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에 적합한 말

 

 

[잠언 2511-15]

 

 

언제가 한국에 계신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혹시 미국에 “에티켓”에 관한 책들이 있으면 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이렇게 부탁하신 이유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본적인 에티켓이 부족한 것 같아 관심을 갖고 연구하면서 책을 쓰시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때 그 분이 그러한 책을 쓰시려고 하신다고 생각하셨다는 자체가 흥미로웠습니다. 그 이유는 제 자신뿐만 아니라 아마 대부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크리스천 에티켓에 대해서 그리 중요시 여겨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저는 그 때 그 분이 그런 책을 쓰시려고 하신다고 할 때에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 보다 더 에티켓을 잘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책이 나와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좀 자극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좋은 나무 성품학교대표”인 이영숙 박사가 “이민 사회 자녀교육”이란 칼럼에서 “에티켓이 바로 성품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예절을 가르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모습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그러면서 그녀는 그 칼럼에서 부모들은 자녀들이 어려서부서 좋은 생각을 갖게 하고 그 생각이 좋은 버릇으로 길들여져서 좋은 습관이 되고 좋은 성품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가르치고 도와주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자녀들의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에티켓으로 표현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자녀들에게 좋은 성품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첫째로 일반적으로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지녀야 할 에티켓을 한 5가지를 말하였습니다. 그 중에 두 가지는 바로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하거나 기분 나쁜 말을 고의적으로 말하지 않는다”와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거나 험담을 하지 않는다” 입니다.

 

