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자

 

 

[잠언 261-12]

 

 

95세 이상이 된 노인 50명을 상대로 “당신들에게 이제 다시 삶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아가고 싶습니까?”란 질문의 3가지 답 중에 첫 번째 답이 바로 ‘날마다 반성(I would reflect more)하는 삶을 살겠다’였습니다(인터넷). 오늘 우리는 이것을 실천해 보려고 합니다. 즉, 우리는 오늘 영적 거울인 성경 말씀에 우리 자신을 반영해(비춰)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그 반영이란 과연 우리는 성경 말씀에 비춰볼 때 지혜로운 사람인가 아니면 미련한 사람인가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혜로운 자”에 대해서 한 5 가지로 생각해 보십시다.

 

(1) 지혜로운 자에게는 듣는 귀가 있습니다.

 

성경 잠언 15장 31절을 보십시오: “생명의 경계를 듣는 귀는 지혜로운 자 가운데에 있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하나님의 명령(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10:8), 권고를 또한 듣습니다(12:15).

 

(2) 지혜로운 자는 지식이 있습니다.

 

성경 잠언 10장 14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는 지식을 간직하거니와 미련한 자의 입은 멸망에 가까우니라.”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지식을 전합니다(15:7).

 

(3)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납니다.

성경 잠언 14장 16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는 두려워하여 악을 떠나나 어리석은 자는 방자하여 스스로 믿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위로 향한 생명 길”을 향합니다(15:24).

 

(4) 지혜로운 자는 입술을 지혜롭게 사용합니다.

 

성경 잠언 16장 23절을 보십시오: “지혜로운 자의 마음은 그의 입을 슬기롭게 하고 또 그의 입술에 지식을 더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언제나 신중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지혜로운 자는 말로 자기 자신을 보호합니다(14:3, 현대인의 성경).

 

(5) 지혜로운 자는 노를 억제합니다.

 

성경 잠언 29장 11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미련한 자”는 누구입니까? 영적 우매한 자로서 한 4가지로 요약할 수가 있습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를 미련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시편 14편 1절을 보십시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2) 성경은 죄를 심상히 여기는 자를 미련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잠언 14장 9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죄를 심상히 여겨도 정직한 자 중에는 은혜가 있느니라.”

 

(3) 성경은 책망을 듣기 싫어하는 자를 미련한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잠언 1장 22-25절을 보십시오: “너희 어리석은 자들은 어리석음을 좋아하며 거만한 자들은 거만을 기뻐하며 미련한 자들은 지식을 미워하니 어느 때까지 하겠느냐 나의 책망을 듣고 돌이키라 보라 내가 나의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며 내 말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불렀으나 너희가 듣기 싫어하였고 내가 손을 폈으나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도리어 나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며 나의 책망을 받지 아니하였은즉.”

 

(4) 성경은 영혼(내세)을 위하여 준비하지 않는 자를 미련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누가복음 12장 16-21절을 보십시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오늘 본문 잠언26장 1-12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미련한 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말하는 미련한 자는 누구인지 한 9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적당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미국 야구 역사상 제일 안타를 많이 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피트 로즈(74살)라는 사람으로서 그는 1963년부터 1986년까지 23년 동안 빅 리그에서 3천 562경기에 출장해 역대 최다인 4천 256 안타를 쳤습니다. 이 사람을 제외하면 4천 안타 고지를 밟은 것조차 타이 콥(4천 191안타)이 유일한 정도로 독보적인 타격 기록이라고 합니다. 이 기록이라면 그는 충분히 미국프로야구(MLB) 명예의 전당(Hall of Fame)에 설 수 있는 기록이지만 그는 도박으로 벌써 30년 가까이 야구계에서 축출 당했습니다(인터넷). 여기서 미국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이란 “야구 발전에 기여한 이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공간인데 거기에 이름을 올리려면 메이저리그 선수들은 최소 10년 이상 뛴 선수 중에서 은퇴 후 5년이 지난 선수를 대상으로 미국야구 기자협회 소속 기자들의 투표로 헌액자를 선정하는데 75% 이상 득표하게 되면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확정된다고 합니다(인터넷). 그가 신시내티 레즈 감독으로 재직하던 1989년에 신시내티의 경기 결과에 돈을 걸고 도박을 했다는 의혹에 휩싸여 메이저리그에서 관련 조사를 하는 중에 협의를 극구 부인하던 로즈는 메이저리그에서 영구추방 당하되 관련 조사를 중단하는 것으로 메이저리그 사무국과 합의하고 야구계를 떠났습니다. 그런 후 15년 뒤인 2004년에 자서전을 출간해 도박을 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마 이번에 미국프로야구 커미셔너가 바뀌면서 신임 커미셔너인 롭 만프레드라는 사람이 로즈의 명예의 전당 입회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 생각엔 이 사람이 미국프로야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려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올리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5장 27절을 다시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현대인의 성경) “꿀을 너무 많이 먹어도 이롭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도 이롭지 못하다”]. 여기서 우리는 명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명예욕”(desire for honor)과 ‘명예탐욕(greed for honor)’입니다. 그리고 성경 잠언 25장 27절에서 “자신의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도 이롭지 못하다”(헛되니라)고 말씀하였을 때 잠언 기자가 말하였던 “명예”는 바로 명예탐욕이었습니다. 명예탐욕이 무엇입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것으로 우리 모두가 항상 경계해야 합니다. 한 예로, 저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사무엘상 25장에 나오는 “나발”이 생각납니다. 그는 “심히 부여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나 있었습니다(2절). 그런데 그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그가 다윗의 선을 악으로 갚았기에(21절) 다윗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를 한 사람도 남겨 두지 않고(22절) 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17절). 그 때 그의 지혜로운 부인인 아비가일이 다윗의 발에 엎드려 하는 말을 들어보십시오: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24-25절). 이런 미련한 자에게 과연 “영예”(honor)각 적당(적합)(fitting)합니까?

 

