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의 특징

 

 

[잠언 2613-16]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부족한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 중에 세 가지를 말하라고 한다면 저는 헌신도(commitment)와 간절함(earnestness or desperateness)과 긴박감(sense of urgency)을 말하겠습니다. 주로 1세 어른들이 그들의 자녀들인 2세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 "헌신도"가 부족하다고들 말하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1세 어른들 뿐만 아니라 2세를 목양하는 2세 목사님도 그리 말하더군요. 그러나 저의 생각은 헌신도가 부족한 것인 꼭 2세 형제, 자매들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1세나 1.5세나 우리 모두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대체적으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헌신도가 빈약하다고 생각합니다. 헌신도 뿐만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간절함”도 많이 부족합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있지 않습니다. 얼마 전 새벽기도회 때 스바냐 1장에서 3장까지 말씀을 읽다가 1장 6절에 제 시선이 좀 멈췄었습니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따르지 아니한 자들과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리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날에 유다 백성들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 중에 하나님을 찾지도 아니하고 구하지도 아니한 자들을 멸절하시겠다는 말씀에 저는 좀 놀랬습니다. 왜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지도 않고 구하지도 않았을까 생각해 볼 때 그 이유는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고 우상을 경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4-5절).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스바냐 2장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명령에 순종하는 세상의 모든 겸손한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찾고 의와 겸손을 추구하라. 어쩌면 너희가 여호와께서 분노하시는 날에 형벌을 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겸손히 찾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헌신도와 간절함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긴박감"입니다. 긴박한 상황에 있기 전까지는 너무나 태평하게 지내는 것 같습니다. 문제의 심각성을 좀 깨달아서 긴박감을 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그래야 하는데 지금 우리는 그러한 긴박감이 없습니다. 그저 여유입니다. 지금 우리는 타성에 많이 젖어있습니다.

 

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족한 헌신도와 간절함과 긴박감의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볼 때 저는 그 원인이 이기주의와 안락주의와 게으름이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기주의”가 무엇입니까? 자기 사랑이 아닙니까? 자기 사랑하는 사람이 주님을 사랑한다고 헌신하겠습니까? 점점 더 시간이 지나갈수록 주님께 헌신하는 사람들이 적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 디모데후서 3장 2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말세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점점 더 교회를 봉사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들 먹고 사는데 힘들므로 말미암아 결국 교회를 자원하는 마음으로 봉사하는 자들이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점점 더 성도들이 교회에 헌신하지 못하(않)고 있습니다. 헌신도 뿐만 아니라 간절함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기의 안락(comfort)을 추구하지 뭐 하러 주님을 위해서 고생하며 고통을 당하려고 하겠습니까. 쾌락주의도 위험하지만 안락주의도 참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간절히 찾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요나서 4장을 읽다가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더위를 피하게 하셔서 편안하게(comfort)해 주시고자[“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to ease his discomfort)] 박넝쿨을 예비하셔서 요나의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들어 주셨다는 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습니다(6절). 그 때 요나는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 중심으로 묵상하다가 2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1) “내가 불편하다고 하여(요나 4:6 - discomfort) 불평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닌 듯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에게까지 분노해서는 아니 됩니다(9절). “Our discomfort may be an opportunity to learn lesson from God - His concern.”[우리의 불편함은 어쩌면 하나님께로부터 교훈(그 분의 아끼는 마음)을 받을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욘 4:6, 11)]. “게으름”도 이기주의와 안락주의와 더불어 우리의 헌신도와 간절함과 긴박감에 안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게으름”이란 “이기주의”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연관이란 “게으름의 뿌리는 자기 사랑”입니다(김남준). 자기를 사랑하는 이기주의적인 사람은 결코 주님을 향하여 헌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주님을 찾고자 하는 간절함도 없고 또한 긴박감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게으름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인터넷 글을 보니까 이렇게 게으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무릇 게으름이란 ‘움직이느냐! 움직이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중요한 일부터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이기 때문이다“(인터넷). 그 글을 쓴 문요한이란 정신과 전문의는 게으름의 3가지 유형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완벽주의형(우유부단형) 게으름 증을 꼽을 수 있습니다.

 

대개 이들은 자신들의 성향 때문에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우거나 세부적인 준비에만 급급하다가 시간을 다 허비합니다. 겉으로는 늘 바빠 보이지만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더 시급한지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당장 시험공부를 시작해야 하는데 그 와중에 꼼꼼하게 책상 정리하고 다양한 색연필로 멋있는 시간계획표 짜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이다.

