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 칭찬, 분노, 질투, 책망
[잠언 27장 1-6절]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디도서 2장 10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매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력을 잃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 교회는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끄는 힘이 없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만 우리의 행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고 있습니다(참고: 딛 1:16). 우리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없습니다(딤후 3:5). 우리가 매력 있는 그리스도인 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을 이 어두운 세상에 빛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7장 1-6절 말씀 중심으로 한 다섯 가지 주제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 다섯 가지 주제란 “자랑”, “칭찬”, “분노”, “질투” 그리고 “책망”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이 다섯 가지를 주제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아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절을 보십시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고 안희숙 사모님이 작사한 복음 성가 “내일 일은 난 몰라요” 1절 가사가 생각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 주소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저는 고 안희숙 사모님이 쓰신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읽었던 기억도 납니다. 이번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시금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에 대해서 인터넷에서 뒤져보면서 고 안 사모님의 신앙에 대해서 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인터넷). 그녀가 31살 때인 일제 말엽인 1939년 전교생이 합동으로 신사에 가서 행했던 신사참배시 의연히 꼿꼿하게 하나님 이외의 어떤 신에게도 절을 하지 않는 믿음의 절개를 보이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고 또한 제 74회 일본제국회의 때 의사당에서 ‘일본은 유황불로 망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대사명을 전하고 그 자리에 체포 투옥돼 평양 형무소에서 6년 옥고를 치루셨다고 합니다. 그녀는 감옥에서 주님의 참사랑을 몸소 실행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각색 죄수들과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는데 그들에게 하나님과의 사랑을 회복시키셨던 놀라운 사건들이 “죽으면 죽으리라”에 실려 있습니다. 흥미로웠던 점은 “죽으면 죽으리라”는 책을 쓰셨을 뿐만 아니라 “내일 일은 난 몰라요”란 복음성가를 작사한 고 안희숙 사모님은 1945년 사형집회 몇 시간을 앞두고 8.15 광복과 함께 8월 17일 출옥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분이 작사한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장래 일도 몰라여 하루하루 살아요 …’란 복음성가 가사가 그녀의 삶 속에 체험해서 나온 가사라는 것을 우리도 좀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고 있습니까? 과연 장래 일을 아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성경 전도서 8장 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무도 모르는데 누가 장래 일을 말해 줄 수 있겠는가?”(현대인의 성경)[(개혁개정) “사람이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장래 일을 가르칠 자가 누구이랴”]. 성경은 아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어느 누구도 장래 일을 알아서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믿지 않고 장래 일을 말해준다고 거짓말을 하는 점쟁이(fortune-teller)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어리석은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서 예언의 기도를 받는 것을 그대로 믿는 것도 지혜로운 처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도서 7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일이 잘되어 갈 때는 기뻐하고 어려움을 당할 때는 생각하라. 하나님은 행복도 주시고 고난도 주시므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사람은 알 수가 없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형통(일이 잘되어가는 것)과 곤고(어려움)를 병행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그 한 예로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란 인물이 생각납니다. 성경 창세기 39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창 39:2, 3, 23). 이렇게 형통했던 요셉의 삶 속에 유혹이 있었고(7-12절) 그 유혹을 뿌리쳐 도망갔었던 요셉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혔습니다(13-20절). 즉, 요셉에게는 형통한 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곤고한 날도 있었습니다(전 8:14).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므로 형통하였던 요셉의 삶에는 곤고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는 17살 때 10명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할 뻔하다가(창 37장) 애굽 사람 보디발 집에 팔렸습니다(39:1). 그리고 그는 30살 때 애굽의 총리가 되기까지 13년 동안 곤고한 일을 당합니다. 이렇게 형통함과 곤고함을 당한 요셉, 왜 하나님께서 그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요셉에게 형통함과 곤고함을 허락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장래 일을 헤아릴 수 없는 요셉으로 하여금 오직 하나님만 믿게 하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요셉은 그의 나이 39세 때(약 22년 후)에야 하나님께서 왜 자기를 애굽에 보내셨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뜻은 바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그의 형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그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였습니다(45:5, 7). 