오늘 본문 잠언 26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예가 적당하지 아니하니 마치 여름에 눈 오는 것과 추수 때에 비 오는 것 같으니라.” 여러분, 여태껏 살아오시면서 여름에 눈이 오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혹시 추수 때에 비가 오는 것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마 여름에 눈이 오는 것을 본 적이 없으실 것입니다. 어쩌면 추수 때에는 비가 오는 것을 본 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거의 드물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추수 때에 비가 온다면 농작물에게 피해를 줄 것입니다. 지금 성경은 미련한 자에게는 영예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준다는 것은 마치 여름에 눈이 오는 것처럼 적당(적합)하지 않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Walvoord). 또한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마치 돌을 물매에 매는 것처럼(8절) 적합하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돌을 던지려고 할 때에 그것을 물매에 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돌이 던져질 수가 없습니다(박윤선). 이와 같이 나발 같이 미련하고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에게 영예를 준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만일 나발과 같은 다른 사람이 선을 악으로 갚는 자에게 영예를 준다면 마치 추수 때에 비가 와서 농작물에게 피해를 주는 것처럼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줄 것입니다. 저는 그러면 에서 피트 로즈라는 야구 선수가 미국프로야구 명예전당에 들어간다는 것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미국프로야구 역사상 제일 안타를 많이 친 전설적인 야구선수라 할지라도 그가 감독하면서 자기 팀 야구 게임을 도박한 사람을 만일 명예전당에 올려놓으면 그 명예전당의 “명예”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리고 만일 명예전당에 그의 이름이 올라간다면 후배 야구 선수들과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요? 우리는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보시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 “’오직 말씀’ 역사 배경 세미나 때 강사 목사님이 말한 것처럼 한국 대형 교회 어느 목사님의 명예욕을 언급하셨는데 우리는 그렇게 명예탐욕을 내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명예탐욕을 경계하고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명예탐욕은 경계하고 또 경계해야 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올바른 명예는 구해야 합니다. 올바른 명예란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명예 욕구는 하나님께서 식욕, 수면욕, 성욕 등과 함께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이고,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이 바른 방법이며, 그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들에게 덕을 끼치는 것이라면 우리의 명예욕은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입니다(참고: 신 26:19-19). 우리는 이러한 정당하고 바람직한 명예욕을 가지고 겸손히 주님을 위해서 사는 하나님의 사람을 ‘존경’(honor)해야 합니다.

 

지난 주 인터넷 페이스 북에 올려 진 글 하나를 보았습니다. 전에 비슷한 기사를 어느 인터넷 뉴스에서 보았던 것 같았지만 잘 생각이 안 나서 다시금 글을 다 읽어 보았습니다. 다 읽은 후 제 마음에 든 생각은 ‘참 귀한 분들이다. 참 존경할 만한 분들이다. 나도 그 분들을 본받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분들은 누군가 하면 한국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수녀 마리안(71) 그리고 마가레트(70)입니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딘 후 약 43년간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주고,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43년간 헌신해서 70인 된 이 두 분은 이른 새벽에 아무도 모르게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란 제목의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소록도 섬을 떠나 고국이 오스트리아로 떠났다고 합니다. 편지에서 그들은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또한 이들은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답니다. 그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봐 조용히 떠난다고 합니다.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 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합니다. 그 분들의 방문 앞에는 그분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다고 합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인터넷). 이런 분들에게 영예가 적합하지 않습니까. 이런 분들을 우리가 존경(honor)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둘째로, 미련한 자의 까닭 없는 저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특별히 이유 없이 그냥 누군가가 미웠던 적이 있습니까? 그 사람이 나에게 잘못한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알면서도 까닭 없이 그 사람이 괜히 밉고 그런 적이 있습니까? 없으시면, 혹시 여러분은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미움을 당해본 적이 있습니까? 구약 성경 시편을 읽다 보면 시편 기자는 까닭 없이 미움을 당했던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 시편 69편 4절을 보십시오: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내 머리털보다 많고 죄 없는 나를 죽이려는 내 원수들의 세력이 막강하므로 내가 훔치지도 않은 것을 물어 주게 되었습니다.” 또한 현대인의 성경 시편 38편 19절도 보십시오: “내 원수들의 세력이 막강하고 이유 없이 나를 미워하는 자가 많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유 없이 그의 원수들에게 미움을 당하였습니다(애 3:52).

 

오늘 본문 잠언 26장 2절을 보면 성경은 “까닭 없는 저주” 또는 “이유 없는 저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2절을 보십시오: “까닭 없는 저주는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이유 없는 저주는 날아다니는 참새나 제비처럼 상대방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물론 2절에는 “미련한 자”란 단어가 나오지는 않지만 1절과 3절에 “미련한 자”가 나오는 것을 보면 2절에서 “까닭 없이 저주”하는 사람은 미련한 사람이지 결코 지혜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미련한 자가 누군가를 까닭 없이 저주할 때 그 저주가 객관적으로 볼 때 공평한 저주이겠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 저주는 공의롭지 않은 저주(an unjust curse )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이 미련한 사람의 공의롭지 않는 저주는 마치 “참새가 떠도는 것과 제비가 날아가는 것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참새가 “떠도는 것”은 ‘목적이 없기’(aimless)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목적 없이 하늘에서 떠도는 참새는 어디에 착륙(landing)해야 할지 몰라 그냥 허공에서 맴도는 것입니다. 바로 까닭 없는 저주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즉, 목적이 없다는 것은 저주의 실패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서 성경은 “까닭 없는 저주는 …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의롭지 않은 저주는 그대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골리앗이 블레셋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 하였으나(삼상 17:43-44), 다윗은 도리어 승리했습니다(48-50절).

 

만일 미련한 자가 까닭 없이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를 저주하고 핍박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교훈(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현대인의 성경 시편 119편 78절을 보십시오: “교만한 자들이 이유 없이 나를 비난한 일에 대하여 수치를 당하게 하소서. 그러나 나는 주의 교훈을 묵상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를 이유 없이 비난하는 교만한 자들이 수치를 당하게 하길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나는 주의 교훈을 묵상할 것입니다”라고 결심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시편 기자는 교만한 자들이 이유 없이 자기를 비난하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교훈을 묵상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까? 현대인의 성경 시편 119편 86절과 161절을 보십시오: “주의 계명은 모두 신뢰할 만합니다. 나를 도우소서. 사람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고 있습니다 … 권력 있는 자들이 이유 없이 나를 핍박하나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주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주님의 계명을 신뢰하였고 또한 권력 있는 자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시편 기자처럼 누군가 우리를 까닭 없이 힘들게 하고, 까닭 없이 비난하고 심지어 이유 없이 우리를 저주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심한대로 실제로 실천으로 옮길 수 있길 기원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까닭 없는 저주”를 묵상할 때 저주의 나무(신 21:23)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여 신성모독 죄(마 26:65)로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유는 영원히 저주 받아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저주를 받아 마땅한 이유가 있지만 예수님께서는 저주의 나무에 죽으실 아무 이유도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임한 저주를 돌이켜 우리에게 영생의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신 23;5, 느 13:2, 엡 1:3ff). 이 영생의 축복과 모든 영적인 축복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까닭 없는 비난을 받고 욕을 먹으며 심지어 저주를 받을지라도 묵묵히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선 우리가 신뢰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며 또한 신뢰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비난을 받고 욕을 먹으며 심지어 저주를 받을 만한 죄를 범하였다면 우리는 다윗처럼 그 저주를 소리도 다 들어야 합니다(삼하 16:5ff.). 다윗은 자신의 죄의 결과로 반역이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고 있었을 때 베냐민 지파 사람인 시므이가 그를 저주하였을 때에도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라고 말하면서 그 저주의 소리를 다 들었습니다(16:5ff). 그리고 그는 그 저주의 소리를 다 들으면서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통함을 감찰하시사 그 저주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으로 자기에게 갚아 주실 줄 믿었습니다(12절). 이러한 믿음으로 까닭 있는 저주인 던 까닭 없는 저주이든 다 들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에게 선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입니다.

