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잠언 2815-20]

 

 

지난주에 뉴스를 통해서 접한 소식은 이 나라 대통령이 미식축구 선수들이 미국 국기에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고 그들에 대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발언을 하므로 많은 미식축구 운동선수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팀 주인(owner)까지 나서서 공개적으로 항의(protest)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런 모습을 보는 가운데 한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가 인터뷰한 내용에 좀 많이 공감하였습니다. 그 선수가 한 말은 대통령의 발언이 “divisive”, 즉 분열을 초래하는(불화를 일으키는) 것이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의 말에 동의합니다. 어떻게 한 나라의 대통령이 공적인 모임에서 많은 사람들과 미디어 기자들이 있는데 연설을 하면서 시민을 하나 되게 하기보다 분열을 초래하는 발언을 욕까지 섞어가면서 했는지 참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지도자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 가정의 지도자인 가장인 남편/아버지가 매우 중요하며, 한 교회의 지도자인 목회자가 매우 중요하며, 한 나라의 지도자인 대통령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하되 특히 제 생각엔 그 지도자가 지혜로운 지도자인 게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지도자가 그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이끈다면 이 얼마나 큰 축복일까 생각합니다. 전에 우리는 잠언 20장 26-30절 말씀 중심으로 “지혜로운 왕”이란 제목 아래 한 5가지로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복습 차원에서 다시 짧게 묵상하면서 이러한 지혜로운 대통령, 지혜로운 목사, 지혜로운 가장을 위하여 기도하고 싶습니다. (1) 지혜로운 왕(지도자)은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여 분리한 후 악인을 벌합니다(20:26). (2) 지혜로운 왕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20:27). (3) 지혜로운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합니다(20:28). (4) 지혜로운 왕은 힘과 지혜가 있습니다(20:29). (5) 지혜로운 왕은 징계를 합니다(20:30).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8장 15-20절 중심으로 “이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란 제목 아래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할지를 한 5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탐심을 사랑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15-16절을 보십시오: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는 악한 관원은 부르짖는 사자와 주린 곰 같으니라 무지한 치리자는 포학을 크게 행하거니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현대인의 성경) “가난한 백성에게는 악한 관리가 부르짖는 사자나 굶주린 곰처럼 위험한 존재이다 어리석은 통치자는 자기 백성을 탄압하여도 청렴한 통치자는 정치 생명이 길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악한 관원”(15절)과 “무지한 치리자”(어리석은 통치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도자들은 포학을 크게 행하여 가난한 백성을 압제하고 탄압하되 마치 “부르짖는 사자나 굶주린 곰”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부르짖는 사자와 굶주린 곰”을 상상해 보십시오. 왜 사자가 부르짖습니까? 그 이유는 주려서 먹을 것을 찾기 때문입니다(박윤선). 만일 저와 여러분이 산으로 캠핑을 갔다고 굶주린 곰이나 사자를 만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이 얼마나 두려운 상황입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7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면 저와 여러분은 어찌 되겠습니까? 성경 호세아 13장 8절을 보면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새끼 잃은 곰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서 그들의 염통 꺼풀을 찢고 그들을 삼키겠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러나 성경은 이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 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미련한 자가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더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어떻게 미련한 자가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더 위험합니까? 그 이유는 미련한 사람이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분노할 때 들 합리적 (이성적)이기 때문입니다(MacArthur). 이렇게 분노할 때 들 합리적(이성적)인 미련한 지도자가 우리나라 대통령이라면 우리나라는 어찌되겠습니까? 만일 우리 교회 목사님 이러한 미련한 지도자라면, 우리 집에 가장인 남편/아버지가 미련한 가장이라면 그 교회와 그 가정은 어찌되겠습니까? 상상이 되십니까?

