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

 

 

 

[잠언 281-7]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무엇을 깨닫고 계십니까? 혹시 여러분의 삶 속에서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여러분 자신에 대한 깨달음을 주시고 계시는 것이 있는지요? 저의 경우에는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제 자신의 미련함을 깨닫게 해주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야고보서 1장 5절인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저는 성경에 있는 지혜의 책들을 몇 년 전부터 매주 수요기도회 때마다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혜의 책을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오히려 저의 미련함이 더 들춰지는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더욱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개인 블로그에 들어가 “깨달음”이란 글을 찾기(search)에 적어서 눌러보았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2006년 4월 2일에 쓴 글이 떠서 읽어보았습니다. 그 글 내용은 제가 주일 한국어 예배 설교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깨달음을 적은 내용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사도행전 7장 9-16절 말씀 중심으로 “요셉의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설교를 했었는데 요셉의 하나님은 첫 번째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임을 선포하다가 귀한 깨달음을 받았습니다. 그 깨달음이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창 39:2, 3, 23)는 말씀 가운데서 성경에서 말씀하는 형통은 요셉의 환경에 변화라기보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환경은 애굽 군대장관 보디발을 섬기는 종이였고(2-3절) 또한 나중에 그는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있었습니다(23절). 이러한 상황에 놓여 있었던 요셉을 우리는 형통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은 문제 해결,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의 환경 변화가 될 때에 하나님께서 형통을 복을 주셨구나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범사에 형통케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통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난 날 아니면 요즘에 여러분이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깨달음은 무엇인가요? 오늘 본문 잠언 28장 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정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이란 제목 아래 과연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은 무엇인지 한 4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은 의인은 담대하다 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1절을 보십시오: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악인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치지만 의로운 사람은 사자처럼 담대하다”].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원로 목사님이 계시는 선교지에서 현지인 일군들에게 요한복음을 가르치는 중에 요한복음 16장 33절 말씀까지 가르친 후에 경찰 등 사람들이 들이 닥쳤던 그 때 그 상황이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 때 좀 두려운 상황이었는데 제 마음에 생각난 말씀은 그 현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쳤던 요한복음 16장 33절이었습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내가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가르쳤는데 내가 겁먹어서 되겠는가. 담대해야 겠다’라고 마음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그래서 저는 담대하게 행동한답시고 제가 머무르고 있었던 방에서 이불을 덮고 잠자는 척 하다가 경찰이 들어왔을 때 ‘미국 여권을 보여줘서 미국 시권자임을 영어로 밝히면 그 사람들이 떠나겠지’라는 생각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제 여권을 보여주면서 영어로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오히려 그게 문제가 되어서 경찰서에 나오라는 말까지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오늘 본문 잠언 28장 1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지금 잠언 기자는 “악인”과 “의인”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는 악인의 도망함과 의인의 담대함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악인이 도망할까요? 쫓아오는 자도 없는데 왜 악인은 도망할까요? 죄를 졌기 때문이 아닐까요? 죄를 지면 우리 인간의 본능은 죄를 숨기고 그 범한 죄의 댓가(형벌)로 인하여 두려움 속에 거하기에 편안히 잠을 잘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속담에 “때린 놈은 다릴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릴 뻗고 잔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는 맞아봐서 다릴 뻗고 잠을 잤지만 저를 때린 사람은 저를 때리고 나서 그 날 밤 다릴 뻗고 잠을 잘 잤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ㅎㅎ 성경 레위기 26장 17절을 보면 오늘 본문 잠언 28장 1절 상반절에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말씀의 좋은 예를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좋은 예란 바로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또한 하나님의 모든 명령도 준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배반한 것입니다(레26:14-15). 그 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리신 징벌은 무엇이었습니까? 레위기 26장 17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하나님의 징벌 중 하나는 하나님께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은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36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들에 대해서는 끊임없는 두려움으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겠다. 