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지지 않는 나의 미련

 

 

 

[잠언 2720-27]

 

 

제가 몇 달 전부터 발 무좀으로 좀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의사 선생님도 만나서 약 처방을 받아 약도 바르고 있는데도 이번엔 왼쪽 발가락 사이에 난 무좀이 좀 오래갔습니다. 그러다가 몇 주 전부터는 같은 발 외쪽 뒤꿈치 피부가 갈라져서 저는 무좀인 줄 알고 같은 무좀약을 바르곤 했는데 제 아내가 보더니 이것은 무좀이 아니라 때가 많아서 피부가 갈라진 거라고 하면서 뜨거운 물에 발을 담근 후 때를 벗겨야 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내의 말대로 그 다음 날 운동하러 가서 운동 후 제 발을 뜨거운 물에 담가서 좀 있다가 샤워를 하면서 제 왼발 뒤꿈치에서 때를 밀어내려고 했더니 그렇게 잘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제 발 뒤꿈치에 때가 오랫동안 밀지 않아 많이 굳어 있어서 그런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이와 같이, 저의 마음과 양심도 많이 굳어 있지 않나 자아성찰해 봅니다. 저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저의 완고하고 강퍅한 마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에게 “새 마음”을 주셨다고 믿습니다(겔 36:26). 하나님께서는 저의 “굳은 마음”을 제거하시고 저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주셨습니다(26절). 하나님께서는 저의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해 주시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11:19). 그런데 문제는 제가 제 마음 관리를 게을리 해서 제 마음의 미련함의 때가 많이 묻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기보다(골 4:5) 미련하게 행하여 세월을 허송하면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대상 21:8). 저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서 들춰내시는 저의 미련함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지혜로 이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가고 싶은데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마치 제 발 뒤꿈치에서 때가 잘 벗겨지지 않듯이 그만큼 저는 제 미련함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22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아니하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제가 어릴 때 본 기억은 곡식을 절구 안에 넣고 방망이처럼 생긴 절구공이로 절구 안에 곡식을 쳐 찧는 모습입니다. 저는 어릴 때 왜 아주머니들이 그렇게 하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했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이유는 곡물로부터 껍데기를 분리하거나 알곡을 찧어서 곱게 만들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인터넷). 결국 공이질을 하는 목적은 알곡을 껍데기와 분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곡식을 절구에 넣고 찧으면 그 안에 있는 곡식은 알곡과 껍데기를 분리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알곡과 껍데기를 체로 쳐서 껍데기를 날려 버리고, 곡물을 가려냅니다(인터넷). 그런데 오늘 본문 잠언 27장 22절에서 잠언 기자는 “미련한 자를 곡물과 함께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을지라도 그의 미련은 벗겨지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미련한 자의 미련함은 없애기가 매우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벗겨지지 않는 나의 미련”이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말씀 잠언 27장 20-24절 말씀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그 러면서 저는 나의 미련 4가지를 말씀에 비취 나누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인 4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여러분도 저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 자신을 비춰보면서 여러분 자신의 미련함을 깨달아 알아 우리 모두가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의 교훈을 받아 순종하므로 지혜로운 그리스도인들로 세움 받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첫째로, 나의 미련은 만족함이 없는 나의 눈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20절을 보십시오: “스올과 아바돈은 만족함이 없고 사람의 눈도 만족함이 없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죽음과 멸망이 만족함을 모르듯이 사람의 눈도 만족할 줄 모른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눈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만일 저와 여러분이 시각장애인이 된다면 말입니다. 저는 실제로 이 생각을 몇 번이고 해보았습니다: ‘만일 내가 시각장애인이 된다면 ….”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교회에 있다가 점심 식사 음식을 사러 식당을 향하여 가다보면 우리 교회 근처에 있는 시각장애인 기관 때문인지 자주 보는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지팡이를 손에 쥐고 걸어가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 니다. 저는 그 사람들을 볼 때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저 또한 만일 저 사람들처럼 눈이 안보이면 어떻게 될까 라는 생각을 할 때 저는 솔직히 두렵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바로 “안목의 정욕”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1서 2장 16절을 보십시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세상으로부터 온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쓰여 있는데 현대인의 성경은 “눈의 욕심”이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저는 이 눈의 욕심 때문에 시각장애인이 된다면 더 이상 눈의 욕심을 부리지 못할 텐데 라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여러분, “눈의 욕심” 또는 “안목의 정욕”하면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누가 생각이 나십니까? 저는 먼저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류 최초 여자인 하와가 생각납니다. 그녀는 뱀의 미혹을 받아 에덴동산 중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보고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보기에 아름다우며”(현대인의 성경)]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라고 여겼습니다(6절). 그녀는 그 나무를 보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뱀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았고 그 나무가 보암직도 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안목의 정욕(눈의 욕심)에 이끌려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인 아담에게도 그 열매를 주므로 그도 먹어(6절)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습니다. “안목의 정욕”(눈의 욕심)하면 두 번째로 생각나는 사람은 바로 다윗입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잘 아는 밧세바를 범하게 된 성경 이야기를 보면 다윗이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나 예루살렘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한 여인이 유부녀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것을 보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삼하 11:2)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다윗은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서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인 밧세바(3절)를 자기에게로 데려오게 하여 그녀와 동침했습니다(4절). 그리고 그녀가 임신했다고 하니까(5절) 그녀의 남편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오게 만들어 그로 하여금 그의 집으로 내려가 밧세바와 동침케 하여 그 아기가 그 두부부의 아기인 것처럼 꾸미려고 시도까지 했습니다(6-13절). 그러나 이 시도가 안 되니까 다윗은 결국에 가서는 요압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서 우리아를 죽이게 만들기까지 했습니다(14-17절). 성경은 이렇게 다윗이 행한 일이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7절).