 

(2) 자기회의형 게으름 증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늘 자신의 능력을 의심하고 스스로를 비난하기 때문에 망설이고 미루는데 능합니다. “자기회의-불안-미룸-불완전합리화(다음에는 좀 더 준비해서 꼭 해야지!)-자기비난”이라는 악순환을 계속 반복하고 있는 셈입니다.

 

(3) 수동공격형 게으름 증을 들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의존하고 있는 대상(예: 부모)에 대한 반감을 적극적으로 표출하거나 승화시키지 못하고 늘 수동적으로 표현합니다. 겉으로는 공손한 것처럼 보이지만 요구되어지는 일에 대해 늘 꾸물거리고 비능률적으로 행동하는 식으로 무의식적인 공격성을 표현합니다. 불행하게도 자신의 인생을 서서히 실패로 몰아감으로써 상대를 화나게 하고 상대의 삶도 파괴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위의 유형에 비하면 오히려 태연해 보입니다.

 

네이버 사전을 보니까 “행동이 느리고 움직이거나 일하기를 싫어하는 성미나 버릇이 있”는 사람이 바로 게으른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원어 히브리어를 보면 “게으른 자”란 ‘습관적으로 게으르고 활동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규율(훈련)도 없고 계획도 없는 도덕적으로 실패한 자’를 말합니다[a person who is habitually lazy and inactive, suggesting he has no discipline or initiative, as a moral failure(Swanson)]. 그러나 잠언을 보면 “게으른 자”란 그저 이런 의미만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예를 들어 잠언 15장 19절을 보면 “게으른 자의 길은 가시울타리 같으나 정직한 자의 길은 대로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면 성경은 “게으른 자”를 “정직한 자”와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언 21장 25-26절을 보면 성경은 일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자”를 “의인”(the righteous)하고 대조하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9장 15절을 보면 성경은 “게으른 자”를 “해태한 사람(an idle man), ‘나태하여 놀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Walvoord). 이것을 볼 때 게으른 사람이란 그저 습관적으로 게으르고 활동하지 않는 사람으로서 규율도 없고 계획도 없는 도덕적으로 실패한 자란 의미 외에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지 않는 자, 불의한 자란 의미도 포함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 예레미야 48장 10절은 “여호와의 일을 태만히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요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게으름은 죄입니다. 게으름이 죄가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는 것(마25:18)은 주님께 “악하고 게으른 종”(26절)이라는 책망을 받는 죄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3-16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게으른 자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 중심으로 게으른 자의 특징이 무엇인지 오늘 성경 말씀 중심으로 한 4가지로 생각해 보면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게으른 자의 특징은 핑계를 잘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3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사람은 '길거리에 사자가 있다.' 하면서 일하러 가지 않는다"(현대인의 성경). “길과 거리는 사람들이 일하는 일터입니다. 그런데 그 곳에 사자가 있다면 그런 곳에 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 겁을 집어먹고 자신이 없을 때 핑계를 대는 구실입니다”(인터넷).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에게 비춰보았을 때 겁을 집어먹고 자신이 없어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주님의 일을 하지 않았던 제 자신의 모습을 엿보게 되었습니다. 그 핑계 중 하나는 실패의 두려움으로 인한 핑계로서 ‘내가 그 일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을꺼야’라는 식으로 생각하여 주님의 일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왜 제가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그 원인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제 자신의 명철을 의지한 것입니다(3:5). 믿음이 없었기에 제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였고, 믿음이 없었기에 실패를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습관적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한 핑계는 ‘나는 모험심이 없다’였습니다. 용기가 없었고 믿음이 없었던 것인데도 말입니다.

 

중국 고전 “회남자”에는 “시간이 없어서 공부하지 못한다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못한다”는 글이 나온다고 합니다(인터넷). 실제로 우리는 공부만이 아니라 다른 일들도 “시간이 없어서 못한다”는 핑계를 자주 댑니다. 그런데 과연 이러한 핑계는 우리가 게을러서 그런 것은 아닌지 적어도 한번쯤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수필가 찰스 램에 대한 일화입니다: 그가 인도의 한 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을 때 마음대로 자기가 하고 싶었던 책을 읽고 자기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 정년퇴직을 하는 날, 더 이상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글을 쓰고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뛸 듯이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정년퇴직을 한 후 깨달은 것은 “바빠서 글 쓸 새가 없다는 사람은 시간이 있어도 글을 쓰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좋은 생각도 일이 바쁜 가운데서 떠오른다는 것을 그 때서야 깨달았다고 합니다. 할 일 없이 빈둥대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자신을 학대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합니다(인터넷).

