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제해야 합니다.

 

 

[잠언 2516-28]

 

 

성경 디모데후서 3장 3절을 보면 “말세에 고통 하는 때”에(1절) “사람들이”(2절) “절제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3절). 그리고 실제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절제하지 못하고 성령을 거슬러 육체의 소욕(욕망)을 따라 육체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갈 5:17, 19). 지금 우리가 행하는 그 육체의 일중에 특히 “음행”과 “다툼”과 “시기”와 “화내는 것”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질투”와 “술 취함”과 “방탕함”(19-21절)이 우리 가운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그 원인은 우리가 성령님의 지배를 받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육체의 일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갈라디아서 5장 16절은 우리에게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무엇입니까?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열매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입니다(22-23절). 저는 여기서 특히 “절제”(self-control)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이유는 오늘 본문 잠언 25장 28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자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성벽이 무너진 무방비 상태의 성과 같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자제해야 합니다”란 제목 아래 성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자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한 9가지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는 먹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6절을 보십시오: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현대인의 성경) “꿀을 구하면 적당히 먹어라. 너무 많이 먹으면 토하게 된다”]. 여러분, 과식이란 무엇입니까? “음식을 일정한 량 이상으로 섭취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과식하게 되면 비만증이나 구토를 유발할 수가 있습니다(인터넷). 인터넷 헬스조선에 “알면 유용한 … 과식 습관을 바꾸는 방법 9가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인터넷):

 

(1) 식사 12분 전, 애피타이저부터 먹자.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 인체에서 포만감을 느끼게 하는 식욕 억제 호르몬인 렙틴이 분비된다. 이 호르몬이 식욕중추에 신호를 보내 포만감을 느끼면 음식을 그만 먹게 된다. 렙틴이 분비돼 식욕중추에 포만감 신호를 보내려면 최소 12분이 걸린다. 본격적인 식사 전에 가벼운 애피타이저로 렙틴 분비를 앞당기자. 미리 렙틴 분비를 유도하면 식사할 때 포만감을 빨리 느껴 식사량을 줄일 수 있다.”

 

(2) 렙틴 저항성을 막자.

 

“과식을 습관화하면 인체가 렙틴 신호에 무감각해지는 렙틴 저항성 상태가 되고, 이렇게 되면 렙틴이 많이 분비되어도 인체가 포만감 신호를 받아들이지 못해 많이 먹게 되고 비만이 된다. 실제로 비만한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렙틴 농도가 높다. 렙틴 저항성을 높이는 음식도 있다. 탄산음료나 과자 같은 단 음식이 대표적이다. 스트레스도 렙틴 저항성을 초래한다. 평소 음식 조절에 신경 쓰고 스트레스를 쌓아 두지 않도록 하자.”

 

(3) 운동으로 연비를 높이자.

 

“같은 양의 음식을 먹어도 영양소를 에너지로 전환하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다. 영양소를 에너지로 전환하는 효율을 높이려면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 운동을 하면 세포 내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좋아진다. 미토콘드리아는 영양소를 에너지로 전환하는 에너지 발전소다. 특히 걷기나 달리기, 등산, 수영 같은 유산소운동이 효과적이다.”

 

(4)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하자.

 

“세로토닌은 뇌 신경전달물질인데, 부족하면 몸에 부정적인 변화가 나타난다. 폭력적으로 변하거나 우울해지고 식욕이 늘어 폭식장애가 생기기도 한다. 반대로 세로토닌 분비가 늘어나면 몸에 긍정적인 변화가 생긴다. 신체 기능이 원활해지며, 기분이 좋아지는 동시에 식욕이 억제된다. 따라서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해 과식을 예방하자.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하려면 햇볕을 자주 쬐고, 심호흡하며 산책하거나 밝은 음악을 듣는 것이 좋다. 일부러 기분 좋은 상상을 하고 음식을 삼키기 전에 30번 이상 씹는다. 단백질 섭취도 잊지 말자. 단백질은 세로토닌이나 엔도르핀 같은 각종 호르몬의 주원료이다.”

 

(5) 식사시간엔 식사에만 집중하자.

 

“밥 먹을 때 TV나 신문을 보는 등 다른 일을 하면 뇌가 식사 행위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해 허기를 빨리 느낀다. 반면 뇌가 인식할 수 있게 음식에 집중해서 식사하면 과식을 예방할 수 있다.”

 

(6) 혈당지수가 낮은 음식부터 먹자.

