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때

 

 

[잠언 258-10]

 

 

여러분, 여러분은 인간관계가 어떻습니까? 문안합니까 아니면 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과연 인간관계를 어떻게 햐는 것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주님이 주시는 인간관계 속에서의 축복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대로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면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그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계명에 순종하지 않(못)하고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지 못하면 우리는 인간관계에서의 그 쓴 열매를 맛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쓴 열매 중에 하나는 바로 다툼입니다.

 

여러분, 왜 인간관계에서 다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저는 성경에서 그 이유 7가지를 찾아보았습니다:

 

(1) 미련함입니다.

 

성경 잠언 18장 6절을 보십시오: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 잠언 20장 3절을 보십시오: “다툼을 멀리하는 것이 사람에게 영광이거늘 미련한 자마다 다툼을 일으키느니라.”

 

(2) 욕심입니다.

 

성경 잠언 28장 25절을 보십시오: “욕심이 많은 자는 다툼을 일으키나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풍족하게 되느니라.”

 

(3) 미움입니다.

 

성경 잠언 10장 12절을 보십시오: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느니라.”

 

(4) 분노입니다.

 

성경 잠언 15장 18절을 보십시오: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성경 잠언 29장 22절을 보십시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 잠언 30장 33절을 보십시오: “대저 젖을 저으면 엉긴 젖이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5) 거만/교만입니다.

 

성경 잠언 13장 10절을 보십시오: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22장 10절을 보십시오: “거만한 자를 쫓아내면 다툼이 쉬고 싸움과 수욕이 그치느니라.”

 

(6) 패역입니다.

 

성경 잠언 6장 14절을 보십시오: “그의 마음에 패역을 품으며 항상 악을 꾀하여 다툼을 일으키는 자라.” 잠언 16장 28절을 보십시오: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7) 싸우는 정욕입니다.

 

야고보서 4장 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여러분, 어떻게 인간관계를 잘 할 수 있을까요? 존 멕스웰 목사님은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맥스웰): “다른 이들이 호감을 느끼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그들을 편하게 해 줘야한다." 그러면서 그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서는 다음 일곱 가지 특징을 지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 따뜻한 가슴입니다.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은 따뜻하고 친절합니다. 편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따뜻한 가슴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하나님의 따뜻한 가슴(마음)을 느껴야 합니다. 그의 인자하심이 진정으로 나의 생명보다 낮다는 진리(시63:3)를 경험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가득 채워져 가는 마음을 소유한 자에게서는 은은히 배어 나오는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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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인차 존중입니다.

 

상대방의 장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자신의 장점만을 의지하고 은근히 상대방의 단점을 깔보는 사람과는 편안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과 그저 다를 뿐인데도 자기의 이기적인 기준에서 상대방을 틀렸다는 느낌을 뾰족하게 심어주려는 자와는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입니다. 서로의 다른 점들을 존중하고 서로의 다른 점들 가운데 내 이해의 폭을 넓히려고 노력하는 자에게는 왠지 편안함을 느낍니다.

 

(3) 기분의 일관성입니다.

 

죤 멕스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들은 시종 일관된 기분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은 안정되어 있고 우리가 예측 가능한 상태를 가지고 있다. 볼 때마다 항상 같은 상태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서 어떤 대접을 받게 될지 예측하기 쉽다." 우리의 기분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좋았다 나빴다 할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감정의 안정감이 없게 되면 참으로 편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4) 상대방 감정에 대한 세심한 배려입니다.

편한 사람은 상대방 기분이 자신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 채고 상대방의 기분과 감정에 맞추어 알맞게 반응을 조절합니다(멕스웰). 알맞게 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편한 사람은 나의 감정을 이성으로 듣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들어준다고 생각합니다. 건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들어 주면서 자신의 감정 또한 진실 되게 또한 적절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그리할 때 상대방은 편안한 사람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므로 말미암아 더욱더 마음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5) 자기 결점을 스스럼없이 공개하는 사람입니다.

