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잠언 288-14]

 

 

여러분, 성경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시128:1). 우리가 계속해서 잠언 말씀을 묵상해오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에 대하여 여러 번 묵상을 했었습니다. 그만큼 지혜의 책 잠언은 일관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임(1:7)을 반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그 반복된 말씀들을 다시금 살펴볼 때 저는 한 2 가지 여기서 다시금 복습을 좀 하고자 합니다:

 

먼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좀 복습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우리의 자세나 의지, 느낌, 행실과 목적들이 하나님의 자세와 의지와 느낌과 행실과 목적으로 다 맞바꿔있는 정신 상태입니다[“The fear of the Lord is a state of mind in which one’s own attitudes, will, feelings, deeds, and goals are exchanged for God’s(MacArthur)].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는 모든 것이 주님 중심이지 결코 자기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는 결코 자기 뜻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만을 구합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생각, 주님의 느낌, 주님의 자세와 의지, 주님의 행실을 본받아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삽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 박윤선 박사님은 한 5가지로 말했습니다: (1) 평범한 일을 하면서도 죄를 범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2) 은밀한 가운데서 경건하게 살며 깨어 기도합니다. (3) 마음속으로 죄를 범하지 아니합니다. (4) 평안한 때에 오히려 주님을 떠날까 하여 두려워하며 조심합니다. (5) 난처한 때에 구차스럽게 그것을 면하려 하지 않고 의리를 지킵니다.

 

그러면 성경책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삶은 어떠한 삶인지 좀 복습하고자 합니다: (1) 우리는 잠언 1장 8-19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에 대해서 한 3가지로 이미 교훈을 받았습니다: (a)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8절). (b)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의 꾐을 좇지 않습니다(10절). (c)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15절). (2) 우리는 잠언 24장 21-26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한 나라의 시민에 대해서 한 2가지로 이미 교훈을 받았습니다. (a)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민은 자기의 대통령을 경외합니다(21절상). (b) 하나님을 경외하는 시민은 반역자들과 사귀지 않습니다(21절하). (3) 우리는 전도서 5장 1-7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어떻게 하는지 한 3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a)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합니다(1절). (b)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립니다(2절). (c)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께 서약한 것을 지킵니다(4절). (4) 우리는 시편 34편 8-14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어떻게 하는지 한 4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a)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께 피합니다(8절). (b)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9-10절). (c)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12절). (d)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합니다(14절). (5) 우리는 시편 128편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무슨 복을 받는지 한 3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a)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산업에 축복을 받습니다(2절). (b)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가정에 축복을 받습니다(3절). (c)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교회에 축복을 받습니다(5절).

 

오늘 본문 잠언 28장 14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현대인의 성경) “항상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나 고집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현대인의 성경) “항상 여호와를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여기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누구일까요?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해선 우리는 문맥인 바로 전 구절 13절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현대인의 성경) “자기 죄를 숨기는 사람은 번영하지 못할 것이나 자기 죄를 고백하고 버리는 사람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그리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8:13).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죄를 자복하되 자기가 거룩하신 하나님께 범한 죄를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깨닫게 하셨을 때 그는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인정한 죄를 버립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복한다’는 말은 ‘인정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죄를 버림이 회개의 열매이다. 열매 없는 회개는 하나마나 한 것이다. 그런데 죄를 버리는 것은 죄를 미워하는 데까지 이르러야 실행된다”(박윤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죄악을 미워합니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자복할 뿐만 아니라 회개하므로 그 죄를 버립니다. 그가 그리하는 이유는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28:13).

 