 

“음식 먹는 순서도 중요하다. 섬유질이나 비타민, 미네랄이 풍부한 채소를 먼저 먹고 탄수화물이나 지방이 든 음식을 가장 나중에 먹는다. 채소는 포만감이 금세 느껴지고 오래 지속돼 다음 순서에 먹는 음식량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채소 다음에 먹어야 할 영양소는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같은 크기의 탄수화물이나 지방보다 포만감을 더 오래 유지시키고, 근육량을 늘리는 효과가 있다.”

 

(7) 접시는 작게, 재료는 크게.

 

“시각 효과를 이용하자. 작은 접시에 식재료를 크게 썰어 담으면 시각 대비로 음식이 실제보다 많아 보인다.”

 

(8) 먹기 전에 양을 정하자.

 

“음식이 맛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더 먹게 된다. 과식을 막으려면 먹을 양을 미리 정해두자. 밥 2/3 공기가 목표라면 나머지 1/3은 미리 다른 그릇에 덜어 놓고 먹는다. 남들보다 적은 양을 먹으려면 식사 속도를 맞추기 위해 오래 씹게 되는데, 저작운동은 침 분비를 촉진해 소화에도 도움을 준다.”

(9) 심리적 요인을 살피자.

 

“화나거나 우울할 때 과식이나 폭식하는 경우가 있다. … ‘현재 자신이 배가 고파서 먹는지, 특정 감정을 잊기 위해 먹는지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 ... 심리적인 이유로 과식한다면 음식을 대체할 활동을 찾아야 한다. 평소 화날 때 과식하는 습관이 있다면 '다음에 화날 때는 친구에게 전화하거나 사우나에 가야지'하고 미리 자기와 약속하는 식이다. 운동이나 평소 좋아하는 취미 활동도 좋은 대체 방법이다. 심리 문제를 과식으로 해결할 경우 악순환이 계속된다. 몸이 비만해져 외모에 자신이 없어지고 패배감이 들 수 있다. 심리 문제로 생기는 과식을 끊기 힘들다면 전문가를 찾아 상담받자.”

 

오늘 본문 잠언 25장 16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솔로몬 왕은 “너는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 과식함으로 토할까 두려우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솔로몬 왕은 꿀을 보거든 족하리만큼 먹으라고 말하고 있지만 과식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잠언 24장 13절에서 “꿀”에 대해서 묵상을 했었습니다: “내 아들아 꿀을 먹으라 이것이 좋으니라 송이꿀을 먹으라 이것이 네 입에 다니라.” 잠언 기자는 꿀이 좋으니까 먹으라고 말하면서 특별히 “송이꿀”을 말하고 있는 이유는 송이꿀이 더 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꿀이 몸에 왜 좋은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한 예로 “허준의 동의보감에는 ‘꿀은 혈당 농도를 조절해 주어 몸의 피로를 없애 주고 칼슘, 마그네슘이 있어 불면증 신경통 관절염에 아주 효과가 뛰어나고 각종 염증(고름)에 좋다’고 기록돼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잠언 25장 16절에서 솔로몬 왕은 꿀이 몸에 좋으니까 족하리만큼 먹으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과식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꿀이 먹되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니까(27절) 과식은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음식 먹는 것을 절제하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과도하게 섭취하는 것은 몸을 건강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몸을 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적당히” 먹는 것입니다(16절, 현대인의 성경). “건강에 좋다는 음식만 먹는다고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웰빙에 대한 강박관념이 오히려 스트레스를 일으킬 수 있다. … 적당히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면서 꼭 섭취해야 할 것에 대한 균형 감각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 연세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박태선 교수는 “몸에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 “과하게 섭취하지만 않는다면 때로는 몸에 좋지 않은 음식을 섭취해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는 것도 중요하다. 콜라나 도넛 등을 정크 푸드라고 정의내리고 무조건 기피하거나 비만을 고려해 칼로리에 집착하는 것이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이다. 몸에 나쁜 음식이라도 좋아한다면 적당히 먹어라. 몸에 좋다는 말에 먹기 싫은 것을 억지로 먹는 것보다는 낫다. 음식은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즐거움이다”(인터넷).

 

그러므로 우리는 음식을 즐겁게 먹되 절제하여 적당히 먹는 습관을 들어야 합니다. 아무리 몸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 할지라도 과식을 하지 말고 절제하여 적당히 먹는 것을 즐길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7절을 보십시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현대인의 성경) “꿀을 너무 많이 먹어도 이롭지 못한 것처럼 자신의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도 이롭지 못하다”].