 

"시종일관 항상 완벽한 척하는 사람만큼 남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도 없다"(멕스웰). 이러한 사람에게서는 왠지 사람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너무나 완벽하게 보이려는 완전주의자에게서는 따뜻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자신에게 정직하지 못한 사람은 인간관계에서서 정직할 수가 없기에 편안한 인간관계, 인간미를 느끼는 인간관계보다 뭔가 형식적이고 기계적인 인간관계임을 느끼지 않나 생각합니다.

 

(6) 쉽게 용서하고 빨리 용서를 구하는 능력입니다.

 

"우리가 다가가기 편한 사람은 인간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어서 자기 결점도 스스럼없이 드러내기 때문에 항상 겸손하다. 겸손하기 때문에 빨리 용서를 구하고 또 쉽게 용서한다"(멕스웰). 편안한 인간관계는 서로가 완벽해서 이뤄지는 것이 절대 아니라 생각합니다. 서로의 "한계와 허술함", 서로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총을 잊지 않으므로 서로를 용서하는데 기쁨을 누리는 인간관계가 참으로 편안한 인간관계라 생각합니다.

 

(7) 진실성입니다.

 

편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진실해야 한다. 솔직해야 합니다. 내 모습 그대로 보여줄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 것에 두려움이 있다면 또한 그들이 나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까 걱정하고 있다면 결코 인간관계를 단순하고 순수하고 진실 되게 유지하기가 힘들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9절 상반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너는 네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거든 ….”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경에서 주는 교훈 한 2가지 중 하나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너무 성급하게 고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25장 8절을 보십시오: “너는 서둘러 다투지 말라 마침내 네가 이웃에게 욕을 보게 될 때에 네가 어찌할 줄을 알지 못할까 두려우니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어떤 일로 너무 성급하게 법정으로 달려가지 말아라. 만일 상대방이 너를 부끄럽게 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겠느냐?”]. 무슨 뜻입니까? 이웃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있을 때 너무 성급하게 고소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갈등이 있는 우리 이웃을 고소하므로 우리가 그 이웃에게 욕을 보게(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성급하게 고소한 후 그 소송에서 이기지 못하고 지면 고소한 사람이 고소당한 사람에게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마도 제일 이상적인 상황은 우리가 이웃과의 관계가 좋아서 아무 다툼(분쟁)이 발생하지 않는 것일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웃관계에서 바람직한 일일 것입니다. 왜 바람직한 일입니까? 왜 우리가 우리의 이웃과의 관계가 좋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마 19:19, 22:39). 그러나 우리가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만일 우리 이웃이 그 사랑을 거부하고 우리와 다투고 분쟁을 일으킨다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특히 만일 우리가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우리 이웃이 우리를 고소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예 이웃과의 관계에서 소송 문제도 전혀 없으면 그것보다 더 바람직한 일은 없겠지만 아무리 우리가 의롭게 살려 해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자의든 타의든 송사 문제는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주로 우리는 그 때에 이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까지 가야만 하는가 하면서 항상 포기하고 손해를 봐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1997년 2월 24일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에서 기독벌률센타가 개최한 제1회 ‘화해와 성결을 위한 법률 세미나”에서 “크리스천의 법정 송사에 대한 성경적 이해”란 제목아래 세미나를 인도하신 목사님이자 변호사인 주명수란 분의 글을 보니까 우리 “그리스도인이 법정에 들어가기 전에 물어 보아야 할 질문들” 13가지가 있어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인터넷):

 

(1) 이 소송을 하는데 있어서 나의 어떤 점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는가?(고전 10:31)

 

(2) 만약 내가 앞으로 6개월만 살 수 있다면, 나는 이 소송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낭비할 것인가? (시 90:12)

 

(3) 이 소송을 하려고 하는 나의 진실한 동기는 무엇인가, 보복은 아닌가?(고전 13, 마5:38-48)