그런데 우리의 본능은 우리가 범한 죄를 숨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죄가 들춰졌을 때 즉시 인정하기보다 오히려 부인(deny)하고 또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우리의 죄를 부인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완악하게 했기 때문입니다(14절). 이렇게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강팍하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출 7:13). 그리고 우리가 고집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우리는 성령의 검인 말씀으로 우리 양심에 찔림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의 죄를 고백(인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완악(강퍅)한 마음이란 “회개하지 아니하는 마음”입니다(롬 2:5). 그러다가 누군가가 우리가 범한 죄에 대한 증거를 들이대면 우리는 그 때서야 우리의 죄를 인정하며 자백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더 이상 우리가 범한 죄를 숨길 수 없고 더 이상 그 죄를 부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여 우리는 우리의 수치를 모르고 철면피 같은 얼굴로 우리의 죄를 뉘우치는 기색이 전혀 없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될 때로 되라는 식으로 우리의 죄의 결과를 받아들이기까지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28장 14절 하반절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리라”[(현대인의 성경) “… 고집스러운 사람은 어려움에 빠질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 복 받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버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어떠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고 버릴까요? 과연 우리는 어떠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려야 할까요?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8장 8-14절 말씀 중심으로 한 5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립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이자”하면 무슨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저는 “이자”하면 두 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은 제가 대학교 때 나라에서 저에게 융자를 해주었는데 그 융자해 준 돈의 이자가 은행에서 융자해주는 돈의 이자에 비해 매우 쌌다는 것입니다. 제 기억으로 아마 그 때 은행 융자 이자가 한 8%로인가 10%로였던 것 같은데 나라에서 가난한 학생에게 융자해준 돈의 이자는 4%로인가 그랬습니다. 그리고 그 융자해준 돈을 제가 졸업한 후 6개월 이후에 매달이 아닌 세 달의 한번 씩 갚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에겐 나라에서 융자해준 돈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자”하면 또 하나 생각나는 것은 저희 부부가 Chase 은행을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는데 전에 Saving 계좌에 얼마 정도 입금을 했었는데 이자가 얼마나 작았던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아니 저축 계좌에 입금을 하면 좀 이자가 높아야 저희 부부에게 이익이 있는데 이자가 너무 낮아서 아무리 저축 계좌에 오래 두어둬 이익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8절을 보십시오: “중한 변리로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를 위해 그 재산을 저축하는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비싼 이자를 받아 자기 재산을 늘리는 사람은 결국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을 위해 재물을 쌓는 것이다”]. 이 말씀은 “중한 변리” 또는 “비싼 이자”를 받아 자기 재산을 늘리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비싼 이자를 받아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게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요즘 우리가 집을 사려고 은행에서 돈을 융자할 때 이자가 30년 융자는 4.0%이고 15년 융자는 3.625%라고 합니다(인터넷). 주로 사람들은 주택 담보 대출 금리가 낮은 15년 융자를 하고 싶어 하지만 매달 돈을 갚은 액수가 크기에 부담이 되서 30년 융자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까 미국 대통령 선거 이후에 미국의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급등하고 있다고 합니다. 한 0.5% 포인트 가량 올랐다고 하는데 이는 40만 달러의 주택을 담보대출을 받아 살 경우에 연간 700달러가량 이자 부담이 늘어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인터넷). 결국 은행들은 고객들에게 주택담보대출을 해주므로 말미암아 이자를 받아서 수입을 늘리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잠언 28장 8절에서 성경은 “비싼 이자를 받아 자기 재산을 늘리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구약 성경 당시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비싼 이자를 받는 것이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실제로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가난한 동포 유대인들에게 돈을 빌려준 후 이자를 받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박윤선). 출애굽기 22장 25절을 보십시오: “네가 만일 너와 함께 한 내 백성 중에서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어 주면 너는 그에게 채권자 같이 하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 것이며”[(현대인의 성경) “너희가 내 백성 가운데 가난한 동족에게 돈을 빌려 주거든 너희는 그에게 빚쟁이처럼 굴지 말며 이자를 받지 말아라”]. 성경 신명기 22장 19-20절을 보십시오: “네가 형제에게 꾸어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지니 곧 돈의 이자, 식물의 이자, 이자를 낼만 한 모든 것의 이자를 받지 말 것이라 타국인에게 네가 꾸어주면 이자를 받아도 되거니와 네 형제에게 꾸어 주거든 이자를 받지 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같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돈이나 양식이나 그 밖에 어떤 것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외국인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있으나 여러분의 동족에게 이자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이 동족에게 이자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여러분이 들어가 차지할 땅에서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성경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외국인에게는 이자를 받을 수 있어도 자기 동족들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면 이자를 받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그 땅을 차지하면 모든 일에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기원전 1792년에서 1750년에 바벨론을 통치한 함무라비 왕이 반포한 고대 바빌로니아의 법전인 함무라비 법전(Hammurabi’s Code)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외국인에게 돈을 빌려주었으면 이자를 높게는 20%까지 받았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합니다(IVP Background 주석). 