 

신약성경 마태복음 5장 27-2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또 율법에는 '간음하지 말아라.' 고 쓰여 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정욕의 눈으로 여자를 바라보는 사람은) 이미 마음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여인이 심히 아름다워 보여서 정욕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이미 마음으로 그녀와 간음한 것입니다. 이것은 꼭 남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여자도 지나가는 멋진 남자를 정욕의 눈으로 바라보았다면 그것은 이미 마음을 그와 간음한 것입니다. 언젠가 저는 전도서 7장 7절 말씀 중심으로 왜 사람들이 불륜의 관계를 맺는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탐욕”입니다. 성경 출애굽기 20장 17절을 보면 모세의 10계명 중 열 번째 계명이 적혀있습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명하셨는데 왜 우리는 탐하는 것일까요? 그 원인은 우리 안에 있는 욕심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욕심이 있으면 우리는 우리 아내의 품을 항상 만족하게 여기지 않습니다(잠 5:19). 그 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 안에 욕심이 있으면 우리는 분수에 넘치게 다른 여자를 탐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우리 아내 아닌 다른 여자를 쳐다봅니다. 그리고 우리의 귀는 그녀에게 대해서 듣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은 아무리 많은 여자를 보고 들어도 만족함을 모릅니다. 성경 전도서 1장 8절을 보십시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는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가득 차지 아니하도다.” 그래서 사탄은 우리를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으로 꾀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합니다(벧후 2:18). 죄를 짓게 하되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여인을 탐내게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불륜의 관계를 맺는 원인은 탐욕입니다. 탐욕은 족한 줄을 모릅니다(사 56:11). 그러므로 탐욕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아내를 만족하게 여기지 못하고(잠 5:19) 우리 이웃의 아내를 탐내게 만듭니다(출 29:17).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탐욕으로 향하지 말아야 합니다(시 119:36). 성경은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골 3:5).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탐심을 물리쳐야 합니다(눅 12:15).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그의 책 “영적 광명”에서 ‘눈의 문제’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존스): "여러분의 눈이 문제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보면, 마음도 그것을 따라갑니다. ... 만일 여러분으로 하여금 유혹을 받게 하는 것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러한 것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 여러분의 눈이 어떤 것들을 탐하지 말게 하십시오. 똑바로 앞만 바라보는 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십시오. ... 여러분은 눈과 언약을 맺고 앞만 똑바로 바라보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이 지시하는 방향, 거룩과 하늘만 주목하고 나가십시오." 성경 욥기 31장 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현대인의 성경) “내가 내 눈과 서약하였으니 어찌 처녀를 정욕의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눈과 약속해야 합니다. 더 이상 다른 여자/남자를 정욕의 눈으로 보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구하는 가운데 우리가 맺은 약속(서약)대로 정욕의 눈으로 다른 이성을 쳐다보지 않는데 헌신하고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만족함이 없는 눈으로(잠 27:20) 눈의 욕심(요일 2:16)을 따라 음란의 죄를 끊임없이 범할 것입니다(벧후 2:14).