제가 2014년 2월 12일에 제 개인 블로그에 “나누는 몇 마디”에 이런 글을 올린 것을 다시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언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도 생각해 봐야겠지만 그 사람을 위하여 무엇을 말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도 자주 해야 할 듯 ….” 그런데 이 글을 다시금 읽을 때 제 머리에 딱 든 생각은 ‘아 .. 그 말을 그 사람에게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였습니다. 즉, 저는 제가 적은 글대로 실천하며 살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특히 잠언에 “말”에 대한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몇 가지 예를 듭니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18:6), “의인의 마음을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는니라”(15:28),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10:19),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지 말라”(25:9). 그 말씀들 중에 저는 잠언 15장 23절 말씀을 좋아합니다: “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현대인의 성경) “대답 한 마디 잘해서 사람이 기쁨을 얻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제때에 적절한 말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제가 이 말씀을 좋아하는 이유는 저의 삶 속에서 성령님께서 저의 입술로 하여금 상대방에게 “때에 맞는 말”, 즉 “제때에 적절한 말”을 하게 하시므로 그 상대방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특히 저는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 저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므로 그 말씀을 상대방에게 말했을 때에 그 말씀이 상대방을 위로했을 때도 있었겠지만 그 보다 상대방을 면책하므로 마음(양심)에 찔림을 주므로 뉘우치게 하시는 역사를 여러 번 경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잠언 15장 23절 말씀처럼 “때에 맞는 말”, “제때에 적절한 말”이 참 중요하다 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1절에서도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경우에 합당한 말”(a word aptly spoken) 또는 “경우에 적합한 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현대인의 성경) “경우에 적합한 말은 은쟁반에 올려놓은 금사과 같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경우”란 말의 히브리어는 “바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그 말은 “그 때 형편과 경우에 잘 조절하여 돌아감”을 가리킵니다(박윤선). 즉, 그 때 형편과 경우에 잘 조절하여 한 적합한 말은 은쟁반에 올려놓은 금사과와 같이 그만큼 큰 가치(great value)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과연 “경우에 적합한 말”(적절한 말, 합당한 말)은 무엇인지 한 3가지로 오늘 본문에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경우의 합당한 말은 슬기로운 자의 책망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2절을 보십시오: “슬기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은 그것을 듣는 자에게 금귀고리나 순금 장식과 같다”]. 여러분은 칭찬 듣는 게 좋으십니까 아니면 책망 듣는 게 좋으십니까? 당연이 우리 모두의 본능은 칭찬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어느 누가 책망을 듣는 것을 좋아하겠습니까? 우리의 죄악 된 옛 본능은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인지 결코 책망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저희 부모님 시대에 한국식 자녀양육에 대하여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이란 바로 “주마가편”(走馬加鞭) 입니다. 즉, 저는 왜 잘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더 해야 하는지 아직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히려 미국식 자녀 양육이 더 익숙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미국식 자녀 양육이란 특히 부모가 자녀를 칭찬(격려)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만일 그 칭찬이 사랑이 없이 그냥 겉치레로나 아부적언 것이라면 어떠하시겠습니까? 그런데 책망은 상대방이 여러분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책망 듣는 것이 그런 칭찬 듣는 것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십니까? 성경 잠언 27장 6절을 보면 “책망”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전에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저는 이런 짧은 글 2개를 써서 제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만 마디의 칭찬보다 사랑으로 말하는 한 마디의 면책을 더 사모하고 싶습니다.” “주님 안에서 진정한 우정은 친구의 아픈 책망도 겸허히 받는 것입니다.” 실제로 잘 모르는 사람에게 책망을 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친구나 사람에게 책망을 받는 것이 더 마음이 아프고 또한 마음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사랑하는 친구로 부터 받는 상처는 신뢰할 만하다(can be trusted)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2절을 보면 성경은 “슬기로운 자(지혜로운 자)의 책망은 청종하는 귀에 금 고리와 정금 장식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오늘 본문 11절과 연관해서 생각하면 지금 성경은 경우에 적절한(합당한) 책망은 그 책망을 청종하는 사람에게 “그 고리와 정금 장식”같이 큰 가치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저는 경우에 적합한 책망을 하는 사람도 지혜로운 사람이지만 그 책망을 청종하는 사람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경우에 적합한 책망을 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적합한 상황과 적절한 시기(타이밍)에 적합한 책망을 한다는 것이 지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충고하는 자가 상대방에게 말할 때에 여려가지를 고려하여 잘 조절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한 4자기 조언을 했습니다: (1) 충고하는 자 자신이 사랑과 화평을 지니고 있을 때에 말해야 되며, (2) 능욕하는 태도로 말하지 않아야 되며, (3) 성급하게 말하지 않아야 되며, (4) 예의 없이 말하지 않아야 된다”(박윤선). 그런데 실제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책망할 때 나 자신이 사랑과 화평을 지니고 있을 때 말하는지, 성급하게 말하는 것은 아닌지 등 생각해 볼 때 어쩔 때는 너무 성급하게 감정적으로 말한 적도 있었던 제 자신을 뒤돌아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책망을 겸손히 잘 경청하는 사람 또한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지혜가 없이는 아무리 맞는 책망의 말이라도 듣기 싫은 게 우리의 본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9장 7-8절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의 책망을 듣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게 거만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거만함은 진리의 교훈과 책망을 멸시하며 거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거만함은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어리석음의 소리와 유혹의 소리를 너무나 속히 듣게 만들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리 바른 말을 하는 책망이라 할지라도 듣기를 거부합니다.

 