 

(4) 내가 하는 소송이 다른 신자들 앞에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가, 내가 하는 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신자들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가?(롬 14:13, 딤전 4:12)

 

(5) 내가 하는 소송이 불신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가, 내가 하는 소송으로 인해 그들이 복음을 영접하는데 방해가 되고 있는가?(고전 6:1-8, 10:32-33)

 

(6) 내가 하는 소송이 상대방 앞에서나, 상대방의 변호사 앞에서나 나의 변호사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가? (롬 15:1-3)

 

(7) 나는 이 소송을 하고 있는 중에도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는가?

 

(8) 나는 이 소송을 이기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가?

 

(9) 내가 하는 소송이 무죄한 제3자에게 해를 주는 결과가 되지는 않는가?(막 9:42)

 

(10) 나는 이 소송을 하는 중에도 나의 가족과 가사와 나 자신에 대해 최선을 다할 수 있는가?

 

(11) 다른 해결책은 적절했는가? (a) 용서는 적절했나? (b) 화해와 타협은 적절했는가? (c) 상대방을 만나 그의 의견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d) 화해를 도와줄 변호사나 다른 중재를 찾아본 적이 있는가?

 

(12) 나의 권리들을 주장하기 위해 열성을 내는 만큼 화해나 용서를 하기 위해서 열성을 낸 적이 있는가? (마 6:12-15)

 

(13) 나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이고, 그에 따라 판결된 결과에 대해 깨끗하게 승복할 것인가?’

 

한 3년 전(2011년 11월 달)에 “소성해도 되는 것입니까?”란 제목아래 고린도전서 6장 1-11절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분쟁들을 중재인(arbitration)을 둬서 자기들끼리 문제를 해결하도록 허락했다고 합니다(Hodge). 그래서 오랫동안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분쟁들을 은밀히(privately) 해결하던지 아니면 회당 법정 안에서(in a synagogue court) 해결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문제들을 이교도 법정(pagan court)에 가지고 가는 것을 거부했었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문제들을 이교도 법정에 가지고 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성경적 원리들로 그의 백성들의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MacArthur).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성경적인 원리들로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오히려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불의한 자들 앞에서 송사(소송)를 하였던 것입니다(1절). 그래서 바울은 충격과 비통함 속에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How can it be?) ‘너희들은 어떻게 서로 송사할 엄두까지 냈느냐?(How dare you sue each other?)라고 말한 것입니다(1절). 바울이 염려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세상 법정에서 불공평한 공판을 받을까봐서가 아닙니다. 바울의 염려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교회의 권위와 능력을 별로 존중히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었습니다(MacArthur).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 일을 판단할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5절).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형제들 간의 문제를 교회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교회 밖인 세상 법정에 소송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인 줄 알라고 말입니다.

