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는

 

 

 

[잠언 2623-28]

 

 

여러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여러분 자신을 비춰볼 때 들춰지는 위선으로 인하여 고민해 보신 적이 있지 않으십니까? 특히 저 같이 말씀을 맡은 목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면서 들춰지는 자신의 위선으로 인하여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종종 늦게나마 말씀을 선포한 후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선포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고 있지 못한 제 자신의 모습을 들춰내실 때 양심에 찔림 속에서 위선적인 제 자신의 모습으로 인하여 제 자신이 한심해 보이고 낙심이 될 때도 있습니다. 고 옥한음 목사님이 그의 책 “옥한음 목사가 목사에게”란 책에서 쓴 글을 다시 한 번 찾아서 읽어 보았습니다: "사실 목회자만큼 위선자가 되기 쉬운 직업도 없습니다. 목회자만큼 위선자가 될 확률이 높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 위선이 악습으로 몸에 배면 양심도 없어집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얼마나 무서운 벼랑 끝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 할 말씀이라 생각합니다. 위선이 악습으로 몸에 배면 양심도 없어진다는 말씀이 마음에 다가옵니다. 양심이 마비된 목회자, 양심도 없는 목회자가 된다는 것, 이 얼마나 위험한 일입니까. 죤 칼빈은 위선자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위선자들은 열심이라는 가면으로 그럴듯하게 자기의 자만심을 감춘다.’ 열심의 가면으로 자기의 자만심을 감춘 위선, 경계하고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4절을 보면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위선자는 아첨하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개역개정)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위선자는 ”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잠언 26장 23-28절 말씀 중심으로 한 가지로만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우리가 묵상하고자 하는 위선자에 대한 그 한 가지란 바로 위선자는 그의 입술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선자 하면 우리는 주로 “외식”을 생각할 수 있는데 “외식”이란 무엇입니까? 구약 히브리어 의미는 ‘자기를 감추는 자’ 또는 ‘위선자’입니다. 즉, 위선자는 자기를 감추는 자란 말입니다. 신약에서는 원래 무대에서 가면을 쓰고서 연출하는 배우를 가리킨 것으로서, 후에는 위선자, 외식하는 자를 의미하는 단어 ‘휘포크리테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은 특히 종교인들에게 상용된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거짓된 태도를 뜻합니다. 겉으로는 아주 경건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하면서도 내면으로는 거짓과 위선이 가득한 경우가 바로 외식의 적합한 표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외식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유태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가 높은 만큼 신앙적 과시욕 또한 대단해서 외식(外飾), 허식(虛飾), 가식(假飾)의 전형으로 비쳐졌습니다. 거짓으로 꾸미고 자기 의(self-righteous)를 과시하는 위선자들 이였습니다. 어거스틴은 배우들이 그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고, 그들의 본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교회 안과 모든 인간 생활에서 본래의 자기 모습이 아닌 것처럼 가장하려는 모든 사람은 위선자이거나 배우라고 말했습니다(인터넷).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설교자이자 신학자, 저술가였던 토마스 왓슨은 그의 책 “회개”에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회개는 위선자들에게 필요하다. 위선은 성결을 위장하는 것이며, 위선자 또는 무대 연기자는 도덕가보다 한 술 더 떠 종교의 의상으로 몸치장을 하고 있다. 그는 경건의 형식은 자처하지만 능력은 부인한다(딤후 3:5). 위선자는 아름다운 외관을 가진 집 같지만 모든 방안은 어둡다. 그는 아름답게 금박을 입힌 썩은 기둥이며, 그는 신앙고백의 가면 밑에 자기의 전염병의 상처를 감춘다. 위선자는 얼굴을 화장하는 것은 반대하지만 거룩을 꾸미는 화장을 한다. 그는 겉으로 선하기 때문에 정말로 악할 수 있다. 위선자는 그의 눈을 하늘나라에 못박아놓고 있는 것 같으나 그의 마음은 불순한 육욕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그의 양심에 역행하여 비밀한 죄 가운데 살아간다. 그는 말씀을 듣지만 오로지 귀뿐이다. 그는 교회 헌신에 열심이며 그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그를 바라보고 그를 칭찬하지만 그러나 그는 가정과 골방 기도를 등한시한다. 위선자는 겸손을 가장하지만 이것은 세상에서 출세하기 위하여서다. 믿음을 자처하지만 그는 믿음을 방패로 삼기보다 오히려 가면으로 삼아 이용한다. 그는 겨드랑이에 성경책을 끼고 다니지만 자기 마음속에는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말씀의 촛대를 가지고 당신의 마음속을 조사해서 혹시 거기서 아무 회개거리도 찾아낼 수 없을지 살펴보라”(인터넷).