 

성경 전도서 4장 5절을 보면 전도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우매자, 즉 미련한 자는 ‘손을 거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손을 거둔다’는 말은 ‘미련한 자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잠언 21장 25절 말씀과 일치되는 말씀입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즉, 게으른 자는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하는 게으른 자를 가리켜 성경은 우매자, 즉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미련한 자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자기의 책임인 일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성경 요한복음 15장 2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 미련한 자는 핑계를 되면서 일하기를 싫어하는 것, 지금은 그 죄를 핑계 할 수 없습니다. 이젠 우리도 핑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잠언 26장 13절 말씀을 받았으니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죄를 핑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즉, 우리는 더 이상 겁을 집어 먹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주님을 일을 미루던지 하지 않으면 그것이 주님 보시기에 ‘핑계할 수 없는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 누가복음 9장 57절부터 보면 핑계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핑계된 사람 중에 한 사람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57절).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분명히"나를 따르라“(59절)고 말씀하셨는데 한 사람은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59절)라고 그러고 또 다른 사람은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61절). 그 때 예수님께서 이러한 말을 하셨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60절),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 하니라”(62절). 우리도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뒤를 돌아보면서 이런 저런 핑계(변명)를 대면서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머뭇거리면 아니 됩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께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주님의 일을 하지 않는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뒤돌아 봐야 합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그러한 죄를 범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자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 후 우리는 더 이상 겁을 집어 먹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지 말고 오히려 믿음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둘째로, 게으른 자의 특징은 잠자기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4절을 보십시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서 도는 것 같이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도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문짝이 돌쩌귀에서만 돌듯이 게으른 자는 침실에서만 뒹군다”]. 이것은 게으른 자는 잠자리를 맴돈다는 말입니다. 즉,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뒹굴면서 잠자기를 좋아한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13절과 연관해서 생각해 볼 때 게으른 자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일하러 가지 않는 이유는 좀 더 자고 좀 더 졸고 싶어서란 말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 솔로몬은 잠언 6장 9-1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참고:24:33):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 더 자자, 좀 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누워 있자 ....“

 

여러분, 하루에 잠을 몇 시간씩 자는 게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한 인터넷 사이트를 보니까 잠은 소아의 경우 12시간, 청소년은 9시간, 어른은 7시간 30분 이상 자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인터넷). 수면 시간이 부족한 것도 문제이지만 수면 시간이 너무 길어도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잠자는 시간을 줄여서라도 무엇인가 생산적인 일을 하려고 할 때가 있는데 그러한 수면 부족은 오히려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저하돼 일의 효율성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평소보다 4시간을 못자면 반응 속도가 45%가량 느려지고, 하룻밤을 전혀 안자고 꼬박 세면 반응 시간이 평소의 두 배 가까이 길어진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수면부족은 무엇보다 정신적인 활동을 흐리게 합니다. 수면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새롭고 복잡한 문제나 창의력, 재치, 순발력 등을 요하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또한 생기가 없고 둔감해지며, 기분이 가라앉아 평소 쾌활하던 사람도 며칠 잠을 제대로 못자면 쉽게 우울해지고 짜증이나 화를 잘 내기도 합니다. 지나치게 많이 자면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늘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수면과다는 불면증과 함께 우울증의 대표적인 징후입니다. 그러므로 공부나 일을 하기위해 수면시간을 무조건 줄이거나, 피로를 푼다고 수면시간을 무조건 늘리는 것 보다는 자신만의 적절한 수면시간을 찾아 규칙적인 수면습관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잘 맞는 수면시간과 습관이야말로 몸에 꼭 필요한 보약이라고 합니다.

 

성경 이사야 56장 10절을 보면 잠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입니다. 이사야 56장 10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파수꾼들은 맹인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들이라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들이요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니." 여러분, 적군과의 전쟁 속에서 성을 지키는 파수꾼들이 “누워 있는 자들이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들”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말로 한다면, 군대에서 보초서는 군인들이 깨어 서서 보초를 서지 않고 누워 있으며 잠자기를 좋아한다면 어찌되겠습니까? 파수꾼들의 역할은 깨어 있어서(시 127:1) 밤낮으로 보초를 서는 것입니다(느 4:9). 그리고 그들은 적군이 오는 것을 보고 경고의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겔 33:6).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책임을 맡은 파수꾼들이 잠자기를 좋아한다면 그 성과 그 성에 있는 사람들은 적군들에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잠자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파수꾼으로 세우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잠자기를 좋아하는 파수꾼들에게 자기 생명을 맡기겠습니까.