그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도 놀라 칼날을 피해 도망가는 자처럼 달아날 것이며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다”(현대인의 성경). 결국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에도 놀라 칼날을 피해 도망가는 자처럼 달아”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끊임없는 두려움으로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합니다(잠 28:1).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할 수 있을까요? 그 이유는 의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지은 죄가 없기에 양심이 떳떳한 가운데서 악인처럼 두려움 속에서 도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깨끗한 양심을 가진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자같이 담대하기 위해선 깨끗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죄를 범하면 하나님께서는 끊임없는 두려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하시사 쉽게 놀라며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과 사람에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써야 합니다(행 24:16). 또한 우리는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23:1). 그리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얻은 우리는 사자 같이 담대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해 지는 원인이 한 2가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1) 우리가 우리 자신의 강함을 느껴서 담대함이 생기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우리 자신의 연약을 느낀 데서 생긴다는 것입니다. 곧, 우리가 우리의 연약을 느끼고 하나님만 믿을 때에 우리는 의를 얻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장 9-10절에서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자신이 약함을 알기 때문에 주님을 전적으로 믿게 되어 강해지고 담대해 집니다. (2)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강하고 담대해 진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6-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하여주시므로(요 14:21, 23) 우리로 하여금 담대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지만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약할 때 강함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므로 말미암아 담대하게 살아가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은 총명 있고 지식 있는 지도자가 있으면 나라가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미국 땅에 살면서 부족하나마 사랑하는 고국 대한민국과 이 미국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할 때 특히 우리는 두 나라의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만큼 한 나라의 대통령의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이 한 교회의 담임하는 목사로서 제 자신뿐만 한 나라의 지도자인 대통령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성품(character)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의 성품의 변화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특히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본받게 해 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미국이나 한국이나 대통령을 뽑을 때 중요시하게 보는 것은 그 사람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그 성품에 있어서 저는 그 사람의 진실성을 어떠한지를 보게 됩니다. 만일 그 대통령 후보가 선거철 때 이런 저런 공약을 시민들에게 하면서 나중에 대통령이 되어서 지켜 나아가지 않는다면 우리 시민들에 입장에선 충분히 그 사람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제 개인적인 생각은 그 이전에도 그 대통령 후보가 과연 진실한 사람인지 아니면 거짓말을 서슴없이 계속 하는 사람인지 좀 알 수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그 후보에 대한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서 들을 때 적어도 조금이나마 그 사람의 성품에 대해서 우리 각자 나름대로 판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진실성 외에도 우리가 종종 우리 나라 대통령과 그의 지도부를 위해서 기도할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도자들이 되길 기도하곤 합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스러운 지도자들일 때 이 나라를 하나님의 뜻대로 지혜롭게 잘 다스릴 수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현실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대통령을 볼 때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가 보이지 않고(우리가 보기엔?) 성품도 과연 그들이 진실한지 의문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충분히 실망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다가 더 실망스러운 현실은 정치인들이 서로 다투고 싸우고 비난하고 등등 그러한 모습들을 뉴스를 통해서 볼 때에 한 숨이 나올 때가 많습니다. 왜 이렇게 하나가 되지 못하고 당파들이 나뉘어서 서로 비난하고 다투는지, 그러면서 어떻게 민생을 돌보면서 시민들을 위할 수 있는지 우리는 희망을 잃게 되기까지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2절을 보십시오: “나라 안에 죄가 있으면 정권이 자주 교체되어도 총명하고 지식 있는 지도자가 있으면 나라가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다”(현대인의 성경)[“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저는 이 말씀을 2개로 나눠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나라 안에 죄가 있으면 정권이 자주 교체가 된다는 말씀입니다(2).