 

그러면 위선자의 입술과 마음은 어떻게 다른지 한 6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위선자의 입술은 온유하지만 그의 마음은 악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3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현대인의 성경) “친절한 말에 악한 마음은 유약을 입힌 토기와 같다”](Like a coating of glaze over earthenware are fervent lips with an evil heart). 여러분, 혹시 크리스피 크림 도넛츠를 아십니까? 제가 처음에 그 도넛츠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때 그 도넛츠를 먹으면 입이 녹는다고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저는 그 소문을 듣고 크리스피 크림 도넛츠 가게에 가서 금방 만들어진 오리지널 글레이즈 도넛츠를 먹어보았는데 참 맛이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제 아내가 저의 풀러 신학교 Th. M. 논문을 다 수정해 주었을 때 제가 아내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더니 아내는 크리스피 크림 도넛츠 12개(dozen)를 원한다고 하여 사 준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도넛츠 가게에는 여러 종류의 도넛츠들이 있지만 제가 오늘 잠깐 언급하려고 하는 것은 글레이즈 도넛츠입니다. 여기서 “글레이즈”란 도넛츠 위에 얇게 씌운 것으로 설탕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글레이즈”란 꼭 도넛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선에도 “글레이즈”를 하는데 여기서 글레이즈란 “생선을 냉동하여 저장할 때, 건조나 변질을 막기 위하여 생선에 덮는 얼음 피막”을 가리킵니다(네이버 사전). 생선뿐만 아니라 나무에도 색을 입힐 때에 보통 글레이즈를 사용하는데 나무에 글레이즈를 입히면 윤기가 나고 보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글레이즈는 토기에도 입힙니다. 글레이즈 질그릇을 보면 윤기가 나고 더 보기 좋습니다. 이렇게 질그릇에 글레이즈를 입히는 것을 영어로 “coating”이라고 합니다. 한국어로는 글레이즈를 질그릇에 칠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3절을 보면 성경은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은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낮은 은을 입힌 토기니라”란 말씀은 ‘토기에 글레이즈를 칠했다’는 의미입니다. 바로 “온유한 입술에 악한 마음”이 그와 같다는 말입니다.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마음은 악한데 그 악한 마음에 ‘온유한 입술’을 칠하면 어떨 것 같습니까. 현대인의 성경으로 말한다면, 마음은 악한데 그 악한 마음을 “친절한 말”로 윤기 나게 입히면(덮으면) 어찌되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외식이요 위선이 아닙니까. 악한 마음을 품고 있는데 그것을 친절한 말로 잘 포장하는 것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온유한 입술”입니다. “온유한” 입술이란 “매끄러운 말”(smooth talk), “비위를 맞추는/아첨하는 말투”(flattering speech) 또는 “불타는”(burning) 입술이란 뜻입니다(Swanson). 이것은 위선자는 상대방을 향하여 악한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입술로는 매끄러운 말을 하고 상대방의 비위를 맞추되 자기의 악한 마음을 매우 따뜻한(열렬한) 사랑의 말로 가장합니다(Gesenius).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 외식자(아첨하는 자)가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서도 뜨거운 친절미 있게 표현함을 가리킨다.” 여러분, 상상이 좀 되시죠? 마음에 없는 말을 하면서도 뜨거운 친절미 있게 표현하는 외식자의 말이 좀 상상이 되시죠?

저는 성경에서 악한 마음을 품었지만 그 마음을 열렬하고 친절한 사랑의 말로 덮어서 포장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할 때 먼저 잘 포장하지 못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입니다. 창세기 31장 1-2절을 보면 야곱이 라반의 아들들이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고 우리 아버지의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라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자기의 외삼촌인 라반의 안색을 본즉 자기에게 대하여 전과 같지 아니한 것을 알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보면 야곱의 외삼촌인 라반은 자기의 마음을 잘 포장을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야곱이 보기에도 라반의 안색은 전과 같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라반의 아들들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그들 또한 야곱을 향한 자기들의 마음을 잘 숨기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은 야곱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자기들끼리 만나서 야곱에 대해서 얘기할 때 “야곱이 우리 아버지의 소유를 다 빼앗”았다, 그 소유로 말미암아 “이 모든 재물을 모았다”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은 야곱이 자기들의 말을 들을 줄 몰랐겠지만 진짜 자기의 안 좋은 마음을 잘 숨기는 자들은 상대방이 말을 듣지 않도록 더욱더 조심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라반과 그의 아들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잘 포장하지 못했습니다. 라반은 변한 자기의 안색을 잘 포장하지(숨기지) 못했고 그의 아들들 또한 야곱에 대하여 말을 잘 숨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좀 더 생각해 보았습니다. 성경에서 자기의 악한 마음을 따뜻하고 친절한 말로 잘 포장한 사람은 누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을 때 저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인류의 첫 여자를 미혹한 뱀이 생각났습니다. 그 뱀이 그 여자를 미혹하는 말들을 들어 보십시오. 그들의 대화를 다시 한 번 들어보십시오:

 

뱀: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1절),

여자: “동산 나무의 열매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2-3절),

뱀: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4-5절).

