 떠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기 여기는 악을 떠날 수 있습니다(7절). 여러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그 분을 범사에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뢰하고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의 헛된 믿음입니다(14:16). 그리고 스스로 자기 자신이 지혜롭다고 믿는 이러한 헛된 믿음의 원인은 높은데 마음을 둔 교만입니다(롬 12:16). 왜 우리가 높은데 마음을 둡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높으신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친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잠 3:7) 또한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합니다(롬 12:16). 이러한 교만함에 우리가 빠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으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 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나 우준하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롬 1:21-22).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낮은데 마음을 둬야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는 겸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 겸손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를 하나님께서 들어 일으켜 높이 사용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왜 성경은 우리에게 지혜롭게 행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지혜롭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잠 28:26). 현대인의 성경으로 말한다면, 우리가 지혜롭게 행해야 하는 이유는 지혜롭게 처신하는 사람은 안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게 살 것입니다(1:33). 또한 지혜로운 자는 견고한 망대가 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여(29:25) 하나님께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습니다(18:10). 이러한 안전함이 여러분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지혜롭게 행하여 하나님의 구원(건지심)과 안전함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일곱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상대적 빈곤”(relative poverty)란 말을 들어 보셨나요? 빈곤에는 두 종류의 빈곤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절대적 빈곤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대적 빈곤이라고 합니다. 절대적 빈곤은 “개인 및 가족이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 및 기타 생활상 필요한 자원이 결핍되어 육체적인 능률을 유지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상대적 빈곤이란 “사회의 평균 또는 일정 생활수준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적게 가지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인터넷). 저는 여태껏 “빈곤”하면 절대적 빈곤의 개념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언젠가 한인 라디오 방송을 통해서 지금 제가 살고 있는 이 남가주 캘리포니아에는 상대적 빈곤의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뉴스였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때 들은 뉴스의 내용 중 저에겐 좀 충격이었던 것은 한 달에 3, 4천불을 벌어도 한 달에 쓰는 비용이 예를 들어 5천불이라면 그 사람은 상대적 빈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뉴스 내용이 저에게 좀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절대적 빈곤의 개념밖에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 달에 3, 4천불을 버는데도 빈곤이라고 하니까 좀 놀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후로부터 점점 더 뉴스를 통해서나 사람들을 통해서 여기 캘리포니아에 물가가 너무 비싸고 특히 아파트 렌트비랑 너무 비싼데 인건비는 오르지 그만큼 오르지 않다보니 계속해서 매달 마이너스가 되다보면 상대적 빈곤 속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난한 자”에 대한 교훈은 우리가 이미 잠언을 묵상해 오면서 계속해서 배워오고 있었습니다. 제일 근래에 배운 교훈은 바로 잠언 28장 18절 말씀이었습니다: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 이 말씀의 원어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순전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이중으로 속이는 자는 한번 넘어지히라”입니다(박윤선). 이중으로 속이는 자는 어떠한 자입니까? 그 좋은 예가 바로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8장 6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 [“거짓된 부자”(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원어 히브리어의 개역하면 “두 길로 속이는 부자”입니다(박윤선). 두 길로 속이는 부자는 어떠한 자입니까? 겉으로는 선한 길을 가는 체 하지만 실제로는 악한 길로 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박윤선). 이렇게 두 길로 행하는 부유한 자가 행하는 악한 길 중에 하나는 바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입니다(3절). 학대하되 좀 더 구체적인 예는 야고보서 2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며 법정으로 끌어가는 사람들은 부자들이 아닙니까?”(현대인의 성경). 두 길로 행하는 부유한 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함에 있어서 그들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을 괴롭히며 또한 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기까지 하여 해를 입힙니다.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행을 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보지 않은 뒤에서는 이렇게 가난한 자들을 (교묘하게) 학대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와 보지 않은 뒤에서의 불일치된 행함으로 인하여 두 길로 속이는 부자들은 재물을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물을 모으되 잘 모으는 것 같이 보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2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하려니와 못 본 체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크리라”[(현대인의 성경) “가난한 자를 보살피는 사람은 부족한 것이 없어도 가난한 자를 못 본 체하는 사람은 많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묵상한 잠언 말씀을 보면 성경은 “가난한 자”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 (14:31)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2) (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 (3) (21:13) “귀를 막고 가난한 자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가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4) (22:16) “이익을 얻으려고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자와 부자에게 주는 자는 가난하여질 뿐이니라.” 이 말씀들을 보면 가난한 자를 학대하든지 조롱하면 가난한 자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요, 가난하여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잠언 28장 27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가난한 자를 못 본 체하는 사람은 많은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가난한 자를 못 본 체한다’는 말씀은 가난한 자의 필요한 것들에 대하여 아무 반응을 하지 않는 것을 가리킵니다(MacArthur). 성경 잠언 14장 31절 하반절(현대인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이다.” 성경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존경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오늘 본문 잠언 28장 27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난한 자를 못 본 체하는 자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않는 자요 하나님을 존경하지 않는 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한 눈을 가진 자”(22:9)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행을 갚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9:17). 이러한 선한 눈을 가진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2:9).