오늘 본문 잠언 28장 16절을 보면 성경은 “무지한 치리자”, 즉 “어리석은 통치자”와 “탐욕을 미워하는 자”와 대조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탐욕을 미워하는 자”를 “청렴한 통치자”라고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잠언 기자가 두 종류의 지도자를 대조하는 것을 보면 무지하고 어리석은 통치자는 탐욕을 미워하는 청렴한 통치자와 달리 탐욕을 사랑하고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청렴한 통치자는 탐욕을 미워하지만 무지하고 어리석은 통치자는 탐욕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탐욕을 사랑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면 어찌되겠습니까? 여러분, 탐욕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이 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어찌되겠습니까? 성경 디모데전서 6장 10절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현대인의 성경) “돈을 사랑하는 것이 온갖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가지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돈을 사랑하고 탐욕을 사랑하는 지도자들은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결국에는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지도자들로 인해 그들이 다스리는 나라 시민들이, 교회 식구들이, 가족 식구들이 많은 고통을 당하며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지도자들은 얼마나 시민들에게 횡포를 부리며 탄압하며 시민들에게서 착취하겠습니까(겔 45:9,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만일 우리나라의 지도자들이 탐심을 사랑해서 돈을 사랑하고 권력을 사랑하여 포학을 크게 행하여(28:16) 가난한 서민들을 압제한다면(15절) 얼마나 많은 시민들이 고통을 당하겠습니까? 예를 들어, 아합 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여 무죄한 자를 죽였고(왕상 21:1-16), 사울 왕은 장기 집권을 위하여 다윗을 여러 번 죽이려고 하였습니다(삼상 18:6-19:1)(박윤선). 지금도 탐욕을 사랑하는 세계 지도자들로 인해 그 나라 시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장기 집권과 물질의 욕심 속에서 시민들을 압제하고 포악하게 다스리므로 그 나라 그 시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과연 그들에게는 희망이 있겠습니까?

 

만일 우리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사야 선지자 시대 때 이스라엘 목자들처럼 탐심 속에서 자기 배만 채우는 목자들이라면 그 교회 교인들은 어떻겠습니까? 이사야 56장 11절을 보십시오: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요 그들은 몰지각한 목자들이라 다 제 길로 돌아가며 사람마다 자기 이익만 추구하며”[(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욕심꾸러기 개처럼 만족할 줄 모르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몰지각한 목자들이다”]. 왜 이스라엘 목자들은 벙어리 개처럼 능히 짖지 못했습니까? 그 이유는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11절).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고 말하는 자들이었습니다(11-12절).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목자들은 탐심 속에서 자기 배만 채우는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면서 쾌락을 추구하며 오늘도 또한 내일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경 같이 “무지”하였고 벙어리 같이 옳은 말로써 경고하지도 않았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꿈과 같은 헛된 것을 숭상하였습니다(10절). 그들은 안일을 좋아하였고(10절) 탐심이 많았습니다(11절). 그러면서도 각성이 없었고 이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11절). 자기 사정만 돌아보면서 술에 취하여 쾌락을 누렸습니다(11-12절).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미래의 일을 스스로 장담 하였습니다(12절)(박윤선). 이스라엘 목자들은 참으로 몰각한 목자들이었습니다. 이렇게 몰각한 이스라엘 목자들처럼 우리 교회 목사님과 장로님이 자기 배만 채우는 탐욕이 심한 사람들이라면 그 교회 식구들은 어찌되겠습니까? 이렇게 탐욕이 심한 지도자들은 오래 못갑니다. 오히려 오늘 본문 잠언 28장 16절 하반절을 보면 탐욕을 미워하는 청렴한 지도자들의 통치 기간은 길 것입니다(박윤선).

 

우리가 사모하고 기도하는 지도자는 어떠한 지도자입니까? 결코 우리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탐심을 사랑하는 사람들이길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사모하며 기도하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은 탐욕을 미워하는 지도자들이요 청렴한 사람들입니다(잠28:16). 하나님께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하는 모세에게 혼자 중한 짐을 질 수가 없기에 세우신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과 십부장이 생각납니다. 성경 출애굽기 18장 21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청렴결백한 유능한 인재들을 뽑아 1,000명, 100명, 50명, 10명씩 각각 담당하게 하”신 것을 보면 지도자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하고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청렴결백한 사람들이여야 합니다(개역개정).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이러한 사람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로운 지도자들, 거짓을 미워하는 진실한 사람들, 불의한 이익을 미워하는 청렴결백한 사람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가, 우리 교회가, 우리 가정이 견고히 세워지며(잠29:4) 또한 우리 모두가 즐거워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2절).