 

만일 우리의 미련함이 만족할 수 없는 우리의 눈이라면 우리는 하나님께 이 미련함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히 12:2). 그리할 때 우리는 만족할 수 없는 안목의 정욕(눈의 욕심)을 극복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나의 미련은 사람들의 칭찬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들어서 아시는 말 있지요?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요? 켄 블랜차드란 사람이 쓴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칭찬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칭찬의 위력과 칭찬을 필요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인터넷). 이 책은 가정과 회사에서 인간관계로 고민하던 웨스 킹슬리라는 영업 회사 중역이 플로리다에 출장을 가서 씨 월드 해양 관에서 범고래의 멋진 쇼를 보고 무개 3톤이 넘는 범고래를 어떻게 훈련 시켰는지 알고 싶어 조련사를 찾아가서 그 훈련비법을 듣고, 자신의 가정과 회사에 적용시킴으로써 가정의 화목과 목표한 영업실적을 훌륭하게 달성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웨스 킹슬리가 범고래 조련사인 데이브는 웨스를 통해서 깨달은 점은 범고래와의 관계는 인간 사이의 관계와 다르지 않으며, 멋진 쇼를 하게 만드는 비결은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인 관심과 칭찬, 그리고 격려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인간관계에서 긍정적 관심과 칭찬 그리고 격려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인터넷).

 

어느 누구도 칭찬 받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성향은 근대 심리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윌리엄 제임스가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인터넷). 어느 한 설문 조사에서 ‘직장 생활에서 가장 행복을 느낄 때가 언제인가?’라고 물었더니 45%가 ‘칭찬 받을 때’라고 응답했다고 합니다(인터넷). 물론 그 칭찬이 지나쳐서 아부로 들리지 않는 이상 말입니다. 그런데 좀 웃긴 것은 우리 안에 본능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칭찬하므로 그 칭찬이 우리의 귀에 아부같이 들릴지라도 우리는 별로 기분이 나쁘지 않고 오히려 은근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 정도로 칭찬이라는 것은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칭찬”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두 가지를 좀 생각합니다. 첫째는, 저는 제 자신이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둘째는, 바로 오늘 본문 잠언 27장 21절 말씀입니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도가니와 풀무는 은이나 금을 단련하는 도구인데 사람을 단련하는 도구는 칭찬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칭찬”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 의미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인터넷): (1) 하나는, 사람의 자질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성경 사무엘상 18장 7절을 보면 이스라엘 여인들이 전쟁터에서 올라오는 사울 왕 일행을 보고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며 다윗을 칭찬합니다. 이것은 여인들이 다윗이 사울보다 전쟁 능력이 더 뛰어나다는 칭찬한 것입니다. 이렇게 칭찬이란 칭찬 받는 사람의 능력이나 자질이 우수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2) “칭찬”이란 단어의 또 다른 가능한 해석은 칭찬이란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내는 시험의 도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27장 21절 하반절을 공동번역은 “칭찬해 보아야 사람됨을 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즉, 칭찬을 받을 때 그 사람의 태도를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령 과시를 좋아하는 사람은 칭찬을 들으려고 애쓸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사람에게 계속해서 칭찬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은 칭찬에 굶주려서 칭찬을 받고자 애쓸 때에 한 마디의 사랑의 면책도 크게 상처를 입고 실망하여 시험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성경 잠언 27장 2절에서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말씀에서 배운 교훈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자화자찬을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21절을 보십시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7장 21절 하반절 말씀인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는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제 생각에 우리 사람들은 칭찬에 많이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다른 형제, 자매들 에게 칭찬을 받을 때에 기분이 좋고 기쁘지만 그 칭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우리 자신에게 돌릴 위험(유혹)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교인들의 칭찬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도 모르게 칭찬에 컨디셔닝이 되면 주님께 칭찬을 받기 위하여 주님의 교회를 섬기기보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봉사할 위험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칭찬 받기를 좋아하기보다 주님께 칭찬 받기를 좋아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다 주님 앞에 서서 회계할 때가 올 텐데 그 때 주님께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칭찬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마 18:23, 24; 25:14-30).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24:45). 그러면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은 누구입니까? 저는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우리는 진실한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한 마음(벧후 3:1)과 진실한 입술(잠 12:19)을 가지고 진실한 청지기(눅 12:42)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신실한 주님의 종이 되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책임을 신실하게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자를 주님께서 칭찬하십니다(수 22:3).