 

나라 안에 어떠한 죄가 있을 수 있습니까? 부정부패뿐만 아니라 모든 거짓과 악행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죄를 범하는 나라 지도자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중에 오늘 본문 잠언 28장 3절을 보면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관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이 관리는 “가난한 자를 학대 하는 가난한 자”라고 개혁개정 번역에 말씀하고 있는데 그 뜻은 그 관리는 지난날에 자신도 가난한 자였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관리가 되어서 가난한 자들을 이해하고 체휼하여 도와주고 그래야 하는데 오히려 그들을 학대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는 오늘 본문 2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총명하고 지식이 있는 지도자”가 결코 아입니다(현대인의 성경). 미련한 지도자 입니다. 이러한 지도자는 오늘 본문 3절 하반절을 보면 “곡식을 남기지 아니하는 폭우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농작물을 휩쓰는 폭우와 같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끔 우리가 한국 뉴스를 보다보면 폭우로 말미암아 농작물이 다 망가져서 농사짓는 사람들이 인터뷰하는 것을 봅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관리가 마치 농산물을 망치는 폭우와 같다는 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한 나라 지도자들이 많으면 그 서민들은 얼마나 고생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8장 2절의 말씀을 개역개정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나라는 죄가 있으면 주관자가 많아져도 ….” 저는 이 번역을 현대인의 성경 변역인 “나라 안에 죄가 있으면 정권이 자주 교체되어도”란 말씀과 좀 비교해 보았습니다. 죄가 있으면 한 나라에 주관자가 많아진다는 번역과 정권이 자주 교체된다는 번역을 비교해 볼 때 그 의미는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주관자가 많이 진다는 의미나 정권이 자주 교제된다는 말이나 둘 다다 죄로 말미암아 나라가 안정적이지(stable) 못한 것을 의미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죄가 있으면 한 나라의 지도부가 얼마나 갈라지고 나뉘어져서 당파 싸움을 하겠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곧, 나라에 당파가 많은 것은 그 나라에 벌써 있었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박윤선). 그 예로 박윤선 박사님은 열왕기상 11장과 12장에 나오는 솔로몬 왕이 우상 섬긴 죄 값으로 그의 사후에 이스라엘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진 것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성경은 두 번이나 이스라엘 나라의 분열이 하나님의 벌로 되었다고 말씀하였습니다(왕상 12:15, 24). “그러므로 어느 나라에서든지 내란이나 당파가 일어나서 평안하지 못할 때에는 통치자를 위시하여 모든 국민은 그 나라의 죄악을 깊이 반성하고 회개해야 된다”고 말했습니다(박윤선). 여러분은 이 박윤선 박사님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우리가 보기에도 분열된 고국과 미국을 생각할 때 우리 모두가 우리나라의 죄악을 깊이 반성하고 하나님께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2장 25절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느 나라든지 서로 싸워 갈라지면 망하고 그 어떤 마을이나 집안도 서로 싸워 갈라지면 오래가지 못한다”(현대인의 성경)(“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가정이나 교회뿐만 아니라 한 나라도 서로 싸워 갈라지면 어떻게 견고히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분쟁으로 인하여 분열되어 있는 가정이나 교회나 나라는 결코 견고히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잠언 28장 2절에서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나라 안에 죄가 있으면 정권이 자주 교체”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정권이 자주 교체되면 그 나라는 견고히 서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죄로 인하여 그 나라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열되어 있는 나라는 결코 안정적일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시민들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시민들은 염려와 걱정 속에서 정치권에서의 끊임없는 당파 싸움으로 인하여 심신이 지치고 낙심하며 좌절감을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2) 총명하고 지식 있는 지도자가 있으면 나라가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다는 말씀입니다(28:2).

 

이 말씀을 개혁개정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 명철과 지식 있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장구하게 되느니라.” 한 나라의 지도자가 총명(명철)하고 지식이 있으면 그 나라는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다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한 나라의 시민으로서 이러한 지도자가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되어서 하루속히 나라가 안정을 되찾길 원하고 있습니까. 대통령뿐만 아니라 대통령을 보좌하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총명(명철)과 지식을 가지고 우리나라를 이끌어 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반대로 대통령이던 그를 보좌하는 사람들이 지식도 부족하고 총명하지 못해서 그들의 어리석음 가운데 자신들의 사리사욕만을 채우려고 한다면 이 나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총명(명철)과 지식(지혜)를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적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지혜를 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가 잠언 20장 26-30절 말씀 중심으로 “지혜로운 왕”이란 제목 아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 5개를 받았습니다. 짧게 복습을 합니다:

 

(a) 지혜로운 왕은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여 분리한 후 악인을 벌합니다(26).