 

얼마 전 한국 뉴스를 보니까 프랑스에서 체벌 반대 공익광고에 엄마가 아이의 따귀를 때리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아마 아이가 식탁에서 음료를 쏟아서 맞았는지 아니면 아이가 시끄럽게 굴어서 엄마에게 맞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그 뉴스의 초점은 유럽에서 요즘 체벌을 법으로 금지하는지를 놓고 국가별로 논쟁이 뜨겁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럽 최고 인권감시기구인 유럽평의회가 프랑스가 이미 어린이 보호를 약속한 유럽사회헌장에 서명하고도 법으로 체벌을 금지하지 않고 있자 프랑스에 경고장을 보냈다고 합니다. 유럽평의회 47개 회원국 가운데 스웨덴, 독일 등 27개 나라는 체벌을 금지했는데, 프랑스와 영국 등은 체벌을 용인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체벌 논란에 프란체스코 교황도 가세했다고 합니다. 그는 아이를 때리지만, 얼굴은 절대 때리지 않는다는 한 아버지의 사례를 들며 적절한 체벌은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녀 양육함에 있어서 적절한 체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한국에는 아동학대가 10건의 8건 이상이 가정 안에서 발생할 정도로 부모의 자녀 체벌이 심각하기에 최근에 어린이에 대한 체벌을 법률로 금지하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 같습니다(인터넷). 얼마나 가정 안에서 부모의 자녀 체벌이 심각하기에 아동학대가 10건의 8건 이상이 가정 안에서 발생하는지 좀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정도로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가 문제가 심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결코 가정 안에서 아동학대가 일어나서는 아니 된다고는 생각하지만 실제로 요즘 뉴스에서 말하는 “아동학대”란 말의 정의가 무엇인지 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보니까 아동복지법 제3조 제 7호에 이렇게 정의를 내린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아동학대’란 보호자를 포함한 성인이 18세 미만의 사람인 아동의 건강 또는 복지를 해치거나 정상적 발달을 저해할 수 있는 신체적·정신적·성적 폭력이나 가혹행위를 하는 것과 아동의 보호자가 아동을 유기하거나 방임하는 것을 말합니다”(인터넷). 얼마 전 미국 CNN 뉴스에 한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가 자기 자녀를 체벌한 것 같은데 큰 이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 뉴스를 보면서 가정에서 아버지가 자녀를 징계한 것 같은데 왜 이렇게 큰 문제로 뉴스에서 삼고 다루는 것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든 생각은 진짜 아동학대 하는 부모들 때문에 자녀를 사랑해서 징계하는 것조차도 이젠 법적으로 제지를 당하는 시대를 우리가 맞이한 것은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저는 자녀들을 훈계함에 있어서 Tedd Tripp이란 목사님이 그의 책 “Shepherding a Child’s Heart”에서 한 2가지로 말한 것을 공감하고 있습니다: (1) Rich, full communication(대화를 충분히 하는 것)이고 (2) The rod(회초리) 입니다. 물론 여기서 주님의 “훈계”로 자녀를 양육한다는 말은 회초리보다 대화를 우선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서 이 두 가지가 병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화를 우선시 하다가다 자녀들이 정 말을 안 듣고 죄를 범한 후에도 뉘우치지 않고 계속해서 불순종할 때에 부모로서 자녀를 회초리를 들어 징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 12장 6절 말씀 때문입니다: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현대인의 성경) “주께서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꾸짖고 나무라시며 그가 아들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다 채찍질하신다”]. 또한 잠언 13장 24절을 보십시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이 성경구절들은 사랑하는 자녀를 성실히 징계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3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잠언 10장 13절 하반 절에서는 “… 지혜 없는 자의 등을 위하여는 채찍이 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거만하고 강퍅한 자(“미련한 자”의 신분)를 벌과 재앙으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박윤선). 그러면 왜 성경은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미련한 자는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잠언 14장 3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는 교만하여 입으로 매를 자청하고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자기를 보전하느니라.” 또 다른 이유는, 미련한 자의 미련한 짓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그에게는 막대기로 징계를 해야 합니다. 성경 잠언 22장 15절을 보십시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현대인의 성경) “아이들은 미련한 짓을 하기가 일쑤지만 징계의 채찍으로 이런 것을 바로 잡을 수 있다”]. 미련한 자의 영혼을 죽음(스올, 음부)에서 구하기 위해서 그는 막대기로 징계해야 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잠언 23장 13-14절을 보십시오: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현대인의 성경) “자식을 훈계하는 데 주저하지 말아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를 채찍으로 벌하면 그의 영혼을 죽음에서 구하게 된다”]. 이 성경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미련한 자에게는 막대기든 회초리이든 징계가 필요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부모님과 자식과의 관계에서만 적용되는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성경 시편 89편 32절을 보십시오: “내가 회초리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며 채찍으로 그들의 죄악을 벌하리로다”[(현대인의 성경) “내가 막대기로 그들의 죄를 벌하고 채찍으로 그들의 죄를 다스릴 것이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사야 10장 5절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죄를 범한 북쪽 이스라엘 백성을 징계하심에 있어서 앗수르란 나라를 하나님의 “진노의 막대기”와 하나님의 손에 “몽둥이”로 사용하셨다는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또한 남쪽 유대 나라는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하나님의 진노의 회초리로 사용하시사 유다 나를 징계하셨다는 예레미야 50-52장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다 결국은 앗수르나 바벨론이 미련하여져서 하나님 앞에서 교만해졌기에(사 10:12-16, 14:24-25; 렘 50:29) 하나님께서는 그 막대기와 회초리를 꺽으시사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미련하여 미련한 죄를 범한 후에도 자복하고 회개하며 돌이키지 않을 때 사랑의 막대기(매)를 드셔서 우리를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미련함을 멀리 쫓아내시며(잠 22:15),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시고(14:3) 또한 우리에게 지혜(29:15)를 주십니다. 성경 잠언 29장 15절을 보십시오: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행하게 버려 둔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꾸짖고 때려서라도 교육을 시키면 지혜를 얻게 되지만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면 자식이 어머니를 욕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때에 우선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히 12:5).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6절)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대우하시기에(7절)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10절) 우리를 징계하시는 것입니다. 비록 징계 받을 당시에는 슬퍼 보이나 후에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연단을 받을 것입니다(11절).

 

넷째로,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한 자와 대화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만일 대화해 보신 적이 없다면 한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한 자하고 대화를 하면 여러분은 말이 통할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제 생각엔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습니다. 특히 제가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한 자에게 바른 교훈을 하고 심지어 사랑으로 책망을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은 제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저에게 화를 낼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한 자하고는 대화가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한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가 바른 줄로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잠 12:15). 즉, 그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26:12) 그는 “계명을 받”지 않습니다(10:8). 오히려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합니다(1:7). 실제로 제가 제 자신을 볼 때에 미련하여 제 마음이 교만하고 강퍅해져 있을 때에는 누구의 말도 잘 안 듣는 것을 봅니다. 심지어 그러한 때에는 제가 존경하는 신앙의 선배님들의 말도 잘 안 듣는 제 자신을 모습을 봅니다. 그와 같이, 저 또한 누군가가 자기 스스로 옳다고 여기고 있고 자기 행위가 바른 줄로 여기는 있는 사람에게는 성경적인 옳은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가도 말해 보았자 그 사람이 듣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기에 안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경우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을까요?

