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해야 할 다섯 부류의 사람들

 

 

[잠언 2617-22]

 

 

지난주에 밤에 잠들기 전에 성경 요한복음을 읽다가 이러한 생각이 들어 글로 적어 보았습니다. 그 글 내용의 초점은 우리가 “멀리해야 할 사람”이지만 저는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우리가 가까이 해야 할 사람은 두 가지로 적어 보았는데 그 사람은 바로 “진실한 사람”(잠12:22)과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약3:2)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멀리 해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성경 요한복음 8장 4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이 말씀을 읽다가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쟁이”를 멀리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거짓말쟁이“ 외에 우리는 누구를 멀리해야 할까요?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6장 17-22절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멀리해야 할 다섯 부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이 다섯 부류의 사람들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들을 받아 순종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 부류의 사람들은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7절을 보십시오: “길로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는 자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길을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개귀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 여러분, 여러분이 개의 귀를 잡으면 개가 어떻게 반응할 것 같습니까? “강아지는 귀를 잡아주면 좋아하나요?”란 인터넷 기사가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이 질문에 이러한 답변들을 하였습니다(인터넷):

 

(a) “귀가 모든 동물의 약점입니다. 그래서 보호하려고 움직이는 것 같습니다.”

(b) "귀 잡으면 무지 싫어하고 아파해요“

(c) “절대 안 됩니다. 강아지는 귀가 민감하기 때문이죠. .. 꼬리도 그렇고요 ...”

(d) "개를 귀잡으면 어떤 개는 물어요. 함부로 잡지 마세요 ...“

(e) "그러다가 큰일 납니다. 강아지는 귀 잡는 것 싫어해서 물어요.

저도 우리 집 개한테 물려봤어요. 진짜 아파요 ㅠㅠ“

 

오늘 본문 잠언 26장 17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길을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개귀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이다"(현대인의 성경). 죤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잠언 기자 당시 팔레스타인 안에서는 지금처럼 개들이 길들인(domesticated) 개들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개의 귀를 잡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dangerous)고 합니다(맥아더). 그러기에 잠언 기자는 개귀를 잡아당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개귀를 잡아당기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바로 길을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끼어드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간섭하다’(meddles)란 단어는 문자적으로 '자기 자신을 그것으로 인하여 흥분시키다‘(excites himself over)란 뜻입니다(Walvoord). 이 문자적 의미를 생각할 때 잠언 기자가 오늘 본문 잠언 26장 17절에서 말하고 있는 개의 귀를 잡는 자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끼어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좀 더 심하게 말한다면, 남들이 다투는 것을 보면 자기 자신이 흥분이 되어서 관심을 가지고 다투는 사람들에게 가서 알아보고 끼어들어 다툼을 부채질 하는 사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에서 한 3가지 교훈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박윤선):

 

(1) 우리는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한국 속담에 “내닫기는 주막집 강아지라”는 말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저는 처음 들어본 말인데 그 의미는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잘 뛰어들어 참견을 하는 사람을 비꼬아 이르는 말”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어떻습니까? 혹시 여러분 주위에 어떤 일이 있을 때마가 남의 일에 잘 뛰어들어 참견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특히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의 일에 열심히 참견하는 사람이있습니까? 그런 사람에게는 “남의 참견 말고 제 발등의 불 끄지”라고 말한다고 합니다(인터넷). 실제로 성경 베드로전서 4장 15절을 보면 성경은 “... 남을 간섭하는 일로 어려움을 당하지 않도록 하십시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지나가다가 우리와 상관없는 싸움에 간섭하여 불필요한 어려움을 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싸움에 참견하는 것은 지혜로운 행동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웃 사랑도 아닙니다.

 