 

여러분, 성경 잠언 23장 21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술 취하고 음식을 탐하는 자는 가난하여질 것이요 잠자기를 즐겨하는 자는 해어진 옷을 입을 것임이니라"[(현대인의 성경)"술주정꾼과 대식가는 가난하게 되고 잠자기를 좋아하면 누더기를 걸치게 된다"]. 이 말씀의 문맥을 보면 잠언 기자는 술 취하는 자들과 더불어 사귀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술 취하는 자들은 가난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술 취하는 자들이 가난해 지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술 취하는 자들은 방탕생활을 하면서(엡 5:18) 자기가 가진 소유를 낭비할 뿐만(참고: 눅 15) 아니라 게을러서 잠자기를 좋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잠 23:21). 그래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고 거듭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엡 5:18, 롬 13:13, 고전 5:11, 6:10).

 

여러분, 우리는 게으른 자들처럼 잠자기를 좋아해서는 아니 됩니다. 또한 우리는 게으른 자는 깨야할 시간에 깨지 않고, 일을 해야 할 시간에 일을 하지 않고 나중으로 미뤄서는 아니 됩니다. 좀 더 자고 나중에 일하자라는 자세로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지 않고 다른 것(상황, 사람 등등)을 탓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고 깨어서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반드시 일할 수 없는 밤이 오기 때문입니다(새 찬송가 330장 “어둔 밤 쉬되리니”). 그러므로 우리는 “일할 때 일하면서 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할 때에 잠자기를 좋아하지 말고 부지런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던지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부지런히 해야 합니다.

 

셋째로, 게으른 자의 특징은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5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게으른 자는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에 갖다 넣기를 싫어한다"]. 똑같은 말씀이 잠언 19장 24절에도 나와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 여러분, 이솝우화 중에 “개미와 베짱이”이를 아시죠? 그 유명한 이야기를 보면 개미는 여름에 열심히 일하는 동안 베짱이는 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개미들을 조롱합니다: “어이, 개미들, 여름에 겨울 준비를 하다니 머리가 어떻게 된 것 아냐?” 그러한 조롱에도 불구하고 개미들은 무더운 여름날에도 추운 겨울을 위해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베짱이는 매일 일은 하지 않고 노래만 부르며 살다가 겨울에 되서는 먹을 음식이 없어 밥을 구걸하는 신세가 됩니다. 어린 시절 우리가 이 동화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개미처럼 되어야지 베짱이처럼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개미처럼 근면 성실하게 살아야 하지 베짱이처럼 게으르게 살아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젠 나이가 들어서 이 이솝 이야기를 생각하면 그저 개미처럼 근면성실해야 한다는 교훈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미리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 아주 어린 아이를 보면 엄마가 음식을 숟가락에 담아서 그 아이의 입에 음식을 먹여줍니다. 그런데 그 어린 아이가 자라나서 이젠 어느 정도 자기 혼자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어릴 때부터 습관적으로 엄마에게 음식을 받아먹었다고 하여 계속해서 엄마가 숟가락으로 음식을 퍼서 먹여주겠지 하고 자기 입만 벌리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잠언 21장 25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게으른 자의 정욕이 그를 죽이나니 이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함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게으른 자들은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잠언 13장 4절에서 성경은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그는 마음은 원하는데 손을 게으르고 놀리기 때문이 그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게으른 자는 그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12:27) 자기의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합니다(19:24, 26:15). 웃기지 않습니까? 고기를 먹고 싶으면 사냥을 해서 짐승을 잡아야 하는데 마음으로만 원하고 실제로 사냥도하지 않는다는 것이 여러분 웃기지 않습니까? 또한 어느 누가 배가 고픈데 손을 그릇에 넣고서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합니까? 아니 그러면 아기처럼 누군가 숟가락으로 음식을 먹여줘야 합니까? 이것은 게으름의 극치라 생각합니다. 마음은 원하는데 사냥도 하지 않고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는 것, 이것은 참으로 게으름 중의 게으름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게으른 사람을 가리켜 성경 잠언 19장 15절은 “태만한 사람”(an idle man), 즉, 나태하여 놀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게으른 자는 그 손으로 일하기를 싫어합니다(21:25). 그 결과 게으른 자에게는 피할 수 없는 가난이 오되 마치 피해자가 강도를 만나 압도당하는 것처럼 가난이 옵니다(24:33)(MacArthur).