 

우리는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4-5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이 두 성경 구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즉,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고 4절에 말했다고 5절에 가서는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서로 상충되는 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련한 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2가지 지혜로운 태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침묵입니다.

 

미련한 자가 우리에게 말할 때 우리는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4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 두렵건대 너도 그와 같을까 하노라.” 만일 상대방이 진리가 아닌 진리를 왜곡하는 말을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그 상대방은 그 왜곡된 말을 진리로 믿고 확신까지 하고 있는데 그런 그가 그 말을 우리에게 한다면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요? 만일 우리가 ‘예, 당신 말이 맞아요’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그 사람의 미련함을 따라는 대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람의 미련함에 동참하는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만일 우리가 그 미려한 자의 왜곡된 말에 ‘아니오. 당신 말이 틀립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그 미련한 사람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말이 통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미련한 자의 어리석은 것을 따라 대답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4절). 그 때는 오히려 우리가 침묵하는 게 지혜롭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2) 미련한 자가 무식의 원인으로 무지한 말을 할 때에는 우리가 그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대답하여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5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에게는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라 두렵건대 그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길까 하노라.” 여러분, 만일 미련한 자가 어리석은 말을 할 때에 우리가 침묵하지 않고 그의 어리석음을 따라 대답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은 그 미련한 자는 자기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긴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련한 자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5절).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무지한 것이요 그의 영혼이 매우 어두워져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자에게 우리는 그 어두워진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구원하고자 빛 되신 주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18장 19-24절을 보면 예수님도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두워진 대제사장에게 “바른 말”을 하셨습니다(23절). 그 때에 예수님 곁에 서 있던 대제사장의 “아랫사람”이 손으로 예수님을 쳤습니다(22절).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무지하고 어두워진 대제사장에게 바른 말을 하시므로 “곁에 섰던 한 경비병”에게 뺨을 맞으셨습니다(23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무지하고 영적으로 어두워진 미련한 자에게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바른 말을 하되 우리는 그 미련한 자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녀의 영혼 구원을 위하여 듣던지 아니 듣던지 “바른 말”을 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 미련한 자 앞에서 침묵함과 바른 말로 가르쳐야 함을 생각할 때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을 때에 예수님의 반응이 생각났습니다. 먼저 많은 사람들이 와서 거짓 증언을 하였지만 실질적인 증거를 얻지 못하고 있는데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와서 예수님에 대해서 이러한 증언을 했습니다(마 26:59-60):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3일 만에 다시 세울 수 있다고 말한 사람입니다”(61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자 대제사장이 일어나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들이 불리한 증언을 하는데도 왜 대답이 없는가?”(62절, 현대인의 성경). 그 때 예수님의 반응은 바로 “침묵”이었습니다(63절). 이때뿐만 아니라 빌라도 총독 앞에서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발을 당하셨을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셨습니다(27:12). 그 때 빌라도가 예수님께 “저 사람들이 너에 대해서 증언하는 말이 들리지 않느냐?”라고 물었습니다(13절). 그 때에도 예수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셨습니다(14절).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는 어리석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앞에서 침묵으로 반응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반응은 이미 이사야 53장 7절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면서도 침묵을 지켰으니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사람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그의 입을 열지 않았다”(현대인의 성경). 그러시다가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마26:63)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64절). 예수님께서는 미련한 대제사장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으실 것과 하늘 구름을 타시고 다시 오실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때 대제사장은 자기 옷을 찢으며 예수님이 “신성 모독 하는 말을 하였다 고 말했습니다(65절). 그 때 온 공회에 사람들은 예수님은 사형을 받아야 한다고 외쳤습니다(66절, 현대인의 성경). 총독 빌라도 앞에서 예수님을 고발하였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아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고 외쳤습니다(27:22, 23). 그 때 빌라도는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고(26절) 예수님께서는 고난을 당하신 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35절).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처럼 침묵할 때 침묵하고 말을 할 때 말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특히 우리는 미련한 자 앞에서 침묵하므로 그의 미련함에 동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미련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럴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다섯째로,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이라크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폭탄 등으로 인하여 다리를 절단한 병사들의 모습을 TV를 통해서 본적이 있으실 것입니다. 저에게 잊혀지지 않는 TV 장면은 그런 병사들을 돕고자 어느 한 사람이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훈련시켜서 결국에는 어느 높은 산(이름을 잊어버렸음)을 정복케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저는 두 다리이던 한 다리이던 절단하고 의족을 끼고 그 훈련 프로그램에 동참한 한 6-7명의 군인들을 TV에서 인터뷰하는 모습을 보면서 놀랬고 또한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놀랜 이유는 두 다리도 멀쩡한 나 같은 사람도 저렇게 추운 날씨에 저렇게 높은 산을 정복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저 사람들은 의족을 끼고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군인들의 인터뷰하는 모습 등을 보면서 그들을 돕고자 이 훈련 프로그램을 하는 그 한 사람이 참으로 귀한 일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한 사람이 저렇게 다리를 절단하고 의족을 낀 상태에서 충분히 절망할 수 있는 여러 군인들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 등으로 강화시켜주고 희망을 주는 것 같아 참 보기가 좋았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 군인들은 미국 군대에서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에 파병이 되어 싸우다가 원치 않게 자신들의 다리를 잃어버리거나 다쳐서 절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코 어느 누구도 자기가 자기 다리를 원치 않는다고 스스로 절단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은 미국 군인으로서 충성되이 싸우다가 그렇게 다리를 잃어버리거나 다쳐서 절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6절을 보면 성경은 “미련한 자 편에 기별하는 것은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림과” 같다[(현대인의 성경)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은 자기 발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누가 스스로 자기의 발을 베어 버리려고 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우리는 과연 정신이 멀쩡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정신이 나간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스스로 자기의 발을 절단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은 마치 자기 발을 자르는 것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잠 26:6). 무슨 뜻일까요? 왜 성경은 그리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분, 만일 우리가 우리 발을 스스로 베어 버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과연 우리가 제대로 걸을 수 있겠습니까? 아니잖습니까.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걸어서 우편을 배달하는 우체부 아저씨가 다리 하나를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다른 다리 하나로(의족이 없이) 우편을 제대로 배달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성경은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그렇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은 오늘 본문 잠언 26장 6절 하반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마치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독을 마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죽지 않겠습니까. 스스로 독을 마신다는 것은 스스로 자멸하는 것이 아닙니까.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이 그와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에 스스로 해를 당하게 하며 스스로 자멸하는 소식을 전한 미련한 자 누가 생각나십니까? 저는 다윗에게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고 소식을 전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사무엘하 1장을 보면 사울(이스라엘)의 진영에서 한 아말렉 사람(8절)이 다윗에게 나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2절)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도 죽었나이다”(4절)라고 소식을 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때 다윗은 자기에게 소식을 전하는 그 청년에게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줄을 네가 어떻게 아느냐”(5절)고 물었습니다. 