 

만일 한 나라의 대통령이 선인과 악인을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 나라가 어찌되겠습니까. 그래서 정부의 중요한 직책에 악한 사람들을 세워 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솔로몬 왕이 하나님께 구한 것은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였습니다(왕상 3:11). 우리가 우리나라 대통령을 위해 기도할 때 솔로몬처럼 “선악을 분별하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그 대통령이 나라를 잘 다스려서 질서와 공의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b) 지혜로운 왕은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나라를 다스립니다(20:27).

지혜로운 왕은 의인으로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리므로 악을 행하는 악인의 어두움을 들춰내되 그 악인의 깊은 속까지도 살핍니다. 그리고 그는 공의로 그 악인들을 벌하므로 악인의 등불을 끕니다. 다시 말하면, 지혜로운 왕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한 나라를 잘 다스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인의 빛이 환하게 비췰 것이며 악인의 등불은 꺼질 것입니다.

 

(c) 지혜로운 왕은 인자와 진리로 스스로 보호합니다(28).

 

지혜로운 왕은 인자함과 진리로 말미암아 자기의 왕위도 견고하게 할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사랑하며 백성들에게 약속한 바를 신실하게 지켜 행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왕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또한 자기의 왕위를 견고하게 합니다.

 

(d) 지혜로운 왕은 힘과 지혜가 있습니다(29).

 

다시 말하면, 지혜로운 왕은 힘뿐만 아니라 경험을 통한 지혜도 있다는 말입니다.

 

(e) 지혜로운 왕은 징계를 합니다(30).

 

징계하되 그는 자기 백성의 죄악을 없애고자 매를 들어 상하게 때립니다. 그가 그리하는 이유는 “매는 사람 속에 깊이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인과 악인을 구별하고 분리하여 악인을 공의로 징계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나라의 시민을 보호하며 나라의 질서를 세웁니다.

 

우리나라 대통령이 이러한 지혜로운 대통령이 되길 원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명철과 지식이 있는 지혜로운 지도자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세워질 때 그 나라고 오랫동안 인정을 유지한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나라 안에 죄가 있으면, 특히 대통령이나 그의 보좌관들 및 지도자들 가운데 죄가 있으면 그 정권은 오래가지 못하고 교체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을 찾아야 하며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나라 지도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명철과 지식이 있길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은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엔 부유한 것이 중요합니까 아니면 성실(정직)하게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만일 여러분이 아무리 성실(정직)하게 일을 한다고 해도 부자가 될 수 없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정직을 버리고 거짓되게 말하고 행해서라도 부자가 되고자 애쓰시겠습니까? 성경을 보면 부하고 가난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실히 행하는냐, 지혜롭게 행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우리에게 교훈해 주고 있습니다. 성경 잠언 19장 1절을 보십시오: “가난하지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이 입술이 거짓되고 미련한 사람보다 낫다”(현대인의 성경). 전도서 4장 13절을 보십시오: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젊은이가 늙고 둔하여 경고를 더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이 말씀들을 보면 성경은 가난해도 진실하게 사는 지혜로운 사람이 거짓되고 둔하여 경고를 받을 줄 모르는 미련한 사람보다 낫다고 우리에게 교훈해주고 있습니다. 그만큼 진실성과 지혜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8장 6절을 보십시오: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나으니라”[(현대인의 성경)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사는 자가 거짓된 부자보다 낫다”]. 이 말씀을 원어 히브리어로 개역하면 “진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는 두 길로 속이는 부자보다 나으니라”입니다(박윤선). 여기서 ‘두 길로 행한다’는 말은 “실상 그가 악한 길로 행하면서 선한 길을 가는 체 하기만 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박윤선). 그러면 이렇게 두 길로 행하는 부유한 자가 행하는 악한 길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 28장 3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두 길로 행하는 부유한 자가 행하는 악한 길 중에 하나는 바로 “가난한 자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학대하되 좀 더 구체적인 예는 야고보서 2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괴롭히며 법정으로 끌어가는 사람들은 부자들이 아닙니까?”(현대인의 성경). 두 길로 행하는 부유한 자는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함에 있어서 그들을 업신여길 뿐만 아니라 그들을 괴롭히며 또한 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기 까지 하여 해를 입힌다는 것입니다. 상상이 되지 않으십니까? 겉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행을 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보지 않은 뒤에서는 이렇게 가난한 자들을 (교묘하게) 학대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 잠언 28장 6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 즉 두 길로 행하는 부자들입니다.