 

성경 요한일서 3장 17-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현대인의 성경)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가난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겠습니까? 자녀들이여,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합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 가난한 형제, 자매를 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로 그 지체를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말로만 아무개 형제, 아무개 자매가 힘들다고 다른 사람에게 얘기하는데도 끝나면 아니 될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우리 가난한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 합니다. 성경 잠언 11장 2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현대인의 성경) “남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써도 더욱 부유해지는 자가 있고 지나치게 아껴도 여전히 가난한 자가 있다”].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28:27) 오히려 더욱 부하게 된다는 성경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 가난한 자를 보았으면 못 본 체하지 말고 오히려 다가가서 구제하고 도와주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여덟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악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사람들이 숨어 살지만 그가 망하면 의로운 자들이 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작년 2017년 11월 7일 오후에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24년 만에 미국 대통령으로 한국 국회당에서 550여명이 되는 한국 여야 의원들과 주한 외교 사절 등 앞에서 연설을 하였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약 35분 동안의 연설은 거의 대부분을 북한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그 중에 24분가량은 북한 체제를 규탄하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6. 25. 전쟁과 한.미 동맹사를 언급하는 것으로 시작해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에게 경고까지 보냈습니다(인터넷). 연설 후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에 대한 외신들의 평가가 있었는데 그 평가 중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또한 북한 인권 상황을 문대통령이 아니라 동맹국인 미국 대통령의 입으로 북한 인민들의 고통과 참혹한 실상을 소개함으로서 한국민들의 반공교육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저는 그 “북한 인민들의 고통과 참혹한 실상”을 다시금 보고자 트럼프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다시금 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인터넷): “북한노동자들은 끔찍하게 긴 시간을 견디기 힘든 조건에서 무보수로 일합니다. 최근에는 전 노동 인구에게 70일 연속 노동을 하든지 아니면 하루치 휴식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가족들은 배관도 갖춰지지 않은 집에서 생활하고 전기를 쓰는 가정은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부모들은 교사에게 촌지를 건네며 자녀들이 강제노역에서 규제될 거란 희망을 갖습니다. 100만 이상의 북한주민들이 1990년대 기근으로 사망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기하로 계속 목숨을 잃고 있습니다. 5세 미만 영유아 중 거의 30%가 영양실조로 인한 발육부진에 시달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2년과 2013년 북한 체제는 2억 달러로 추정되는 돈, 즉 주민들의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배분한 액수의 절반에 가까운 금액을, 대신 더 많은 기념비, 탑, 동상을 건립해서 독재자를 우상화하는 데 썼습니다. 북한경제가 걷어 들이는 미미한 수확은 비뚤어진 체제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배분됩니다. 주민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여기기는커녕 이 잔혹한 독재자는 주민들을 저울질하고 점수 매기고 국가에 대한 이들 충성도를 너무나도 자위적으로 평가해서 이들에게 등급을 매깁니다. 충성도에서 높은 점수를 딴 사람들은 수도인 평양에 거주할 수 있습니다. 점수가 가장 낮은 사람들은 먼저 아사합니다. 한사람의 작은 위반, 예를 들면 버려진 신문지에 인쇄된 독재자 사진에 얼룩을 실수로 묻히거나하면 이것이 그 사람의 가족 전체 사회 신용등급에 수십 년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0만으로 추정되는 북한주민들이 노동수용소에서 강제노역을 하고 고문과 기아, 강간, 살인을 견뎌내며 고통 받고 있습니다. 알려진 한 사례에서는 한 9살 소년이 10년간 수감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이것은 이 아이의 조부가 반역죄로 고발당했다는 이유였습니다. 또 한 가지 사례에서는 한 학생이 김정은 삶에 대한 세부사항 하나를 잊었다는 이유로 학교에서 구타를 당했습니다. 군인들은 외국인을 납치해서 이들을 북한 첩보원의 어학교사로 일하게 만듭니다. 전쟁 전에 기독교의 근거지였던 곳이었지만 이제는 기독교인들과 다른 기타 종교인들 중 기도를 하거나 종교를 보유했다 적발되면 억류와 고문 그리고 대부분 경우에 처형까지도 감수해야 합니다. 북한 여성들은 인종적으로 열외에 있다고 간주되는 태아를 강제로 낙태시켜야 합니다. 이 아이들이 출산하면 아이들은 신생아 때 살해됩니다. 중국인 아버지를 둔 한 아기는 바구니에 담긴 채 끌려갔습니다. 경비대는 이 아이의 피가 불순해서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왜 중국을 도와야겠다는 의무감을 느껴야 합니까? 북한 생활이 너무나 끔찍하기 때문에 주민들은 정부 관료에게 뇌물을 주고 해외 노예로 팔려간다고 합니다. 차라리 노예가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도망을 치고자 시도하게 되면 사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가 됩니다. 탈출에 성공한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에 더 가까웠다. 북한을 떠나고 나서야 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고 말입니다.”