저는 책망을 겸손히 잘 경청한 사람을 생각할 때 시편 기자 다윗이 생각납니다. 시편 141편 5절을 보십시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 할지라도 머리의 기름 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하지 아니할지라 그들의 재난 중에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다윗은 난관 속에서도 의인의 책망을 거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책망을 은혜로 여겼습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사람의 본능은 난관을 만나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위로 받기를 원할진데 ... 다윗에게는 겸손함과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다윗은 난관과 고통, 역경을 눈이 주님께 향하여 고정되어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스스로 낮췄기에 그는 의인의 책망을 거절하지 않고 은혜로 여겼던 것입니다. 전도서 7장 5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지혜자의 채찍질이 미련한 자의 칭찬(격려)보다 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십시오: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노래를 듣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서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우매자의 노래”는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솔로몬 왕은 저와 여러분에게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우리가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매자의 웃음소리는 솥 밑에서 가시나무의 타는 소리 같으니 이것도 헛되”기 때문입니다(6절). 한 마디로, 우리가 우매자의 노래, 즉 악인의 거짓된 위로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그 위로가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인의 거짓되고 헛된 위로보다 지혜의 채찍질과 같은 책망 듣기를 더 좋아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채찍의 말로 맞아 양심이 가책을 느낄 그 당시에는 괴롭겠지만 우리의 마음과 삶에는 양약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풀러 신학교 김세윤 교수님은 “고린도전서 강해”란 책에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비판도 칭찬도 결국 '설익은 판단'(prejudice)에 의한 것으로서 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심판이고 하나님의 칭찬입니다. ... 따라서 복음 선포 자들은 교인들의 비판이나 칭찬에 좌우로 흔들리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로서 그리스도에게 절대적으로 충실해야 합니다. 또 교인들은 우리 모두의 심판관은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외모만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간적 심판을 삼가야 합니다"(김세윤). 여러분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김세윤 교수님이 말한 “인간의 비판도 칭찬도 결국 설익은 판단에 의한 것으로 별 의미가 없”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의 심판이고 하나님의 칭찬”이다는 말 또한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특히 책망에 관하여서 우리는 어느 누구의 책망보다 경우의 합당한(적합한) 지혜로운(슬기로운) 자의 책망을 겸손히 듣데 ‘어쩌면 주님께서 그 지혜로운 형제(자매)를 통하여 나를 책망하시는가 보다’라고 한번쯤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우리의 죄악을 책망하시는 말씀(엡 5:11)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책망이 우리의 영혼에 유익이 되기 때문입니다(딤후 3:16). 어떠한 유익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책망을 받으므로 우리는 죄악의 길을 걷다가도 회개하고 돌이켜 바르게 함을 받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책망을 받아 회개하므로 의의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경우의 합당한 말은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충성된 자의 말입니다.

 