 

여러분은 두 길로 행하는 부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겉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행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실상 사람들이 모르게 뒤에선 악행을 일삼아서 재물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이러한 자보다 진실히 행하는 가난한 자가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부함과 가난함 보다 진실히 행하느냐 아니면 위선적으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면서 거짓되게 행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하나님을 찾는 자는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찾는 그리스도인들은 이 진리를 깨닫고 가난할지라도 진실하고 성실하게 행하고자 힘쓰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자가 되기를 애쓰기보다 진실하고 성실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두 길로 행하는 부자들이 되면 아니 됩니다. 겉으로는 사람들 앞에서 선한 길을 가는체 하면서 실상은 악한 길로 행하는 부자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으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자”가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자보다” 낫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 잠언 19장 22절 새번역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서 바랄 것은 성실이다. 거짓말쟁이가 되느니, 차라리 가난뱅이가 되는 것이 낫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는 어떠한 사람입니까? 아마도 “율법주의자”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신약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들을 생각할 때 “율법주의자”였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율법주의자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그들이 철저히 지켰다는 율법은 하나님의 법이 아니라 인간의 전통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마 15:3)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율법주의자였던 예수님 당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철저히 지켰던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법(계명)을 자기들 나름대로 철저히 지켰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하여 율법주의자였던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리켜 “위선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7:5, 15:7, 눅 6:42, 12:56, etc.). 예를 들어 마태복음 23장 27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위선자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다. 회칠한 무덤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해골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예수님 보시기에 율법주의자들이었던 바리새인들은 위선자들로서 회칠한 무덤같이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였지만 속은 해골과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도행전 23장 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위선자야, 하나님이 너를 치실 것이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재판한다고 거기에 앉아서 오히려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고 하느냐?'(현대인의 성경). 실제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자랑하며(롬 2:23)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21절). 예를 들어,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도둑질하지 말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은 도둑질을 하였습니다(21절). 그래서 우리는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는 심지어 “율법”에 대해서도 그리 긍정적인 생각이 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특히 “율법”하면 우리는 옛 언약 시대인 구약을 생각하기에 예수님이 새언약 시대인 신약에 와서는 율법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는 모세의 10계명을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는 이중계명으로 대치하셨다고 생각하기에 더 이상 10계명을 중요시하지 않고(심지어 무시하고)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지키고자 애쓰는 경향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균형을 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는 구약에 나오는 모세의 10계명이나 예수님의 이중계명이나 지켜 행해야 합니다. 물론 구약에 나오는 모든 율법을 지금도 다 지켜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지금도 지켜야 할 율법이 있는가하면(continuity) 이젠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는 율법도 있습니다(discontinuity). 예를 들어, 구약에서 말씀하고 있는 10계명 같은 율법은 지금도 우리가 철저히 지키려고 노력해야 하겠지만 구약에 나오는 음식에 관한 법들은 이젠 더 이상 지키지 않아도 되는 법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율법의 기능’입니다. 칼빈은 율법의 기능이 3가지 있다고 말했습니다: (1) 율법의 기능은 죄를 깨우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2) 율법은 우리의 양심과 함께 사람들이 지독하게 타락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3) 믿음으로 구원 받은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것입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28장 7절을 보십시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는 자는 아비를 욕되게 하는 자니라”[(현대인의 성경)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지만 건달과 사귀는 자는 자기 아버지에게 수치가 된다”]. 무슨 뜻입니까? 먼저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로운 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잠언 1장 7절 상반절에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여기서 “지식”은 “지혜”를 가리킴).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는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음식을 탐하는 자와 사귀”지 않습니다(28:7). 