그 때 그 청년은 길보아 산에서(6절) 사울이 자기에게 “나를 죽이라”(9절)고 말했다고 하면서 자기가 보기에 사울 왕이 살 수 없는 줄을 알고 그를 죽이고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로 가져왔다고 대답했습니다(10절). 그 대답을 들은 다윗은 옷을 잡아 찢으며 사울과 요나단과 하나님의 백성과 이스라엘 족속이 칼에 죽음으로 말미암아 저녁때까지 슬퍼하여 울며 금식했습니다(11-12절). 그런 후 그는 “그 소식을 전한” 아말렉 청년에게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14절)라고 말한 후 청년 중 한 사람을 불러 그 아말렉 사람을 죽이라 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말렉 청년은 죽습니다(15절). 여러분은 이 죽임을 당한 아말렉 청년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다윗의 말대로 하나님의 기름 부음 받은 사울 왕을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사울 왕을 죽인 후 그의 머리에 있는 왕관과 팔에 있는 고리를 벗겨서 다윗에게 가지고 와서 그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한 이 외국인 아말렉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으로 미련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어쩌면 그 아말렉 사람의 입장에서는 사울 왕을 죽인 후 그의 왕관과 고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와서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하면 다윗이 기뻐할 것이라 라고 생각했을 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가 사울 왕의 왕관과 팔의 고리를 다윗에게 가지고 온 것을 보면 어쩌면 그 아말렉 사람은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의 그 다음 왕으로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는 다윗에게 상급을 기대했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 하나는 그 아말렉 사람은 자기에게 해가 되며 자기 스스로를 죽이는 소식을 다윗에게 가지고 와서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 스스로 해를 당하게 하며 스스로 자멸하는 소식을 전한 미련한 자들이 사무엘하 4장에 나옵니다. 그들은 바로 사울의 넷째 아들인 이스보셋을 쳐 죽이고 목을 베어 그의 머리를 가지고 다윗에게 온 “브에롯 사람 림몬의 아들 레갑과 바아나”입니다(5절).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는 “밀을 가지러 온 체하고” 이스보셋의 집 가운데로 들어가서 침상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이스보셋을 죽이고 그의 머리를 잘랐습니다(5-7절). 그리고 그들은 밤새도록 아라바 길로 도망쳐 나와서(6절, 현대인의 성경) 헤브론에 도착하여 다윗 왕에게 이스보셋의 머리를 드리면서 “왕의 생명을 해라려 하던 원수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의 머리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오늘 우리 주되신 왕의 원수를 사을과 그의 자손에게 갚으셨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8절). 그 때 다윗 왕의 답변은 무엇이었습니까? “… 내 생명을 여러 환난 가운데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전에 사람이 내게 알리기를 보라 사울이 죽었다 하며 그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줄로 생각하였어도 내가 그를 잡아 시글락에서 죽여서 그것을 그 소식을 전한 갚음으로 삼았거든 하물며 악인이 의인을 그의 집 침상 위에서 죽인 것이겠느냐 그런즉 내가 악인의 피 흘린 죄를 너희에게 갚아서 너희를 이 땅에서 없이하지 아니하겠느냐”(9-11절)하고 청년들에게 명령하매 곧 그들을 죽이고 수족을 베어 헤브론 못 가에 매달았습니다(12절). 이것이 바로 다윗 왕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착각한 미련한 사람인 레갑과 그의 형제 바아나의 결말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무덤을 판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해가 되고 스스로 자멸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좋은 소식인 줄 착각하고 다윗 왕에게 전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교회가 미련한 사람 편에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인 복음을 세상에 나아가 전하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도움이 될까요 아니면 오히려 해(self-damaging)가 될까요?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어느 면으로 보면 저는 지금 우리 그리스도의 교회가 스스로 자신에게 해가 되는 이러한 어리석은 일을 자행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못하고 오히려 어두운 세상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죄를 범하고 소금이 맛을 잃은 듯 세상의 복음의 능력과 영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인 복음을 이 세상에 나아가 전한다는 것은 스스로 교회에 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우둔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개혁한글 성경 시편 19편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우리가 우둔해졌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확실한(trustworthy) 말씀, 완전한(perfect) 말씀을 사랑하므로 그 말씀을 듣고 배우고 주야로 묵상하므로 지혜롭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우둔해졌다는 증거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지 않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사모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주시길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이 세상에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인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이렇게 지혜롭게 이 세상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에 대해서 성경 로마서 10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현대인의 성경)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여섯째로, 미련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잠언은 힘이 없고 위험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두 다리를 다 저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구약 성경 사무엘하 9장에 나오는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입니다. 그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어 준 사람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1, 7절). 어떻게 다윗이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었습니까? 다윗은 므비보셋에게 그의 할아버지인 사울의 모든 밭을 다 그에게 도로 주고 또한 그로 하여금 항상 다윗의 상에서 떡을 먹게 하였습니다(7, 11, 13절). 즉, 다윗이 두 발 다 저는 요나단의 아들인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왕자 중 하나처럼 항상 자기상에서 먹게 하였습니다(11, 13절). 저는 여태껏 이 성경말씀을 읽으면서 다윗이 두 다리를 저는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왕자 중 하나처럼 항상 자기상에서 먹게 한 것이 얼마나 그에게 큰 은총을 베푼 것이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성경 사무엘하 5장 8절 하반 절을 말씀을 겸하여 묵상할 때 조금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 날에 다윗이 이르기를 누구든지 여부스 사람을 치거든 물 긷는 데로 올라가서 다윗의 마음에 미워하는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치라 하였으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기를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은 집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더라.” 분명히 이 말씀을 보면 다윗의 마음은 “다리 저는 사람과 맹인”을 미워하였는데 그는 두 발을 다 저는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왕자 중 하나처럼”(9:11) “항상 왕의 상에서 먹”게 하였습니다(13절). 이것은 다윗이 두 다리 저는 므비보셋에게 큰 은총을 베푼 것입니다. 그러면 왜 다윗이 두 다리 저는 므비보셋에게 큰 은총을 베풀어 주었을까요? 물론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그와 더불어 언약을 맺었고(삼상 18:3, 20:16-17) 또한 다윗은 자신을 자기 생명처럼 사랑해준 요나단의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삼하 1:26)기에 그와의 맺은 언약의 책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실히 감당하고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무엘하 7장에 나오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으신 언약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면서 다윗이 두 다리 저는 므비보셋에게 은총을 베풀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와 맺으신 언약(다윗의 언약) 가운데서 이미 베풀어주셨고(7:8-9) 또한 장차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그 큰(21절) 은총(15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7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에는 “절름발이에게 덜렁덜렁 달려 있는 다리처럼 아무 쓸모가 없다”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이미 묵상한 6절 말씀이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그 말씀을 다시 보면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은 마치 자기 발을 베어 버림과 같다’고 잠언 기자는 말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의 두 발을 베어버린다는 그 자체가 바른 정신이면 그러지 않을 것이요 또한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벌였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제대로 걸을 수가 없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와 같이,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은 제 정신으로 하는 것이 아니요 끔찍한 일이요 제대로 소식이 전달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한 후 잠언 기자는 7절에 와서는 “저는 자의 다리는 힘없이 달렸다니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도 그러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절름발이에게 덜렁덜렁 달려 있는 다리가 쓸모가 있습니까? 그 힘없는 두 다리를 걷고 뛰는데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나요? 지금 잠언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핵심은 절름발이에게 덜렁덜렁 달려있는 다리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처럼 미련한 자의 잠언[“가르쳐서 훈계하는 말”(네이버 사전)]도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미련한 자의 잠언이 아무 쓸모가 없습니까? 그 이유는 미련한 자의 잠언은 미련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미련한 자가 잠언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좀 웃기지 않습니까? 미련한 자가 입을 열어 가르쳐서 훈계하는 말(잠언)이 어떠할 것 같습니까? 지혜롭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미련한 줄 모르고 오히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고 훈계를 한다는 것, 저는 그 자체가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미련한 자가 자기 자신도 그 훈계를 언제, 어디서 혹은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모르는데 그 훈계를 다른 사람에게 가르친다고 할 때에 그 잠언이 힘이 있겠습니까? 쓸모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잠언을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을 못하는 미련한 자의 입에서 나오는 잠언은 힘도 없고 아무 쓸모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일 지혜로운 자가 잠언을 자기 삶 속에서 적용한 후 우리에게 그 잠언을 말해 줄 때 그 잠언이야 말로 우리에게 유익되고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닌가요?