 

여러분, “명예”란 무엇입니까? 엣센스 국어사전에 명예는 이렇게 풀이돼 있습니다(인터넷): (1)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일컬어지는 이름 (예) 명예를 회복하다. (2) 도덕적 존엄에 대한 자각 또는 도덕적 존엄이 남에게 승인되고 존경·상찬되는 일. (3) 사람의 사회적인 평가 또는 가치. (4) 지위나 직명을 나타내는 말위에 쓰여서, 그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고, 또 그 공로를 찬양하기 위해 증여되는 칭호. (예) 명예 총재 / 명예시민. 김만풍 목사님이란 분은 명예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셨습니다(인터넷): “명예란 ‘의로운 목적으로 선한 일을 바른 방법으로 추구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로부터 사랑과 존경과 칭찬을 받게 되는 영광스러운 이름’이다.” 성경 잠언 22장 1절을 보면 성경은 “많은 재물보다 명예를 택할 것이요 은이나 금보다 은총을 더욱 택할 것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은이나 금이나 많은 재물보다 명예(good name)와 은총(favor)을 더욱 택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명예”와 “은총”을 생각할 때 구약 창세기에 나오는 노아란 인물이 생각났습니다. 성경 창세기 6장 8절을 보면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 창세기 6장 9절을 보면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였으며 또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저희 집 세 아이들인 딜런, 예리, 예은이가 노아처럼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하나님이 알고 계시며 인정하는 좋은 이름을 가진 딜런, 예리, 예은이가 되길 기원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잘 죽기 위해서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잘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있습니까? 아무래도 한 평생을 잘 살았는지는 못 살았는지는 죽은 후에야 평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잘 살았는지 알 수가 있을까요? 우리의 이름을 생각하면 알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후에 장례식 때에 내 이름 석 자를 사람들이 생각할 때 칭찬하는지 안하는지 보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옛 속담에 모든 사람은 세 이름이 있다고 합니다: (1)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2) 다른 사람이 나를 부르는 이름(one others call us), 그리고 (3) 우리가 얻은 이름(one we acquires ourselves). 과연 우리가 얻고 있는 이름은 무엇입니까?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의로운 삶을 살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에게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칭찬을 받는 내 이름 석 자인지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합니다. 잠언 10장7절을 보면 성경은 이러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을 기념할 때에는 칭찬하거니와 악인의 이름은 썩으리라.” 의인의 이름은 죽은 후에 기념할 때에 칭찬이 있다는 말씀 입니다. 그 이름은 축복된 이름입니다. 전도서 7장 1절의 말씀을 빌리자면 “아름다운 이름”(a good name)입니다. 이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a good ointment)보다 낫다고 솔로몬 왕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이름은 세상의 부(wealth)보다 더 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잠언 25장 27절 하반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현대인의 성경) “자신의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도 이롭지 못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명예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종류의 명예를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명예욕”(desire for honor)입니다. 이 욕구는 하나님께서 식욕, 수면욕, 성욕 등과 함께 주신 선물로서 만일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우리가 하는 일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이고,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이 바른 방법이며, 그 결과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들에게 덕을 끼치는 것이라면 우리의 명예욕은 정당하고 바람직한 것이라는 것입니다(참고: 신 26:19-19). 그러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명예탐욕(greed for honor)’은 우리가 항상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7절에서 솔로몬 왕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자신의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도 이롭지 못하다(헛되니라)는 말은 바로 명예탐욕을 가리킵니다. 왜 우리가 명예탐욕에 빠질까요? 명예탐욕에 빠진 사람들 가운데는 평소에 부모나 형제자매, 선생님, 친구 등 자기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칭찬을 듣지 못하고, 존경과 사랑을 받지 못하여 욕구불만을 해소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지내온 이들이 흔히 발견된다고 합니다. “명예탐욕에 빠진 사람들의 자화상을 관찰해 보면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이 배색되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자신의 위치를 남들과 비교하고, 남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와 행동에 매우 민감합니다. 시기와 질투가 숨어 있습니다. 분노와 불평으로 그늘져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명예탐욕에서 벗어나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명예탐욕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말씀의 거울에 자신의 자화상을 비춰보고 잘못된 부분을 고쳐 그려야 합니다. 명예 자체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삼고 그의 뜻에 합당한 일들을 선한 방법으로 추구하는 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걸어 나아갈 때 하나님의 은혜의 상급으로 칭찬과 명예와 영광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인터넷).