(2) 우리는 남들의 다툼에 가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나친 관심은 오히려 남의 일에 간섭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가담까지 하게 만들어서 남들의 다툼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교회 안에서 두 형제가 서로 다투고 있는데 지나친 관심을 갔다보면 왜 그 두 형제들이 싸우는지 궁금해 하다가 알고 싶어 간섭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면 그 두 형제들의 말을 듣다가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가담하여 한쪽으로 기울어져 한 형제와 같은 편이 되어서 다툼을 더 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책임은 다툼을 더 크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투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화목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 죽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자들입니다(롬 5:10). 이러한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고후 5:18).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습니다(19절). 성경은 우리에게 “할 수 있거든 ...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12:18). 우리는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 하는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3) 우리는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남들의 다툼에 가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혹시 “성난 승냥이 코침 잘못 주다 되물린다”는 말 들어 보셨습니까? 이 말은 북한어라고 합니다. 그 의미는 “성이 난 사람에게 섣불리 참견하였다가 도리어 손해를 본다는 말”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은 혹시 성이 난 사람에게 섣불리 참견하였다고 손해를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손해”에 대한 한 2가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2가지란 (a) 우리는 재물의 손해를 통해서라도 영적인 재산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과 (b) 우리 사람들 보기에는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손해를 돌이켜 우리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룻 4장)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잠언 26장 17절 말씀에 근거하여 저의 “손해”에 관한 생각이 하나가 더 추가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남의 일에 간섭하고 가담하므로 불필요한 손해는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에게만 손해가 아니라 다투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도 손해요 더 나아가서 만일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면 교회 공동체에게도 손해가 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아무 유익이 없는 손해는 일부러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손해도 구분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유익된 손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재물의 손해를 통해서라도 우리의 영적인 재산을 되찾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해를 돌이켜 도리어 우리에게 축복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룻 4장). 그러나 우리에게 무익한 손해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남의 일에 간섭하고 가담하므로 보는 불필요한 또는 쓸데없는 손해입니다(잠 26:17). 우리는 손해도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구분해서 볼 수 있어야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신과 상관없는 다툼을 간섭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느 누가 개의 귀를 잡아당기면 그 개에게 자신이 물릴 것을 뻔히 알면서 개귀를 잡아당기겠습니까. 그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 성경 잠언 26장 17절은 우리에게 그러한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길을 지나가다가 자기와 상관없는 다툼에 끼어드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멀리해야 할 둘째 부류의 사람들은 바로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입니다

 

여러분, 한국 사극 드라마를 보다보면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있다가 그 횃불을 집으로 던지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혹은 여러분은 전쟁할 때 병사들 중 화살을 쏘는 사람들이 화살에 불을 달아서 쏘는 모습을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왜 전쟁터에서 병사들이 불화살을 적군의 진영에 있는 군사들에게 쏘는 것입니까? 적군을 죽이려는 목적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 잠언 26장 18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8-19절을 보십시오: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 있나니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도 그러하니라”[(현대인의 성경) “자기 이웃을 속이고 그저 농담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자는 횃불을 던지고 활을 쏴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과 같다”]. 여기서 “횃불을 던지며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란 말씀을 원어 히브리어로 직역하면 “불덩이, 화살, 죽음을 던지는 미친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사람은 화살에 불을 달아서 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는 인명을 가볍게 보고 살인을 도모하는 미친 사람입니다(인터넷). 우리는 이런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저는 미국 뉴스에 총기 난사 사건들에 대한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인명을 가볍게 보고 살인을 도모하는 정신 나간 사람들이란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리 사람의 생명을 가볍게 여기고 총을 들고 학교에 들어가서 총기를 난사하며 여러 젊은 학생들의 귀한 생명을 앗아가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언젠가 뉴스를 들어보니까 총기 규제법을 강화해야 한다고 뉴스 앵커가 말하면서 그 법 중에 하나가 총을 팔 때에 사는 사람에 대해서 조사할 때 그 사람이 정신에 문제가 있는 사람(치료를 받은 경험이 있던지 등등?)이라면 총을 팔지 못하게 하는 규제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말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데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정신병자에게 총을 팔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어는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지난 15년간 미국에서는 소아양극성 장애(조울증)가 40배나 증가했고 자폐증 진단도 20배나 늘었다고 합니다. 불과 한 세기 전 6가지에 불과했던 정신장애는 이제는 200여개가 이른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러한 상황 속에서 총기 규제법을 강화하지 않고 조울증 환자에게도 총을 판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러분, 만일 지금 인명을 가볍게 보고 살인을 도모하는 미친 사람이 총을 들고 여러분 앞에 서 있다면 여러분은 어떠하시겠습니까? 두렵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지 않겠습니까? 바로 “자기의 이웃을 속이고 말하기를 내가 희롱하였노라 하는 자”, 또는 “자기 이웃을 속이고 그저 농담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자”(현대인의 성경)가 바로 그 미친 사람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9절). 이러한 사람은 남을 속이되 기탄없이 속이며 또한 무자비한 마음으로 속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남을 속이고도 그것을 후회하거나 한탄하지는 않고 도리어 즐거워합니다(박윤선). 상상이 되십니까? 남을 속이고도 후회하거나 한탄하지 않고 도리어 즐거워하는 사람의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이 얼마나 잔인하고 미친 짓입니까? 남을 속이므로 그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그저 농담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마치 횃불을 던지고 화살을 쏘아서 사람을 죽이는 미친 사람이라고 잠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혀를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을 보면 “사람의 혀는 불과 같고 악으로 가득 찬 세계와 같”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절). 또한 “혀는 걷잡을 수 없는 악이며 죽이는 독으로 가득 차 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8절). 비록 우리 사람의 혀가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마치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듯이 혀를 잘못 사용하면 큰 손해를 가져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5절). 우리는 우리의 혀를 잘못 사용하여 상대방에게 큰 손해를 끼쳐서는 아니 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혀로 사람을 속여서는 아니 됩니다. 성경 레위기 25장 14절을 보면 “... 너희 각 사람은 그의 형제를 속이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 서로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4장 28절을 보면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25장 18절을 보면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니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입술로 우리 이웃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상대방에게 그대로 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성경은 우리가 친히 보복(복수)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을 속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이웃이게 거짓말을 하고 속인다면 그것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요 8:44).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거짓말을 하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진실해야 합니다. 참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세움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멀리해야 할 셋째 부류의 사람들은 말쟁이 또는 수다쟁이입니다.