더운 여름 날씨에 제가 저희 집에서 좀 신경 써서 하는 일 중에 하나가 바로 빈 물통에다가 마시는 물을 받아서 냉장고에 넣어 놓는 일입니다. 제가 그리하는 이유는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어서입니다. 그래서 저는 물통 한 4, 5개에서 정수기를 물을 받아다가 냉장고에 넣곤 합니다. 그런데 많은 때에 제가 집에 가서 찬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를 열면 찬 물병이 하나도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저희 집 세 아이들이 다 마셔버리기 때문입니다. ㅎㅎ 자기들도 더운 여름에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은 것, 저와 뭐가 다르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꼭 물 한통은 냉장고 서랍에 숨겨 놓곤 하였는데 이젠 그것마자 아이들 중에 누가 찾아내서 마시는 것을 보고 어이가 없어서 좀 포기한 상태입니다. ㅎㅎ 문제는 아이들이 물을 마신 후 빈 물통에다가 정수기 물을 받아다가 냉장고에 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막둥이 예은이는 가끔 저처럼 빈 물통에 물을 받아다가 냉장고에 넣곤 하긴 하지만서두요. 저는 지금도 좀 날씨가 추운데도 불구하고 물통에다가 물을 넣어서 냉장고에 넣곤 합니다. 그 이유는 저는 지금도 시원한 물을 마시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3절을 보십시오: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충성스러운 사절은 그를 보낸 사람에게 무더운 한여름의 시원한 냉수 같아서 자기 상관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25장 5절을 보면 솔로몬 왕은 “왕 앞에서 악한 자를 제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혜로운 왕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악을 미워하므로(8:13, 16:12) 자기 자신이 악을 행하는 것도 경계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나지 않고 그 말씀을 경청하고 순종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 신하들이 악을 행하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악한 신하들을 제거합니다. 특히 그는 자기 신하들 중에 간사한 악인들을 제하여 버립니다. 그 이유는 만일 그 간신들을 제하여 버리지 않으면 자기 자신에게 해가 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왕에게 해가 된다는 것은 그 나라에 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지혜로운 왕은 단호하게 간신들을 척결합니다. 그리하므로 그는 자신의 왕위(보좌)를 공의로 말미암아 굳게(견고히) 서있게 합니다(16:12). 그 뿐만 아니라 지혜로운 왕은 자신의 왕위를 견고히 서있게 하고자 충성된 신하들을 자기 옆에 둡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충고를 잘 받습니다. 잠언 16장 13절을 보십시오: “의로운 입술은 왕들이 기뻐하는 것이요 정직하게 말하는 자는 그들의 사랑을 입느니라.” 여기서 “정직하게 말하는 자”나 “의로운 입술”은 충신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충신은 왕에게 정직하게 말한다는 말입니다. 지혜로운 왕은 이러한 충신들을 자기 옆에 둔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충고를 듣는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3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충성된 사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충성된 사자는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자기를 보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란 히브리어는 “추수하는 날에 눈의 찬 것과 같으니라”라고 개혁되어야 합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추수하는 때가 가장 더운 때라고 합니다(박윤선). 그 때에 눈의 찬 것을 사람을 시원하게 할 수 있는데 충성된 사자가 이렇게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충성된 사자는 어떻게 그를 보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할까요? 바로 자기를 보낸 주인을 위하여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므로 충성된 사자는 그 주인의 마음을 크게 기쁘게 하며 시원하게 할 수가 있습니다(박윤선). 여기서 사명을 완수한다는 말은 보냄을 받은 사람은 자기를 보내신 주인의 뜻을 이루어 드린다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자기를 보내신 주인의 뜻을 신실하게 이루어 드린 사명을 다한 충성된 사자(일꾼)들이 여러 명 나옵니다. 그 중에 한 두 명의 예를 들어보고자 합니다. 한 사람은 구약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집 모든 소유를 맡은 늙은 종입니다(2절). 그는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명대로 아브라함의 고향 아브라함의 족속에게로 가서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을 위하여 아내(3-4절)인 리브가(15절)를 택하여 그녀를 데리고(61절) 와서 이삭의 아내가 되게 했습니다. 이렇게 아브라함의 늙은 종은 그의 주인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주인 아브라함의 뜻을 이루어 드리므로 그 주님의 마음을 기쁘게(시원하게) 해드렸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신약 데살로니가전서 3장 4-10절에 나오는 바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는 그의 영적 아버지인 사도 바울에게 데살로니가(교회)로 보냄을 받았습니다(6절). 그 이유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여러 환난 중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3절) 그리고 시험하는 자가 그들을 시험하려 바울의 그의 동역자의 수고가 헛되게 하지 않고자 바울은 참다못하여 그들의 믿음을 알기 위하여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냈습니다(5절). 디모데는 보냄을 받은 자로서 충성되이 사명을 잘 완수하고 다시 바울에게로 돌아와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6절). 그리고 디모데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항상 바울과 그의 동역자를 잘 생각하여 그들을 간절히 보고자 한다고 말해주고(6절) 그들의 믿음을 말해주므로 그는 바울을 위로하였습니다(7절). 데살로니가전서 3장 8-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 이렇게 보냄을 받은 디모데는 자신을 데살로니가 교회로 보낸 바울의 마음을 위로하며 기쁘게 해주었습니다. 그는 오늘 본문 잠언 25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던 충성된 사자였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충성된 사자는 오늘 본문 잠언 25장 14절에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듯이 결코 “거짓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4절을 보십시오: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하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으니라”[(현대인의 성경) “선물을 주겠다고 입으로만 떠벌리는 자는 비 없는 구름과 바람 같은 사람이다.”] 무슨 뜻입니까? 마치 비 없는 구름과 바람은 당장 비가 쏟을 것을 것처럼 보여도 결국에는 비가 오지 않는 것처럼 말로만 선물한다고 거짓 자랑해(떠벌려) 놓고 선물을 하지 않으므로 상대방을 낙심케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의미를 오늘 본문 13절에 나오는 충성된 사자에게 적용해 볼 때 충성된 사자는 결코 그는 거짓 자랑을 하면서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그러한 불성실하고 불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결코 그는 자신의 주인을 낙심시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충성된 사자는 거짓 자랑하지 않고 진실되이 그 주인에게 약속한 것을 신실하게 실천으로 옮깁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창세기 24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입니다. 그는 “그의 주인 아브라함의 허벅지 아래에 손을 넣고 이 일에 대하여 그에게 맹세”한 후 실제로 그 맹세한 대로 실행에 옮겨 그의 주인의 명대로 아브라함의 고향에 가서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와 같이 충성된 사자는 말로만 떠들지 않고 그 주인에게 맹세(또는 서약)한 것을 실천으로 옮겨 그 주인이 자기에게 맡긴 사명을 완수하므로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여러분, 보내신 이의 마음을 제일 시원케 하신 분은 바로 이 땅에 보내심을 받으셨던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시야 말로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제일 시원케 하시고 또한 제일 기쁘시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막 1:11). 여러분, 우리도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도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신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께 충성되어야 합니다(딤후2:2). 그리고 성경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 4:2).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하나님의 은혜로 신실하게 잘 감당하고 완수하여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경우의 합당한 말은 설득력이 있는 부드러운 말입니다.