 

셋째로, 우리는 이웃집에 가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7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아라. 그렇지 않으면 네 이웃이 너에게 싫증을 느껴 너를 미워할 것이다”]. 여러분, 이웃이 여러분 집에 자주 찾아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처음에 몇 번 올 때에는 반갑고 기쁘다가도 여러분도 바쁘고 힘든데 여러분의 이웃이 계속해서 자주 찾아온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할지라도 너무나 자주 집에 찾아가는 것은 그 친구에게 민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7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선 자주 만나고 집에도 자주 놀로 가서 시간도 같이 보내고 그래야 하지 않나요? 결코 이웃 사랑함에 있어서 이웃집을 방문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좋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집과 왕래하면서 친밀한 교제를 통해 우정을 쌓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17절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단어는 바로 “자주”(too much of you)입니다. 즉, 이웃집에 가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자주” 가는 것은 이웃이게 민폐가 되는 것이기에 그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16절에서도 꿀은 좋은 것이지만 너무나 많이 먹는 것(과식하는 것) (too much of it)은 오히려 몸 건강에 안 좋은 수 있는 것처럼 이웃집에 가는 것도 좋은 것이지만 자주 가는 것은 안 좋은 것일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7절 말씀의 문자적 의미는 ‘당신의 발(걸음)을 귀중하게 만드십시오’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발걸음을 귀중하게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우리 이웃집에 다니는 것을 지나치게 해서는(overdo it) 아니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웃집에 가서 너무 오래 머물러서는(overstay) 아니 됩니다(Murphy).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를 17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너를 싫어하며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다시 말하면, 우리가 우리 이웃집에 자주 다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렇지 않으면 네 이웃이 너(우리)에게 싫증을 느껴 너(우리)를 미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이웃집에 다니는 것을 자주하기보다 오히려 드물게 하는 것이 좋을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발걸음을 귀중하게 만드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저는 이것을 ‘드문의 원리’(principle of rarity)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The Bible Knowledge 주석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A person should refrain from frequently visiting his neighbor, to avoid being a nuisance, but he should visit enough so that his visits are valued(사람은 그의 이웃에게 성가신 사람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는 이웃을 자주 방문하는 것을 삼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방문이 가치가 있을 정도로 필요한 만큼은 방문해야 합니다)(Walvoord).

 

우리의 이웃집 방문이 잘 절제되어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은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웃집 방문이 가치가 있고 소중이 여길 수 있는 방문이 되길 바랍니다.

 

넷째로, 우리는 입을 자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6-28절 말씀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우리에게 입에 대하여 4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8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뽀족한 화살이니라.”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4장 28절에서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까닭 없이 네 이웃을 쳐서 증인이 되지 말며 네 입술로 속이지 말지니라.” 우리는 까닭(이유) 없이 우리 이웃의 거짓 증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입술로 우리 이웃을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상대방에게 그대로 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성경은 우리가 친히 보복(복수)하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을 속이지 말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이웃이게 거짓말을 하고 속인다면 그것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마귀를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요 8:44). 오히려 우리는 기독교의 황금률(The Golden Rule)대로 행해야 합니다. 기독교의 황금률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7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 이 말씀은 예수님의 이중계명 중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을 실천함에 있어서 어떻게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핵심 원리입니다. 그 원리는 ‘내가 상대방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내가 먼저 그에게 그렇게 대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나는 상대방이 나를 좀 이해해 주길 원한다면 내가 먼저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우리도 남을 대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상대방에게 진실을 원하듯이 우리가 먼저 그 상대방에게 진실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거짓말을 입 밖으로 내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결코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거짓증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우리는 진실 된 증거를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8절에서도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언급의 핵심 내용은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방망이요 칼이요 뾰족한 화살”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방망이나 칼이나 화살은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무기들이 아닙니까? 이웃에게 거짓 증거 하는 사람은 그 이웃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서는 아니 됩니다.

 