오직 하나님만이 요셉의 장래뿐만 아니라 우리의 장래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면서 하루하루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1절을 보십시오: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성경은 우리에게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우리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람은 참 미련한 것 같습니다. 그 한 예가 누가복음 12장 16-21절에 나오는 한 부자의 비유입니다. 그 비유의 내용은 밭에 소출이 풍성한 한 부자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어서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에 그는 자기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자기의 모든 곡식과 물건을 쌓아 둬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이 세상의 부패한 부자들이 합법적인 은행 구좌들 외에 조세피난처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나라에 세금을 내지 않고 자신들의 욕심을 만족하고자 돈을 더욱더 많이 모으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한 후 그 부자는 편안히 쉬면서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려고 했습니다(16-19절). 그 때 하나님께서는 그 부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아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아가면 네가 지금까지 쌓아 둔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20절, 현대인의 성경). 하나님께서는 이 미련한 부자를 가리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는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21절). 또 다른 예는 야고보서 4장 13-16절 말씀입니다: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현대인의 성경) “'오늘이나 내일 어떤 도시에 가서 한 해 동안 장사하여 돈을 벌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여,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안개에 지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겠다.'고 말해야 할 여러분이 도리어 허영에 들떠 자랑만 하고 있으니 그런 것은 다 악한 일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우리는 허탄한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6절). 특히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 사업가들에게 적용이 많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이 그들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자신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고(시 49:6, 렘 9:23) 또한 자신의 재물을 의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시 49:6).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자랑”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고후 10:17),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내가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11:30). 우리는 우리의 강한 것들을 자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랑하되 주님 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성경 예레미야 9장 23-24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우리는 자랑하되 하나님을 아는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리스도인 사업가는 사업을 하여 이익을 남기고자 이런 저런 계획을 세워야겠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항상 자신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는 사실입니다(약 4:14).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주님의 뜻이라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고 말하는 마음 자세와 습관을 가져야 한다고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15절). 이러한 마음 자세로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잠 27:1).
둘째로, 우리는 우리 입으로 우리 자신을 칭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2절을 보십시오: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다른 사람이 너를 칭찬하게 할망정 네 입으로는 너를 칭찬하지 말아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사자성어 “자화자찬”(self-praise)이란 말이 생각납니다. 그 말의 뜻은 “자기가 그린 그림을 스스로 칭찬한다는 뜻으로, 자기가 한 일을 스스로 자랑함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네이버 사전). 여러분은 여러분하고 대화하는 상대방이 자꾸만 자화자찬하면 어떻습니까? 교만한 생각이 드나요? 혼자 잘난 척 하는 게 피곤한가요? 어느 웹사이트를 보니까 어느 사람은 ‘제발 그만해. 너 혼자 잘난 너만의 섬으로 돌아가 버리라”고 하고픈 마음이 목구멍 위로 스물스물 올라온다’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러면 왜 우리 사람들은 잘난 척을 하는 것일까요? 잘난 척 하는 사람의 심리는 무엇일까요? 자격지심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즉,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스스로 미흡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기에 스스로 잘난 척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겉보기에는 자기 자신을 잘난 척 하는 사람이 자신감이 많이 보이겠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겁이 많고 자격지심이 큰 경우가 상당이 많다고 합니다. 또한 잘난 척 자화자찬이 심한 사람의 심리는 알고 보면, 불안하고 여린 마음을 감추기 위한 반작용일 수 있습니다”(인터넷).
