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
[잠언 27장 11-14절]
여러분, 요즘 여러분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요?
성경 고린도후서 5장 9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우리가 이 육체의 집에 머물러 있든지 떠나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썼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았습니다. 우리도 바울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바울처럼 주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엡 5:10). 제가 한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 시편 69편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두 번의 짧은 묵상을 했었습니다. 먼저 저는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리십니다”란 제목 아래 이러한 글을 써 보았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시 69:13).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반겨주시사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 겸손히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5절).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였던 것이 “나의 우매함”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우리의 어리석음과 죄를 자복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열심을 내야 합니다(9절).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때 우리는 우리를 반겨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으로 교회를 위하여 열심을 내야합니다. 넷째로, 우리가 더욱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선 우리는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30절). 하나님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면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고난 중에서도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송케 하십니다. 두 번째로 저는 시편 69편 말씀을 묵상할 때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란 제목 아래 이러한 글을 써 보았습니다: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 (29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의 마음은 상하고 근심이 충만할 수 있습니다(20절). 그 때에 우리는 아무리 찾아도 어느 누구에게도 동정과 위로를 받을 수 없을 수 있습니다(20절). 그러한 때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용기를 가지고(32절, 현대인의 성경)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29-30절).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31절).”
오늘 본문 잠언 27장 11절 상반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지혜를 얻고 내 마음을 기쁘게 하라 …”[(현대인의 성경) “내 아들아,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내 마음을 기쁘게 하여라 …”]. 이 성경 말씀은 잠언 기자가 자기 아들에게 하는 말로서 그는 자기 아들이 지혜를 얻어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하길 원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우리 21세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을 할 때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잠언 27장 11-14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하면서 한 3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주님을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위험을 보면 피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2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슬기로운 사람은 위험을 보면 피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대로 나아가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여러분은 여러분 앞에 위험이 있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를 들어, 만일 지금 여러분이 산에 캠핑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멀리 있는 곰을 발견하였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분명히 여러분 중에 아무도 그 곰을 좀 더 가까이 보고 싶어서 곰이 있는 쪽으로 일부러 걸어가시는 분은 한 분도 없으실 것입니다. 그 이유는 뻔 하잖습니까.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만일 여러분 옆에 있는 여러분의 자녀가 호기심을 가지고 그 곰에게 가까이 다가가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부모로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연이 여러분의 자녀를 말리지 않겠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당연히 곰에게 가까이 가는 것은 여러분의 자녀가 위험한 줄 알기 때문이 아닌가요?