 

여러분은 “부드러운 혀”를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은 부드러운 말을 하십니까? 아니면 가끔 과격한 말도 하십니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잠언 15장 1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부드러운 대답은 분노를 가라앉혀도 과격한 말은 분노를 일으킨다”]. 상상이 되십니까? 부드러운 말로 상대방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하는데 마치 불에 기름을 붓듯이 화가 난 사람에게 과격한 말을 하면 그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겠습니까? 잠언 15장 18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성미가 급한 사람은 다툼을 일으켜도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은 시비를 그치게 한다”]. 우리가 성미가 급하여 화를 쉽게 내면 우리는 다툼을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분노 가운데 입을 절제하지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하되 과격한 말, 상대방에게 상처 입히는 말을 하기 때문입니다(15:4). 그래서 우리는 화가 날 때 우리의 입을 좀 닫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화가 나 있을 때에는 말을 절제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분노하는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면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과격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상대방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분노할 때 말하기를 더디 해야 합니다(약 1:19).

 

저는 요즘 제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해서 제가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무슨 말을 잘 하지 못했다기 보다 무슨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세치 혀를 잘 놀려야 한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물론 제 짧은 혀로 하는 말이 상대방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만큼은 아니다 할지라도 제 짧은 혀로부터 나오는 말의 결과를 과소평가하면 아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 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현대인의 성경) “이와 같이 사람의 혀도 몸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잘못 사용하면 큰 손해를 가져옵니다. 작은 불씨가 큰 숲을 태우지 않습니까?”]. 우리 혀로부터 나오는 말이 어떤 이들에게는 큰 상처와 좌절과 실망을 줄 수가 있습니다. 요즘 인터넷 상에서는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사람들이 무심코 뱉은 말 한마디(인터넷 상에 글을 남기므로)가 상대방으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는 사례도 발생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나오는 말 한마디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성경 잠언 18장 21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현대인의 성경) “혀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한다. 혀를 놀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 댓가를 받는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15절을 보십시오: “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깎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인내력 있는 설득은 완강한 통치자의 마음도 돌이켜 놓을 수 있으며 부드러운 혀는 뼈도 꺾을 수 있다]. 오늘 본문 성경 잠언 25장 15절은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부드러운 혀는 뼈도 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여러분, 어떻게 부드러운 혀가 뼈를 꺾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의 의미는 부드러운 혀는 힘들 일도 해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Walvoord). 그러면 부드러운 혀가 무슨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부드러운 혀는 “관원”의 마음도 돌이켜 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관원”이란 말은 재판관과 같은 고위층의 관리를 말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뜻은 불의한 재판관에게 어떤 옳은 판결을 청구하는 자는, 그 재판관의 태만한 것 때문에 분개하기 쉽지만 그가 끝까지 온유한 태도를 지키면 그 재판관도 감동된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우리가 부드러운 혀로 불의한 재판관의 마음도 돌이켜 놓을 수 있을까요? 바로 “인내력 있는 설득”으로 가능합니다(15절).

 

여러분, 우리는 인내력 있는 설득으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부드러운 혀로, 온유한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돌이키십니다. 바라기는 경우의 합당한 말인 설득력 있는 부드러운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