저는 개인적으로 “칭찬”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두 가지를 좀 생각합니다. (1) 잠언 27장 21절 말씀입니다: “도가니로 은을, 풀무로 금을,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 이 말씀 하반절을 공동번역은 “칭찬해 보아야 사람됨을 안다”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말씀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제 생각에 우리 사람들은 칭찬에 많이 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김에 있어서 다른 형제, 자매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에 기분이 좋고 기쁘지만 그 칭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우리 자신에게 돌릴 위험(유혹)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교인들의 칭찬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신도 모르게 칭찬에 컨디셔닝이 되면 주님께 칭찬을 받기 위하여 주님의 교회를 섬기기보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봉사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칭찬”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잠언 27장 21절 하반절인 “칭찬으로 사람을 단련하느니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2) 저는 제 자신이 칭찬에 인색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입니다. 한 15년 전인가 저희 부부가 한국에서 살고 있었을 때 섬겼던 새 가정부 커플들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원하는 것 아내가 남편에게 원하는 것을 다섯 가지 적어오라고 교회 숙제를 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희 부부도 집에 가서 서로에게 원하는 것 다섯 가지 씩 대화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제가 다 잊어버렸어도 아직까지 한 가지 잊지 못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내가 제일 첫 번째로 저에게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appreciation”(감사)였습니다. 그만큼 저는 아내에게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감사하는 마음도 부족했기에 감사 표시도 인색했을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을 바라볼 때 감사 표현도 부족하지만 칭찬도 잘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저는 칭찬이 인색합니다. 제가 아내에게 한 변명은 제 자신이 자라나면서 아버님께 그리 칭찬을 잘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버님 세대의 어르신들은 “주마가편”, 즉 잘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는 자녀 양육 방법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아버님께서 칭찬하실 때에 어색함을 느낍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제가 아버님의 칭찬에 그리 익숙하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기 미국에서 자라서 그런지 미국 아빠들처럼 자녀 양육에 있어서 칭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자녀가 뭔가를 잘했을 때 ‘Good job!’(잘했다)고 칭찬하는 것 필요합니다. 그러다가 자녀가 뭔가 잘 못했을 때에도 ‘It’s okay. You can do better next time’(괜찮아, 너는 다음에 더 잘할 수 있어)라고 위로/격려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칭찬에 인색한 저는 가정 식구들에게 칭찬을 하는 남편과 아버지가 되고 싶습니다. 특히 저는 아내와의 관계에서 잠언 31장 28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현숙한 아내를 남편이 칭찬하는 모습, 그리고 자녀들은 그러한 어머니에게 아침에 일어나서 감사하는 모습, 그러한 모습을 저희 가정에서 보고 싶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제가 한국에서 신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 하루는 실천신학 반에서 각자가 읽은 책을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동원 목사님의 “가정행전”이란 책을 읽고 교수님과 같은 반 신학생들 앞에서 발표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난 후 저의 발표한 내용을 다른 학생들이 듣고 비평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 때 저보다 나이 많은 어느 목사님이 저의 발표에 대해서 한 마디 하셨는데 저는 그 한 마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한 마디는 다름 아닌, 저의 발표가 교만하게 들렸다는 식의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목사님은 더 이상 저의 발표에 대해서 비평을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하고 싶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저는 좀 놀랬습니다. 제 나름대로 이동원 목사님의 책을 읽고 은혜 받고 도전받은 것을 같은 반 신학생 분들하고 나누고 싶어서 열심히 한답시고 발표했는데 첫 비평이 저의 발표가 교만하게 들렸다고 하니까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 때 그 경험을 통해서 느낀 것은 문화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미국에서 공부했던 저의 입장에서는 클래스에서 발표할 때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여 자신감을 가지고 발표하는 것이 교만하게 들리지는 않을 텐데 아마 한국에서는 그리 교만하게 들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아직도 제가 이리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보면 저는 그 때 제 자신을 자랑하려고 발표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즉, 저는 그 때 자화자찬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저는 다른 사람이 듣기에 지나치게(?) 자신감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자신감보다 그 읽은 책에 대하여 열정과 확신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가정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또한 이동원 목사님의 “가정행전”의 책 내용에 공감하는 부분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렇게 그 목사님이 말하니까 좀 섭섭했습니다. 