 

오늘 본문 잠언 26장 9절에서도 잠언 기자는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에 대해서 또 다시 말합니다. 그는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가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술 취한 사람이 자기 손에 가시나무를 들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좀 달리 질문한다면, 만일 술 취한 사람의 손에 칼이 있다면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 뿐만 아니라 술 취한 사람의 손에 가시나무가 있으면 그 사람은 비틀비틀 거리면서 가시에 자기 자신이 찔릴 수도 있습니다. 가시에 찔리면 아프지 않겠습니까. 이와 같이,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미련한 자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입에서는 나오는 잠언을 듣는 사람에게도 아픔(고통)을 주며 또한 위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미련한 자는 잠언을 잘못 적용하며 또한 왜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MacDonald).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또한 그 말씀을 잘못 받아들여 적용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특히 영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지고 말씀을 사모하며 추구하는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적용하며 왜곡하므로 자기 자신의 신앙생활에 치명적인 해를 끼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심각하게 여겨지는 것은 이러한 사람들이 입을 열어 왜곡된 가르침을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므로 그들에게도 신앙생활의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민감함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그 영적 민감함을 더욱더 말씀과 기도로 날카롭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미련한 자의 잠언과 지혜로운 자의 잠언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잠언 13장 20절의 말씀처럼 “지혜로운 사람과 함께 다”녀야 합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리할 때 우리가 지혜를 얻습니다.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워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9:9).

 

일곱째로, 미련한 자를 고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도 알고 계실 테지만 한국 양궁이 전 세계에서 알아줄 정도로 잘합니다. 특히 여자 양궁은 1984년 올림픽부터 2004년 올림픽까지 개인전과 단체전 금메달을 석권한바다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한국 양궁 선수가 잘하냐면 몇몇 올림픽에서 한국 양궁 선수가 쏜 화살이 표적 정 중앙에 있는 설치된 카메라를 박살내었을 정도라고 합니다(인터넷). 만일 그 정도의 실력 있는 사람이 닥치는 대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활을 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 본문 잠언 26장 10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미련한 자나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자는 마치 닥치는 대로 활을 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궁술 가와도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정도로 미련한 자나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치명적이다 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어느 누가 궁술가가 지금 닥치는 대로 활을 쏘고 있는데 그 화살을 맞으려고 하겠습니까. 당연히 화살을 맞지 않고자 피하지 않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이 치명적임을 좀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6절에서 배웠듯이 미련한 자 편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자기 다리를 자르는 것과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처럼 치명적입니다. 이렇게 미련한 자 편에 소식을 전하는 것이나 미련한 자를 고용하는 것은 스스로 해를 끼치는 치명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어느 단체에서나 사람을 고용하려고 할 때 원서를 써 내는 사람들에게 이력서를 써서 내라고 하지 않나요? 그러면 그 단체에서 사람 고용하는 담당자가 그 단체에 지원한 사람의 원서와 이력서 등을 보고 이 사람을 고용할 것인지 안할 것인지 판단해서 결정하지 않겠습니까.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력서를 써서 내면 당회에서나 청빙위원회에서 그것을 본 후 관심이 있으면 인터뷰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하는 이유는 한 사람 교회에 잘못 들어오게 되면 교회에 큰 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기억납니다. 몇 년 전에 동부 어느 교회에서 장로님들 몇 분이 저희 교회 찾아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제가 아는 여기 남가주에 살고 있는 목사님이 그 동부에 있는 교회 담임 목사 이력서 등을 내었는데 그 목사님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저까지 만나러 동부에서 비행기 타고들 오신 것입니다. 그 정도로 어느 교회들은 꼼꼼하게 목사님을 청빙할 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교회 청빙위원회가 담임 목사를 청빙하려고 하는데 그냥 아무나 길가에 지나가는 사람이 목사라면 자기들이 섬기는 교회에 담임 목사로 청빙하겠습니까? 만일 그렇게 하면 그 교회는 어찌 되겠습니까? 콩가루 교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제가 2011년 3월에 사사기 17장 1-2절과 18장 19절 중심으로 “콩가루 집안, 콩가루 교회”란 제목 아래 말씀 묵상을 한 것이 생각나서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여기서 “콩가루 집안”은 바로 미가라 이름 하는 사람의 집안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콩가루 교회”란 콩가루 지파인 단 지파를 생각하고 그렇게 제목을 적어본 것입니다. 제가 미가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었다고 말한 이유는 미가의 어머니는 어머니의 소견대로 아들이 자기의 은 1,100을 도둑질했다가 어머니에게 저주를 받을까봐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머니는 미가가 복 받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17:2). 아니, 어떻게 도둑질한 아들을 면책하지 않고 하나님께 복 받기를 원한다고 축복을 빌어줍니까. 이해가 안 되는 어머니입니다. 더 이해가 안 되는 것은 미가의 어머니는 자기의 아들에게 돌려받은 은 일천 일백을 하나님께 거룩히 드린다고 하면서 아들을 위하여 은 이백을 은장색에게 주어서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만들게 하여 아들에게 줍니다(3-4절). 참 어이가 없는 어미의 행동입니다. 아들 미가는 어떻습니까? 그는 어머니로 부터 받은 그 신상을 자기의 집에 두었습니다(4절). 놀라운 것은 어머니로 부터 “내 아들아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는 축복을 받은 미가에게는 신당(a shrine or house of gods)까지 있었습니다(5절). 이렇게 어머니나 미가나 다들 자기 멋대로 했습니다. 이게 콩가루 집안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단 지파를 콩가루 지파라고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다. 미가는 대제사장이 입는 에봇을 자기 마음대로 만들어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드라빔이라는 우상도 만들어 가지고 있었습니다(5절). 그런데 그는 심지어 유다 베들레헴에 한 레위 소년(7절)이 거할 곳을 찾고자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미가의 집에 왔을 때(8절) 미가는 그에게 “해마다 은 열과 의복 한 벌과 식물을 주”겠다고 약속하여 그 레위 소년을 자기를 위하여 “아비와 제사장”으로 삼습니다(10절). 그리고 나서 미가는 이제 레위인이 자기의 제사장이 되었으니 “이제 여호와께서 내게 복 주실 줄을 아노라”고 말합니다(13절). 그러다가 단 지파가 라이스란 땅(18:7)을 기업으로 삼고자 자기 온 가족 중 용맹 있는 다섯 사람들을 보냅니다. 그들은 그 땅을 살펴보고 돌아와 단 자손 육백 명을 데리고 다시 미가의 집에 이르러(13, 15절) 그 집에 들어갑니다(17절). 그리고 그들은 미가의 신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부어 만든 신상을 취한 후(17절) 레위 소년에게 “우리와 함께 가서 우리의 아비와 제사장이 되라 네가 한 사람의 집의 제사장이 되는 것과 이스라엘 한 지파, 한 가족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어느 것이 낫겠느냐”(19절)고 말합니다. 그 때 그 레위 제사장은 “마음에 기뻐하여 에봇과 드라빔과 새긴 우상을 취하고 그 백성(단 지파) 중으로 들어”갔습니다(20절). 그 결과 단 지파는 우상을 섬기게 됩니다. 콩가루 지파입니다.