(2) 우리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0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으니라.” 성경 잠언 10장 32절을 보면 “의인의 입술은 기쁘게 할 것을” 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의인의 입술은 경우에 적합한 말을 하므로 상대방을 기쁘게 합니다. 우리가 이미 잠언 25장 11-15절에서 “경우에 합당한 말”(11절), 또는 경우에 적합한 말에 대해서 묵상을 했었습니다. 여기서 “경우”란 히브리어로 “바퀴”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말은 “그 때 형편과 경우에 잘 조절하여 돌아감”을 가리킨다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즉, 그 때 형편과 경우에 잘 조절하여 한 적합한 말은 은쟁반에 올려놓은 금사과와 같이 그만큼 큰 가치가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한번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는 것이 경우에 적합한 말인가요?’ 아마도 아무도 “예”라고 대답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아무리 축복의 말이라 할지라도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 잠언 27장 1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현대인의 성경) “이른 아침부터 자기 이웃을 큰 소리로 축복하면 오히려 그것을 저주로 여길 것이다”]. 무엇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중요한 교훈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대로 행할 때에도 때를 맞추어 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좋은 일이라도 우리가 그것을 행하는 데 있어서 적당한 시기를 맞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잠언 기자 솔로몬왕은 오늘 본문 잠언 25장 20절에서 “마음이 상한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고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상한 자”는 영어 성경에는 “a heavy heart”(마음이 무거운 자)라고 번역돼 있는데 히브리어의 의미는 “마음이 슬픈 자”(a sad heart)입니다(Gesenius). 지금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마음이 슬픈 자에게 노래하는 것을 두 가지로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a) 마음이 슬픈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마치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번 겨울 유난히 춥고 또한 독감으로 고생하시는 분들이 많으신데 이렇게 추운 날에 어느 누가 옷을 벗고 다니겠습니까. 오히려 옷을 더 두텁게 입고 다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마음이 슬픈 자에게 노래하는 것이 마치 추운 날에 옷을 벗음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한 마디로, 그 뜻은 경우에 적합하지 않다는 말입니다(11절). 여러분의 마음이 슬픈데 여러분에게 누군가 다가와서 기쁘게 노래하는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아마 어느 누구도 그것을 좋아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b) 마음이 슬픈 자에게 노래하는 것은 마치 소다 위에 식초를 부음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소다”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 “natron”의 의미는 고대에 '천연탄산 소다'(an alkali mineral)로 알려진 물질을 말합니다. 이 물질은 당시 동방에서 세척용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Swanson). 예레미야 2장 22절을 보십시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네가 많은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내 앞에 그대로 있으리니.” 이 소다 물질 위에 식초를 부으면 즉시 부글부글 끊어 오르며 발효 효과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슬픈 자에게 아무 동정(sympathy) 없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의 슬픈 마음을 더욱더 뒤흔드는 것(agitation)이라는 말입니다(MacArthur).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 슬픈 자에게 노래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마음이 슬픈 자(의 연약함을)를 동정하여(히 4:15)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합니다(롬 15:17).

 

(3) 우리는 험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3절을 보십시오: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북풍이 비를 일으키는 것같이 험담하는 혀는 분노를 일으킨다”]. 여기서 “참소하는 혀”란 현대인의 성경에는 “험담하는 혀”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원래 문자적으로 “은밀한 혀”(a tongue of secrecy)란 말입니다. 즉, 참소하는 혀는 “중상 모략하는 혀”(a slanderous tongue)란 말입니다(Walvoord). 여러분, 우리가 뒤에서 상대방 몰래 그 사람의 흉을 보고, 그 사람의 흠을 들추어 헐뜯다가 그 상대방의 귀에 그 말이 들어간다면 그 사람이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가 터무니없는 말로 상대방을 헐뜯거나 그 사람을 해치려고 속임수까지 써서 일을 꾸며 결국에는 그 상대방의 명예를 손상시키기까지 한다면 그 상대방에 우리에게 분노하여 명예훼손으로 고소까지 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요한이 쓴 편지 중 가이오란 인물에게 쓴 요한삼서 1장 9-10절을 보면 교회 성도들 중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란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사도 요한을 맞아들이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9절) 악한 말로 그를 “비방”(gossiping maliciously)하였습니다(10절). 