이해를 받지 못하고 오해를 받았다는 느낌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2절을 보십시오: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으로는 하지 말며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네 입술로는 하지 말지니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다른 사람이 너를 칭찬하게 할망정 네 입으로는 너를 칭찬하지 말아라”]. 성경은 우리에게 “너는 다른 사람이 너를 칭찬하게 할망정 네 입으로는 너를 칭찬하지 말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 입으로 우리 자신을 칭찬하지 말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를 칭찬하게 하라는 교훈입니다. 여기서 먼저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오늘 본문 잠언 27장 2절에 나오는 “칭찬”이란 단어와 1절에 나오는 “자랑”이란 단어가 같은 히브리어 단어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1절) 우리 입으로 우리 자신을 자랑(칭찬)하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왜 우리는 우리 입으로 우리 자신을 칭찬하면 아니 될까요? 저는 그 이유를 고린도후서 10장 12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우리는 자기를 칭찬하는 사람들과 같은 사람으로 우리 자신을 분류하거나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정한 표준에 따라 자기를 평가하고 비교하므로 지혜가 없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우리가 우리의 입으로 우리 자신을 칭찬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은 우리가 정한 표준에 따라 우리 자신을 평가하는 것으로서 지혜가 없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또 다른 교훈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를 자랑(칭찬)하게 하라는 교훈입니다. 그 말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오늘 본문 개혁개정을 보면 “타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 외인이 너를 칭찬하게 하고 …”라고 이렇게 두 번이나 잠언 기자는 반복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고후 8:18). 또한 우리는 주님의 종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고전 11:2). 특히 교회 직분자들은 “경건한 사람”들로서(행 22:12) 교인들에게 칭찬을 받는 사람들이어야 할뿐 아니라 사도행전 6장에 나오는 일곱 집사들처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교회 성도들에게 “칭찬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행 6:3). 칭찬을 받되 우리는 교회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장차 나타나실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순수한) 믿음 (혹은 단련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벧전 1:7). 성경 고린도후서 10장 1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인정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칭찬해 주는 사람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우리 모두가 우리 자신을 칭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정하는 사람들, 주님께서 칭찬해 주는 사람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미련하게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3절을 보십시오: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현대인의 성경) “돌도 무겁고 모래도 무겁지만 미련한 자가 화내는 것은 그보다 더 무겁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이미 묵상한 “분노”에 대한 잠언 말씀들이 생각납니다. 예를 들어 잠언 12장 16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또한 잠언 15장 1절을 보십시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이 말씀들 외에 저는 “분노”하면 잠언 17장 12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날지언정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 것이니라.” 여러분은 여러분이 새끼를 빼앗긴 암곰을 만난다는 것을 상상이 되십니까?
얼마 전 2016년도 오스카 시상식 때 남우주연상을 받은 디카프리오가 출연한 “레버넌트”(죽음에서 돌아온 자)란 영화를 보면 곰이 자기 새끼 곰을 지키려고 주인공인 디카프리오를 공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곰이 얼마나 무섭고 사납게 주인공을 공격하는지 그 주인공은 거의 죽게 됩니다. 호세아 13장 8절을 보십시오: “내가 새끼 잃은 곰 같이 그들을 만나 그의 염통 꺼풀을 찢고 거기서 암사자 같이 그들을 삼키리라 들짐승이 그들을 찢으리라.” 이 얼마나 무서운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새끼 잃은 곰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서 그들의 염통 꺼풀을 찢고 그들을 삼키겠다는 이 말씀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잠언 17장 12절은 차라리 새끼 빼앗긴 암곰을 만나는데 미련한 일을 행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미련한 자가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더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습니까? 어떻게 미련한 자가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더 위험합니까? 그 이유는 John MacArthur 목사님 말에 의하면 미련한 사람이 새끼 빼앗긴 암곰보다 분노할 때 들 합리적(이성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Fools are less rational in anger than wild bears(MacArthur)].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미련한 자가 비이성적으로 당장 분노를 나타내는 것(잠 12:16)이 상상이 되십니까? 미련한 자는 비이성적으로 당장 분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또한 오랫동안 삐뚤어진 생각으로 분노를 품고 있다가 상대방을 죽이기도 합니다. 그 예로 우리는 구약 성경 사무엘하 13장에 나오는 다윗의 아들 압살롬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누이를 강간한 암논을 죽이고자 2년 동안 분노를 계속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분을 오래 동안 품으면 반드시 죄를 범하게 됩니다(박윤선).