 

이 뱀의 말들이 얼마나 달콤합니까. 그 달콤한 말을 들은 그 여자는 다시 보지 말했어야 할 그 선악과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했습니다(6절). 그리고 결국 그녀는 그 나무의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아담)에게도 주”었습니다(6절). 이렇게 사단은 자기의 악한 마음을 친절(온유)한 말로 잘 칠하고 잘 포장합니다. 그 제일 좋은 예가 바로 마태복음 4장에 나오는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이야기입니다. 마귀는 40일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 주리신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시험하는 자 마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3절),

예수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4절),

 

그랬더니 마귀는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6절),

예수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7절),

 

그 때 마귀가 또 예수님을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9절),

예수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10절).

 

여러분, 위선자의 마음은 악합니다. 그런데 위선자는 자기의 악한 마음을 잘 숨기고, 잘 포장합니다. 어떻게 그는 포장합니까? 마치 질그릇에 은을 칠해서 윤기 나게 하듯이 위선자는 자기의 악한 마음을 온유한 입술로 포장하여 윤기 나게 합니다. 특히 그는 상대방에게 따뜻한 사랑의 말로 친절미 있게 표현하므로 자기의 악한 마음을 윤기 나게 포장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아 성찰하는 가운데 혹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룩한 말씀으로 우리의 위선적이 모습을 들춰내신다면 우리는 우리의 외식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2) 만일 우리 주위에 이러한 위선자가 있다면 우리는 그 사람의 말을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온유하고 친절하게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아니 됩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의 열렬한 말을 통하여 사랑을 느끼기까지 않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말을 믿어서는 아니 됩니다.

 

(3) 우리는 예수님처럼 위선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겨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말씀 충만,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위선자의 말을 분별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성령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위선자의 말을 어떻게 답변하고 그 달콤한 유혹의 말을 이길 수 있을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으로 승리케 하실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글을 써보았습니다: “참으로 달콤하게 들리는 설득력이 강한 사탄의 새빨간 거짓말은 성경적인 것 같지만 실제는 99% 성경 말씀에 1%로 추가되었던지 아니면 1%로 뺀 비성경적인 말이다. 100%로 성경적인 마인드가 없이는 다 속아 넘어갈 수밖에 ....” 우리 모두 100% 성경적 마인드를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사모하십시다. 우리 모두 말씀 충만하여 위선자의 온유한 입술을 통해서도 그의 악한 마음을 분별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그 위선자의 온유하고 따뜻하고 친절한 말에 속아 넘어가지 마십시다.

 