그리고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고리대금업으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세우는 하나의 방법은 부적절하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돈을 빌려주는 것이란 같은 동족 사람 중 경제적으로 힘든 사람을 돕고자 하는 게 목적이었지 그 사람의 경제적으로 힘은 것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IVP Background 주석).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러한 명령을 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동족 중 가난한 자들에게 돈을 빌려준 후 이자를 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시사 불쌍히 여기셔서 그런 것입니다(잠 28:8). 성경 시편 72편 13절을 보십시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궁핍한 자의 생명을 구원하며.” 이렇게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잠언 19장 17절에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또한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님을 공경하는 자이지만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 가난한 자를 지으신 주님을 멸시하는 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4:31). 오늘 본문 잠언 28장 8절에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은 “비싼 이자를 받아 자기 재산을 늘리는 사람은 결국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사람을 위해 재물을 쌓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다시 말한다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동족에게 비싼 이자를 받아 자기 재산을 늘리는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께서 징벌하시사 그들의 늘린 재산을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가나안 사람에게 돌아가게 하(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의 비슷한 말씀이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3장 22절 하반절에도 나와있습니다: “… 죄인의 재물은 의인을 위하여 쌓이느니라”[(현대인의 성경) “… 죄인의 재산은 선한 사람을 위해 쌓인다”]. 또한 욥기 27장 16-17절을 보십시오: “그가(악인이) 비록 은을 티끌 같이 쌓고 의복을 진흙 같이 준비할지라도 그가 준비한 것을 의인이 입을 것이요 그의 은은 죄 없는 자가 차지할 것이며.” 성경 전도서 2장 2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에게 지혜와 지식과 행복을 주시지만 죄인들에게는 재산을 애써 모으고 쌓는 수고로움을 주시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자에게 그것을 넘겨주도록 하시니 이것도 헛된 것이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은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결국 하나님께서는 악인들이 재물을 불의한 방법으로 얻을지라도 그 악인의 재물을 의인에게 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입니까? 여려 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가면서까지 불의한 방법으로 재산을 늘리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 하여 재산을 늘린다고 해도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우리가 불의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결국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에게 돌아가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이 교훈들과 더불어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다면 그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여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는 가난한 사람을 우리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가증한 기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립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잘 받고 있습니까? 혹시 여러분은 저처럼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더디다는 생각이 든 적이 없으십니까? 이안 M. 더귀드(Iain M. Duguid) 목사님은 우리의 기도 응답이 더딜수록 사탄은 우리에게 수시로 다가와 지속적으로 제안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현혹하는 지름길’(deceptive shortcut)입니다. 그 때 우리를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1)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므로 하나님의 때에 기도 응답을 받든지, 아니면, (2) 우리가 그리도 원하는 것을 더 이상 기도하며 기다리기보다 사단이 보여주는 지름길을 선택하여 빨리 얻든지. 그러나 만일 우리가 두 번째 길을 선택하면 그 선택의 결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뿐만 아니라 우리 후손들에게도 고통을 줄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귀드 목사님의 권면은 기도 응답이 더딜수록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더 견고히 세워 가실 것이며 그리고 기도 응답을 받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임재)을 더욱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볼 것이라는 것입니다(더귀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책 “두려움에서 믿음으로”(From Fear to Faith) 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단번에, 우리가 원하는 방법대로 들어주셨다면, 우리는 매우 빈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안 될 이기주의 등을 다루기 위해 가끔 응답을 미루시기도 합니다." 참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단번에 우리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신다면 우리는 매우 빈곤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을까요? 기도 응답의 더딤이 우리의 이기주의 등을 다루기 위해서라면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미루시고 계심에 감사해야 하지 않을까요?

