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
[잠언 27장 7-10절]
여러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 전도서 6장 6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고 하여도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결국 다 같은 곳으로 돌아갈 뿐이다”(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이 말씀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백년 만년을 산다한들 우리 마음에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 전도서를 보면 우리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수고함으로 낙을 누리는 것’이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전 2:24, 3:13, 8:15). 성경은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이요(3:13) 또한 이것은 선하고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18). 이것을 우리가 받아 누릴 수 있을 때 우리는 겸손히 누려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만족감을 누려야 합니다(18절). 그 이유는 반드시 우리는 그것을 누리지 못할 날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 잠언 14장 11절부터 보면 언제 우리의 마음이 즐거운지 한 7가지로 우리는 이미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우리의 장막이 흥할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14:11). (2) 우리가 진실하게 살아갈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14:14). (3) 우리가 주님만 믿고 주님의 뜻대로 행할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14:15). (4)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 살아갈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14:16). (5) 우리가 선으로 악을 이겨 나아갈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14:19). (6)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14:21). (7) 우리가 열심히 수고할 때 우리 마음에는 즐거움이 있습니다(14:23).
오늘 본문 잠언 27장 9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 이 말씀을 보면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저는 여기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란 제목을 정하고 오늘 본문 잠언 27장 7-10절 말씀 중심으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한 4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7절을 보십시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현대인의 성경) “배부른 사람은 꿀도 싫어하지만 배고픈 사람에게는 쓴 것도 달다”]. 여러분, 우리가 즐거움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바로 먹는 즐거움입니다. 특히 우리가 배고플 때 우리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도 좋고 즐겁습니다. 인터넷에서 어떤 기사를 보니까 “입이 즐거우면 기분도 좋고 뇌도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우리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과식은 비만을 만들고, 건강을 해치고 각종 질병을 야기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건강을 위해 소식을 하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7절을 보면 “배부른 자”와 “주린 자”가 나옵니다. 잠언 기자는 이 두 부류의 사람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지만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달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배가 부르면 아무리 우리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일지라도 그 음식을 먹기 싫어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배가 너무 고프면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지 않는 맛없는 음식이라도 있으면 먹지 않습니까? 여기서 저는 배부른 자의 즐거움과 배고픈 자의 즐거움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저는 배부른 자의 즐거움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데 배고픈 자의 즐거움은 음식으로 배가 채워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리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배고플 때 음식으로 채워지는 그 즐거움을 여러분도 경험해 보시지 않았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오늘 본문 잠언 27장 7절에서 “배부른 자”를 교만한 자를 비유한 것이고 “주린 자”는 겸손한 자를 비유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교만한 자는 “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하고 겸손한 자는 “쓴 것”, 곧 고난도 달게 받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흥미로운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만일 이 해석이 맞는다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고난도 달게 받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박윤선 박사님과 달리 오늘 본문 잠언 27장 7절을 좀 달리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잠언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저는 그 핵심이 배부름이 아니라 주림이라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잠언 기자는 꿀이라도 싫어하는 배부른 자 보다 쓴 것이라도 달게 여기는 주린 자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주린 자는 쓴 것도 달게 여긴다면 하물며 그 주린 자에게 진짜 단 꿀을 준다면 그 주린 자가 얼마나 기뻐하고 즐거워할까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주린 자가 쓴 것이 아닌 꿀을 먹으므로 그의 주림이 채워질 때 얼마나 마음이 즐거울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여기서 얻는 교훈은 우리는 주린 자처럼 꿀을 사모하여 그 꿀로 우리가 채워지므로 마음의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사모하고 채워져야 할 꿀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답하기 위하여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4장 13-14절 상반절을 다시 보았습니다: “내 아들아, 꿀을 먹어라. 이것이 좋다. 특별히 송이꿀은 더 달다. 이와 같이 지혜도 달콤한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어라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보면 잠언 기자는 꿀이 좋으니까 먹으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송이꿀”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송이꿀이 더 달다”고 말하면서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바로 지혜입니다. 