그는 사도들을 망령되이 폄론하였던 인물로서 지금 말로 한다면 그는 목회자를 헐뜯고 비방하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영혼은 크게 잘못된 영혼입니다. 교회 내에서 성도들이 목회자를 험담하고 비판하는 것은 디오디레베와 같이 영혼이 잘못된 사람입니다. 우리는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 상호간에 절대로 중상모략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서로가 중상모략하면 관계가 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분란에 휩싸여 교회에 분열을 일어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주의 형제들을 비방하고 중상 모략하는 일은 망령된 일입니다(10절). 우리는 그런 사람을 경계해야 합니다. 성경 잠언 10장 18절을 보면 “미움을 감추는 자는 거짓된 입술을 가진 자요 중상하는 자는 미련한 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혁한글을 보면 “참소하는 자는 미련한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고 공동번역은 “험담을 일삼는 사람은 바보다”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레위기 19장 16절은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비방하지 말”라 고 명하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또 너희는 돌아다니면서 남을 헐뜯지 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돌아다니면서 남을 헐뜯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험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미련한 자나 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조심합니다. 특히 그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습니다(잠 11:13). 그러므로 그는 남을 험담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4)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좋은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5절을 보십시오: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멀리서 온 좋은 소식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다”]. 지혜로운 자는 남에 대해 험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마음이 슬픈 자에게 노래하지 않으며 또한 결코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를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입술로 좋은 소식을 이웃에게 전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5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멀리서 오는 좋은 소식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다”(현대인의 성경)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좋은 소식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와 같이 우리 마음의 갈증을 해갈해 준다는 말입니다. 시편 42편 1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우리가 이 죄악 된 세상에 살아가면서 뉴스 등을 통하여 날마다 듣는 것은 거의 대부분 나쁜 소식들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심령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에 살고 있었던 롯처럼 의로운 심령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벧후 2:8). 그러므로 우리의 상한 심령은 주님을 더욱더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때에 우리의 상한 심령을 시원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좋은 소식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 좋은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다섯째로, 신뢰하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을 신뢰하는 것을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특히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고 있으므로 심신이 지쳐있을 때 우리는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에게 너무나 잘 해주는 사람들을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러한 때에 우리는 주님보다 사람을 더 의뢰할 유혹에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 본문 잠언 25장 1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기의 이웃을 쳐서 거짓 증거하는 사람”을 우리는 멀리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가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진실하지 못한 거짓말을 하는 자를 신뢰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9절을 보면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환난 날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위기에 처한 때에 신실치 못한 자를 신뢰하는 것은 흔들리는 이로 음식을 씹거나 위골된 발로 걷는 것과 같다”]. 여기서 그는 “진실하지 못한 자”(신실하지 못한자, the unfaithful)를 의뢰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은 마치 “부러진 이와 위골된 발 같”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부러진 이”로 밥을 먹는다는 것이 상상이 되십니까? “위골된 발”을 의지하여 길을 걸으시겠습니까? 환난 날에, 즉 우리가 위기에 처한 때에 우리가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하는 것이 마치 이와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9절). 그러므로 우리는 환난 날에 진실하지 못한 자를 의뢰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진실하신 하나님을 의뢰해야 합니다.