 

둘째로, 우리는 사람의 피를 흘린 자”(살인범)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가끔 뉴스를 보다보면 오래 전에 살인을 한 살인범을 수년 후에야 잡는 뉴스를 봅니다. 그런 뉴스를 보다보면 저는 결국에는 살인범이 잡히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DNA 검사 결과로 잡히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모습을 뉴스를 통해서 보다 보면 수년 동안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나이가 늙어서 잡히는 살인범들이 이젠 감옥에 가서 죄 값을 치르게 될 텐데 그 죄 값을 다 치르지도 못하고 감옥에서 죽겠구나 라는 생각도 들 때가 있습니다. 한쪽으로는 왜 빨리 자수해서 죄 값을 치루고 다시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들 수 있겠지만 또 다른 쪽으로 생각하면 우리의 본능은 죄를 짓고 나서 자수하여 죄 값을 치르기보다 오히려 도망가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도망한다 하여도 잡히는 그 순간까지 그 살인범들이 겪어야 할 나름대로 고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바로 자신이 행한 살인죄로 인하여 드는 마음의 죄책감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모든 살인범들이 마음의 죄책감으로 고통당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마음이 강퍅하고 양심이 아예 마비가 되어서 살인죄를 범하고 나서도 죄책감에 시달리지도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17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피를 흘린 자는 함정으로 달려갈 것이니 그를 막지 말지니라”[(현대인의 성경) “살인범은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 때문에 죽을 때까지 도망자의 신세가 될 것이다. 그런 자를 돌보지 말아라”].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을 죽인 살인범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린 죄로 양심에 눌림이 있고 그 양심에 눌림 속에서 도망한다고 해도 결국에는 함정에 빠지고야 말 것이라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인범은 결국에는 잡힌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여기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살인죄뿐만 아니라 모든 죄악에는 마침내 하나님의 보응을 받는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 좋은 예가 바로 아합 왕입니다. 열왕기하 10장 10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 너희는 알라 곧 여호와께서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그의 종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제 이루셨도다 하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아합의 집에 대하여 하신 저주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 아합의 집에 대하여 저주의 말씀을 하신 이유는 아합의 집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8:27). 아합의 집이 행한 악은 하나님의 명령을 버리고 바알들을 따른 것입니다(왕상 18:18). 특히 아합 왕은 왕후 이세벨이 충동하였으므로 자기 자신을 팔아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한 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습니다(21:25-26).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주님의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님의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19:10, 14). 결국 아합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한 것입니다(21:22).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노하게 하였습니다(22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하여 아합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19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통하여 이세벨과 아합에게 속한 자에 대해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23-24절; 참고: 왕하 9:10). 그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아합에 대한 예언의 말씀대로 아합은 아람과의 전쟁에서 활에 맞아 부상을 입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습니다(왕상22:34-35). 그리고 그 병거를 창기들이 목욕하는 사마리아 못에서 씻었는데 개들이 아합의 피를 핥았습니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된 것입니다(38절). 아합 왕의 부인 이였던 이세벨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도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통하여 약속하신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예후를 들어 일으켜 아합 왕과 그의 모든 가족을 심판하셨는데 예후가 아합 왕의 부인인 이세벨을 죽인 후(왕하 9:33)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34절)고 명하였는데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녀의) 두골과 발과 그(녀)의 손 외에는 찾지 못”했습니다(35절). 이것은 “여호와께서 그 종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하여” “이스르엘 토지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지라”고 예언의 말씀의 성취였습니다(36절).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 선지자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신 것입니다(7절).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로마서 2장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응하시되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참고 꾸준히 선한 일을 하며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않을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으로 갚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7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이기적이며 진리에 순종하지 않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분노와 형벌로 갚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보응하시는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고통이 있을 것이며(9절)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10절). 이렇게 하나님은 보응하시는 하나님이신데 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재물이 많아 탐심의 노예였던 바벨론을 보응하심(렘56:7, 13)과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과가 땅에 가득할 정도로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응하심에 있어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점이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보응하셨을 때에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예언한대로 역사에 바벨론은 사라졌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아 멸망당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고 멸망당하지 않은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셔서 그들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언약 백성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을 받지 않은 것입니다. 비록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약 백성으로서 불성실하고 불충성했지만 하나님께서 미쁘시사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셔서 마땅히 버림받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 선지자 시대 때에는 하나님께서 우상을 자기들 마음에 들이며 죄악의 걸림돌을 자기 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겔 14:3, 4, 7)을 보응하심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응하시므로(4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 붙잡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는 사실입니다(5절).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배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다시금 붙잡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5절) 그 약속을 이루심에 있어서 그들의 죄의 값으로 보응하시겠다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사 선택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죄의 값을 치르심에 있어서 그들에게 보응하시되 그 보응의 목적은 그들을 멸망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들의 마음을 다시 붙잡아 주시사 다시 세우시는 것이라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죄를 범하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을 보응하시사 자신의 공의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서는 또한 그들을 보응하시므로 다시금 붙잡아 주시고 다시금 세워주시사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 감사한 일입니까. 