 

저는 이것이 지금 현시대의 많은 교회의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먼저 문제는 우리 목사들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자격 미달의 사람들이 목사가 되는 게 큰 문제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생각해 볼 때 신학교에서 제대로 검증이 되지 않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라 생각합니다. 더 심각한 것은, 유령 신학교들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신학교들은 신학교 운영을 위하여 재정 압박 속에서 질적으로 자격이 너무나 미달되는 사람을 신학교에 입학하게 허락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북쪽 이스라엘 왕 여로보함이 그리했습니다. 그는 “일반 백성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되 누구든지 자원하면 그 사람을 산당의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왕상 13:33). 이와 같이, 지금 여러 신학교에서는 누구든지 지원하면 대충 시험 보아서 신학교에 입학 허가해서 신학 공부를 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염려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0절에서 성경은 “미련한 자나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자는 닥치는 대로 활을 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궁술 가와도 같다”(현대인의 성경)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미련한 자나 지나가는 사람을 고용하는 자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잠언 기자는 “닥치는 대로 활을 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궁술 가와 같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미련한 자와 일꾼의 자격도 알아보지 않고 아무나 채용하는 것은 치명적이다 라는 말입니다(박윤선). 만일 회사에서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들이 미련한 자나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고용한다면 그 회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또한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교회에서 청빙위원회가 미련한 목사를 담임 목사로 청빙하면 그 교회와 성도님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박윤선 박사님은 오늘 본문 잠언 26장 6-10절에 근거하여 “미련한 교역자”에 대해서 한 4가지로 말했습니다: (1) 미련한 교역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시 14:1). 이렇게 하나님을 모르는 미련한 교역자는 영감은 받지 못하고 인간적인 기계적 지식에서만 생각합니다. (2) 미련한 교역자는 죄를 심상히 여깁니다(잠 14:9). 이렇게 죄를 가볍게 여기는 미련한 교역자는 피 흘리기까지 죄를 대적하지 않습니다(히12:4). (3) 미련한 교역자는 책망을 듣기 싫어합니다(1:20-33). 성경은 책망을 귀하게 여기는데 미련한 교역자는 그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참고: 27:5-6). (4) 미련한 교역자는 영혼(내세)을 위하여 준비하지 않습니다(눅 12:16-21). 미련한 교역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생 뿐입니다(고전15:19). 잠언에서는 이러한 미련한 자는 징계의 대상이라고 거듭거듭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판은 거만한 자를 위하여 예비 된 것이요 채찍은 어리석은 자의 등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니라”(잠 19:29); “말에게는 채찍이요 나귀에게는 재갈이요 미련한 자의 등에는 막대기니라”(26:3).

 

인터넷 페이스 북 CEO 마크 저커버그가 직원을 고용할 때의 단 한 가지 원칙을 공개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나는 나를 위해 직접 일해 줄 사람만을 고용할 것이”다(I will only hire someone to work directly for me)라고 합니다. 이어 그는 “가장 중요한 것은 팀을 가능한 한 작게 만드는 것”이라면서 “페이스 북은 전 세계 수십억의 인구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지만 우리 팀은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은 현대 기술 덕분에 가능한 것”이라면서 “큰 회사는 거품이 낀다”고 강조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한 회사에 고용주라면 사람을 고용함에 있어서 오늘 잠언 26장 10절 말씀을 어떻게 적용하시겠습니까? 저는 한 2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우리는 사람을 고용할 때 될 수 있는 데로 철저하게 검증을 해야 합니다. 아는 사람을 통하여 소개를 받았다 할지라도, 추천한 사람을 우리는 잘 아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지원자를 꼼꼼히 잘 살펴보고 점검해 봐야 합니다. (2) 우리는 미련한 자를 고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혜로운 자를 고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 성품인 진실 되고 신실한 자, 등등 이러한 자를 고용해야 합니다.

 

여덟째는, 미련한 자는 미련한 짓을 되풀이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을 보셨습니까? 상상만 해도 좀 역겹지 않으십니까? 저는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는 것은 한 번도 본 기억은 없지만 개가 똥을 먹는 것은 본적이 있습니다. 상상만 해도 좀 구역질나지 않으십니까? 여러분은 개의 그러한 모습을 생각할 때 그러한 개는 참 미련한 개라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그와 같이 우리 사람들이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는 것, 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미련하겠습니까? 그 예로 구약 출애굽기나 사사기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들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거듭 거듭 되풀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인 모세나 심지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과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죄를 거듭 범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볼 때도 얼마나 미련하게 보입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오늘 본문 잠언 26장 11절에서 성경은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RETURN) 먹는 것 같이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REPEATS) 행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언 기자는 미련한 자를 개와 같은 자로 말하고 있는 그 이유를 박윤선 박사님은 2가지로 설명했습니다(박윤선):

 