다시 말하면, 잠언 기자는 지혜도 송이꿀 같이 달콤하니 지혜를 얻어라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잠언 4장 5-7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지혜를 얻으며 명철을 얻으라 내 입의 말을 잊지 말며 어기지 말라 지혜를 버리지 말라 그가 너를 보호하리라 그를 사랑하라 그가 너를 지키리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우리는 주린 자처럼 송이꿀과 같은 하나님의 지혜를 사모하며 그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지혜(깨달음)를 얻어야 합니다. 그 만큼 지혜가 중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지혜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혜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마치 꿀을 먹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즉, 우리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잠 30:5)을 사모하며 그 말씀을 평생 옆에 두고 읽고 또한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지혜를 얻어 마음을 즐겁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번 Big Bear에 있는 cabin으로 영어사역 연합 수련회 갔었을 때 일입니다. 마지막 날 아침 식사하기 전에 저는 밖에 나와 의자에 앉아 산과 나무 등을 쳐다보면서 혼자 조용히 앉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새들 두 마리 정도가 날라 다니다가 나무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때 이 성경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29-31). 그러면서 저는 ‘하나님께서 저 새도 다 먹이시고 그러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나를 …’ 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더욱더 믿고 의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8절을 보십시오: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으니라.” 여러분,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하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철새”가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저는 계절을 따라 서식지를 이동하는 철새를 생각할 때 전에 신문인가 인터넷에서 본 “철새 교인”이란 말이 생각났습니다. 자기 집 교회(home church)가 없이 이 교회 저 교회 다니면서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을 볼 때 안타갑기도 하고 또한 염려도 됩니다. 동시에 저는 내 집과 같은 교회가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그 집과 같은 교회가 주님 안에서 한 영적 가정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화목하고 평안할 때 우리는 그러한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왜 잠언 기자는 오늘 본문 잠언 27장 8절에서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를 말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그는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을 말하고자 그리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은 보금자리를 떠나 떠도는 새와 같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고향을 떠나 유리하는 사람”하면 성경에서 누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생각납니다. 요셉은 나이 17살 때 자기를 미워하는 형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하다 강제적으로 고향인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39살 즘 되어서야 자기가 사랑하는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 등 가족 식구들과 재회하며 애굽에서 함께 삽니다. 그러다가 요셉은 결국 고향인 가나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요셉은 불쌍한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향 땅으로 다시 돌아가지도 못하고 이방 나라에서 죽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이 요셉을 생각할 때 지금 이북이 고향이지만 남한이나 미국이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 한인 어르신들이 생각납니다. 이러한 분들을 가리켜 아마 “실향민”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그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실향민은 고향을 떠난 후 고향에 자유로이 돌아갈 길이 막힌 사람들이다. 난민도 포함된다”(인터넷). 인터넷 중앙일보를 보니까 금년 추석인 2016년 9월 14일에 “실향민 5000명이 그린 ‘그리운 내 고향’ … 북녘 보이는 오두산 전망대 벽화 완성”이란 제목 아래 기사가 있어 읽어보았습니다. 읽어보았더니 5000이나 되는 실향민들과 국내 이산가족 및 탈북자들이 경기도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에 화폭에 그린 북녘 고향의 그림 5000개를 모아 벽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면 그리했을까 생각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믿음의 장인 히브리서 11장 15-16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떠나온 옛 고향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돌아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나은 하늘이 있는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불리는 것을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위해 한 성을 마련해 주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개혁개정)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옛 고향을 떠나 하늘에 있는 새 고향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들입니다. 이 세상은 더 이상 우리의 고향이 아닙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늘나라(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새 찬송가 235장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을 하나님께 찬양 드릴 수 있습니다:
- 보아라 즐거운 우리 집 밝고도 거룩한 천국에 거룩한 백성들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 앞서 간 우리의 친구들 광명한 그 집에 올라가
거룩한 주님의 보좌 앞 찬미로 밤낮을 즐기네
- 우리를 구하신 주님도 거룩한 그 집에 계시니
우리도 이 세상 떠날 때 주님과 영원히 살겠네
- 우리의 일생이 끝나면 영원히 즐거운 곳에서
거룩한 아버지 모시고 기쁘고 즐겁게 살겠네
[후렴] 거기서 거기서 기쁘고 즐거운 집에서
거기서 거기서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겠네.