 

오늘 본문 잠언 28장 9절을 보십시오: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사람이 율법을 외면하고 듣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신다”].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기도’는 우리가 귀를 돌려 하나님의 율법(말씀)을 듣지 아니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귀를 돌린다(돌이킨다)는 말은 “반역의 심리를 가지고 순종하지 않음이니, 그것은 일시적 실수가 아니고 고의적 범죄이다”라고 박윤선 박사님은 말하였습니다(박윤선). 마치 반항하는 사춘기 아이가 아버지가 말씀하시는데도 불구하고 등을 돌려 고의적으로 아버지의 말씀 듣기를 거부한다면, 그러면서 자기가 도움이 필요할 때 아버지에게 와서 도와달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이 그 아버지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때 만일 저와 여러분이 반항하고 말도 듣지 않는 자녀의 요청을 들어준다면 과연 그것이 그 자녀를 위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 자녀를 도와준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우리 자녀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자녀를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또한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그것은 우리 자녀를 아버지께 순종하는 자녀로 양육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고 더욱더 아버지의 말에 등과 귀를 돌리는 자녀가 되도록 도와주는 것 밖에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구약 성경 스가랴 7장 11-1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렸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귀를 막으며 자기들의 마음을 금강석 같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진노하시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불러도 그들이 듣지 아니한 것처럼 그들이 불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13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등을 돌린 이스라엘 백성들을 온 세상에 흩어 외국 땅에서 살게 하셨고 그 후로 그들이 살던 땅은 황폐하여 왕래하는 자가 없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던 좋은 땅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신 것입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이스라엘 백성들은 등을 하나님에게로 돌리고 얼굴을 하나님에게로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끊임없이 가르쳤는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교훈을 듣지 아니하고 받지 아니하였습니다(렘 32:33). 그러면서 자신들이 궁핍하던지 어려움에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가증한 기도를 어떻게 듣고 그 기도를 응답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등을 돌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등을 돌려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고(18:17) 그들의 가증한 기도를 듣지 않으셨습니다(슥 7:13).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가증한 기도를 드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고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명하셨습니다. 예레미야 7장 16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는 이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지 말라 그들을 위하여 부르짖어 구하지 말라 내게 간구하지 말라 내가 네게서 듣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 11장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예레미야야, 너는 이 백성을 위해 기도하지 말며 그들을 위해 부르짖거나 간구하지 말아라. 그들이 고통 중에서 나에게 부르짖어도 내가 듣지 않을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신약 성경 야고보서에 “…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는 말씀을 토대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배웠습니다. 그것을 반대로 말한다면, ‘행함이 있는 믿음을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살아있는 믿음으로 생각할 때 우리의 기도도 행함이 없는 기도는 죽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기도도 행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야 그 기도가 살아 있는 기도라 생각합니다. 이 생각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살아 있는 기도란 우리의 책임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무조건 기도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도를 응답해 주셔야 한다는 생각은 균형을 잃은 삐뚤어진 생각입니다. 기도에 관한 우리의 책임은 하나님께 올바른 기도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말로만 ‘주여 주여’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현대인의 성경) “너희가 나를 보고 입으로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어째서 내가 말하는 것은 실천하지 않느냐?”](눅 6:46).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말로만 “주여 주여” 해서는 아니 되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7:21).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우리 마음속에 죄를 그대로 품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실 것입니다(시66:18).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을 미워하므로 자신의 마음속에 죄를 미워하기에 그 죄를 자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 드린 가증한 기도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그는 죄악에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성실함을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립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성실하고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저는 “정직”하면 잊혀지지 않는 책 제목이 있습니다. 그 책 제목은 “정직의 위기”입니다. 워렌 W. 위어스비 목사님이 쓰신 책인 영어 제목은 “The Integrity Crisis”입니다. “정직”(integrity)이란 무엇입니까?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보면 이 말은 라틴어 “integritas”에서 온 것으로 “완전”, “전체”, “완벽”의 뜻을 지녔습니다. 어근은 “integr”로서 “완전한”, “손상되지 않은”, “본래대로의”라는 뜻입니다(인터넷). 저자는 그 책에서 정직한 사람들은 숨길 것이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삶은 열려진 책과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 만큼 정직한 사람들로서 투명한 삶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선적인 사람들은 자기 속에 있는 것들 등을 숨기고 포장하며 꾸밉니다. 즉,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며 거짓을 말합니다. 특히 위선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고자 교회에 나와서도 거룩한 척, 예배를 드리고 기도하는 척, 찬양하는 척, 섬기는 척, 사랑하는 척, 등등 척척 잘합니다. 이렇게 위선적인 사람들은 투명하지 않습니다. 존 비비어는 “광야에서의 승리”라는 자신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무서운 시험을 받고 연단을 받은 다음에 당신은 더욱 투명해질 것입니다. 투명한 그릇은 그 자체의 영광을 나타내지 않고 그 안에 들어있는 것을 나타냅니다.”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서운 시험과 연단을 받아서라도 투명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위선적인 모습들이 연단을 통해서라도 정화되어 정직한 모습을 회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나 그리스도인들의 교회가 순수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만큼 우리는 세상의 불순한 것들로 오염이 되어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믿음과 교회가 순수성을 잃어가면서 나타나고 있는 증상은 바로 위선입니다. 우리의 겉과 속이 다릅니다. 교회 안에서와 교회 밖에서의 생활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모양새를 따지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처럼 보이려고 꾸미고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서 교회같이 보이려고 너무나 두껍게 포장을 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썩은 냄새는 진동합니다. 그 썩은 냄새도 가려보려고 향수를 뿌려 보지만 더 희귀한 냄새만 나게 될 뿐입니다. 이 썩은 냄새까지는 우리가 숨길 수 없나 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를 싫어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냄새도 싫어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위선을 더 싫어하고 증오하기까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를 비판하고 욕하기까지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회는 그들 앞에서 거룩하게 보이려고 합니다. 이젠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죄악들인데 말입니다.