 

시편 125편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성경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은 시온 산처럼 요동치 아니하고 영원히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산”이란 “부동과 안식의 표상”입니다(박윤선).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은 이렇게 산처럼 어떠한 환난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견고히 서 있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안식을 영원히 누릴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합니까? 어떻게 근심된 일과 곤고한 일과 죽을 일이 쌓인 이 죄악 된 세상에서 산처럼 요동치 아니하면서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의뢰하는 자들을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2절). 예루살렘은, 지리상으로 많은 산악들로 포위되어 있다고 합니다(박윤선). 이렇게 많은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른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를 의뢰하는 자들을 둘러싸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은 하나님 앞에 영원히 있고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히 보호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시 50:15).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환난 날에 진실하신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시사(20:1) 우리를 위로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고후 1:4).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환난에서 건지실 것이기 때문에(시50:15) 우리는 환난 날에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15절).

 

여섯째로, 미워하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구정을 맞이하여 사랑하는 부모님을 뵈러 자녀들과 함께 고향으로 향하는 장면들을 뉴스를 통해서 보았습니다. 자녀들보다 손주들로 인하여 더 기뻐하신다고 말하시는 어느 어르신의 인터뷰 내용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온 가족 식구가 한 자리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우리 예수님을 믿는 가정은 예수님의 이중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므로 가정 천국화를 이루어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가야 하는데 많은 가정 안에서는 사랑보다 미움이 싹트고 있습니다. 상처와 아픔과 눈물을 흘리고 있는 가정들이 많습니다. 특히 부부관계의 불화가 점점 더 심각해져 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부모님들과 자녀들과의 관계도 사랑보다 미움이 더 싹트고 있는 가정도 많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가정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우리의 옛 본능은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상대방에게 갚아주는 것입니다(신 19:21). 우리는 죄악 된 본능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되 우리의 죄악 된 본능은 원수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본능은 우리의 원수를 용서하지 않고 오히려 복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잠 24:29). 또한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0장 22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여기서 성경은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데 그 말은 상대방이 나에게 고통을 안겨줬다고 나도 그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성경 로마서 12장 19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즉, 우리가 친히 악을 갚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원수 갚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갚아 주실 것이기에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라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1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 말씀을 묵상할 때 저는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43-44절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본능은 우리 “이웃은 사랑’하고 우리 ‘원수는 미워’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웃”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이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웃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생각하는 “이웃”은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이지만(마 5:46)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이웃”이란 ‘우리의 원수’까지도 포함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시면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 교훈이 바로 오늘 본문 잠언 25장 21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 교훈이란 우리의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우리는 우리의 원수에게 음식과 물을 공급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그 대답을 로마서 5장 10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8절). 나타난바 된 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할 때 우리는 우리의 원수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잠언 기자는 오늘 본문 잠언 25장 21절에서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 본문 잠언 25장 22절을 보십시오: “그리 하는 것은 핀 숯을 그의 머리에 놓는 것과 일반이요 여호와께서 네게 갚아 주시리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네 원수는 머리에 숯불을 놓은 것같이 부끄러워 견딜 수 없을 것이며 너는 여호와께 상을 받을 것이다”]. John MacArthur 목사님에 의하면 옛날 이집트 문화에 사람이 자기의 죄를 뉘우친 것을 공적으로 사람들에게 보이길 원하면 숯불이 담긴 화로를 그의 머리에 놓고 걸어간다고 합니다. 여기서 “숯불”은 그 사람의 수치심과 죄책감의 타오르는 고통을 상징한다고 합니다(MacArthur). 그러면 지금 잠언 기자는 “네 원수가 배고파하거든 음식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우리는 원수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1) 첫째 이유는 우리가 우리의 원수들에게 사랑을 베풀면 그들은 그들 안에 있는 미움과 원한, 증오, 적개심에 대한 수치를 느끼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MacArthur). (2)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우리가 우리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원수들에게까지도 사랑을 베풀면 그들의 차갑고 강퍅한 마음이 불에 녹듯이 변하여 우리의 새로운 친구가 되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로마서 12장 20절에 인용했습니다. 그 말씀을 요약하자면,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고 저와 여러분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하므로 우리 원수들의 마음도 녹여서 주님 안에서 친구를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일서 3장 1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현대인의 성경)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자입니다. 살인자에게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은 여러분도 알고 있는 일입니다”]. 즉,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요 살인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말씀은 반대로 생각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으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는(요일 5:12-13) 천국 백성 답에 예수님의 이중 계명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나 원수를 미워하는 것을 자제하고 우리 이웃뿐만 아니라 우리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일곱째로, 다투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계명처럼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우리 이웃을 미워하기도 하며 심지어 미운 사람들과 다투기까지 합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성경 야고보서 4장 1절은 그 원인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다투는 원인은 우리 속에 있는 싸우는 정욕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싸우는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2장 1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이기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그 육체의 정욕 중 하나가 바로 싸우는 정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싸우는 정욕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4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다투는 여인” 또는 “다투기 좋아하는 여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아내는 그녀의 남편과 다투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5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혀도 과격한 말은 분노를 일으킨다”]. 상상이 되십니까? 부드러운 말로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하는데 마치 불에 기름을 붓듯이 화가 난 사람에게 과격한 말을 하면 그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성경 잠언 15장 18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성미가 급한 사람은 다툼을 일으켜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시비를 그치게 한다”]. 우리가 성미가 급하여 화를 쉽게 내면 우리는 다툼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분노 가운데 입을 절제하지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하되 과격한 말, 상대방에게 상처 입히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15:4).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날 때 우리의 입을 좀 다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화가 나 있을 때에는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분노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과격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할 때 말하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약 1:19).

 

저는 오늘 본문 잠언 25장 23절에서 아내가 그녀의 남편과 다투는 원인을 찾아보았습니다: “북풍이 비를 일으킴 같이 참소하는 혀는 사람의 얼굴에 분을 일으키느니라” [(현대인의 성경) “북풍이 비를 일이키는 것같이 험담하는 혀는 분노를 일으킨다”]. 아내가 그녀의 남편과 다투는 이유는 “참소하는 혀”(험담하는 혀) 때문입니다. 여기서 “참소하는 혀”란 “은밀한 혀”란 뜻인데, 남을 해롭게 하며 자기를 유익하게 하려고 아첨하는 자의 말을 가리킵니다(박윤선). 그리고 그런 말을 듣는 남편은 분을 일으키기에 부부가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참소하는 혀를 가진 여인, 남편을 해롭게 하는 말을 하는 여인, 자신의 유익하게 하려고 아첨하는 말을 하는 그러한 여인과 다투면서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낫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말씀이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1장 9절과 19절에도 나와 있습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 …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함께 사는 것보다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현대인의 성경) “다투기 좋아하는 여자와 한집에 사는 것보다 차라리 옥상 한 구석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 다투기 좋아하는 성미 고약한 여자와 함께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광야에서 혼자 사는 것이 더 낫다”]. 성경 잠언 21장 9절을 보면 성경은 “다투는 여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지만 19절에 가서는 “다투며 성내는 여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투는 원인이 분노는 참지 못하고 성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가 있냐면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5장 18절을 보면 성경은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8절).