둘째로, 위선자는 자기의 미운 감정을 아첨으로 숨김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미워지는 감정이 들 때에 그 미운 감정을 잘 숨겨집니까? 그러면서도 그 미운 사람하고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것이 결코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요셉의 형들입니다. 성경 창세기 37장 4절을 보십시오: “그의 형들이 아버지가 형들보다 그를 더 사랑함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더라”[(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그의 형들은 아버지가 자기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그를 미워하여 그에게 말도 잘 하지 않았다”]. 요셉의 형들은 자기들의 아버지인 야곱이 자기들 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요셉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요셉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향한 미운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요셉이 꿈을 꾸고 형들에게 말하니까 그 형들은 요셉을 “더욱 미워”했습니다(5, 8절). 결국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향한 미운 감정을 숨기지 않고 그를 죽이기를 꾀하기까지 하였습니다(18절). 또 다른 예는 다윗 왕의 아들인 암논이 압살롬의 여동생인 다말을 사랑하여(삼하13:4) 그녀를 강제로 동침한 후(14절) 그녀는 “심히 미워”하였는데 성경은 암논이 다말을 “미워하는 미움이 전에 사랑하던 사랑보다 더”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5절). 이렇게 누군가를 미워하는 미움의 감정이란 매우 강하여 어떠한 방법으로도 표출이 되기가 쉽습니다. 이렇게 미운 감정이란 무섭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4절을 보십시오: “원수는 입술로는 꾸미고 속으로는 속임을 품나니”[(현대인의 성경) “위선자는 아첨하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 성경은 위선자는 이러한 살인적인 미운 감정도 아첨하는 말로 숨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위선자는 그러한 미운 감정도 숨기면서 오히려 그 미워하는 사람에게 아첨하는 말을 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기서 위선자의 “감정”이란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다른 사람과 열린 적대감과 갈등(문제)라는 뜻으로 그 사람과 원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Swanson). 즉, 위선자는 원수 된 사람을 속으로는 미워하는 감정이 있으면서도 그 미운 감정을 아첨하는 말로 숨긴다는 것입니다. 숨기되 위선자는 항상 그 마음에 그 원수 된 사람을 배반을 반복적으로 생각하면서 속임을 품습니다(Spence-Jones).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의 입술로는 그 원수 된 사람에게 아첨하는 말을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가 생각났습니다. 성경 마태복음 26장 49절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들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가룟 유다와 함께(47절) 예수님을 잡으러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겟세마네로 왔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는 그 무리들에게 “내가 입 맞추는 자가” 예수라고 말하면서(48절) 예수님께 나아와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하고 예수님께 입을 맞췄습니다(49절). 마음속으로는 예수님을 팔려고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에게서 파송된 큰 무리들과 예수님께 왔으면서 겉으로는 예수님께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라고 말하면서 예수님께 입을 맞춘 가룟 유다, 이 얼마나 간교한 위선자의 모습이요 행동입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저자 누가는 누가복음 22장 48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 저자 마태는 마태복음 26장 50절에서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위선적인 말과 위선적인 입맞춤 뒤에 숨겨진 예수님을 팔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게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70인경을 보면 오늘 본문 잠언 26장 24절은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원수는 자기의 입술로 눈물의 약속들을 하지만 그의 마음에는 속임을 교묘하게 궁리(고안)한다’(An enemy weeping promises all things with his lips, but in his heart he contriveth deceits”(Spence-Jones). 즉, 위선자는 원수처럼 미워하는 사람을 향한 자기의 미운 감정을 숨기고 교묘하게 그 사람을 속이고자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약속의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위선자의 눈물에 웬만한 사람이면 속아 넘어가지 않겠습니까. 눈물로 자신의 미운 감정을 속이는 위선자를 과연 우리는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위선자처럼 자신의 미운 감정을 숨기려고 아첨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성경 시편 12편 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 우리는 아첨을 하기보다 오히려 경책을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경책하는 자는 혀로 아첨하는 자보다 나중에 더욱 사랑을 받”기 때문입니다(잠 28:23). 우리는 위선자의 아첨하는 말을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그의 미운 감정을 숨기려고 입술로 꾸미는 아첨하는 말을 조심히 분별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6장 24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러한 글을 썼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상대방을 향한 자신의 미운 감정은 표출이 될 수밖에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그 감정을 아첨하는 말로 숨기는 사람은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자신의 미운 감정을 눈물까지 흘리면서 숨길 수 있는 사람은 매우 위험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위선자의 아첨의 말과 눈물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의 위선적인 아첨의 기도와 눈물에 우리 자신을 스스로 속이는 것을 멈춰야 합니다.”

 

셋째로, 위선자는 그의 말을 좋게 할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추악한 생각이 가득합니다.

 

여러분은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듣기 좋으라고 말을 할 때 그 말 속에서 그 사람의 진심을 느끼십니까? 왠지 저는 누군가 저에게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진심을 잘 느끼지 못합니다. 그냥 인사차 예의상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특히 그 상대방이 만일 저에게 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가 알고 있다면 그렇게 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무리 제 귀에 좋게 들려도 저는 그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6장 25절을 보십시오: “그 말이 좋을지라도 믿지 말 것은 그 마음에 일곱 가지 가증한 것이 있음이니라”[(현대인의 성경) “그의 말이 아무리 좋게 들려도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마음에 추악한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5절을 보면 현대인의 성경은 위선자의 말이 아무리 좋게 들려도 그것을 믿을 수 없는 것은 그 마음에 추악한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24절에서 이미 묵상한대로 위선자가 우리 듣기 좋으라고 아첨하는 말을 하는 이유는 우리를 향한 자신의 미운 감정을 숨기고자 하는 것이기에 그 사람이 우리의 귀에 아무리 듣기 좋은 말을 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그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만일 우리가 그 위선자의 마음에 추악한 생각이 가득한 것을 알고 있다면 어떻게 그 사람의 듣기 좋은 말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결코 우리는 그의 말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 위선자의 듣기 좋은 말을 믿는다면 우리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그러한 미련한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먼저 미련한 사람은 바로 성경 역대하 18장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 아합입니다. 제가 아합 왕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는 참 선지자인 미가야의 예언이 자기에 대하여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그를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7절). 대신 그는 400명의 거짓 선지자들이 좋게 말하는 거짓 예언[“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11절)]을 듣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그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유다 왕 여호사밧하고 길르앗 라못으로 함께 싸우러 가기 전에(3절)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에게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오늘 물어 보소서”라고 말하였을 때(4절) 아합이 거짓 선지자 400명의 좋게 말한 예언을 들은 후(5절) 여호사밧이 “우리가 물어 볼 다른 예언자는 없습니까?”(6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물으니까 아합이 자기에게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는 미가야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미가야는 자기에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에 자기가 그를 미워한다고 말하였습니다(7절). 그 때 여호사밧은 아합에게 “그런 말씀을 마소서”(7절)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미련한 사람들은 바로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꾸준히 보내신 참 선지자들의 말(렘 26:5)을 듣지 않고 오히려 거짓을 예언하는(27:10, 14-16)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들었습니다. 즉, 그들은 참 선지자가 말한 하나님의 재앙(26:3, 13, 19)의 소리를 듣지 않고 오히려 거짓 선지자들이 말한 평화(28:9)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결코 평화가 있을 상황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은 “평강하다 평강하다”(6:14, 8:11)라고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듣고 믿었습니다(28:15).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예언했을 뿐만 아니라 “너희가 바벨론의 왕을 섬기게 되지 아니하리라”고 거짓 예언했습니다(27:9, 14).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 거짓 선지자들을 보내시지도 아니하였는데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10, 14, 15, 16절)한 말을 유다 백성들은 들었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미련한 백성입니까.