오늘 본문 잠언 27장 3절을 보십시오: “돌은 무겁고 모래도 가볍지 아니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분노는 이 둘보다 무거우니라”[(현대인의 성경) “돌도 무겁고 모래도 무겁지만 미련한 자가 화내는 것은 그보다 더 무겁다”]. 무슨 말입니까? 분노를 품은 사람이 오래 동안 상대방을 유쾌하지 않게 만들며 견딜 수 없게 만든다는 뜻입니다. 특별히 미련한 자의 분노가 그렇습니다(박윤선). 그러한 분노하는 미련한 사람으로 인하여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당하는 것보다 오히려 무거운 돌이나 무거운 모래주머니(sand bag)를 나르는 것이 더 낫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분노하는 미련한 자가 우리에게 주는 괴로움이 돌이나 모래보다 무겁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좋다고 그러한 분노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분노하는 미련한 자를 만나지 말아야 합니다. 아예 우리는 그 미련한 자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미련한 자는 행악으로 낙을 삼기 때문입니다(10:23). 그리고 행악으로 낙을 삼는 미련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반역만 힘쓰는 자입니다. 그러한 자는 남을 해롭게만 하므로 우리는 그를 가까이 하지 말뿐 아니라 만나지도 말아야 합니다.
넷째로, 우리는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4절을 보십시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현대인의 성경) “분노가 잔인하고 파괴적이긴 하지만 질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사울 왕이 생각납니다. 먼저 저는 사울 왕이 분노했던 것을 생각할 때 사무엘상 20장 30-31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사울은 노발대발하며 소리쳤다. '이 미친놈아! 네가 네 자신의 수치와 네 어미의 수치도 모르고 천한 이새의 아들 쪽을 택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 그 녀석이 살아 있는 한 너는 절대로 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당장 가서 그를 끌어오너라.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이 말씀의 배경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했을 때(1절) 사울 왕의 아들인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므로(17절) 그에게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4절)고 말하였을 때 다윗은 “내일은 초하루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셋째 날 저녁까지 들에 숨게”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5절). 그리고 사울 왕이 자기를 찾거든 다윗이 자기 고향 베들레헴에 가기를 허락을 간청한 것을 사울 왕에게 물을 때에 만일 그가 “좋다”하면 자기는 안전할 것이지만 만일 사울 왕이 화를 내면 자기를 죽이기로 작정할 것을 알 것이라고 말했습니다(6-7절). 그리고 초하루가 되었을 때 사울 왕이 앉아 음식을 먹을 때 다윗의 자리가 비어있었지만(25절) 사울 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26절). 그런데 이튿날에도 다윗의 자리가 여전히 비어있으니까 사울이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다윗이 어찌하며 어제와 오늘 식사에 나오지 아니하느냐’고 물었습니다(27절). 그 때 요나단의 자기의 아버지 사울 왕에게 이렇게 답하였습니다: “'다윗이 나에게 베들레헴으로 가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자기 가족이 모여서 제사 드릴 일이 있다고 그 곳으로 오라는 형의 명령을 받았다기에 내가 보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왕의 식탁에 나오지 못했습니다'”(28-29절, 현대인의 성경). 그 말을 들은 사울 왕은 노발대발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 아들인 요나단에게 “이 미친놈아! 네가 네 자신의 수치와 네 어미의 수치도 모르고 천한 이새의 아들 쪽을 택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아느냐?”(30절,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잠언 27장 4절을 보십시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 이렇게 분노는 오늘 본문 잠언 27장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잔인하고 파괴적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러한 잔인하고 파괴적인 분노도 질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제가 보기엔 성경에서는 두 종류의 질투를 말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첫 번째 종류의 질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있어야 할 좋은 질투입니다. 그 질투는 바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질투심입니다. 민수기 25장 1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My jealousy)으로 질투했다고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머물러 있었을 때 그들은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였을 뿐만 아니라(1절)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 여자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바알브올에게 가담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진노하셨습니다(1-3절).