 

여러분, 부부 관계에 있어서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고 분노를 쉽게 내면 다툼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우리가 분노하면 과격한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1절). 그래서 “다투는 여인”이나 “다투며 성내는 여인”에 대해서 묵상할 때 잠언 19장 13절을 보면 성경은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참고: 27:15). 무슨 말입니까? 남편과 다투는 습성이 있는 아내는 평안한 날이 별로 없을 만큼 자주 남편과 다투고, 또 다툼이 시작되면 그녀는 연거퍼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말을 끊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렇게 연거퍼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다투며 성내는 아내가 계속에서 분노 가운데서 말을 쏟아낸다면 그녀의 남편은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여러분, 다투며 성내는 여인과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이나 광야에서 사는 것이 낫습니다. 큰 집에서 편안하게 부부가 함께 살면서 서로 다투는 것보다 불편하지만 움막이라도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게 더 낫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화목한 부부를 세우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여덟째로, 우리는 굴복하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6절을 보면 잠언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악인 앞에 굴복하는 것은 우물이 흐려짐과 샘이 더러워짐과 같으니라.” 여기서 ‘굴복하다’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의미는 ‘실패하다’(fail), ‘넘어지다’(fall) 혹은 ‘비틀거리다’(stagger)이란 뜻입니다. 비틀거리고 넘어지되 그 이유는 불충분한(부족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be in an inadequate state)(Swanson).

 

여러분, 우리가 영적으로 부족한 상태에 있을 때, 특히 믿음이, 이런 저런 신앙의 어려움과 역경을 만날 때 흔들리다가 결국에는 넘어지지 않습니까? 시편 기자는 이러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시편 13편 4절을 보십시오: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 내가 흔들릴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현대인의 성경) “내 원수들이 ‘우리가 너를 이겼다’하고 말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들이 내가 넘어진 것을 기뻐하지 못하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그의 원수가 이겼다는 것과 자기가 흔들릴 때에 그의 원수가 기뻐할까봐 두려워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 우리는 실패하고 넘어질 위험이 많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부족하고 연약한 가운데서 믿음이 흔들려 마지못해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동의하며 또한 그들의 것을 받아들일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의 짐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시 55:22).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우리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않으실 것입니다(22절).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하심을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굴복해야 하지 말 것과 굴복해야 할 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는 무엇에 굴복해야 합니까? 로마서 8장 7절을 보십시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이 말씀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케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법(말씀)에 굴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에 굴복해야 하지 말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 잠언 25장 26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우리는 악인 앞에 굴복해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믿지 아니하는 악인들에게 박해를 받아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는 그들에게 굴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악인들에게 굴복하는 것은 “우물을 흐리게 하고 샘을 더럽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26절, 현대인의 성경). 상상이 좀 되십니까? 깨끗한 우물에서 물을 길러다 마시는데 그 물에 더러운 물질이 들어가 그 우물이 더럽혀 졌다면 어느 누가 그 우물에서 다시금 물을 길러다 마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우리 한국 교회 역사에도 일어났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일이란 바로 일제시대 때 우리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신사참배를 한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악인에게 굴복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결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실망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악인에게 굴복하는 것은 결코 후세대 그리스도인들에게 본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악인들에게 굴복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악인들에게 굴복하는 것을 자제해야 합니다.

 

마지막 아홉째로, 우리는 우리 마음을 자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28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마음을 제어하지 아니하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자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성벽이 무너진 무방비 상태의 성과 같다”]. 여러분, 무너진 성읍과 성벽이 없는 성읍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데 적군이 공격해 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무너진 성읍과 성벽이 없는 성읍에 사는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겠습니까? 매우 취약한(vulnerable) 상태에서 적군의 공격에 무방비(방어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전쟁에서 패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바로 자기의 마음을 자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이와 같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절제력이 없고 통제가 안 되는 사람은 문제(trouble)와 유혹(temptation)에 취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분노를 절제할 수 없는 자, 즉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문제와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성경 잠언 14장 17, 29절을 보십시오: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악한 계교를 꾀하는 자는 미움을 받느니라 …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 노하기를 자제할 능력이 없는 사람은 어리석은 일을 행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미가 급한 사람은 자기의 어리석음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래서 성경 잠언 29장 1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의 노를 다 드러내어도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억제하느니라.”

 

여러분, 우리는 분노를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를 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 잠언 16장 32절을 보십시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우리는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 분노를 자제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는 자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먹는 것과 명예만을 추구하는 것과 이웃집에 가는 것과 입과 신뢰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과 다투는 것과 우리 마음을 자제해야 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성령의 열매 중 하나는 절제를 맺어주시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