 

저는 지금도 별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지혜롭지 못하고 미련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후서 4장 3절에서 말하였듯이 바른 교훈을 듣지 않고 오히려 가지 욕심을 따르며 우리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교사들의 말”을 듣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심지어 우리는 그 교사들이 위선자들인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하는 좋게 들리는 말들에 “아멘”하면서 믿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오늘 성경 잠언 26장 25절은 그 위선자들의 말이 아무리 좋게 들려도 그 말을 믿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는 추악한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25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바른 교훈을 들어야 합니다. 비록 그 바른 교훈이 우리에 귀를 즐겁게 하지 못하고 좋게 들리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바른 교훈을 듣기를 속히 해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는 우리를 책망하며 경책하는 성령의 검과 같은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 귀에 좋게 들리던 안 좋게 들리던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그 진리의 말씀을 믿음으로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셀 수 없는 하나님의 생각은 참으로 보배롭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시 139:17-18).

 

넷째로, 위선자는 속임으로 자기의 미움을 감출지라도 반드시 그의 악은 회중 앞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6절을 보십시오: “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현대인의 성경) “그가 아무리 자신의 감정을 숨겨도 그의 악한 행위는 대중에게 드러날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잠언 26장 24절에서 “위선자는 아첨하는 말로 자신의 감정을 숨긴다”는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정”이란 미운 감정을 말합니다. 즉, 위선자는 자기의 미운 감정을 아첨으로 숨깁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6절에서는 “아첨하는 말”(24절)이 아니라 “속임으로” 그 미운 감정을 감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자신의 미운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고 오히려 어떠한 모양으로도 표출하는 사람보다 미운 감정을 어떤 모양으로도 표출하지 않고 상대방을 속이는 사람이 더 무섭고 더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성경에서 찾아보았을 때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과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생각났습니다. 먼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 왕은 살인적인 질투로 다윗을 질투하므로 다윗을 죽이려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습니다. 이렇게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이 다 알정도로 표출하였습니다. 사울 왕도 그랬지만 창세기에 나오는 에서도 자기 동생인 야곱을 미워하여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것(창 27:41)을 생각할 때 에서 또한 자기의 미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표출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과 비해 압살롬이란 인물은 자기의 미운 감정을 2년 동안이나 표출하지 않고 숨겼습니다. 그는 자기의 누이 동생인 다말이 또 다른 다윗의 아들인 암논에게 강간을 당하여 욕되게 되었을 때 마음으로는 암논을 미워하였지만 자신의 미운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암논에 대하여 잘잘못을” 말하지 아니하고 2년 동안이나 자신의 미운 감정을 숨겼습니다(삼하 13:22-23). 그러다가 “그로부터 2년 후에 압살롬”은 잔치를 베풀어 암논과 모든 왕자들을 초청하여 결국에는 암논을 죽였습니다(23-29절). 이렇게 마음속에 숨겨둔 미운 감정이란 무섭고 참 위험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다면 시간이 지나가면 갈수록 그 미운 감정은 더욱더 쌓여서 우리가 그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 무슨 더 큰 죄를 범하게 될지 모릅니다.

 