물론 여기에 우리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보응을 받으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다시 붙잡아 주시고 다시 세워주시는 역사 속에서 그들의 책임이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이었던 것처럼 우리의 책임 또한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죄악 된 일들을 보고 듣고 있습니까. 특히 한 나라의 악한 지도자와 어리석은 통치차로 인하여 얼마나 그 나라 시민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잠 28:15-16). 심지어 자기 나라 시민들을 공개적으로 살인하는 동영상까지 우리가 보았잖습니까. 어떻게 자기 나라 시민들에게 화학무기를 사용해서 어린아이들까지 죽입니까. 이렇게 사람들의 피를 흘리는 살인자들은 지금 자신의 함정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17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반드시 보응하실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떻습니까? 물론 실제로 사람의 피를 흘리는 살인범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은 실제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다른 사람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말씀은 요한1서 3장 15절이라 생각합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현대인의 성경)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 우리가 우리 형제, 자매를 미워하는 살인죄를 범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살인죄에는 하나님의 보응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보응하시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를 충분히 쏟지 않으시고 잠시 보응의 고통을 통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케 하시사 결국에는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들로 다시 세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이젠 더 이상 형제, 자매를 미워하는 살인범들이 아니라 그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자들로 저와 여러분을 세워주십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굽은 길로 행하는 자”(거짓되게 사는 사람)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 자신이 스스로 ‘나는 이중인격자’란 생각을 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네이버 사전을 보니까 “이중인격”이란 “겉과 속이 다른 경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경우, 어떻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볼 때가 있지 않았나요? 성경에 겉과 속이 달랐던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금식을 하고(마 9:14, 막 2:18) “박하와 운항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도 드렸으며(눅 11:42, 마 23:23) 자신들이 보기에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도 하지 않고(막2:16) 세리와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하였지만(눅 18:11) 그들은 속으로는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으며(16:14) 그들 속에는 탐욕과 악독과 방탕과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였습니다(11:39, 마 23:25, 27). 이렇게 바리새인들은 이중인격자들이었습니다. 이들 외에 성경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 중에 가롯 유다라는 이중인격자가 나옵니다. “유월절 엿새 전에” 베다니에 가신 예수님, 마리아란 여인이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았습니다(요12:1-3). 그 때 가롯 유다는 이것을 보고 “이 항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으냐”고 말하였습니다(5절). 만일 우리가 그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우리는 이 말을 듣고 가롯 유다는 진정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착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가롯 유다가 그리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절). 그는 겉으로는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속으로는 도둑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가롯 유다는 이중인격자였습니다. 이만재란 사람이 쓴 “교회가기 싫은 77가지 이유”라는 책이 생각납니다. 그 책을 보면 교회 가기 싫은 77가지 이유가 적혀 있는데 그 중에 두 가지는 바로 “교회에서 진짜 신앙인을 보지 못했다,” “이중인격자가 많아 싫다”라는 이유입니다(인터넷). 왜 교회가 이 지경까지 된 것일까요? 언젠가 제가 이런 글을 쓴 것을 다시금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2015. 4. 11.). “지금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산하기보다 이중인격자들을 생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제 개인적인 생각을 글로나마 써서 나눈 것입니다. 제가 이리 생각하는 이유는 어쩌면 제 자신부터 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겉과 속의 다른 모습이 주위 사람들이 알 정도로 점점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점점 더 진실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만큼 교회가 사람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행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을 양육하는데 헌신하기보다 겉과 속이 좀 달라도 봉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봉사는 열심히 잘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품이 받쳐주지 않기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가리는 죄를 범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18절을 보십시오: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현대인의 성경)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나 거짓되게 사는 사람은 갑자기 패망할 것이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18절을 보면 성경은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나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곧 넘어지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나 거짓되게 사는 사람은 갑자기 패망할 것이다.” 지금 잠언 기자는 “성실하게 행하는 자”(진실하게 사는 사람)과 “굽은 길로 행하는 자”(거짓되게 사는 사람)과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원어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순전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나 이중으로 속이는 자는 한번 넘어지리라”입니다(박윤선). 여러분, 이중으로 속이는 자는 어떠한 자입니까? 그 좋은 예가 바로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8장 6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 [“거짓된 부자”(현대인의 성경)]입니다. 원어 히브리어의 개역하면 “두 길로 속이는 부자”입니다(박윤선). 여러분, 두 길로 속이는 부자는 어떠한 자입니까? 겉으로는 선한 길을 가는 체 하지만 실제로는 악한 길로 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박윤선). 이렇게 두 길로 행하는 부유한 자가 행하는 악한 길 중에 하나는 바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입니다(3절). 학대하되 좀 더 구체적인 예는 야고보서 2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며 법정으로 끌어가는 사람들은 부자들이 아닙니까?”(현대인의 성경). 두 길로 행하는 부유한 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함에 있어서 그들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을 괴롭히며 또한 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기 까지 하여 해를 입힙니다. 잘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행을 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보지 않은 뒤에서는 이렇게 가난한 자들을 (교묘하게) 학대를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와 보지 않은 뒤에서의 불일치된 행함으로 인하여 두 길로 속이는 부자들은 재물을 모으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재물을 모으되 잘 모으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고통당하는 가난한 의인들은 어떻게 그러한 이중인격인 악한 부자들이 “항상 평안하고 재물을 더욱 불어나”는지(시73:12) 자기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헛되도다 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할 수가 있습니다(13절).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길로 속이는 이중인격인 부자들은 그리 재물을 쌓는 가운데 자신들의 악도 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잠언 28장 18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그러한 부자들은 “곧 넘어”질 것임[갑자기 패망할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들에게는 반드시 넘어지는 한 때가 올 것입니다(박윤선).