 

(2) 우리는 주님께 받은 달란트를 바로 가서사용하여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장 16-17절을 보십시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저는 “열매”를 생각할 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17-19절에서 말씀하신 “아름다운 열매”가 생각납니다. 저는 이 아름다운 열매를 한 3가지로 생각했습니다: (a)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14절).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저와 여러분이 맺는 아름다운 열매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21절). (b)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맺는 아름다운 열매란 성령님의 열매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을 보십시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이 성령님의 열매 중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서 예수님의 이중 계명인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를 순종하므로 천국 생활을 합니다. (c) 저와 여러분이 맺는 아름다운 열매(the good fruit)란 바로 선행(good deeds)입니다. 에베소서 2장 8-10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3)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25:4, 8. 9, 13) 주님을 재림을 준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는 말씀에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라고 말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로, 나의 미련은 게을러서 성실하게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유목민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재산은 무엇이었겠습니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가축들(예를 들어 양 떼와 소 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어느 무엇보다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양 떼나 소 떼를 부지런히 보살피며 돌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책임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목민들은 자기들의 가축들을 항상 마음에 두고 그것들을 부지런히 보살피고 돌봤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창세기 30장에 나오는 야곱입니다. 그가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인 라반에 집에 있으면서 라반의 가축을 쳤습니다(창30:29). 그 결과 야곱이 오기 전에 적었던 라반의 소유가 야곱이 오고 나서부터는 가축이 번성하여 떼를 이루었습니다(30절). 그 원인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에게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30절).

 