 

우리 교회는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정직의 위기를 맞이한 것입니다. 교회는 투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껍데기나 포장들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숨기려고 포장하는데 만 급구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돌이켜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정직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교회는 투명하여 우리 안에 거하시는 예수님의 영광을 이 어두운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우리 교회는 어떻게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는지 이 세상에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아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고 있는지를 이 세상에 나타내야 합니다. 썩은 냄새 가운데서도 더욱더 강하게 풍기는 예수님의 향기를 우리는 이 세상에 들어내야 이 세상이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교회가 투명해지기 위해선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는 고난을 통하여 단련 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정금과 같이 나오게 하시려고 교회로 하여금 고난을 허락해 주십니다. 우리가 받는 이 고난들은 값없는 것들에서 값진 것들을 분리시켜 내는 극렬한 불입니다(비비어). 우리 교회는 고난을 통하여 값없는 것들을 내어 버리고 값진 것들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값진 것들을 위하여 교회는 존재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 교회는 값없는 것들로 인하여 영광을 얻고자 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회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광야를 통과하는 가운데 정화 돼야 합니다. 정화되데 교회는 교회의 순수성과 투명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예수님을 빛을 이 어두운 세상에 환히 비취여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10절을 보십시오: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성실한 자는 복을 받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인도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함정에 빠져도 정직한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보면 잠언 기자는 두 사람을 대조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 사람이란 바로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와 “성실한 자”(정직한 그 사람)입니다.

 

먼저 잠언 기자가 말하고 있는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전에 우리가 한국 뉴스를 보면서 유괴범들이 어린 아이들 꾀어가지고 유괴한 뉴스를 접하곤 했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어린 아이들을 유인했겠습니까? 분명히 그들은 어린 아이들의 흥미를 불러 일으켜 그들로 하여금 꾐에 넘어가게 했을 것입니다. 쉬운 예를 든다면, 제가 저희 집 강아지 루나를 유인하려면 간단합니다. 제가 루나에게 먹잇감을 주면서 유인하면 됩니다. 그러면 루나는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는 저희 집 아이와 함께 있다가도 저를 따라 옵니다. 성경 창세기 3장을 보면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1절)이 여자를 유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어떻게 뱀은 그녀는 유인하여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까? 저는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뱀은 그 여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의문 들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뱀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1절). 여러분, 뱀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현대인의 성경) “네가 동산에 있는 과일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으나”](2:16)라는 말씀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저는 사탄이 이미 그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뱀이 의도한 것은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라기 보다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 즉, 선악과였습니다(17절).

 

(2) 뱀은 여자에게 거짓을 말했습니다.

 

뱀의 질문을 받은 여자는 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3:2-3).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하신 창세기 2장 17절 말씀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여자가 뱀에게 답변한 것처럼 “만지지도 말라”라고는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뱀이 여자에게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도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3:4-5). 이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는데(2:17) 뱀은 그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거짓을 말한 것입니다(3:4).

 

(3) 뱀은 여자로 하여금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여 결국에는 그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통해서 그녀의 남편인 아담도 같은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 창세기 3장 6절을 보십시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요한일서 2장 16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사탄은 인간의 제일 취약점인 이 3가지 –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으로 그 여자를 유인하여(entice) 그녀로 하여금 선악과를 보고 “먹음직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하게 만들므로 결국에는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그녀로 하여금 자기 남편인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주어 먹게 하므로 그 또한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들었습니다. 성경 사사기 14장과 16장을 보면 사사 삼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읽다보면 삼손이 여인에게 꾐을 당하는 모습이 두 번 나옵니다.

 