이렇게 우리에게는 주님 안에서 돌아갈 영원한 고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기쁘고 즐거운 거기서 영원히 영광에 살 것입니다. 이 영원하고 확실한 소망이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지금은 슬픔 많은 이 죄악 된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돌아갈 고향인 천국이 있기에 오늘도 우리는 즐거워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며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소망으로 인하여 저와 여러분의 마음이 즐겁고 기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친구의 충성된 권고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여러분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친구가 있습니까? 함께 웃고 함께 즐거워하며 여러분의 마음에 즐거움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얼굴에 미소와 웃음을 주는 친구가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여러분 주위에 그런 친구보다 여러분의 마음을 힘들게 하고 심지어 여러분을 비참하게 만드는 친구가 있습니까?
저는 얼마 전 John H. Walton & Tremper Longman III이란 저자들이 쓴 "How to Read Job"이란 책을 읽으면서 저는 다시금 욥의 친구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글을 써 보았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친구인 욥에게 욥이 고통당하는 이유가 욥이 하나님께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욥의 입장에서는 욥의 친구들은 욥을 비참하게 만드는 위로자들(miserable comforters)이었습니다(욥 16:2). 우리 주위에 이러한 위로자들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 마음을 더 괴롭게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혹시 여러분 주위에는 욥의 친구들처럼 여러분을 더 비참하게 만든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닌지요? 힘들고 어려워 고통당하는 여러분을 위로한답시고 와서 말하는 내용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더 힘들게 하고 마음을 무겁게 하는 그러한 위로자 친구를 경험해 보시진 않았는지요?
오늘 본문 잠언 27장 9절을 보십시오: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나니 친구의 충성된 권고가 이와 같이 아름다우니라”[(현대인의 성경)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처럼 친구의 진실한 충고도 아름다운 것이다”]. 여기서 “이와 같이”란 말은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9절상)을 가리킵니다. 즉, 친구의 충성된 권고는 기름과 향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과 같이 아름다운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여기서 “친구의 충성된 권고”란 히브리어로 “영혼의 권고”란 뜻입니다. 이 영원의 권고에 대해서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친구의 권고는 말 뿐아 아니고 영혼으로 (간절하게) 권면하는 사랑이다”(박윤선).
여러분을 이렇게 영혼으로 간절하게 권면할 정도로 여러분을 사랑하는 친구가 있습니까? 제가 종종 들어가는 기독교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저는 그 웹사이트에 종종 들어가서 관심이 가는 기사가 있으면 읽고 기사 내용이 좋으면 우리 교회 영어사역 페이스 북 웹사이트에 글을 올려 함께 나눕니다. 그렇게 나눈 기사 중에 얼마 전에 나눈 기사는 “진정한 친구”(TRUE FRIENDSHIP)이란 제목의 기사였습니다. 그 기사 내용의 핵심 성경구절은 바로 잠언 27장 6절입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친구는 상처를 주어도 신실한 우정의 표현이지만 원수는 입을 맞춰도 조심해야 한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그 글을 쓴 사람은 우리가 진정한 친구이신 예수님과 같은 친구를 보내주시길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하면서 진정한 친구이신 예수님과 같은 친구에 대하여 5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로, 당신을 사랑으로 상처를 입힐 수 있는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둘째로, 당신을 세워주는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셋째로, 당신에게 상처 입힐 정도로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대하여 감사하십시오.
넷째로, 다른 사람들의 상처들도 초대하십시오.
마지막 다섯째로, 사랑으로 상처 입는 사람의 친구가 되십시오.