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의 수령들이 태양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목매어 죽임을 당하고(4절) 이스라엘 백성 중 24,000명이나 염병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9절).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6절)인 시므온의 조상의 가문 중 한 지도자인 살루의 아들 시므리(14절)가 모세와 온 회중의 눈앞에 미디안의 한 여인(6절)인 미디안 백성의 한 조상의 가문의 수령인 수르의 딸 고스비(15절)를 데리고 그의 형제에게로 왔습니다(6절). 그것을 보고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비느하스가 회중 가운데서 일어나 손에 든 창으로(7절) 시므리를와 고스비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입니다(8절).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진노를 돌이키므로 그들을 소멸하지 않으셨습니다(11절). 이러한 비느하스의 질투심은 “위로부터 난”것(약3:17)으로써 성경적이요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질투심입니다.
우리도 비느하스가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질투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의 질투심으로 질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남편은 아내를 보호함에 있어서 질투해야 합니다. “결혼 개혁”(Reformed Marriage)이란 책을 보면 저자 더글라스 윌슨(Douglas Wilson)은 남편의 의무에 대해서 여섯 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 세 번째 의무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남편은 질투해야 하며 또한 아내를 보호해야 합니다’(출 34:14). 여기서 말하는 남편의 “질투”는 죄와 섞여서는 아니 되는 경건한 질투를 가리킵니다.
(2) 두 번째 종류의 질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지지 말고 멀리해야 할 나쁜(죄악 된) 질투입니다. 그 질투는 바로 살인적인 질투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사울 왕이 가지고 있었던 살인적인 질투입니다. 성경 사무엘상 18장 9절을 보면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어 성경에는 “주목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영어 성경 New International Version(NIV)를 보면 ‘질투의 눈으로 계속 보았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동사를 히브리 원어의 의미는 The New Strong's Dictionary of Hebrew and Greek Words에 의하면 ‘to watch with jealousy eye’(질투의 눈으로 보다)입니다. 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본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 날”, 즉 다윗이 블레셋 사람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삼상 18:6) 뛰놀며 창화하여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7절)고 하므로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밖에 무엇이냐”(8절)라고 말한 날 후로 사울은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드라마의 주인공 이였던 사울 왕, 그러나 골리앗을 죽이므로 조연출도 아니었던 목동 다윗이 주인공으로 등극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을 받고 사랑을 받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바로 다윗이 모든 사람들에게 주목과 사랑을 받게 된 것입니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도 다윗을 자기의 생명같이 사랑하고(1, 3절) 또한 사울의 딸 미갈도(20, 28절) 그리고 온 이스라엘과 유다 사람들도 다 다윗을 사랑하였습니다(16절). 그러니 사울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특히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 다윗과 함께 계심을 보고 알았던 사울(12, 14, 28절)은 “하나님이 부리신 악신이” 힘 있게 내리므로(10절) 다윗을 질투의 눈으로 계속 바라보았습니다. 무서운 것은 질투의 눈으로 다윗을 바라보던 사울은 결국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타고 있을 때 다윗을 벽에 박고자 손에 든 창을 다윗에게 던졌습니다(10-11절). 실패로 돌아갔지만 사울은 그 때부터 계속 다윗을 죽이려고 노력합니다. 이렇게 질투는 살인의 죄까지 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결국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심을 보고 알므로 “다윗을 더욱 더욱 두려워하여 평생에 다윗의 대적이 되”었습니다(29절). 그는 평생 다윗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다윗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므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사울 왕은 전쟁에서 죽습니다. 질투하여 다윗을 죽이려던 사울이 오히려 죽임을 당합니다. 이것이 바로 죄악 된 질투심의 결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본문 잠언 27장 4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분은 잔인하고 노는 창수 같거니와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현대인의 성경) “분노가 잔인하고 파괴적이긴 하지만 질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물론 이 말씀이 분노와 질투를 비교해 볼 때 분노보다 질투가 더 잔인하고 파괴적이란 말씀이지만 저는 분노와 질투와 연관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할 때 드는 생각은 분노하는 사람은 질투하지 않을 수 있지만 질투하는 사람은 충분히 분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분노보다 질투가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잠언 6장 34절을 보십시오: “남편이 투기로 분노하여 원수 갚는 날에 용서하지 아니하고”[(현대인의 성경) “그 남편이 질투함으로 분노하여 복수하는 날에는 그가 용서받지 못할 것이며”]. 