여기서 “음식을 탐하는 자”란 마치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세 번째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 탕자처럼 방탕하여 재산을 없애버리는 자를 가리킵니다(잠 23:20-21)(박윤선).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가 이렇게 방탕하여 재산을 없애버리는 자와 사귀지 않은 이유는 그는 악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악을 미워하는 것임을 알기에(8:13) 탕자와 같은 방탕하여 재산을 없애는 자와 사귀지 않습니다. 성경 잠언 3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그리고 성경 욥기 28장 2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보가 주를 경외함이 지혜요 악을 떠남이 명철이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한 지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요 또한 악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잠언 28장 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로운 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방탕하여 재산을 없애버리는 “음식을 탐하는 자”를 사귀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자에게 떠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하늘의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는 첫째로 야고보서 1장 5절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성경 야고보서 1장 5절을 보십시오: “여러분 가운데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꾸짖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지혜가 부족함을 좀 철저하게 느낄 때 우리는 우리를 꾸짖지 않으시고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계속해서 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잠언 28장 7절 상반절 말씀처럼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율법을 지키는 자”).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율법을 지켜 행할 때 지혜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이것이 여러 민족 앞에서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현대인의 성경) “이 모든 것을 잘 준수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이 지혜와 지식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명성을 떨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이 모든 법에 대해서 듣고 과연 이스라엘 백성은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민족이구나! 하고 감탄할 것입니다.”](신 4:6). 이 말씀대로 우리는 율법을 지켜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지혜와 총명이 뛰어난 자들이다’라고 감탄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모세는 그 다음 구절인 신명기 4장 7절에 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이 가까이 함을 얻은 큰 나라가 어디 있느냐”[(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가까이하시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와 같은 신을 모신 민족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이 두 구절(신 4:6, 7) 말씀을 생각할 때 역시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말씀 순종과 기도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혜에 관련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해야 한다는 교훈을 다시 한 번 얻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지혜로워지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인을 대적합니다. 성경 잠언 28장 4절을 보십시오: “율법을 버린 자는 악인을 칭찬하나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하느니라.” 여러분, 율법을 지키는 자가 어떻게 악인을 칭찬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악을 행하는 자를 어떻게 율법을 지키는 자가 칭찬할 수가 있겠습니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악인을 대적한다고 말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오늘 본문 잠언 28장 5절 말씀처럼 율법을 지키는 지혜로운 자는 “정의”(justice)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찾고(5절) 율법을 지키는 지혜로운 자(7절)는 악인이 깨닫지 못하는 정의를 깨닫기에(5절) 악인을 대적한다는 말입니다(4절).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는 정의를 행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찾는 자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미워하고 악인을 대적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방탕하여 재산을 없애버리는 탕자와 같은 자를 사귀지 않습니다(7절). 그 이유는 지혜로운 자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것인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7절).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저에게 은혜로 주시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 기쁨이란 성경책을 피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다가 성령님께서 귀한 깨달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깨닫게 된 말씀을 지켜 행하므로(순종하므로) 누리는 기쁨이 말씀을 깨달아서 누리는 기쁨보다 너무나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잠언 28장 1-7절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이란 제목 아래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 4가지를 묵상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은 의인은 담대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은 총명 있고 지식 있는 지도자가 있으면 나라가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한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은 가난하여도 성실하게 행하는 것이 부유하면서 굽게 행하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넷째로, 하나님을 찾는 자가 깨닫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