여러분, 이러한 친구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다면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이러한 친구를 위하여 기도도 해야겠지만 먼저 저와 여러분은 우리 친구들에게 그러한 친구가 될 수 있길 기도하십시다. 그리고 우리가 먼저 친구이신 예수님의 사랑의 충고를 우리 마음으로 겸손히 받아들이는 훈련을 하십시다. 비록 그 충고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우리 마음에 상처가 있다 할지라도 상처 주는 주님의 충고를 겸손히 받으십시다. 그리고 그렇게 주님의 충고를 겸손히 받는 것을 마음으로 즐거워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신실한 가까운 이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가깝게 지내는 이웃이 있습니까? 식구인 형제나 자매보다 더 자주 보면서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있다는 것, 감사해야 합니다. 특히 그 이웃이 여러분에게 신실하게 대하는 이웃이라면 더욱더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신실한 이웃이 불성실하고 여러분이 힘들 때 나 몰라라 하는 형제나 자매보다 낫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0절을 보십시오: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를 버리지 말며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현대인의 성경) “네 친구나 네 아버지의 친구를 저버리지 말며 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네 형제의 집을 찾아가지 말아라. 가까운 이웃은 먼 형제보다 낫다”]. 여기서 “네 친구와 네 아비의 친구”란 “네 친구, 곧 네 부친에게 신실히 행한 친구”란 뜻입니다(박윤선). 즉, 부친 때부터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된 사람은 아들 된 자로서 그를 귀히 여겨 버리지 않아야 된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의 친구 분들 중에 여러분이 보기에도 여러분의 부모님 때부터 신실한 분으로 인정된 분이 있지 않습니까? 만일 있다면, 이러한 신실한 부친의 친구 분을 알고 지내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합니다. 특히 만일 여러분의 부모님은 돌아가셨는데 그 신실한 친구 분이 살아 계시다면 그 분과 가까이 지내면서 부모님을 대하듯이 그 분을 대하면 좋을 듯싶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 부친 때부터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된 분을 우리는 아들 된 자들로서 그런 분을 귀히 여겨 저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잠언 기자가 우리에게 오늘 본문 잠언 27장 10절 중반절에 주는 교훈은 우리는 어려움(환난)을 당할 때 우리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0절 중반절을 보십시오: “… 네 환난 날에 형제의 집에 들어가지 말지어다 …”[(현대인의 성경) “네가 어려움을 당할 때 네 형제의 집을 찾아가지 말아라”].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9절과 10절 상반절 말씀에 근거해서 묵상할 때 저는 그 이유가 우리의 형제가 우리(의 영혼)를 사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9절) 우리를 신실하게 대하지도 않는 형제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10절상).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여러분의 형제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 이유가 있다면 무엇이 있을 것 같습니까? 만일 여러분의 마음에 ‘내 형제는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여태까지 신실하게 대해줬으니 내가 도움을 청해도 분명히 나를 도와줄꺼야’라는 확신이 든다면 당연히 여러분은 어려움을 당할 때 여러분의 형제에게 도움을 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의 마음에 ‘내 형제는 나를 사랑하지도 않고 나에게 불성실하니 내가 지금 힘들어서 도움을 청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꺼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형제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좀 더 정확한 답은 오늘 본문 10절 하반절에 나와 있습니다: “가까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나으니라.” 즉, 성경에서 우리가 어려울 때 우리 형제의 집을 찾아가지 말라는 이유는 우리 형제가 “먼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우리 형제와의 관계가 그리 가깝지 않고 오히려 멀다면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 형제가 생각나서 그의 집에 찾아가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물론 너무나 힘들고 찾아가 도움을 청할 때가 없으면 마지못해서라도 형제를 찾아가겠지만 과연 그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겠습니까? 오히려 형제의 관계가 더 멀어질 확률이 많습니다. 저는 우리 형제와 관계가 멀어진 이유가 바로 9절과 10절 상반절에서 말씀한 것처럼 우리의 형제가 우리(의 영혼)를 사랑하지 않고 우리에게 신실하지 않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달리 말한다면, 형제의 관계가 가까워지기 위해선 그 관계에는 사랑과 신실함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과 신실함이 없는 형제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고 멀어진 형제에게는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찾아가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0절). 오히려 성경은 “가까운 이웃이 먼 형제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0절). 즉, 사랑과 신실함이 없는 먼 형제의 관계보다 사랑과 신실함이 있는 가까운 이웃의 관계가 더 낫다는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는 이러한 가까운 이웃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즐거울 것입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슬픈 일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시는 즐거움을 누리면 살아가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천국과 충성된 친구의 권고와 가까운 이웃으로 인하여 마음의 즐거움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