이 말씀을 보면 질투하는 남편은 분노한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남편은 복수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는 뉴스를 통해서 이러한 질투하며 분노하는 남편의 복수극을 가끔 들을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아가서 8장 6절을 보면 ...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울과 같은 죄악 된 질투심을 우리는 어떻게 극복해 나아갈 수 있습니까? 저는 그 대답을 시편 73편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시편 기자 아삽이 악인의 형통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여(3절) 거의 실족할 뻔 했지만(2절) 그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악인의) 결국”을 깨닫게 되어(17절) 죄악 된 질투심을 극복했습니다. 즉, 아삽은 그의 눈을 하나님께 맞추었을 때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악인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을 깨닫고(17-20절) 또한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가 없음을 깨달았을 때에(25절) 그는 죄악 된 질투심을 극복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는 죄악 되고 살인적인 질투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질투심의 눈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에 살며시 스며드는 세상 적이고 정욕 적이며 마귀적인 질투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질투의 눈으로 저와 여러분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보고 계시기에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로, 우리는 사랑으로 책망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7장 5-6절을 보십시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현대인의 성경) “맞대 놓고 책망하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 친구는 상처를 주어도 신실한 우정의 표현이지만 원수는 입을 맞춰도 조심해야 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본문 잠언 27장 5-6절 말씀을 묵상할 때 마다 마음이 좀 고민이 되고 심지어 죄책감도 듭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저는 실제로 이 말씀대로 숨은 사랑보다 나은 면책(책망)을 잘 하지 못했고 지금도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숨은 사랑도 제대로 못하는 저로서는 그보다 나은 사랑의 면책은 더욱더 제대로 못하고 있으니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고민이 되고 또한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특히 목회 가운데 제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 떼 분들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으로 면책했어야 했을 때 하지 않았던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저는 그 때 제가 이 말씀에 불순종한 제 자신을 봅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도 아직도 계속해서 드는 생각은 면책해 보았자 듣지 않으셨을 텐데 라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듣든지 아니 듣든지 사랑의 면책을 하길 원하셨던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7장 5-6절을 대할 때마다 고민이 듭니다. 이러한 고민 가운데서 제 마음은 마음에도 없는 만 마디의 칭찬보다 사랑으로 말하는 한 마디의 면책을 더 사모하고 싶습니다. 저는 제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에 벗어나서 죄를 범하고 있을 때 제 주위 사람들의 "입맞춤"과 같은 말들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습니다. 또한 저는 제가 범죄하고 있을 때 저의 죄를 덮어주므로 사랑을 표현하는 친구보다 저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걷게 하고자 저의 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면책해 주는 친구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것이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17절) 친구가 친구를 날카롭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