성경 요한일서 3장 1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자기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시므로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였다고 성경 창세기 4장 4-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도 아버지 야곱이 자기들보다 요셉을 더 사랑하는 것을 보고 요셉을 미워하여 그에게 편안하게 말할 수 없었던 것(창 37:4)이 생각납니다. 결국 가인은 자기 동생 아벨을 쳐 죽였습니다(4:8). 그 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7절)[(현대인의 성경) “네가 옳은 일을 했다면 왜 내가 네 예물을 받지 않겠느냐? 그러나 네가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죄가 네 문 앞에 도사리고 앉을 것이다. 죄가 너를 다스리고 싶어 하여도 너는 죄를 이겨야 한다'.”] 가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지 않으므로 죄가 그의 마음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있었습니다. 마치 날카로운 발톱을 지켜 세우고 먹잇감을 노리는 호랑이처럼 마귀는 먹잇감인 가인의 마음 문 앞에서 그를 미혹하며 악을 행하게 하고자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죄를 이기지 못하고 죄로 하여금 자기를 다스리게 하여 결국에는 아벨을 죽이는 살인죄를 범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마귀는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바짝 정신을 차리고 철저하게 경계하십시오”(현대인의 성경)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벧전 5:8). 특히 우리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철저하게 경계해야 할 것은 사탄이 우리 마음에 심어주는 미움입니다. 그리고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미워하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듭니다. 즉,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용서하라’는 말씀을 불순종하게 만들고 ‘사랑하라’는 말씀을 불순종하게 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미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성경 요한일서 2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두움 속에 있고 어두움 속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그는 자기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현대인의 성경). 결국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계속해서 어두움 속에 살게 만들어 우리의 눈을 멀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여 혼동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죄를 범하고 또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우리 하나님, 중심을 보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속임으로 감추고 있는 우리의 미운 감정조차도 들춰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6절을 다시 보십시오: “속임으로 그 미움을 감출지라도 그의 악이 회중 앞에 드러나리라”[(현대인의 성경) “그가 아무리 자신의 감정을 숨겨도 그의 악한 행위는 대중에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죄악 된 본능은 우리의 죄를 감추고 숨기려고 포장하고 또 포장하는 것이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숨겨진 죄를 들춰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 에베소서 5장 11-13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but rather expose them)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끼어들지 말고 오히려 그런 일을 책망하십시오. 불순종하는 사람들이 몰래하는 짓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빛에 의해 밝혀질 때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빛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빛이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거룩한 빛이 우리에게 비출 때에 우리가 몰래하는 짓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숨겨진 모든 죄까지도 다 들춰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다윗이 몰래 우리아의 아내인 유부녀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녀가 임신했다고 하니까 그 모든 것을 덮으려고 결국에는 우리아를 죽이지 않았습니까. 결국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다윗에게 보내어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온 이스라엘 앞에서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현대인의 성경) “너는 그 일을 몰래 해치웠으나 나는 이 일을 모든 이스라엘 사람이 보는 앞에서 대낮에 행할 것이다'”](삼하 12:12).

여러분,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은밀히 범하는 죄를 들춰내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감추어 놓은 상대방을 미워하는 마음조차도 대중 앞에 들춰내시는 것일까요? 아무리 우리가 속임으로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미운 감정을 숨긴다 할지라도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악을 회중 앞에 드러나게 하시는 것일까요?(잠 26:26) 저는 그 이유를 요한일서에서 찾아보았습니다: (1)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우리는 거짓말하는 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자 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4장 2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 그 두 번째 이유는 우리가 형제를 미워하면 살인하는 자요 살인하는 자는 그 속에 영생이 거하지 아니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고자 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3장 15절을 보십시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결국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 깊이 숨겨 놓은 미워하는 감정조차도 회중 앞에 들춰내시므로 말미암아 먼저 하나님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시고 또한 우리의 거짓과 우리의 살인죄를 자복하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기회가 주어질 때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회중 앞에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본능은 우리의 죄가 들춰져도 숨기고 덮고 하는 것이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던 다윗처럼 즉시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위선자는 함정을 파지만 자기가 그 함정에 빠집니다.

 

여러분, 혹시 오래 전에 자주 불렀던 복음성가 중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란 노래를 기억하십니까? 가사가 이렇습니다: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군의 올무에서 새같이/ 오 우리 영혼이 벗어났도다 사냥군의 올무에서 새같이/ 오 올무가 끊어졌네 해방되었네 우리 도움은 주의 이름/ 오 올무가 끊어졌네 해방되었네 우리 도움은 주의 이름.” 저는 어릴 때 교회 유년주일학교에서 이 찬양을 종종 불렀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아마 제 기억으로는 이 노래에는 무용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근데 여러분 이 노래의 가사가 성경 말씀에 근거한 노래라는 사실을 알고 계시는지요? 그 성경 말씀은 바로 시편 124편 7-8절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이 말씀은 시편 기자가 성전에 올라가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시지 아니하셨더면”(124:1)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러 일어났을 때(2절) 그들을 산채로 삼켰을 것이며(3절), 엄몰하였을 것이며(4절) 또한 그들의 영혼이 잠갔을 것(4-5절)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이 극도의 환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력한 가운데에 있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마치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난 새 같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짐(구원)을 받아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시사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사탄은 마치 사냥꾼처럼 우리에게 올무를 놓아 우리로 하여금 그 올무에 걸려 새장에 가두곤 하지만 우리를 도우시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올무를 끊으시사 우리를 그 올무와 같은 새장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 안에서 자유를 누리게 하십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은 구약 성경 시편 124편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만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 23장을 보면 사도 바울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그 사도행전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복음과 자기를 대적하는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고 하고(행23:12) 동맹한 40여명의 사람들이(13절) “매복”하고 있었습니다(16절). 그들은 바울을 죽이려고 숨어서 다 준비하고 있었습니다(21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생질(조카)를 통하여 그 음모를 바울에게 알렸고 바울은 백부장에게 자기의 생질은 천부장에게로 인도해 달라고 부탁하여(16-17절) 결국에는 천부장은 백부장에게 명령하여 가이사랴까지 바울을 호송할 때에 보병 200명과 기병 70명과 창명 200명을 준비하라고 명하였습니다(23절). 그 결과 바울은 무사히 가이사랴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33절). 이렇게 주님을 대적하고 주님의 종을 대적하는 무리들은 주님의 종을 죽이려고까지 하지만 주님의 종을 도우시는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그들의 손에서 건지셨습니다.