여러분은 사도 바울의 염려대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권위와 능력을 별로 존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의 권위와 능력을 존중하고 있다면 어떻게 교회의 분쟁을 세상 법정에 가지고 가서 서로 소송을 걸며 싸우고 있습니까? 지금 교회의 분쟁뿐만 아니라 노회 안에서의 분쟁도 세상 법정에 가지고 가서 서로 소송을 걸며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가정 문제나 교회 문제나 우리 가운데 지혜 있는 자가 하나도 없어서 세상 법정에 불신자 재판장과 변호사들과 맡기고 있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 일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세상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당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때 더 이상 너무 성급하게 우리 이웃을 고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우리가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때 우리는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해결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이웃 중에 제일 가까운 이웃은 우리 배우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제일 가까운 우리 배우자와 충분히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은 부부 싸움은 부부가 알아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가끔 부부가 다투다가 감정적이 되어서 제 3자까지 개입시키므로 문제를 더 크게 만들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제 3자란 부모님이 될 수도 있지만 특별히 자녀들을 생각합니다. 만일 부부가 다투면서 자기 자녀들을 개입시킨다면 자녀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겠습니까? 결코 좋은 영향을 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5장 9절을 보십시오: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현대인의 성경) “너는 네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거든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해결하고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아라”].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거든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해결하고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해결하라는 말씀은 8절 말씀과 연관해서 생각해 보면 그 뜻은 두 사람이 다툴 때에 법정까지 문제를 가지고 가지 말고 두 사람이 조용히 해결하라는 말입니다. 저는 이 교훈을 생각할 때 “합의”(settlement)란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소송으로 인하여 법정에 가기 전에 법정 밖에서 고소한 사람과 고소당한 사람과 서로 합의를 보므로 문제를 조용히 해결할 수 있다면 법정에까지 가서 다른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 9절에서 솔로몬 왕은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때에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해결하라고 말씀하면서 또한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두 사람이 서로 다툴 때에 누가 남의 비밀을 누설합니까? 잠언 11장 13절과 20장 19절을 보십시오: “수다쟁이는 돌아다니면서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겨 둔다”(현대인의 성경) (11:13); “수다를 떨고 돌아다니는 사람은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과 사귀지 말아라”(현대인의 성경) (20:19). 누가 남의 비밀을 누설하는가 하면 그 사람은 바로 “수다장이” 또는 “수다를 떨고 돌아다니는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만일 우리가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게 될 때 그 이웃이 수다쟁이라면 우리는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조심하되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진심을 다 보여줘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잠언 기자 솔로몬 왕은 우리가 우리 이웃과 다둘 때에 남의 비밀(은밀한 일)을 누설하지 말라고 말한 것일까요? 왜 두 사람이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때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본문 잠언 25장 10절에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듣는 자가 너를 꾸짖을 터이요 또 네게 대한 악평이 네게서 떠나지 아니할까 두려우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렇지 않으면 그 말을 듣는 사람이 너를 부끄럽게 할 것이니 네 평판이 좋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다툴 때에 남의 비밀을 누설하면 그 남의 비밀을 듣는 사람이 우리를 부끄럽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평판이 안 좋아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러한 말을 하셨습니다: “다투다가 남의 비밀을 누설하면 왜 그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하는가? 그 이유는, 그 다툼의 문제점만 해결하기 위한 말만 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문제점을 떠나서 상대방의 은밀한 단점을 말하는 것은 하나의 인신공격이다. 언제든지 인신공격은 진리를 분변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야비한 행동인 것이다. 상대방의 은밀한 일은 그의 사적인 문제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침범하는 것은 무례한 일이다. 그는, 평생 그 말 때문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고 상대방의 미워함을 면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부득이하여 다투게 될 때에는 침착한 마음으로 문제점에 대하여서만 증거 해야 된다”(박윤선). 참 일리가 있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다툴 때에 남의 비밀을 말(누설)하지 말고 그 다툼의 문제점만 해결하기 위한 말만해야 하는데 그렇게 못할 때가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볼 때 그 원인 중 하나는 우리 다툼의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그 문제점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까 그 문제를 상대방이 일으켰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인신공격까지 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상대방을 인신공격 까기 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싸우는 정욕”(desires that battle within us)이 있기 때문입니다(약 4:1).

 

여러분, 우리는 이 싸우는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성경 베드로전서 2장 11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이기십시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대적하여 싸우는 육체의 정욕과 싸워야 합니다. 그 육체의 정욕 중 하나가 바로 싸우는 정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싸우는 정욕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이웃과 싸우거나 다툴 때에 문제를 두 사람이서 조용히 해결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결코 남의 비밀을 누설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평판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인간관계를 맺을 때에 항상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모든 사람들에게는 죄악 된 본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갈등 속에서 다툴 때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우리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잠언 25장 8-10절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 이웃을 너무 성급하게 고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이웃과 다툴 만한 문제가 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조용히 해결해야 합니다. 이 교훈을 겸손히 받아 순종하므로 이웃과의 관계를 화목케 하는 사역을 잘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