 

성경 잠언 28장 6절은 이러한 이중인격인 악한 부자보다 진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가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현대인의 성경)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사는 자가 거짓된 부자보다 낫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부함과 가난함 보다 진실히 행하느냐 아니면 위선적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서 거짓되게 행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거짓되고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반드시 넘어질 것이요 갑자기 패망할 것이지만 진실하게 하는 사람,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구원(건짐)을 받을 것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8절).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건짐(구원)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넷째로, 우리는 방탕을 따르는 자”(헛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만일 저와 여러분이 인생의 종착점에 거의 다 와서 우리 인생을 뒤돌아 볼 때 ‘아, 내가 헛되게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면 저와 여러분의 심정이 어떠할 것 같습니까? 특히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뒤돌아 볼 때 너무나 극단적인 개인주의 적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탐심 속에서 자신만을 위하여 수고를 했지만 결과는 ‘내가 헛되고 무익한 수고를 했구나. 참 내가 헛되게 살았구나’라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성경 전도서 4장 8절을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아들이나 형제도 없이 혼자 살면서 억척스럽게 일하며 자기 부를 만족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는 즐거움도 마다하고 누구를 위해서 그처럼 열심히 일하는가? 이것도 다 헛된 것이며 불행한 일이다”(현대인의 성경). 왜 우리 사람들은 이 땅에 살면서 헛된 것을 추구하며 헛되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저는 그 원인을 로마서 1장 21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나님으로서 영광스럽게 하지 않고 감사하지도 않으며 그들의 생각은 쓸모없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은 어두워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지 아니하면(12:2)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또한 하나님께 감사치도 아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은 허망하여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1:21). 즉, 우리의 생각이 무가치하고 헛되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허망한 생각 속에서는 무가치한 일, 헛된 일만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19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방탕을 따르는 자는 궁핍함이 많으리라”[(현대인의 성경) “열심히 일하는 농부는 먹을 것이 많아도 헛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가난하게 된다”]. 이 말씀을 보면 잠언 기자는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와 “방탕을 따르는 자”를 대조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방탕을 따르는 자”란 말의 히브리어 의미는 “헛된 것들을 따르는 자”입니다(박윤선). 즉, 헛된 것들을 따르는 자들은 “헛되게 시간을 보내”므로 결국에는 가난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19절, 현대인의 성경). 그 좋은 성경적인 예가 바로 누가복음 1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탕자의 비유에 탕자입니다. 탕자는 아버지에게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받아서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갑니다(12-13절). 그리고 그는 거기서 허랑방탕한 생활 속에서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다 낭비합니다(13절). 그 때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므로 탕자는 비로소 궁핍해 집니다(14절). 한 마디로, 탕자는 헛된 것들을 따르면서 헛되게 시간을 보내므로 결국에는 가난해졌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헛된 세상입니다. 저는 이 세상이 헛된 이유를 전도서 1장 1-11절 말씀에서 한 4가지로 이미 묵상했었습니다:

 

첫째로,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아무 유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아무 남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도서 1장 3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이 말씀은 해 아래서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행하는 모든 수고가 아무 유익도 없고 남는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성경 전도서 5장 15-16절은 하나님을 떠나서 이 세상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는 “바람을 잡으려는 수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바람을 우리가 어떻게 잡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헛된 수고입니다.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 왕은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업적은 그의 사후에 남을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3, 박윤선).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한 평생 사는 인생은 결국 별 수 없이 티끌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도서 1장 5-6절을 보십시오: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의기양양하여 한평생 활동하지만 별 수 없이 티끌 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아무리 젊었을 때 혈기가 왕성하고 든든히 보일 때가 있을지라도(시 39:5) 결국 사람은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벧전 1:24-25). 결국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24절). 또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바로 시편 39편 6절 말씀입니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결국 우리 인생은 바람과 같습니다. 마치 바람이 남으로 불다 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결국 돌아가는 것처럼(6절) 흙으로 온 우리 인생들도 결국 나중에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인간의 욕심에는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도서 1장 8절을 보십시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 눈이나 귀가 보고 또한 들어도 족함이 없다는 이 말씀은 마치 바다가 언제가 흘려오는 물로 차지 못함 같이(7절) 사람의 욕심도 만족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박윤선). 참으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가 봅니다. 그 끝없는 욕심을 만족시키고자 이 헛된 세상에서 이것저것을 추구해 보지만 결국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전도자 솔로몬 왕은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전도서2장10절을 보면 “무엇이든지 내 눈이 원하는 것을 내가 금하지 아니하며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다 누려보았던 솔로몬 왕, 자신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라고 말하였지만(2:10) 또한 그는 11절에 가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11절).

 