(a) 삼손의 첫 번째 아내로서 삼손이 딤나에 내려가서 그녀를 보고(삿14:1) 그녀를 좋아하게 되어(3절) 자기 부모에게 그녀를 자기 아내로 삼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2, 3절). 그래서 삼손의 아버지가 딤나로 내려갔는데 삼손이 거기서 찬치를 베풀고 친구로 삼은 30명에게 수수께끼를 내었습니다(10-12절). 그런데 그 30명 친구들이 삼손이 낸 수수께끼를 못 푸니까 일곱 째 날[NASB는 4일째 되는 날]에 삼손의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네 남편을 꾀어(Entice your husband) 그 수수께끼를 우리에게 알려 달라 … 그렇지 아니하면 너와 네 아버지의 집을 불사르리라 …”(15절). 그러므로 삼손의 아내는 그 잔치 기간인 7일 동안 계속 울고 삼손에게 졸라 대자(강요함으로) 삼손은 견디지 못해 7일째 되는 날에 그녀에게 그 수수께끼의 답을 말해주고 말았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b) 삼손의 세 번째 여자인 들릴라라 이름 하는 여인이(16:4) 블레셋 다섯 지방의 통치자들에게 각각 은화 1,100개씩 받는 조건으로 삼손을 꾀어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생기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능히 그를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5절). 그래서 들릴라는 삼손에게 “당신의 큰 힘이 무엇을 말미암아 생기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굴복하게 할 수 있는지 내게 말하라"(6절)고 하니까 삼손은 그녀에게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합니다: (1) “만일 마르지 아니한 새 활줄 일곱으로(마르지 않은 일곱 가닥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7절), (2) “만일 쓰지 아니한 새 밧줄들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1절), (3) “그대가 만일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베틀의 날실에 섞어 자면 되리라”(13절). 이렇게 삼손이 3번이나 거짓말을 하니까 들릴라는 삼손에게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냐 당신이 이로써 세 번이나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를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15절)라고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16절). 그래서 결국 삼손은 들릴라에게 “진심을 드러내어” “모든 것을 털어 놓았”습니다: “내 머리 위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부터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17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어떻게 삼손히 들릴라의 꾐에 넘어갔을까를 좀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먼저 삼손은 들릴라의 배후 인물을 몰랐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랑하는 들릴라 뒤에 블레셋 다섯 지방의 통치자들이 그녀에게 뇌물을 주겠다고 약속해서 자기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생기는지, 어떻게 하면 자기를 능히 결박하고 굴복하게 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들릴라에게 시켰는지를 몰랐습니다. (2) 그리고 삼손은 들릴라에게 세 번이나 거짓말을 하면서 세 번째 거짓말에 가서는 자기의 머리털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점점 더 그는 자기의 힘이 근원이 머리카락에가 가까이 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3) 그러다가 들릴라가 날마다 삼손을 재촉하여 조르니까 삼손은 괴로워서 죽을 지경이었다는 것을 볼 때에 요셉을 날마다 유혹한 보디발의 아내가 생각났습니다. 요셉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아니하여 그녀와 동침하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 함께 있지도 않았는데(창 39:10) 삼손은 들릴라에게 모든 것을 털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녀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잤습니다(삿 16:17, 19). 자기 머리를 밀면 자기의 힘이 떠난다고 다 말해 놓고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을 잔다니 ‘나를 잡아 먹으세요’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와 같이, 사탄은 인류의 최초의 여인과 그녀의 남편인 아담을 유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하였고 또한 나실인이었던 사사 삼손도 여자를 사용하여 유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들었던 것처럼 지금도 사탄은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유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특히 사탄은 육체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자극하여 우리를 유인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잠언 28장 10절 하반절에서 잠언 기자가 말하고 있는 “성실한 자”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성실한 사람은 정직한 사람, 즉 의인(upright person)을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의로운 입술”을 가지고 있어 “정직하게 말하는 자”요(잠 16:13) 또한 그/녀의 행위가 정직합니다(미 2:7). 이렇게 의인이 의로운 입술로 정직을 말하고 정직히 행하는 이유는 “여호와께서 의로우서셔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는 것처럼 자기도 의로운 일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시 11:7). 그 좋은 예가 바로 욥기 서에 나오는 욥이란 인물입니다.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욥1:1, 8). 그러므로 그는 10자녀들을 잃고 물질을 잃었어도 오히려 그는 “땅에 엎으려 예배”를 드렸을 뿐만 아니라(20절) “이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도 아니하였습니다(22절). 이러한 의로운 자, 정직한 자, 성실한 자는 오늘 본문 잠언 28장 10절 하반절을 보면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과연 정직한 자가 받는 복은 무엇일까요? 정직한 욥이 받았던 복은 한 2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1) 먼저, 욥의 말년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사 양 14,000 마리, 낙타 6,000마리, 소 2,000마리, 암나귀 1,000마리를 소유로 주셨습니다(욥 42:12).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자녀의 축복도 주시사 아들 7명과 딸 3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13절). 성경은 욥의 딸들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온 땅에 없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 (2) 그러나 제 생각엔 이 복보다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더 큰 복은 바로 이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5절). 욥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삶 현장 속에서 그 분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저는 욥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 영적 축복이 그가 받은 자녀의 축복과 물직의 축복보다 더 큰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잠언 28장 10절에서 잠언 기자가 말하고 있는 정직(성실)한 자가 하나님께 받는 복은 ‘건짐을 받는 복’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10절 상반절을 보면 “정직한 자를 악한 길로 유인하는 자는 스스로 함정에 빠져도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악인은 의인을 악한 길로 유인하고자 함정을 만들어 놓지만 결국에는 악인 자신이 자기가 만들어 놓은 함정에 스스로 빠진다는 말입니다: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현대인의 성경) “남을 해치려고 함정을 파는 사람은 자기가 그 함정에 빠질 것이며 …”](잠 26:27), “함정을 파는 자는 거기에 빠질 것이요 …”[(현대인의 성경) “함정을 파는 자는 바로 그 함정에 빠질 것이며 …”](전 10:8).