(1) 미련한 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어리석은 자(유치한 자)”가 아니라 죄를 업으로 삼는 자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미련한 자는 죄를 짓는데 있어서 양심에 가책을 전연 느끼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주로 ‘양심이 마비된 자’라곤 합니다. 성경 디모데전서 4장 2절을 보면 개역개정에는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 고 말씀하고 있는데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양심이 마비”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양심이 마비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거짓말하는 위선자들”(현대인의 성경)]이 양심이 마비되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2절). 이러한 미련한 자는 불결한 것을 문제시하지 않기에 그 점에 있어서 그는 개와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마7:6), 그것은 개는 거룩한 것을 몰라본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2) 미련한 자강퍅하여 죄를 떠나지 않고 계속하여 그것을 범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미련한 자란 회개하지 않는 자를 말합니다. 그 한 예가 바로 구약 출애굽기에 나오는 애굽 왕 바로입니다. 그는 열 가지 재앙을 만나면서도 간간이 회개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진정으로 회개를 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스스로 강퍅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마음을 강퍅하게 하여 죄를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같은 죄를 번복하여 범하면서도 양심에 가책을 느끼지 않는 미련한 자는 “그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잠언을 보면 이러한 말씀들이 적혀 있습니다: “미련한 자의 마음은 미련한 것을 전파”하고(12:23),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며(15:14) 또한 “미련한 것을 쏟”으며(15:2), “미련한 자는 자기의 미련한 것을 나타”냅니다(13:16). 또한 성경 잠언은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미련한 것”이다(14:24)라고 말씀하면서 “미련한 자에게는 그 미련한 것이 징계가” 된다(16:22)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연 미련한 자가 거듭 행하는 “미련한 것”(미련한 짓)은 무엇일까요? 그 한 예로 잠언 17장 9절을 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지혜로운 자는 사랑을 구하므로 친한 친구의 허물을 덮어주겠지만 미련한 자는 그것을 거듭 말하므로 그 친구를 이간합니다. 또 다른 예는 시편 78편 41절입니다: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 여러분, 과연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듭거듭” 어떻게 시험을 하였습니까? 바로 하나님을 불신하고 불만족 속에서 불평(원망)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미련한 자들이 거듭 행하는 미련한 짓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듭 노엽게 해서는 아니 됩니다(시 78:41). 만일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미련하여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고 거듭거듭 노엽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예레미야 25장 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종 선지자를 너희에게 끊임없이 보내셨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며 귀를 기울여 듣지도 아니하였도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님의 종들을 “끊임없이”(부지런히)(again and again) 보내십니다. 보내주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각자의 악한 길과 악행을 버리고 돌아오라”(5절)고 거듭 말씀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거듭(REPEATEDLY)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거듭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돌아가야(RETURN)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의 미련함을 자복하고 버리며 회개(REPENT)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악 된 습관으로 다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우리는 미련한 것을 또 다시 행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돌이켜 지혜로운 자가 되어 더 이상 미련한 것을 거듭 행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듭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아홉째로, 미련한 자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깁니다.

 

아직도 기억납니다. 대학교 다닐 때 어느 목사님이 캠퍼스에 1주일에 한번 씩 오셔서 소그룹 성경공부를 선배님이 살고 있는 학교 아파트에서 인도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자훈련이라는 것을 하면서 5가지 확신에 대한 성경공부를 하면서 저는 구원의 확신에 대하여 Fact(사실), Faith(믿음), Feeling(감정)이란 가르침을 받은 것을 잊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그 때 저는 사실인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구원의 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그 때 감정에 이끌림을 받아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기에 구원의 확신이 있다가도 없을 때가 더 훨씬 많았습니다. 그 때 배운 5가지 확신 중에 또 하나는 바로 인도의 확신이었습니다. 그 인도의 확신에 대한 성경구절은 바로 잠언 3장 5-6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저는 그 때 이 말씀을 배운 후부터 여태까지 신앙의 여정을 걸어오면서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이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때를 많이 경험했습니다. 그 때 마다 저는 종종 곰곰이 이 말씀을 묵상하는 은혜를 누렸었는데 그렇게 묵상할 때 제 마음에 찔림이 있었던 부분은 바로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제가 2011년 2월 17일에 잠언3장 1-10절 말씀 중심으로 “지혜로운 자(1)”란 제목 아래 수요기도회 설교를 했었는데 그 때 제가 잠언3장 5-6절에 중심으로 설교하면서는 이렇게 말한 기록을 다시 찾아 읽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마음 판에 새기고 지켜 행하는 지혜로운 자는 그가 사랑하는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여 의뢰(신뢰)합니다(잠언 3:5-6). 여기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말은 “독점적인 신뢰”를 말합니다. 이런 의뢰심을 가리켜 “동심의 신뢰(childish confidence)” 라고 합니다(박윤선). 마치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을 믿되 단순성 있는 신뢰심으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바로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입니다(박윤선). 이러한 동심의 신뢰로 하나님을 의뢰하기 위해선 우리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면 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마음으로 의뢰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잠언 3장 7절 말씀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그 말씀은 이렇게 성경에 기록돼 있습니다: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명철을 의지하다보면 결국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여 일을 경영하여 그 경영하던 일이 잘 될 때 우리는 우리가 지혜로워서 그 일이 잘 된 줄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이렇게 자기 명철을 의지하는 자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깁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할 때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기 여기는 악을 떠날 수 있습니다(7절).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그 분을 범사에 인정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의뢰하고 우리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은 곧 우리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의 헛된 믿음입니다(14:16). 그리고 스스로 자기 자신이 지혜롭다고 믿는 이러한 헛된 믿음의 원인은 높은데 마음은 둔(롬12:16) 교만입니다. 왜 우리가 높은데 마음을 둡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높으신 하나님을 친밀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친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잠3:7) 또한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합니다(롬 12:16). 이러한 교만함에 우리가 빠질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으며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나 우준하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1:21-22).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고 오히려 낮은데 마음을 둬야 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는 겸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떠나 겸손해야 합니다. 이러한 겸손한 자를 하나님께서 들어 일으켜 높이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6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보느냐 그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느니라.” 이 말씀을 원어 히브리어를 개역하면 이렇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기 눈으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를 네가 보느냐 그이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소망을 가지라”(박윤선). 여러분, 자기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볼 때에 ‘나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뭘까요? 왜 우리 사람들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것일까요? 물론 그 원인은 교만이지만 저는 그 교만함이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교만하면 우리의 교만한 눈으로 우리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데 왜 우리가 그 지경까지 오게 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할 때 생각난 말씀이 바로 로마서 2장 19-23절입니다: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증히 여기는 네가 신전 물건을 도둑질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이 말씀대로 우리가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자신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말씀에 불순종하며 살고 있으면서 다른 사람은 가르치기를 좋아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교만하여 우리 자신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지혜로운 자라고 스스로 믿는 것은 참 위험합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자는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침을 받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스스로 지혜로운 자라고 믿는 자에게는 희망(소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잠언 26장 12절 하반 절에서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미련한 자에게 어떻게 희망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보다 미련한 자에게 오히려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는 자에게는 장래와 희망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있는 자에게는 장래가 있고 소망이 끊어지지 않을 것입니다(24:14).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고 도리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 1:5)고 약속하신 하나님께 지혜를 믿음으로 구하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에게는 정녕히 장래와 희망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