 

성경 잠언 28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자가 승리하면 모든 사람이 기뻐하지만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은 숨어 살기 마련이다”]. 지금 북한이 그렇지 않습니까? 악인이 권력을 잡았기에 북한 백성들이 숨어 살고 있는 게 아닌가요? 성경 잠언 29장 2절은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이 즐거워하지만 악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이 탄식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금 악인이 권세를 잡은 북한이나 시리아 같은 나라의 백성들은 탄식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28장 28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고 그가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지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악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이 숨어 살지만 그가 망하면 의로운 자들이 번성한다”]. 우리는 이미 비슷한 말씀인 잠언 28장 12절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자가 승리하면 모든 사람이 기뻐하지만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은 숨어 살기 마련이다”]. 먼저 의인에 관한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쓰시므로 의인들이 기뻐하되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크게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박윤선). 특히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지도자들을 의인들로 세우시사 그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실 때 그 나라에는 질서와 공의가 있기에 시민들이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Walvoord). 성경 잠언 11장 10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사람이 잘되면 온 시민이 즐거워하고 …”]. 그러나 악인이 일어나면, 즉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사람들이 숨어 살기 마련입니다(28:12하, 28상). 그 이유는 권력은 잡은 악인은 교만하여 백성들을 압제하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성경 잠언 28장 15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가난한 백성에게는 악한 관리가 부르짖는 사자나 굶주린 곰처럼 위험한 존재이다”]. “부르짖는 사자와 굶주린 곰”을 상상해 보십시오. 왜 사자 가 부르짖습니까? 그 이유는 주려서 먹을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7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미련한 자가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더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어떻게 미련한 자가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더 위험합니까? 그 이유는 미련한 사람이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분노할 때 들 합리적(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 (MacArthur)]. 그러므로 미련하고 교만한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시민들은 숨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악인이 멸망하면 의인이 많아진다고 오늘 본문 잠언 28장 28절 하반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잡은 미련하고 교만한 악인이 망하면 의인들은 많아지고 번성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악인이 많아졌을 때 죄도 많아졌지만(29:16) 그 악인이 멸망하므로 죄도 적어지므로 당연히 숨어 살았던 의인들이 많아지고 번성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사 시대 때 악인들이었던 너무 잔인한 미디안 사람들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이 산 속 동굴과 안전지대로 피신해 살았던 것(삿6:2, 현대인의 성경)처럼 악인들이 일어나면(권력을 잡으면) 사람들은 숨어 살 수밖에 없습니다(잠 28:28).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드온을 사사로 세우시고 그의 300명 군사로 미디안 적군을 물리치게 하신 후에는 기드온이 사는 40년 동안 그 땅에는 평화가 있었습니다(삿 8:28, 현대인의 성경). 그러한 평온한 때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숨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평화스러운 때에는 의인이 많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잠언 28장 12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자가 승리하면 모든 사람이 기뻐하지만”(현대인의 성경)[(개역개정)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또한 잠언 11장 10절 상반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이 잘되면 온 시민이 즐거워하고”(현대인의 성경)[(개역개정)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무슨 뜻입니까? 악인이 멸망하고 의인이 승리하여 잘되면 모든 사람(온 시민)이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족하나마 기도할 때 시리아의 내전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 나라의 독재자가 물러나던지 하고 하루 속이 그 나라 시민들에게 자유가 있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하루 속이 독재자가 물러나던지 하고 그 나라의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마음 것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 이상 궁핍함과 핍박 속에서 허덕이지 않길 기원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저는 어쩔 때에는 시편 기자처럼 권력을 잡고 있는 악인 지도자들이 망하길 기원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 시민들이 더 이상 죽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통을 당하지 않고 기뻐하며 즐거워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 잠언 28장 21-28절 중심으로 우리가 알아야 할 8가지 사실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첫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뇌물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21절). (2) 둘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탐심을 품은 사람은 가난이 자기에게 밀어닥치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22절). (3) 셋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사람을 경책하는 것이 혀로 아첨하는 것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23절). (4) 넷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부모의 물건을 도둑질하고서도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강도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24절). (5) 다섯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욕심을 다툼을 일으키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25절). (6) 여섯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지 말고 지혜롭게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26절). (7) 일곱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27절). (8) 마지막 여덟째로,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악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사람들이 숨어 살지만 그가 망하면 의로운 자들이 번성한다는 것입니다(2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