 

여러분, 사탄과 그의 사람들은 우리를 믿음에서 넘어트리려고 얼마나 각오가 대단한지 모릅니다. 마치 바울을 죽이려고 동맹한 40여명의 사람들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했던 것처럼 사탄과 그의 무리들은 우리의 믿음을 죽이려고 얼마나 결심과 각오가 대단하지 모릅니다. 그들은 작전을 짜고 매복까지 하면서 오직 목적은 우리를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서 떨어트려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을 떠나게 만들려고 무단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작전 중에 하나가 바로 함정입니다. 그들은 함정을 파고 겉으로는 그 함정을 가리우려고 잘 포장하여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여정에 놓습니다. 그 때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하여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아 약하여 그 사탄의 함정에 빠져 하나님께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우리 하나님은 그것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되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하나님을 소망하며 믿음으로 간구케 만드시사 결국에는 우리를 그 함정에서 건져내시고 함정을 판 그 사탄의 무리를 그 함정에 빠지게 만드십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7절을 보십시오: “함정을 파는 자는 그것에 빠질 것이요 돌을 굴리는 자는 도리어 그것에 치이리라”[(현대인의 성경) “남을 해치려고 함정을 파는 사람은 자기가 그 함정에 빠질 것이며 남에게 돌을 굴려 내리는 사람은 자기가 그 돌에 치이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함정”이란 히브리어 원어의 의미는 사자를 잡으려고 판 구덩이(pit)란 뜻입니다(Brown). 저는 이 단어의 의미를 생각할 때 다니엘의 사자굴이 생각났습니다. 메대 사람 다리오가 왕이었을 때 그는 3명의 총리를 두었는데 그 중에 한명이 바로 다니엘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이 마음이 민첩하여 다른 2명의 총리들과 고관들보다 뛰어나므로 다리오 왕이 그를 세워 전국을 다스리게 하고자 하였습니다(단 6:1-3). 그 때 다른 두 총리들과 다니엘을 시기하는 관원들의 꾐으로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게 됩니다. 그러나 결과는 다니엘이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자 굴에서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않고 건짐을 받습니다(23절). 그런데 그 후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십니까? 다리오 왕이 다니엘을 참소하여 다니엘로 하여금 사자 굴에 넣게 만든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여 그들의 처자와 함께 그 사자 굴에 던져 넣게 합니다. 그 결과 그들 모두가 사자 굴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자들이 곧 그들을 움켜서 그들의 뼈까지도 부서뜨렸습니다(24절). 결국 그들은 오늘 본문 잠언 26장 27절 상반절 말씀대로 자기들이 판 함정인 사자 굴에 자기들이 빠지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 속담을 보면 “제가 제 무덤을 판다”는 말 아시죠? 그 말의 뜻은 스스로 자신을 망치는 어리석은 짓을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인터넷). 저는 이 말을 생각할 때 예레미야2장13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현대인의 성경) “내 백성이 범한 두 가지 죄는 생수의 샘인 나를 버린 것과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스스로 판 것이다”]. 이 말씀에 나오는 유다 백성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무덤을 팠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스스로 자신을 망치는 어리석은 죄를 범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무덤을 파는 어리석은 범죄를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있었던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허탄한 것”(5절) 또는 “무익한 것”(8, 11절)을 좇았습니다. 그 허탄하고 무익한 것은 바로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긴 것이었습니다. 곧, 우상숭배였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등을 하나님께로 향하였고 그들의 얼굴은 자신들이 만든 신들을 향했습니다(27-28절). 이렇게 배도하고 패역한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9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선택한 유다 백성들을 향하여 하나님을 버림과 그들 속에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것이 바로 악이요 고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스로 웅덩이를 파는 유다 백성들은 스스로 고통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35편 7절을 보면 성경은 다윗을 죽이려고 해할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4절) 아무 이유 없이 다윗을 잡으려고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놓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이유 없이 다윗을 잡으려고 그물을 치고 함정을 파놓는 다윗의 대적 자들을 생각할 때 위선자는 자신의 미운 감정을 감추고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해하고자 함정까지 팝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판 함정에 자기가 빠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돌을 굴려 내려서 상대방을 치려고 해도 그 돌에 자기가 치이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26:27; 참고: 시 35:7, 현대인의 성경). 생각해 보십시오. 돌을 굴려 내리려면 먼저 그 돌을 언덕 위로 굴려가지고 올라가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돌을 굴려서 언덕 위로 올라가다가 사고가 생기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돌을 굴려서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치이려다가 오히려 자기가 치이지 않겠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위선자는 남을 망하게 하려는 행동을 하지만 그 행동 때문에 마침내 자기 자신도 망한다는 말입니다(박윤선).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마치 요나 선지자가 큰 물고기 안에서 깊은 바다 속에 있었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았던 것처럼(욘 2:4) 우리를 깊은 웅덩이와 같은 함정 속에서도 다시금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기 때문입니다(9절). 비록 우리의 눈으로 볼 때에 우리가 쳐해 있는 상황이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진 것 같아 보일지라도(행 27:20),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일지라도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와 악을 행하는 자들의 함정에서 벗어나게” 해주시길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시 141:9).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구원의 소망과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행 27:23-25).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여 함정을 파놓은 위선자에게서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함정에서 건져주시고 우리를 해하고자 하는 그 위선자를 그 함정에 빠지게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여섯째로, 위선자는 거짓말을 합니다.