오늘 본문 잠언 27장 23절을 보십시오: “네 양 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 떼에게 마음을 두라”[(현대인이 성경) “너는 네 양떼의 형편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항상 네 소떼에 마음을 두어라”]. 무슨 뜻입니까?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사람이 마땅히 부귀와 권세를 의지하여 살지 말고 다만 자기의 실업에 부지런히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라”는 권면입니다(박윤선). 잠언 기자 당시 흔히 있었던 목축업에 종사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말씀을 하였을 때 그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왜 잠언 기자는 그들에게 부귀와 권세를 의지하여 살지 말고 자기의 실업에 부지런히 종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라는 식의 말을 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오늘 본문 24절에 이렇게 잠언 기자는 말했습니다: “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 즉, 그 이유는 부귀영화는 영원히 있지 못하고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도 부귀영화를 의지하면서 살지 말고 각자 자기의 일을 부지런히 성실하게 열심히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일하기 싫은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왜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가르쳤는지 아십니까? 그 이유는 그 교회 성도들 중에는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하는 성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규모 없이 행하여 일만 만들었습니다(11절). 이들이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일만 만들었던 이유, 즉 이들이 미련하게 게을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지 않고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잘못된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중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삐뚤어진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11-12절)[(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여러분 가운데 게을러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돌아다니며 문제만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명령하며 권합니다. 조용히 일하며 자기 생활비를 벌어서 살도록 하십시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에는 게으름에 대한 교훈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잠언 26장 15절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게으른 자는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에 갖다 넣기를 싫어한다"]. 또 다른 성경구절은 잠언 21장 25절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게으른 자들은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잠언 13장 4절에서 성경은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그는 마음은 원하는데 손을 게으르고 놀리기 때문이 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12:27)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합니다(19:24, 26:15). 웃기지 않습니까? 고기를 먹고 싶으면 사냥을 해서 짐승을 잡아야 하는데 마음으로만 원하고 실제로 사냥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분 웃기지 않습니까? 또한 어느 누가 배가 고픈데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합니까? 아니 그러면 아기처럼 누군가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여줘야 합니까? 이것은 게으름의 극치라 생각합니다. 마음은 원하는데 사냥도 하지 않고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는 것, 이것은 참으로 게으름 중의 게으름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게으른 사람을 가리켜 성경 잠언 19장 15절은 “태만한 사람”(an idle man), 즉, 나태하여 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게으른 자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합니다(21:25). 그 결과 게으른 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난이 오되 마치 피해자가 강도를 만나 압도당하는 것처럼 가난이 옵니다(24:34)(MacArthur).

여러분, 혹시나 우리에게 이러한 게으름이 있다면 오늘 본문 잠언 27장 23절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이러한 미련함을 다 벗겨버리고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릴 때 무엇을 생각하고 씨를 뿌릴까요? 분명히 농부는 가을의 추수 때를 생각하고 봄에 씨를 부지런히 뿌릴 것입니다. 농부는 봄에 씨를 뿌리고 부지런히 일하며 수고하는 이유는 바로 가을 추수 때에 곡식(참고: 딤후 2:6)이란 열매를 맺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약 5:7). 우리는 이러한 농부 마인드와 자세를 가지고 우리 각자에게 맡겨질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노동자들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수고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어떠한 결과가 있다고 오늘 본문 잠언 27장 25-27절은 말씀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1) 25절을 보십시오: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움이 돋나니 산에서 꼴을 거둘 것이니라.” 우리가 부지런히, 열심히 일을 할 때 마치 풀을 벤 후에는 새로 옴이 돋는 것처럼 우리에게는 새로운 성장(new growth)이 있을 것입니다(25절). 그 뿐만 아니라 마치 “산에서 꼴을 거둘 것”처럼 우리 또한 수고한 일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25절). (2) 26절을 보십시오: “어린 양의 털은 네 옷이 되며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며.” 마치 ‘어린 양의 털은 우리의 옷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부지런히 수고하면 우리의 일로 인하여 우리에게 공급되는 것들이 있을 것이며 또한 마치 “염소는 밭을 사는 값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일한 수고의 열매로 돈을 벌어 건물을 사든지 땅을 사든지 투자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26절). (3) 27절을 보십시오: “염소의 젖은 넉넉하여 너와 네 집의 음식이 되며 네 여종의 먹을 것이 되느니라.” 마치 “염소의 젖”이 넉넉하여 모든 식구에게 음식이 되어 다 먹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부지런히 우리의 일을 열심히 할 때에 우리 집 안에는 넉넉함(풍요로움)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우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시기 때문입니다(고후 9:8). 그리할 때 우리의 넉넉함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너그럽게(후하게) 헌금도 드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11절).

 

마지막 넷째로, 나의 미련은 영원하지 않은 재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재물”하면 중요시하는 것이 3가지가 있습니다:

 

(1) 저는 신명기 817-18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개혁한글).