오늘 본문 잠언 27장 12절을 현대인 성경을 보면 잠언 기자는 “슬기로운 사람은 위험을 보면 피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그대로 나아가다가 어려움을 당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개역개정에는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은 잠언 기자가 22장 3절에서 이미 말한 말씀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재앙을 보면 숨어 피하여도 어리석은 자는 나가다가 해를 받느니라.” 이 말씀에서 우리가 배웠던 교훈은 슬기로운 그리스도인은 환란 중에 주님을 위한 목적 없이 생명이 희생되거나 무의미한 고난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하면서도 적당한 시기가 오기 전에는(하나님의 인도를 받기 전에는) 지혜 없이 위험한 일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무모하게 반대자들의 반발을 일으킴으로 핍박을 초래하지 말”아야 합니다(박윤선). 그런데 가끔 우리가 뉴스를 통해서 공산주의 국가나 이슬람 국가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의 안 좋은 소식을 접하게 되면 이것은 그 선교사님들이 주님의 복음을 위하여 무모하게 반대자들의 반발을 일으켜 무의미한 고난과 핍박을 초래한 것은 아닌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주님께서 그 선교사님들을 그리 인도하신 것일까 라는 의문과 더불어 그 분들이 좀 더 적당한 시기를 기다렸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은 몇 몇 선교사님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처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은 해야겠지만 무의미한 고난을 스스로 자초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빌 1:29) 무의미한 고난을 스스로 자초하면서까지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기보다 우리 자신들의 어리석음 속에서 자초한 결과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가 오늘 본문 잠언 27장 12절 하반절에서 “어리석은 자들은 나가다가 해를 받는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만일 우리가 어리석으면 우리는 위험을 보면서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나아가다가 어려움(해)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해)을 당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러한 때에 우리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긍휼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건지심)을 구해야지 어리석게 우리의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해서는 아니 됩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기도하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입니다. 즉,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를 분별하는 것을 매우 힘들어 할 때가 참 많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순종한다면 우리가 위험해 쳐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때에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의 확신을 없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헤매곤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사모하지만 어쩔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잘 모르겠기에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 스스로 결심하고 결정하여 행동에 옮기다가 어려운 상황을 처하기도 합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위험을 보면 피해야 합니다(12절).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위험(재앙)을 볼 수 있는 영안을 열어 주시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사 위험을 보고 피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재앙을 내리시려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그의 아내와 함께 피하였습니다(창 19:12-18)(박윤선).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에 재앙을 내려 멸망시키셨나요? 그 이유는 무법한 자들의 불법한 행실과 음란한 행실 때문이었습니다(벧후 2:7, 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습니다(6절). 그 와중에서 하나님께서는 그 무법한 자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그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의로운 심령이 상하였던 의로운 롯을 건져주셨습니다(7-8절). 그 때 롯이 행한 것은 천사의 말을 듣고 순종하여 소돔과 고모라에서 피하여 도망하였습니다(창19:16-17). 다윗도 자기를 죽이려고 하였던 사울 왕으로부터 피하여 숨고 도망가고 그리했습니다(삼상 20:19, 23:19, 26:1)(박윤선).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살고 있는 이곳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입니다. 이곳은 무법한 자들의 불법한 행실과 음란한 행실이 가득 찬 도시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 도시를 심판하시사 재앙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죄악 된 도시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이곳에 무법한 자들의 불법한 행실과 음란한 행실을 본받지 말고 그러한 모든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사 다가오는 재앙이나 위험을 보고 지혜롭게 피하여 불법한 자들과 함께 멸망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둘째로, 주님을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3절을 보십시오: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 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지니라”[(현대인의 성경) “낯선 사람의 보증을 서는 자에게는 그의 옷을 담보로 잡고 외국인의 보증을 서는 자에게는 그의 몸을 담보로 잡아라’]. 우리는 잠언을 묵상해 오면서 이미 잠언 기자가 보증에 대하여 말한 내용을 묵상하면서 교훈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잠언 6장 1-5절 말씀 중심으로 잠언 기자가 우리에게 이웃을 위하여 담보나 보증을 섰다가 우리가 그 이웃에 손에 빠졌을 때 스스로 구원하라(deliver yourself)는 교훈을 배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 이웃의 채무 이행 책임을 떠맡게 되었을 때 성경은 우리에게 스스로 구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의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어리석은 행동이란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갚을 수 없을 정도로 빚을 진 상태를 알면서도 채무 불이행(defaults)하는 그 사람을 위하여 우리 자신 스스로 그 빚을 갚는 책임을 약속하는 것, 즉 보증을 서는 것을 가리킵니다(MacArthur). 