 

어느 한 인터넷 기사를 보니까 제목이 “말 많은 ‘수다쟁이 직장동료’ 퇴치법”이란 글이 있어 읽어 보았습니다(인터넷). 그 기사에 의하면 “많은 직장에서 갈등의 원천이 되는 것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생활을 지나치게 공유하는 직장 동료의 끊임없는 수다”라고 합니다. 어느 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전문직 및 기업 근로자 5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5명 중 3명이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사생활을 지나치게 공유하는 직장 동료가 한 명 이상 있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수다쟁이들은 동료들의 업무를 방해하는 경우가 잦으며 자신의 경력뿐만 아니라 다른 동료들의 경력도 위험에 빠뜨릴 위험이 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0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수다쟁이가 없으면 싸움이 그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쟁이 또는 수다쟁이란 어떠한 사람을 가리킵니까? 주로 우리는 말/수다쟁이하면 “말 많은 사람”(gabbler)을 생각합니다. 또한 말/수다쟁이 하면 우리는 “소문내는 사람”(gossiper)을 생각합니다(인터넷). 동시에 이 단어는 “비밀을 지껄여 대는 사람”(blabbermouth)이란 의미도 있습니다(인터넷). 만일 이런 말/수다쟁이가 여러분 주위에 있다면 여러분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피곤할 것 같습니까?

 

이미 잠언 기자는 잠언 11장 13절과 20장 19절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수다쟁이는 돌아다니면서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겨 둔다”(11:13, 현대인의 성경); “수다를 떨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과 사귀지 말아라”(20:19, 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을 보면 수다쟁이는 돌아다니면서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만일 우리가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게 될 때 그 이웃이 수다쟁이라면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 수다쟁이는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비밀을 누설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다쟁이를 조심해야 합니다. 조심하되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진심을 그 수다쟁이에게 다 보요 줘서는 아니 됩니다. 왜 잠언 기자는 오늘 본문 잠언 26장 20절에서 수다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쉰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수다쟁이는 돌아다니면서 남의 비밀(은밀한 일)을 누설하기 때문입니다(11:13, 20:19). 또한 그 이유는 수다쟁이는 두루 돌아다니면서 남의 말을 하여서 사람들 사이에 이간을 붙이며(딤전5:13) 분쟁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실제로 잠언 기자는 잠언 16장 28절에서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니라”[“... 수다쟁이는 친한 친구를 갈라놓는다”(현대인의 성경)]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수다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쉰다고 잠언 기자는 말하고 있습니다(26:20). 그래서 성경은 두 사람이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때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 잠언 25장 10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너를 부끄럽게 할 것이니 네 평판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다툴 때에 남의 비밀을 누설하면 그 남의 비밀을 듣는 사람이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평판이 안 좋아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투다가 남의 비밀을 누설하면 왜 그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는가? 그 이유는,

그 다툼의 문제점만 해결하기 위한 말만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문제점을 떠나서 상대방의 은밀한 단점을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인신공격이다.

언제든지 인신공격은 진리를 분변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야비한 행동인 것이다.

상대방의 은밀한 일은 그의 사적인 문제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침범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는, 평생 그 말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 상대방의

미워함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부득이여 다투게 될 때에는 침착한

마음으로 문제점에 대하여서만 증거 해야 된다.”