 

모세에게는 염려가 있었습니다. 그는 혹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젓과 꿀이 흐르는 풍족한 땅인 가나안에 들어가 배불리 먹고 풍족한 은혜를 누리면서 살아갈 때에 구원의 하나님, 광야에서 인도해주셨던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잘 나서 지금 이렇게 풍족하게 살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가질까봐 염려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는 두려워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봐서 … (17절).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다(18절)고 말해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과 우리 손의 힘으로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재물을 얻을 능력을 주실 때에 우리는 재물을 얻어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그 풍족함을 누릴 때 우리는 더욱더 진정한 풍족한 나라인 천국을 바라보며 사모해야 합니다. 결코 풍족함을 누릴 때 이 세상이 우리 집 인줄 착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주시는 복을 누려야 합니다(16절).

 

(2) 저는 재물하면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재물은 다 없어질 것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시 52:1, 7, 8).

 

(3) 저는 건강을 잃는 것보다 재물을 잃는 게 더 낫고(5:13, 14), 재물을 잃어서라도 영적인 재산(신앙)을 되찾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재물 때문에 신앙을 잃었다면 그 재물을 손해보고 나서라도 회개하고 돌아와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는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7정 24절을 보십시오: “대저 재물은 영원히 있지 못하나니 면류관이 어찌 대대에 있으랴”[(현대인의 성경) “재물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며 면류관도 대대로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재물은 영원히 있는 것이 아니”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부귀영화는 잠깐 있다가 없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지금 우리는 가치관의 혼동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무엇이 가치가 있고 중요한지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도 가치관의 혼동 속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는 믿음으로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으며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히 11:24-26).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보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더 가치 있게 생각하며 성도들과 함께 고난을 받기보다 세상의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입술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외치지만 우리의 마음은 세상의 성공과 부귀영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 가신 골고다의 길보다 소돔과 고모라의 길, 애굽의 넓은 길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치관의 혼동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혼동된 가치관이 우리 자녀들에게 혼동되는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분명히 부모님이 교회를 다니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부모님의 입에서 자기들에게 외치는 말들은 세상의 성공과 행복과 부귀영화인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래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먼저 성경적인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좀 바로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가치관을 가지고 순간적인 것들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보다 부귀영화를 누린 사람은 솔로몬 왕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는 시편 127편 1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 왕(대하 2:1-5:1)이 성전 건축의 경험이 있는 자로서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다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한 고백입니다. 솔로몬 왕이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집”이 란 “성전”을 가리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다는 말입니다.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세웠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를 지혜롭게 잘 통치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귀영화를 구하지 않고 지혜를 구한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 잘 다스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뿐만 아니라 부귀와 영화를 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재물”과 “지혜” 둘 중의 어느 것을 하나님께 달라고 기도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8장 10-11절에서 우리는 금이나 은이나 진주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훨씬 더 좋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훈계와 지식을 얻을 때 우리는 재물을 벌 수 있는 능력도 얻게 되기에 재물 자체보다 하나님의 지혜가 더 값어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잠언 8장 18-19절을 보십시오: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내 열매는 금이나 정금보다 나으며 내 소득은 천은보다 나으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솔로몬 왕은 지혜가 있는 자에게는 부귀와 영화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혜를 간절히 찾아야 합니다. 잠언 8장 17절을 보십시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솔로몬 왕은 저와 여러분에게 “나를 사랑하는 자”(21절) 곧 지혜를 사랑하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지혜를 사랑할 때 우리는 지혜의 사랑을 덧입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의 사랑을 우리가 덧입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그 말은 솔로몬 왕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지혜를 구했을 때 그가 구하지도 않은 부귀영화를 하나님께서 주셨던 것처럼 우리가 지혜를 사랑할 때 지혜는 우리에게 이 모든 축복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지혜를 간절히 찾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미련하게 영원하지도 않은 재물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물은 다 없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곧 없어질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희망을” 둬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넘치게 주셔서 누리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딤전 6:17, 현대인의 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