넷째로, 이 세상이 헛된 이유는 후세의 사람들이 이 시대 사람을 기억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도서 1장 11절을 보십시오: “이전 세대를 기억함이 없으니 장래 세대도 그 후 세대가 기억함이 없으리라.” 이 세상에는 새 것이 없고 이전 것을 거듭하는 것뿐이기 때문에 사람이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다(9-10절, 박윤선). 그래서 전도자 솔로몬 왕은 “후세의 사람들이 이 시대 사람을 기억함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헛되다”고 말한 것입니다(11절, 박윤선). 아무리 지금 현재 사람의 부와 권력과 힘 등이 많다고 할지라도 죽으면 무엇이 남습니까? 죽어서 세월이 흘러가면 다 잊혀지는 것을 말입니다. 결국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는 것입니다(3절). 그리고 지나간 세대는 기억함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한 번 죽으면 다시는 이 세상에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전3:22, 박윤선). 한번 사는 인생, 우리는 육신의 일을 하면서 헛되게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육신의 일은 다 무익하고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본문 잠언 28장 19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 …”[(현대인의 성경) “열심히 일하는 농부는 먹을 것이 많아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당시 토지를 경작하는 것은 그 시대의 일반적 산업으로써(박윤선) 성경은 열심히 일을 하면 먹을 것이 많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각자 일터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집 안에는 넉넉함이 있을 것입니다(27:27). 그리고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9:8).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사람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우리는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부자가 되려고 서두르는 사람)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여러분, 부자가 되고자 애쓰는 게 죄일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자가 되고자 하면 안 되는 건가요? 성경 잠언 23장 4절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현대인의 성경) “부자가 되려고 너무 애쓰지 말고 자제하는 지혜를 가져라”]. 이 말씀을 보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왜 성경은 우리에게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 디모데전서 6장 9-10절을 보십시오: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현대인의 성경)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시험과 함정에 빠지고 사람을 파멸시키는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에 떨어집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온갖 악의 뿌리가 됩니다. 이것을 가지려고 열망하는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방황하다가 많은 고통을 당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습니다”]. 우리가 부자가 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시험과 함정에 빠지고 사람을 파멸시키고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에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잠언 23장 4절 말씀대로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우리의 사사로운 지혜를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버려야 할 “사사로운 지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거짓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려 하는 것입니다(박윤선). 여기서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란 말씀이 현대인의 성경에는 “자제 하는 지혜를 가져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번역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우리는 자제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 “자제하는 지혜”가 무엇일까요? 한 2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자제하는 지혜란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각의 날개를 펴서 상대방의 대해서 마음대로 생각하지 말고 지혜롭게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롭게 생각하되 상대방의 말만 무조건 듣고 다 믿지 말고 분별력을 가지고 잘 들어서 그 상대방의 마음의 동기를 좀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2) 자제하는 지혜란 절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마음 의 절제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시 62:10). 마음의 절제란 어떠한 종류의 탐심의 유혹이라도 뿌리치고 자족하는 마음을 지키기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 마음을 절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탐심의 유혹에 넘어가서 탐심의 노예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20절을 보십시오: “충성된 자는 복이 많아도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하리라”[(현대인의 성경) “성실한 사람은 풍성한 복을 받아도 부자가 되려고 서두르는 사람은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잠언 기자는 “충성된 자”(성실한 사람)과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부자가 되려고 서두르는 사람)과 비교(대조)를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대조를 염두에 두고 속히 부하고자 서두르는 사람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러한 사람은 충성되지(성실하지) 못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음. 생각해 보십시오. 속히 부하고자 서두르는 사람이 어떻게 성실하게 일을 하겠습니까. 속히 부하고자 서두르는 사람은 성실하지 못하고 오히려 “굽은 길로 행”합니다(18절). 다시 말하면, 그러한 사람은 거짓되게 산다는 말입니다(18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성경은 “가난하여도 성실(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거짓된 부자)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절). 또한 속히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조급합니다. 조급하기에 그는 자기 나름대로 부자가 되고자 사업도 시도해 보면서 이익을 보고자 이런 저런 계획을 세우지만 내일 일을 알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약 4:13-14). 그는 자신의 생명이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14절). 그러나 성경은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14:29). 그리고 성경은 “조급한 자는 궁핍함에 이를 따름이니라”[“조급하게 굴면 가난하게 된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5). 이렇게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는 거짓되게 살고 마음이 조급하여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므로 말미암아 결국에는 “형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8:20,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우리는 속히 부자가 되기를 애쓰기보다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두 길로 행하는 부자들이 되면 아니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겉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한 길을 가는체 하면서 실상은 악한 길로 행하는 부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가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낫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6절). 성경 잠언 19장 22절 새번역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바랄 것은 성실이다. 거짓말쟁이가 되느니, 차라리 가난뱅이가 되는 것이 낫다.” 여러분, 우리는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28:20,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우리는 성실하게 행해야 합니다(18절). 그리할 때 우리는 풍성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20절, 현대인의 성경).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악한 관원”(악한 관리)이나 “무지한 치리자”(어리석은 통치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사람의 피를 흘린 자”(살인범)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굽은 길로 행하는 자”(거짓되게 사는 사람)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방탕을 따르는 자”(헛되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속히 부하고자 하는 자”(부자가 되려고 서두르는 사람)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탐욕을 미워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장수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성실(진실)하게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건짐)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먹을 것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충성된(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풍성한 복을 받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