 

참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다툴 때에 남의 비밀을 말(누설)하지 말고 그 다툼의 문제점만 해결하기 위한 말만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볼 때 그 원인 중 하나는 우리 다툼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그 문제점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그 문제를 상대방이 일으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인신공격까지 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방을 인신공격 까기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싸우는 정욕”이 있기 때문입니다(약 4:1).

 

여러분, 우리는 말이 많은 말쟁이/수다쟁이를 멀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남의 비밀을 쉽게 누설하는 사람을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말쟁이를 가까이 하면 다툼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툼을 멀리하기 위해서라도 수다쟁이를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가 멀리해야 할 넷째 부류의 사람들은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일 년에 두 번 야유회를 공원으로 가서 고기를 구워 먹었던 것 기억하시죠? 그 때 교회 형제님들이 고기를 구울 때 숯을 올려놓고 거기에 lighter fluid를 뿌려서 불을 붙이는 것을 보신 적이 있는지요? 고기를 굽다가 숯불이 다하는 것 같으면 더 많은 숯을 쏟아 부어서 고기를 굽습니다. 나무불도 마찬 가지입니다. 나무에 불을 붙여서 태우다가 나무가 다 타는 것 같으면 우리는 나무를 더 넣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1절을 보십시오: "숯불 위에 숯을 더하는 것과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이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시비를 일으키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숯이 깜부기불을 일게 하고 나무가 타는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하듯이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싸움을 부채질 한다"]. 잠언 기자는 다툼을 좋아하는 자는 마치 숯불 위에 숯을 더하고 타는 불에 나무를 더하는 것 같아 싸움을 부채질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만일 지금 여러분이 입은 옷에 불이 붙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불을 끄고자 불붙은 옷에 물을 뿌리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물을 뿌리지 않고 휘발유를 부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두 사람이 다투고 있는데 우리를 화평케 하는 자들로서 물을 뿌려야 하는데 만일 휘발유를 부은 다면 그 두 사람의 다툼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 불붙듯이 더 크게 다투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집 안에서 식구들 중 둘이서 다투고 있는데 미련하게 끼어들어서 오히려 두 사람의 다툼을 더 크게 만드는 경우도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내 배우자와 자녀가 다투고 있을 때 서로 화목하게 해야 하는데 오히려 본이 아니게 그 다툼을 더 크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자기도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다투는 두 사람의 감정에 개입되어 자기도 분노할 때 그리 다툼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잠언 15장 18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성미가 급한 사람은 다툼을 일으켜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시비를 그치게 한다“]. 분을 쉽게 내는 자(성미가 급한 사람)는 다툼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는 시비를 그치게 합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5장 24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다투는 여인” 또는 “다투기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아내는 그녀의 남편과 다투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5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혀도 과격한 말은 분노를 일으킨다”]. 상상이 되십니까? 부드러운 말로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혀야하는데 마치 불에 기름을 붓듯이 화가 난 사람에게 과격한 말을 하면 그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아내가 그녀의 남편과 다투는 이유는 바로 “참소하는 혀”(헌담하는 혀) 때문입니다. 성경 잠언 25장 23절을 보십시오: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북풍이 비를 일이키는 것같이 험담하는 혀는 분노를 일으킨다”]. 여기서 “참소하는 혀”란 “은밀한 혀”란 뜻인데, 남을 해롭게 하며 자기를 유익하게 하려고 아첨하는 자의 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듣는 남편은 분을 일으키기에 부부가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21장 9절과 1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현대인의 성경) “다투기 좋아하는 여자와 한집에 사는 것보다 차라리 옥상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 다투기 좋아하는 성미 고약한 여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성경 잠언 21장 9절을 보면 성경은 “다투는 여인”(다투기를 좋아하는 여자)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19절에 가서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다투기 좋아하는 성미 고약한 여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부부가 다투는 원인이 분노는 참지 못하고 성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15장 18절을 보면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을 쉽게 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기 때문입니다(18절). 우리는 시비를 그치게 하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성경 빌립보서 2장 14절은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 말한 이유는 그 교회 안에 원망과 시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3절). 빌립보 교회 안에 원망과 시비(다툼)이 있었던 원인은 허영심이었습니다(3절). 교회 안에 분수에 넘치고 실속이 없이 겉모습뿐인 영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 안에서는 불평과 다툼이 일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현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불평과 다툼이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는 허영심 때문입니다. 그 허영심으로 인하여 우리는 옛 습관인 싸우는 정욕대로(약 4:1) 행하기에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울의 말처럼 “모든 일을 원망(불평)과 시비(다툼)가 없이”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는 너희(우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빌 2:15).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삐뚤어진 세상입니다. 주님께서 명하신 바르고 곧은길로 가지 않고 구부러진 길로 가고 있습니다. 마음도 삐뚤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에 말과 행동 다 삐뚤어져 있습니다. 우리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예수님의 빛을 나타내며 살아가야 합니다(15절).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 일을 불평과 다툼이 없이 해야 합니다.