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합니까? 어떻게 정직한 자를 빠트리려고 악인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 악인 스스로 빠지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에게 복을 내리시사 그를 악인이 만들어 놓은 함정에서 건져(구출)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건짐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정직합니다. 그의 입술에서는 정직을 말하며 그의 모든 행위 또한 정직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정직한 우리를 계속해서 악한 길로 유인합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의 길에 함정을 파 놓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죄를 범하기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불성실하게 만들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만들어 결국에는 불의를 행하게 만들고자 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탄의 유인 작전에 넘어가 하나님께 불성실하였다면 우리는 우리의 불성실한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정직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립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살핀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왜 어떤 부자들은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길까요? 저는 그 대답을 신명기 8장 17-18절 상반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여러분의 힘과 능력으로 부유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에게 부유해지는 능력을 주신 분이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즉,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부자들은 자기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재물을 얻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반대로 말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부자들에 대해 성경 잠언 26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미련한 자에게 희망이 더 있다”].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사람은 미련한 자보다 더 소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3장 7절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다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게 됩니다. 특히 부자들이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여 일을 경영하여 그 경영하던 일이 잘되면 그들은 그들이 지혜로워서 그 일이 잘 된 줄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는 부자들은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악이요 그 악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부자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죄악을 하나님께 범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성경 신명기 17장 19절을 보십시오: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기 위해선 우리는 평생에 우리 옆에 성경책을 두고 읽어야 합니다(19절).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가 읽은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형제, 자매들 위에 교만하지 아니할 것입니다(20절).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낮은데 마음을 둬서 겸손히 주님과 이웃을 섬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11절을 보십시오: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나 가난해도 명철한 자는 자기를 살펴 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부자는 자기를 지혜롭게 생각하지만 가난해도 분별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철저하게 살핀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부자가 되기보다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살피는 명철한 가난한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명철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살핀다는 것입니다. 제 인생의 하나님께서 크게 베풀어 주신 은혜 가운데 하나는 저의 신앙생활 습관 중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제 자신을 비춰보게 하시는 것, 즉 자아 반영 및 자아 성찰케 하시는 것입니다. 특히 저는 야고보서 1장 23-24절 말씀에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거울에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는 자기 모양을 보고도 거울 앞에서 떠나면 곧 제 모습을 잊어버립니다”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받은 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나의 영적 거울로 삼고 그 말씀에 제 속사람을 비춰보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받은 영향은 바로 목사님이자 사회학자인 토니 캄폴로가 90세 이상 되신 어르신들에게 설문 조사한 내용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토니 캄폴로 목사님은 그 어르신들에게 ‘당신들이 다시 태어난다면 무엇을 더 열심히 하겠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제일 많이 나온 3가지 대답 중 하나가 “self-reflection”(자아 반영)라는 사실에 저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철저하게 살피면서 또한 노력해야 할 점은 그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부지런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2장 2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현대인의 성경) “그런 여러분이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여러분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한 이유는 바리새인들이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은 가르치기를 좋아하였던 것처럼 로마 교회 성도들 중 유대인 성도들이 그러지 않길 원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그들이 바울의 권면을 듣지 않고 바리새인들처럼 다른 사람들은 가르치기를 좋아하면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았다면 로마 교회 안에 유대인 성도들은 이방인 성도들 앞에서 자기 자신들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 그들 앞에서 교만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만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겨서도 아니 됩니다. 자기 자신이 지혜로운 자라고 스스로 믿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혹여나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좌를 범한다면 자신의 죄를 깨닫고 자복하며 회개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오히려 겸손하여 자기 자신을 살피되 철저하게 살핍니다. 이러한 지혜로운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인이 권력을 잡는 것을 기뻐하였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립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의로운 자가 승리하는 것을 기뻐한다는 말입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책 “영적생활”에서 권력을 남용하는 부모에 대해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권력을 남용하는 부모는 어린 아이에게 자기의 개성을 억지로 강요하며 어린 아이의 인격을 묵살합니다. 