물론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웃 사랑함에 있어서 이웃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을 아예 금하고 있는 말씀은 아니지만(박윤선) 잠언 기자가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혹여나 보증을 섰다가 문제가 생겼을 때 보증을 선 여러분이 실제로 책임질 각오를 하지 못하였던지 또는 상대방 이웃에게 속아서 보증인이 되던지, 보증을 선 후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이행할 경제력 실력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사랑하는 우리 이웃의 빚을 갚을 경제적 능력이 있으면서 그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설 각오를 하고 보증을 선다면 그것은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의 빚을 갚을 경제적 능력도 없으면서 그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선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또 다른 예는 잠언 22장 26절 말씀입니다: “너는 사람과 더불어 손을 잡지 말며 남의 빚에 보증을 서지 말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너는 남의 빚보증을 서지 말아라.” 이 얼마나 명백하고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성경은 남의 빚보증을 서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 경제적 실력 없이 남의 빚에 보증이 된다는 것도 그 빚진 자의 마음에 헛된 위로를 주는 것뿐이며, 또한 자기 자신에게도 파산을 가져오기 쉽다.” 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파산을 가져올 수 있을 정도로 무모하게 이웃의 보증을 선다는 것, 그것은 헛된 위로를 주는 것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3절에서 잠언 기자는 “타인을 위하여 보증 선 자의 옷을 취하라 외인들을 위하여 보증 선자는 그의 몸을 볼모 잡을 지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옷을 취하라”는 말씀이나 “볼모 잡을 지니라”는 말씀은 “남을 위하여 보증이 된 자가 마침내 쓴잔을 받아야 된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적어도 우리는 이미 남을 위하여 보증이 되었다가 쓴잔을 맛본 사람(들)을 통하여 교훈을 받아 남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에게 누군가를 위하여 보증을 설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다면 결코 우리는 남을 위하여 보증을 서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3절 말씀은 이미 잠언 기자가 잠언 20장 16절에서 한 말입니다. 두 구절을 보면 똑 같은 말씀입니다. 여기서 잠언 기자는 보증 행위에 있을 수 있는 실수를 경고하고 있는데(박윤선) 그 실수란 잘 알지도 못하는 타인(외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므로 그 외인에게 아무 것도 돌려받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서서는 아니 됩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우리는 우리가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심지어 가족, 친척 식구라 할지라도 보증을 서는 것을 삼가야 합니다. 그런데 왜 어떤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일까요? 그런 행위를 가리켜 박윤선 박사님은 “경제적 모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큰 경제적 모험입니까? 경제적으로 빚을 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돈을 빌려 주는 행위이던 보증을 서는 것이든 이러한 행위는 돈을 빌려줬던지 보증을 서 준 사람에게 큰 경제적 손실을 가지고 올 수 있기에 경제적 모험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의 말입니다: “사람들이(특별히 신자들이) 경제적 모험을 하면 실패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그렇게 되는 이유는, 지나친 경제 모험이 일종의 불신앙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험은 내일 일을 인간의 힘으로 주장할 듯이 생각하고 하나님을 무시함이다(약 4:13-17).”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보증을 서 달라고 부탁 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1장 15절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인을 위하여 보증이 되는 자는 손해를 당하여도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는 평안하니라”[(현대인의 성경) “남의 보증을 서는 사람은 쓰라린 고통을 당하여도 남의 보증서기를 거절하는 사람은 평안하다”]. 이 말씀대로 우리는 “보증이 되기를 싫어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번역대로 말한다면 우리는 남의 보증서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평안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보증을 섰다가 손해를 당하여 쓰라린 고통을 받는 것을 마다할 수 있다면 남을 위하여 보증을 서는 것,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그러나 제 생각엔 그렇게 당하는 손해나 고통은 그리 큰 의미가 없고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이웃이 보증을 서 달라고 간곡히 부탁까지 하는데 거절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의 보증서기를 거절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11:15).
마지막 셋째로, 주님을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은 적절한 타이밍에 이웃을 올바르게 칭찬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주일 지나 월요일 이른 아침에 전화 소리가 좀 크게 울리던지 카카오톡 소리가 크게 울리면 기분이 어떠십니까? 누구에게 들은 말인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언젠가 제가 들은 말은 목사님들은 월요일 이른 아침에 성도님들에게 전화하지 말고 한 목요일이나 금요일 즘에 전화를 하는 게 좋다는 말이었습니다. 제가 그 때 이 말을 듣고 지금까지 이렇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제가 그 말에 공감하고 동의하기 때문입니다. 