 

오히려 게으른 자들은 일을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경 디모데전서 5장 11-13절을 보십시오: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게으른 젊은 과부는 오히려 집집에 돌아다니면서 망령된 폄론을 하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므로 일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미련하고 게으른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 말씀을 보십시오: “…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 사도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공동체 안에는 일하기 싫어하는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들이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교회 안에서 규모 없이 행하여 일만 만들었습니다(3:11). 이들이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회 안에서 일만 만들었던 이유, 즉 이들이 미련하게 게을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지 않고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았던 이유는 바로 잘못된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 중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삐뚤어진 종말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손을 거두고 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잘못된 종말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위험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종말론 뿐만은 아닙니다. 삐뚤어진 신앙관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충분히 있습니다. 우리가 회피하는 책임 중에 하나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으로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즉, 만일 우리가 잘못된 신앙관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기본적인 책임도 회피한다는 말입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삐뚤어진 신앙관을 가지고 있으면 교회에 충성한답시고 일하지도 않고 놀고먹으면서 분주히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바른 신앙관을 가지고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물론 그 주님의 일에는 예수님을 믿는 일이 매우 중요하지만 또한 중요한 것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일입니다. 섬기되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로 섬겨야 하며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섬겨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임마누엘 믿음으로(학 1:13, 2:4, 5) 주님의 교회를 봉사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스스로 굳세게 하여(2:4) 두려워하지 말고(5절) 주님의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게으른 자의 특징은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6절을 보십시오: “게으른 자는 사리에 맞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지혜롭게 여기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게으른 자는 분별력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긴다”]. 우리는 이미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에 대해서 잠언 두 구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을 했습니다:

 

(1) 첫째 구절은 바로 잠언 37절 말씀입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다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여 일을 경영하여 그 경영하던 일이 잘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지혜로워서 그 일이 잘 된 줄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자기 명철을 의지하는 자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기 여기는 악을 떠날 수 있습니다(7절).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낮은데 마음을 둬야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는 겸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 겸손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를 하나님께서 들어 일으켜 높이 사용하실 것입니다.

 

(2) 둘째 구절은 바로 잠언 2612절 말씀입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이 말씀을 원어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눈으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네가 보느냐 그이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소망을 가지라”(박윤선). 우리가 우리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볼 때에 ‘나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교만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만한 이유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은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6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또 다시 자기 자신을 지혜롭게 여기는 자에 대하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게으른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게으름과 교만이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련함이 교만함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12절) 이렇게 게으름도 교만함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오늘 본문 잠언 26장 16절에서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게으른 자는 교만하다는 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게으른 자는 분별력이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오늘 본문 잠언 26장 16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게으른 자는 분별력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긴다.” 이 말씀을 보면 잠언 기자는 게으른 자와 분별력 있게 대답하는 사람 일곱 명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그 대조를 볼 때 게으른 자가 분별력 있게 대답하는 일곱 사람들보다 자기를 더 지혜롭게 여긴다는 것은 그가 교만할 뿐만 아니라 미련해서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교만하고 미련해서 분별력이 없는 게으른 자에 대해 죤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The ignorant are ignorant of their ignorance"(무지한 자들은 자기의 무지함에 대해서 무지하다). 이렇게 무지한 게으른 자는 성경 히브리서 5장 2절을 보면 “미혹된 자”[“are going astray"(NIV), "misguided"(NASB)]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무지한 게으른 자는 미혹을 받아 잘못에 빠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무지한 게으른 자가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결코 우리는 미련한 게으른 자가 되어서 분별력이 없이 살아서는 아니 됩니다. 도리어 우리는 지혜로운 부지런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진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분별력을 가진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살필 것입니다(잠 28:11,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좋은 교훈을 계속해서 얻을 것입니다(1:5, 현대인의 성경). 그리할 때 우리의 분별력이 우리를 지키고 우리를 보호할 것입니다(2:11, 현대인의 성경).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주님 앞에 서서 회계(결산)를 해야 합니다(마 25:19). 주님께서 “각각 그 재능대로”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셨습니다(15절). 우리는 주님께 각자 달란트를 받은 자들로서 우리의 책임을 신실하게 잘 감당하여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16-17절).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 ”(Well done, good and faithful servant!)라는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21, 23절). 결코 우리는 한 달란트 받은 자처럼 주님께 “악하고 게으른 종아 ...”(You wicked, lazy servant!)라는 책망을 받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26절). 오늘 우리는 본문 잠언 26장 13-16절 말씀 중심으로 게으른 자의 특징 4개를 묵상했습니다: 우리는 게으른 자는 핑계를 잘 되며(13절), 잠자기를 좋아하며(14절), 일하기를 싫어하며(15절) 또한 자기를 지혜롭게 여긴다(16절)고 배웠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에게 이러한 게으른 자의 특징이 없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