그런 유의 부모들은 아이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고 기대합니다. 그것은 주로 소유욕이라 불려집니다.” 이러한 소유욕을 가지고 자녀를 컨트롤하는 권력을 남용하는 부모 밑에서 자라나는 자녀는 심리적으로도 컨디셔닝에 걸려 살지 않나 생각합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정신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아이가 자라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결국 건강하지 못한 정신으로 자라나는 자녀는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도 어른 구실을 제대로 잘 못할 확률이 많습니다. 그래서 제 개인적인 생각은 우리 부모들은 하나님께 받은 신적 권위로 우리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그 권위를 남용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자녀의 인격을 존중해야 하며 억지로 그 자녀를 강요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나친 기대감을 가지고 자녀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가정뿐만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담임 목사님이 권력을 남용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권력을 남용하는 목사님으로 인해 교인들이 상처를 입고 힘들어 하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교인들은 그 목사님을 피할 수밖에 없고 더 나아가서 그 목사님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특히 부교역자 목사님들은 더 할 것입니다. 어떻게 자신들의 인격을 묵살하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면서 억지도 일을 강요하고 있는 담임 목사님하고 함께 사역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래 못 견딜 것입니다. 그러면 한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뭐 멀리 볼 필요가 있나요, 북한을 보십시오. 독재가가 권력을 남용하면서 그 나라를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있으니 그 나라 시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겠습니까. 그 나라의 시민들이 무슨 기쁨과 낙으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8장 12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득의하면 큰 영화가 있고 악인이 일어나면 사람이 숨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자가 승리하면 모든 사람이 기뻐하지만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은 숨어 살기 마련이다”]. 여기서 잠언 기자는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먼저 의인에 관한 말씀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의인을 쓰시므로 의인들이 기뻐하되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의인들에게 은혜와 축복을 크게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박윤선). 특히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지도자들을 의인들로 세우시사 그들로 하여금 그 나라를 다스리게 하실 때 그 나라에는 질서와 공의가 있기에 시민들이 기뻐할 수밖에 없습니다(Walvoord).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해 주시는 것이지 않습니까.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에 따라 돕는 은혜를 크게 베풀어 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쓰임 받는 우리에게 큰 축복을 베풀어 주시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새찬송가 303장 “날 위하여 십자가의”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1절) “날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대신 죽은 주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죄에서 구속함을 받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우리의 기쁨은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주님께 쓰임 받을 때에 우리는 기뻐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해 주시면서 그 때 그 때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우리가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 잠언 11장 10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사람이 잘되면 온 시민이 즐거워하고 …”]. 그러나 악인이 일어나면, 즉 악인이 권력을 잡으면 사람들이 숨어 살기 마련입니다(28:12, 28). 그 이유는 권력은 잡은 악인은 교만하여 백성들을 압제하기 때문입니다(박윤선). 그래서 잠언 29장 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많아지면 백성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권세를 잡으면 백성이 탄식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의로운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이 즐거워하지만 악한 자가 권력을 잡으면 백성들이 탄식한다”]. 실제로 지금 악인이 권세를 잡은 북한이나 시리아 같은 나라의 백성들은 얼마나 탄식을 하고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의인들을 우리나라 지도자로 세워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시민들은 기뻐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가정의 가장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의인으로 세워주시길 때 그 가정과 교회에는 질서와 공의가 있으므로 온 가족 식구들과 교회 식구들이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 잠언 14장 34절을 보십시오: “공의는 나라를 영화롭게 하고 죄는 백성을 욕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의는 나라를 높여도 죄는 백성을 부끄럽게 한다”]. 주님께서 의인들을 나라 지도자로 세워주셔서 우리나라가 영화롭게 되길 기원합니다. 결코 죄를 짓는 지도자들이 되므로 우리 시민들을 욕되게(부끄럽게)하지 않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28:14).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입니다(13절). 우리는 본문 잠언 28장 8-14절 말씀 중심으로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자복 하고 버리는 죄를 한 5가지로 묵상했습니다: (1)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립니다(8절). 즉,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깁니다. (2)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가증한 기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립니다(9절). 즉,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을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3)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불성실함을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림(10절). 즉,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성실하고 정직합니다. (4)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긴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립니다(11절). 즉,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철저하게 살핍니다. (5)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악인이 권력을 잡는 것을 기뻐하였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며 버립니다(12절). 즉,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의로운 자가 승리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로 세움을 받을 수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