우리가 멀리해야 할 마지막 다섯째 부류의 사람들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혹시 여러분은 누군가가 여러분에 대해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다녔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적이 있습니까? 만일 있으시다면, 결코 사실이 아닌데 그 사람이 나에 대하여 말을 꾸미고 거짓말을 하여 나에 대하여 나쁜 소문을 다니면서 퍼드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셨습니까? 저는 이러한 경험을 해보았습니다. 전혀 사실에 근거하지도 않은 거짓말로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내어 자기가 사는 아파트에 저에 대한 나쁜 소문을 내어서 그 소문에 저 뿐만 아니라 연관된 사람들이 찾아와 저에게 그 소문에 대해서 알려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두 분과 함께 교회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좀 더 자세한 내막을 듣고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 저는 저 자신보다 저와 연관시켜서 거짓된 소문에 연루된 그 두 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특히 그 두 분 중에 한 사람은 교회를 다니지도 않았기에 마음이 많이 미안해서 소문을 퍼뜨린 사람 대신 제가 사과를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2절을 보십시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나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의 말은 맛있는 음식과 같아서 사람들은 그것을 삼키기 좋아한다"]. 아직도 잘 잊혀지지 않는 말씀 묵상 중 “사단의 전략(4)”이란 말씀 묵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21장 27-36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한 QT인데 그 때 저는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사탄의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소문”(rumor)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31절). 그 말씀의 요점은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인 야고보와 모든 장로들의 권면을 받아들여 나실인을 서약 한 4명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 그들을 위해 각종 희생 제물을 비용을 치러주고 그들의 희생 제사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철저하고 경건한 유대인인가를 결정적으로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날이 눈앞에 있을 때 오순절 절기를 위해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보고 모든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을 붙잡았습니다(유상섭). 그들은 사도 바울에 대한 거짓된 주장을 서슴없이 펴므로 모든 무리를 충동했습니다. 그 유대인들은 사실인지 아닌지를 먼저 확인한 후 말을 했어야 했는데 그저 추측 속에서 성전 안 이스라엘 남자의 뜰 안에 있었던 모든 유대인 남자들을 충동시켜 바울을 붙잡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경험을 이미 이고니온에서도 겪었습니다(행14). 그는 바나바와 함께 이고니온에 가서 항상 하던 대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을 때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는 역사도 경험하였지만(1절) 그 때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므로(2절) 두 사도를 능욕하고 돌로 치려고 달려드는(5절) 이러한 고난과 핍박도 겪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여기서 악감을 품게 하였다는 말씀은 영어 성경 NIV을 보면 “poisoned their minds against the brothers”라고 적혀있습니다(2절). 즉,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에 독을 넣어 형제들을 대적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얼마나 한심하고 답답한 일입니까? 그런데 이러한 일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거짓된 주장을 펴서 교인들을 충동시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뭔가 사실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라 그저 추측 가운데서 자기가 미워하고 싫어하는 사람에 대하여 주장을 피므로 결국 주위 사람들을 충동하여 자기편을 만들어 그룹을 형성하는 일이 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성경 잠언 16장 2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패려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렵다는 성경 말씀을 생각할 때(10:19) 교회 안에서 말쟁이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는 말을 자꾸만 만들어서 다른 성도들을 충동시켜 다툼을 일으키는 일이 충분히 교회 안에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분쟁에 빠지는 것은 마귀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꾸 서로 다른 생각이 있음을 부각시키며 충동질하여 다투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남의 말하기를 좋아해서는 아니 됩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면 상대방에게 피해를 입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한 예로, 우리가 남의 말을 하다보면 “다툼”을 일으킬 수도 있고(잠 18:6, 26:20) 또한 “친한 벗을 이간”할(갈라놓을) 수도 있습니다(16:28). 그래서 성경 시편 101편 5절에서 “자기 이웃을 은근히 헐뜯”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고 잠언 17장 9절은 허물을 거듭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익한 말을”(함부로 지껄이지 말)아야 합니다(마 12:36). 또한 우리는 집집으로 돌아다니면서 쓸데없는 말이나 헌담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딤전 5:13)(Nel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