오늘 본문 잠언 27장 5-6절을 보십시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오늘 본문 잠언 27장 5절을 보면 성경은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맞대 놓고 책망하는 것이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번역했습니다. 성경에서 맞대 놓고 책망한 사람하면 누가 생각납니까? 저는 다윗 왕을 맞대놓고 책망한 나단 선지자가 생각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성경 이야기는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의 죄를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다윗 왕이 우리아의 처 밧세바와 동침하여 아기가 잉태한 것을 알고 죄를 덮고자 시도하는 가운데 결국 자기의 충성된 군인 우리아까지 죽이는 살인죄까지 범했습니다.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기에(삼하11:27)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한 성에 있는 부한 자와 가난한 자의 비유로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다윗의 죄를 면책하셨을 때(12:1-4) 다윗은 크게 노하여 나단 선지자에게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말하였습니다(5절). 죄를 덮고 덮으려다가 자기 양심마저 덮어버려서 그랬던 것인지 다윗은 자기가 그 “마땅히 죽을 자”인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게 이렇게 직접적으로 면책했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7절). 이 얼마나 충격적인 면책입니까? 다윗 자신은 분명히 자기 자신은 그 “마땅히 죽을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을 텐데 나단 선지자가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면책하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가 내가 행한 일들이 죄라는 것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들춰내실 때 우리의 양심은 충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성경 전도서 7장 5절에도 좀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우매자의 노래”는 바로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지금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해야 합니까? 그 이유를 솔로몬 왕은 전도서 7장 6절에서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니라.” 한 마디로, 우리가 우매자의 노래, 즉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그 위로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헛됨을 솔로몬 왕은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하면 무슨 생각이 나십니까? 가시나무가 탈 때에는 요란한 소리를 내지 않습니까? 그런데 솥의 물을 끓일 수 있는 열은 내지 못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은 “가시나무”는 종종 악인을 가리키는 것으로서(삼하 23:6; 나1:10)(Jamieson) 솔로몬 왕은 육체적 쾌락을 즐기면서 내는 악인의 거짓된 위로의 소리는 그 순간에는 잠깐 위로가 되는 것 같이 보여도 곧 사라진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악인의 위로는 헛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우매자의 노래가 아니라 바로 지혜자의 책망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전도자 솔로몬 왕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는 교훈은 지혜자의 채찍질이 미련한 자의 칭찬(격려)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맞대 놓고 책망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제 생각엔 우리가 익숙한 것은 사람을 맞대고 책망하는 것보다 물래 숨은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숨은 사랑보다 맞대 놓고 책망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잠언 27장 6절을 보십시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숨은 사랑보다 맞대 놓고 책망하는 것이 더 나은 이유는 비록 친구가 우리를 맞대 놓고 책망하는 것이 우리 마음에는 상처가 되겠지만 그 상처는 신뢰할 만한 것이기 때문입니다(6절). 이것이 원수의 거짓된 입맞춤보다 낫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원수는 우리를 미워하기에 거짓된 입맞춤을 통해서라도 우리는 무너트리고자 하는 반면에 친구는 우리는 사랑하기에 진실 된 면책으로 우리를 세우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친구가 우리를 사랑하므로 면책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친구의 사랑의 면책으로 오는 마음의 상처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유익한 상처까지 우리는 우리 친구에게 사랑의 면책으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친구를 날카롭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사랑하는 친구의 면책을 겸손히 듣고 그 면책을 통하여 자신을 더욱더 발전시키는 기회로 삼아 더욱더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러한 지혜로운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본문 잠언 27장 1-6절 말씀 중심으로 한 5가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우리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1절), (2) 우리는 우리 입으로 우리 자신을 칭찬하지 말아야 합니다(2절), (3) 우리는 미련하게 분노하지 말아야 합니다(3절), (4) 우리는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4절), (5) 우리는 사랑으로 책망해야 합니다(5-6절). 이 교훈대로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고, 우리 입으로 우리 자신을 칭찬하지 말며, 미련하게 분노하지 말고, 질투하지 말며 또한 사랑으로 책망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