 

여러분 생각에 마음으로는 상대방을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그 사람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것, 이것은 거짓이라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6장 23절에 말씀에 의하면 이것은 “속임으로” 자신의 미운 감정을 숨기는(감추는) 것인데, 이것은 거짓이 아닌가요? 우리는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는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겉으로는 그 미운 감정을 감추고자 웃고 친절하게 말하고 등등 하는 것은 상대방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직함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음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께 진실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 자신에게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진리화되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마음에 거짓이 침투하지 못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8절을 보십시오: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일으키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거짓말하는 자는 자기가 해치려는 사람을 미워하고 아첨하는 입은 패망을 가져온다”]. 오늘 성경은 “거짓말 하는 자는 자기가 해한 자를 미워하고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거짓말 하는 자는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그 미워하는 사람을 해한다(해친다)는 것입니다. 주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를 미워하여 그 미워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어떻게 상처를 입힙니까? 주로 거짓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중상모략(slandering)하므로 그의 평판(명성)(reputation)에 해를 끼칩니다(Walvoord). 실제로 이것을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혹시 여러분을 미워하는 사람이 터무니없는 거짓말로 여러분을 헐뜯거나 나쁜 소문을 퍼트려서 여러분에게 해를 끼친 적이 있습니까? 이렇게 거짓말 하는 자가 누군가를 미워한다면 그가 그 미워하는 사람을 해하려고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거짓말만 하겠습니까? 오늘 본문 28절 하반절을 보면 거짓말 하는 사람은 아첨까지 해서라도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을 속여서 해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외식을 하면 할수록 우리의 양심은 마비되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양심이 마비되면 될 수록 우리는 외식함으로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딤전 4:2). 그러나 성경은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골 3:9). 그것은 옛 사람의 행위입니다(9절). 그러므로 우리는 거짓말을 미워해야 합니다(잠 13:5).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약 3:14). 특히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거짓을 행해서는 아니 됩니다(요일 2:4). 하나님의 계명 중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 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말하면서 우리 형제, 자매를 미워하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4:20).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뿐만 아니라 우리의 행동과 삶으로도 거짓을 말하는 거짓 증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잠 14:5).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하고 신실한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해야 합니다. 우리는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또한 복음의 합당한 삶으로 살아가므로 우리의 삶으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진실하고 신실한 증인의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합니다.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위선자는 …”이란 제목 아래 과연 위선자는 입술과 마음이 어떻게 다른지 한 6가지로 묵상했었습니다: (1) 위선자의 입술은 온유하지만 그의 마음은 악합니다, (2) 위선자는 자기의 미운 감정을 아첨으로 숨깁니다, (3) 위선자는 그의 말을 좋게 할지라도 그의 마음에는 추악한 생각이 가득합니다, (4) 위선자는 속임으로 자기의 미움을 감출지라도 반드시 그의 악은 회중 앞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5) 위선자는 함정을 파지만 자기가 그 함정에 빠집니다, (6) 위선자는 거짓말을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 위선자들에게 불행이 닥칠 것이다.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속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다”(현대인의 성경). 또한 위선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 있습니다(막 7:6). 우리는 더 이상 이러한 위선을 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마음과 입술이 다른 불일치한 삶을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도 당연히 진실해야 하지만 우리의 입술도 진실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진실하게 사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잠 2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