아마 월요일 이른 아침에 전화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피곤한데 일은 나가야 하고, 좀 더 잠을 자려고 하는데 전화가 울려서 잠에서 깬다면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 월요일 날 이른 아침에는 어머님의 전화도 받기 좋아하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할 수 없이 전화를 받았는데 어머님이든 회사 상관이든 친구든 간데 큰 목소리로 이러쿵저러쿵 말한다면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그 말이 우리를 칭찬하는 말이라 할지라도 그리 이른 월요일 아침에 큰 목소리를 말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결국 상대방 칭찬도 타이밍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적절한 때에 상대방을 칭찬할 때에 그것은 큰 가치가 있습니다. 성경 잠언 25장 11절을 보십시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현대인의 성경) “경우에 적합한 말은 은쟁반에 올려놓은 금사과 같다”]. 이 말씀의 의미는 그 때 형편과 경우에 잘 조절하여 한 적합한 말은 은쟁반에 올려놓은 금사과와 같이 그만큼 큰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잠언 25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바로 윗절인 11절과 연관해서 생각하면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경우에 적절한(합당한) 책망은 그 책망을 청종하는 사람에게 “그 고리와 정금 장식”같이 큰 가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게 경우에 적절하지 못한 책망을 했다가는 서로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관계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 만큼 적절한 타이밍에 적절한 말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선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4절을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현대인의 성경) “이른 아침부터 자기 이웃을 큰 소리로 축복하면 오히려 그것을 저주로 여길 것이다”]. 여기서 잠언 기자는 “이른 아침부터 자기 이웃을 큰 소리로 축복하면 오히려 그것을 저주로 여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이른 아침부터”라는 단어가 눈에 잘 들어옵니다. 아마도 제 개인적으로 이른 아침에는 전화를 받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이름 아침에 전화 받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잠을 더 자고 싶고 피곤해서라기보다 새벽기도회 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제 눈에 들어오는 단어는 바로 “큰 소리로”입니다. 아무리 상대방을 축복한다 할지라도 큰 소리로 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것도 이른 아침에 말입니다. ㅎ 박윤선 박사님의 주석을 보면 그는 여기서 이른 아침에 큰 소리를 상대방을 축복, 즉 칭송(adulation)하는 것은 “지나친 성의를 가지고 아첨하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른 아침에 여러분이 아는 사람이 전화 와서 큰 소리로 여러분을 지나치게 칭찬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축복으로 여기시겠습니까? 특히 여러분이 듣기에도 상대방이 너무 지나치게 여러분을 칭찬한다면 여러분은 그것이 아부성이 있는 말로 들리지 않겠습니까? 그런 말을 이른 아침에 듣는다면 여러분은 그것을 축복으로 여겨서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저주로 여기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4절).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이웃을 올바르게 칭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적합한 때(타이밍)에 적합한 말로 우리 이웃을 칭찬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 이웃이 피곤하여 잠을 자고 있는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우리 이웃을 칭찬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적절한 타이밍에 우리 이웃이게 칭찬의 말을 하게 만드실 때 순종하면 됩니다. 칭찬하되 특히 우리는 오늘 본문 잠언 27장 11-13절에 근거해서 한 3가지 일에 대하여 우리 이웃을 칭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우리는 우리 이웃의 지혜를 칭찬해야 합니다(11절).
특히, 우리 이웃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 육신의 부모님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기쁘게 할 때에 우리는 우리 이웃을 적절한 타이밍에 칭찬해야 합니다.
(2) 우리는 우리 이웃이 슬기롭게 위험(재앙)을 보면 피하는 것을 칭찬해야 합니다(12절).
만일 우리 이웃이 어리석은 자처럼 위험을 보고도 나아가는 것을 보면 해(어려움)를 당할 것을 알고 사랑으로 책망을 해야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지혜롭게 그 위험을 피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우리 이웃을 칭찬해야 합니다.
(3) 우리는 우리 이웃이 낯선 사람의 보증을 서지 않는 것을 칭찬해야 합니다(13절).
결국 우리가 우리 이웃을 적절한 타이밍에 칭찬해야 할 것은 그들의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우리 이웃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지혜롭게 행할 때 우리는 그들을 칭찬해야 합니다.
저는 여기서 한 가지, 제가 얼마 전에 성경 누가복음 6장을 읽다가 32-35절 말씀 중심으로 짧게 묵상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 말씀 묵상 제목은 “우리의 칭찬 기준은 매우 낮은 것 같습니다”입니다.
“우리의 칭찬 기준은 매우 낮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는 사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꾸어 주는 사람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죄인들도 이렇게 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꾸어 주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또한 주님은 은혜도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하는 자를 칭찬하십니다
(누가복음 6:32-35).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위험을 보면 지혜롭게 피해야 합니다(잠 27:12). 또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선 타인을 위하여 보증을 서지 말아야 합니다(13절). 그리고 우리는 이웃을 적절한 타이밍에 올바르게 칭찬해야 합니다(14절). 그러므로 주님의 마음을 기쁘시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